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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고향’에서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3 조회수602 추천수3 반대(4)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앙의 고향’에서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처음 찾은 '새남터 순교성지'에서




올해 본당 설정 50주년을 맞은 천주교 대전교구 태안성당의 사목위원?단체장 합동 피정행사에 참여한 덕에 나는 지난 4일 오전 처음으로 서울 용산구 이촌2동의 ‘새남터 순교성지’를 가 볼 수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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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남터 성당 / 새남터 순교성지 기념성당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 새남터 성당

나는 여태까지 새남터 성지를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이촌동을 지나며 새남터 성당을 보거나 생각을 한 적들은 있지만, 가족과 함께 순례하는 일을 계속 미루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서울 절두산 성지를 비롯하여 국내 곳곳의 수많은 성지들과 마카오 성지도 가보았고, 도합 일곱 개 성지의 후원회에 가입하여 매월 1,2만원씩 회비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새남터 성지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를 않았다니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새남터 성당 안에서 안내를 해주시는 자매님이 우리 일행에게 ‘새남터’의 뜻을 아는지 물었을 때 억새와 나무가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주제라서 선뜻 대답하지도 못했습니다.

새남터는 조선 초기 군사들의 연무장이었고, 국사범들이 처형되던 곳입니다. 세조에 맞서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던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박팽년, 유응부가 처형됐던 곳이지요. 조선 후기 100년 동안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이 네 번에 걸친 큰 박해 때마다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어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최초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 외국인 선교사로서는 처음 우리나라 땅에 들어왔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기해일기>의 저자 현석문 회장,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정의배, 우세영, 김면호(혹은 계호), 김원익 등이 새남터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지요. 이들 가운데 모두 열한 분의 순교자들이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956년 이 거룩한 땅을 매입하여 ‘가톨릭 순교성지’라 새긴 현양비를 세웠고, 1981년 한강성당에서 분가시켜 서부이촌동, 한강로, 원효로 등을 구역으로 하는 새남터 본당을 설립했습니다. 현재 성당과 성지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관리를 맡고 있는데, 1987년 지금의 대성전이 봉헌되었고, ‘순교자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성당에서 나와 순교자 기념관 안을 둘러보면서 이상한 죄스러움을 안아야 했습니다. 특히 <기해일기>의 저자 현석문 성인을 접하면서 나는 여태까지 새남터 성지를 찾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을 몹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인전’ 집필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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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책 표지. 1984년 '성요셉출판사'에서 출간한 전체 5권의 책 안에 내가 집필한 열일곱 분 성인들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  
ⓒ <10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1984년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 탄생하던 해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라는 다섯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성요셉출판사’에서 큰 판형인 4/6 배판으로 펴낸 책인데, 모두 일곱 명의 필자가 집필을 했지요. 1982년에 등단한 풋내기 작가였던 나도 필자로 참여하여 열일곱 분 성인들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처럼 컴퓨터로 작업을 하던 때가 아니었고, 인터넷 검색으로 앉은 자리에서 손쉽게 자료를 얻어 활용하던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자료들을 방바닥 가득 펴놓고 이리저리 대조를 하고 거듭거듭 살펴보면서 원고지에 육필로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자료들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것들도 있어서 고심을 해야 했고, 그러자니 진도가 여간 더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현석문 성인에 관한 이야기는 160매까지 끌어갈 수 있었습니다. 1939년 기해박해 당시의 일들과 그 이전의 일들을 알뜰히 기록한 <기해일기>를 남김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를 수 있는 결정적인 작용을 낳은 현석문 성인의 신앙심과 생애는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벌써 30년 전 일이 되었지만,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필자로 참여하여 현석문 성인을 비롯한 열일곱 분의 이야기를 정리했던 사실을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면서도 여태까지 현석문 성인이 순교하신 새남터 성지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니, 그 얘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남터 성지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성당 안에서 일행과 함께 간단히 주모경만을 바치고, 안내하시는 자매님에게서 새남터 순교성지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잠시 순교자기념관을 둘러보고는 곧 버스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순례(?)를 마치고 떠난다는 것에서도 나는 모종의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새남터 성지를 순례하기로 오래 전에 아내와 약속했었던 일이 아슴아슴 상기되기도 했습니다. 그 약속을 잊고 살며 또 미루다 보니,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 겅중겅중 흘러서 내 나이 벌써 노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오래도록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 아이들 데리고 광주 망월동 5.18국립묘지에 가서 참배를 하기로 아이들 어린 시절에 아내와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 약속도 여태 지키지 못해, 벌써 여러 번 아내의 불평과 타박을 듣곤 했지요.

새남터 성지를 떠나 정릉의 ‘성가소비녀회’ 수도원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세월 덧없음을 반추하며 더 늙기 전에,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아내와의 오랜 약속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묵주를 힘주어 쥐기도 했습니다.

‘복음정신’을 살고자 하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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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치성지에서 / 2013년 8월 18일, 아내와 함께 충남 공주시 신풍면에 있는 '수리치성지'를 순례했다.  
ⓒ 지요하

1박 2일 피정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다음날 6일에는 화성시 기산동 기산성당에 가서 수원교구 시국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서울 홍익대 근처 ‘가톨릭청년회관’으로 가서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단?실행위원단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다음날 집에 내려왔습니다.

<“종북사제 물러가라”고? 저도 고엽제 전우입니다>라는 글을 쓰고 나서, ‘성가소비녀회’ 수도원에서 일박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성가소비녀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료들을 수집하다가 또 한 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성가소비녀(聖家小婢女)라는 수도회 이름이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 김효임 김효주 자매와 관련이 있음을 안 때문이었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대천사에게 “주님의 종이오니…”라고 하신 말씀과 한국의 순교성녀 김효임 김효주 자매가 관장 앞에서 “주님의 작은 여종”이라고 대답한 것을 생각하여 ‘소비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에 야릇한 충격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1984년 출간된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에 내가 열일곱 분의 이야기를 정리했는데, 그 열일곱 분 중에는 김효임 김효주 자매도 있었습니다. 두 분 자매 성인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사람이면서도 나는 여태까지 성가소비녀라는 수도회 이름이 두 분 자매 성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김효임 김효주 자매 성인께도 죄스러워지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습니다. 30년 전 만리포 근처 한 시골집의 방을 빌려 열일곱 분 순교성인들의 이야기를 살을 붙여 정리하기 위해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분들의 삶을 내가 제대로 본받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노년으로 접어든 나이가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새남터 순교성지를 가서 새남터에서 순교한 현석문 성인을 떠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30년 전 열일곱 분 순교성인들 이야기를 재정리했던 일도 떠올리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내 삶을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생애 동안 좀 더 바르고 명확하게, 차분하면서도 뜨겁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더욱 힘차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올곧게 할 수 있었습니다.


14.01.13 14:00 l 최종 업데이트 14.01.13 14:02 l 지요하(sim-o)
태그 : 새남터 순교성지 기념성당, 현석문 , 기해일기, 한국 103위 순교성인, 103위 순교성인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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