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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보이지 않는 감옥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23 조회수968 추천수1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복음: 마르코 3,13-19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렘브란트 작, (1660), 암스테르담 미술관


     < 보이지 않는 감옥 >

 

모히니는 워싱턴 D.C. 국립동물원에 몇 년 동안 살았던 제왕 백호였습니다. 거기 있는 동한 모히니는 쇠창살과 시멘트 바닥으로 이루어진 가로세로 4미터의 전형적인 오래된 사자 우리에서 대부분을 살았습니다. 모히니는 비좁은 우리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생물학자들과 직원들은 모히니를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기로 하고 함께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수천 평방미터에 걸쳐서 언덕, 나무, 연못과 여러 초목들이 조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흥분과 기대에 차 모히니를 새롭고 넓은 환경에 풀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은 듯했습니다. 호랑이는 즉각 울안의 구석에서 은신처를 찾았고, 거기서 나머지 생을 살았습니다. 모히니는 그 구석에서 가로세로 4미터 영역의 잔디가 다 벗겨질 때까지 왔다 갔다 했습니다.

[출처: 타라 브랙, 받아들임, 2013, 53]

 

숲의 왕 백호 모히니가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에 나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넓은 세상에서 호랑이에게 해를 입힐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호랑이를 아주 작은 공간에서만 평생을 머물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넓은 인생을 탐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모히니처럼 아주 적은 사람들만 간신히 만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선택은 자유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은 아주 깊고 아주 넓은 인간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옆에 두려는 마음이 가장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고 고민하여 열두 제자를 뽑아 그들을 특별히 사도라 불렀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리옷 유다가 들어있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나와 함께 나의 일을 해 나갈 사람으로 당신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뽑아 항상 함께 다니고 먹고 자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바로 밤새 기도하고 얻은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게 되니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까지도 기꺼이 옆에 두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백호 모히니였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엄청난 모험과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세상에서 고립되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뽑아주셨으니 당연히 그분의 사도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믿음은 없었고, 그저 자신이 좋은 사람들과만 선택적으로 함께 있으려 했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서도 배신을 당하고 맙니다. 관계는 내가 정하는 것이 하니라 하느님이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정해주셨으니 아무리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라도 기꺼이 견디어 낼 의지가 있어야합니다.

 

베드로에게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들의 이름을 보면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리옷 유다가 맨 마지막 이름으로 나오고, 베드로가 맨 첫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릅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같은 날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배반하고 유다는 한 번 배반합니다. 이 죄를 범한 이후 베드로와 유다 모두 사도로 뽑힘을 받은 것에 대해 자신들이 그 부르심에 대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베드로는 그래도 사도로 남아있었고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베드로가 염치가 없었던 것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믿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뽑아주셨다면 뽑아주신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겠고, 유다는 예수님이 뽑아주신 것보다 관계를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했습니다. 즉 자신은 뽑혔음에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일단 뽑힘을 당했으면 합당하기에 뽑아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에 부당하다고 끝까지 버티셨다면 우리 구원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끝까지 합당하지 않다고 버티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 뽑아주셨으면 합당하기에 뽑아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겸손입니다. 그런데 왜 본당에서는 봉사를 하라고 사제가 뽑아주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뒤로 빼는 것일까요?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뽑아서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고 견디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작은 울타리 속에서 감옥살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물론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리옷 유다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게 하는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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