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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1 조회수866 추천수15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The one who has the bride is the bridegroom;
the best man, who stands and listens for him,
rejoices greatly at the bridegroom’s voice.
So this joy of mine has been made complete.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Jn.3,29-30)
 
 
제1독서 1요한 5,14-21
복음 요한 3,22-30
 

저는 고등학교 때 아주 우연한 기회에 기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타를 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지요. 당시 성탄 예술제 때에 성당의 고등부 학생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Sing-Out”이었습니다.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크게 부르고 동시에 정확하게 동작을 맞추면서 춤을 추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가장 큰 문제가 몸치라는 것이지요. 동작을 제대로 따라하지를 못하니 항상 틀리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노래와 동작을 배우면서 계속해서 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한테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인가를 선택을 해야만 했지요. 첫째는 ‘Sing-Out’ 공연에서 아예 빠지는 것, 둘째는 기타를 배워서 이 공연의 기타 반주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공연에서 빠질 수는 없어서, 정말로 열심히 기타를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그때가 방학 때였는데,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기타만 쳤습니다. 그리고 기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제가 드디어 기타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벌써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그냥 저절로 연주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저의 손이 기타 줄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수백 번을 연습했던 곡이라서 그런지 지금은 눈으로 악보를 읽거나 머리로 악보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 곡이 저절로 제 손을 통해 재생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는 손이 굳어서 종종 이상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30년 전에 배우고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만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또 다른 기억을 내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역시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노력은 전혀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만을 또 자신만이 중심이 되려는 이기심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었던 금욕적인 생활과 힘이 있는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혹시 이 분이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스스로를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겸손 가득한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나 묵상 중에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일상의 삶 안에서는 내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사를 하려고 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은 작아지고, 자신은 커져야만 한다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것을 몸 스스로가 기억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프랑수아 를로르).

 
세례자 요한이 갇혀있던 감옥이 있었고 순교하셨던 마케루스 요새입니다.

 

 
양보다 질일까?(‘행복한 동행’ 중에서)

예전에 보았던 어떤 잡지에 나온 기사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봅니다.

한 도예 수업 첫날, 강사가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교실을 반으로 나눠 왼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수’로, 오른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질’로 점수를 매기겠다고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첫 번째 그룹의 경우 수업 마지막 날 저울을 가지고 와서 완성한 작품의 총 무게가 20Kg을 넘으면 A, 18Kg이 넘으면 B...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긴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 단 하나의 작품만 완성하면 그것으로 점수를 매긴다.

채점 당일,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가장 완성도가 높고 훌륭한 작품은 모두 양으로 점수를 매긴 첫 번째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이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며 점점 나은 작품을 만드는 동안, 두 번째 그룹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획만 세웠다. 그 결과 그들은 평범한 작품 이상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는 양과 질이 함께 올 때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 준다. 양을 위해 질을, 질을 위해 양을 포기하지 마라. 두 가지는 똑같이 중요하며,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양이라는 것은 바로 노력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양을 채우기 위해 그만큼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력이 질의 향상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노력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주님을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저절로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친구를 사귈 때, ‘오늘부터 사귀자’라고 말을 하자마자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져야 가까운 사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양과 질은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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