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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17일(금) 聖女로셀리나, 聖안토니오 님♥
작성자정태욱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16 조회수942 추천수1 반대(0) 신고

 

 

  

1월17일(금) 음12/17

聖女로셀리나, 聖안토니오


 



로셀리나(1.17)

성인명

로셀리나(Roseline)

축일

1월 17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동정녀

활동지역

빌르너브(Villeneuve)

활동연도

1263-1329년

같은이름

로살리나, 로셀린, 로솔리나, 로쎌리나, 로쏠리나


 

  
 


 

 

카르투지오회 수녀인 성녀 로셀리나(Roselina)
하느님께 봉헌한 삶을 살기 전에 부모로부터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그녀는 성녀 클라라회 수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자신은 카르투지오회에 대한 성소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25세 때에야 비로소 도피네(Dauphine) 지방
알프스(Alps)의 베르토(Bertaud)에 있는 카르투지오회 수녀원에 들어간 것 같다.

성녀 로셀리나는 모든 음식물을 일체 먹지 않고 일주일씩 단식하기가 예사였고,
스스로 더욱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순종했고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성녀 로셀리나의 제자들이 그녀에게
어떻게 하는 길이 천국으로 오르는 제일 빠른 길이냐고 물었을 때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주 환시와 탈혼에 빠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도 받았다.
성녀 로셀리나의 유해는 죽은 후에도 살아 생전처럼 아름다웠고,
부패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5년 뒤까지도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만인의 공경을 받았다.
성녀 로셀리나는 로살리나(Rosalina) 또는 로솔리나(Rossolina)로도 불리며,
1851년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다.


                                 


교회미술에서 성녀 로셀리나는 흔히 치마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일에 근거한 것이다.
즉 성녀 로셀리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의 양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어느 날 그 광경을 본 집안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느 날 평소처럼 성녀 로셀리나가 자신의 치마에 빵을 가득 담고 나가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그녀의 치마에 담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성녀는 놀라서 장미꽃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린 로셀리나의 치마를 펼쳤을 때 그
안에는 실제 장미꽃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천국을 얻는 길은 '자신을 아는 것' 이라는 믿음으로
금식 기도로 강하게 스스로를 단련했으며

어린 시절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치마폭으로 날랐던 빵이
장미꽃으로 변하는 신비를 경험했던

성녀 로셀리나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오늘
 스스로의 단련을 통해서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찬상의 기도로 저희를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안토니오(1.17)

성인명

안토니오(Anthony)

축일

1월 17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도원장, 수도승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251-356년

같은이름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드레아 사치의 성 바오로(Paulus, 좌) 은수자와
성 안토니오(Antonius, 우) 수도원장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수도 생활의 창시자로 공경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은수자들을 한데 모아서 다소 산만한 형태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들에 대하여 어떤 권위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독하고 한적한 독수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251년 이집트 중부 코마나(Comana)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난
성 안토니우스는 20세 되던 해에 부모가 사망하였는데,
하루는 부자 청년에 관한 복음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자기에게 남겨진 유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남부 이집트의 고향 근처 산을 찾아다니면서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독수 생활을 시작하고,
기도와 연구 및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맹렬한 영적, 육적인 유혹으로 한 동안 고생하였으나
끝내 이를 극복한 뒤에 그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전한다.

 

 

            
요아힘 파티니르(Joachim Patinir)의 성 안토니오(Antonius)의 유혹

 

 

312년에 그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빈 무덤 동굴에 거처를 마련하고
15년 동안 노동과 기도 그리고 성서 읽기에 전념하며 엄격한 독수 생활을 했다.
그 후 나일 강 끝에 자리한 피스피르(Pispir) 산에 들어갔다가
텅 비어 있는 성채를 발견하고, 입구를 막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약 20년 동안 또다시 독수생활을 했다.
이 때 그의 뛰어난 성덕과 수많은 기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여러 가지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성 안토니우스를 찾아와서
충고를 청하고 또 어떻게 사는지 살피러 왔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은수자들의 집단이 여러 곳에 생겨났는데,
그 중 니트리아(Nitria)와 스케티스(Scetis)가 유명하다.
이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고 각자 움막에서 살면서
주일이나 축일에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영적 스승인 성 안토니우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성 안토니우스는 독수자로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홍해 근처에 있는
콜짐(Kolzim)이라는 높은 산으로 들어가 은둔소를 정하고
기도와 수덕 생활에 열중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하여 정통 교리를 옹호해 달라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청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간 일 외에는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만일 전승이 옳다고 한다면 그는 356년 10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 안토니우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전해진 이유는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던 성 아타나시우스가 기록한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가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면 사막의 은수자들이 환상이나 혹은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람임과 동시에
학문이 뛰어났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생전이나 사후나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에 대한 공경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사막의 교부', '모든 수도자들의 원조', '은수자들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의 휘장으로 묘사되는 그림은 돼지와 종이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수도  생활의 창시자
사막의 교부이신

성 안토니오 님이시여

님의 축일을 기억하는 오늘
모든 수도 성직자들에게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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