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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세례 축일 2014년 1월 1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0 조회수381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세례 축일 2014년 1월 12일.

마태 3, 13-17. 이사 42, 1-4, 6-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요구하고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 주기를 사양합니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보도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예수님보다 세례를 준 요한을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어, 복음서들은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각각 장치들을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으며 세례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가 예수님은 세례를 요구하고, 요한은 사양하는 것 같이 보도하는 것도 그런 장치의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말합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고도 말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노래한 시편 2장에서 가져 온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이사야서, 야훼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가져왔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이 구절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던 구원자이지만, 이사야서가 노래한 고통당하는 야훼의 종과 같이, 하느님을 알리다가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세례자 요한의 것입니다. 그 시대 세례 운동가들은 흐르는 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일종의 정화(淨化)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운동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혹은 성전에 정해진 제물봉헌을 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죄를 씻어주며, 그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이 행한 세례는 다른 세례운동가들이 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세례는 필요에 따라 몇 번이라도, 죄를 씻어주는 정화 의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사람이 회개할 것을 약속하면서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일찍이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하셨습니다.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이 회개 운동은 그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와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시대 유대교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잊어버렸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치면서 심판하실 하느님을 상기시켰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 하느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사람이 실천하며 살아서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그분의 자녀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율법과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하여, 죄인이 된 사람들에게 회개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한은 유대교가 지닌 민족적 배타성을 배제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루가 3, 9)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타민족 앞에 우월감을 갖는 관행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타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감은 그 민족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우월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율사와 사제들의 권위를 과장하면서 하느님이 자비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였다가 후에 독자적인 길을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요구하던 바를 더 발전시켜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같이 물로 씻는 의례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의 죄를 직접 용서하는 실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고 주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절대화하여 강요하던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가히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는 않았다.”(마르 2,27). 유대교는 질병을 인간 죄에 대한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병고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루가 12,50), 혹은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등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세례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깨달음과 실천은 그분을 죽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요한이 세례로써 사람들에게 일으킨 운동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분이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면서 그것이 요구하던 바를 당신의 삶으로 실천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죄에 대해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효도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실천에 충실하였습니다. 그 실천들이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우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느님의 것이었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는 부활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입문 의례입니다. 결혼식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의례이듯이,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례입니다. 세상은 용서하지 않고,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차별하고, 높은 자와 낮은 자를 차별합니다. 그리고 높은 자와 가진 자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갖지 못한 자와 낮은 자도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난한 이와 우는 이도 행복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신앙인은 그것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대가가 십자가로 돌아오더라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희망하면서 그것을 감수합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하며 아버지의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실 것을 빕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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