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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25 조회수794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Go out 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The 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the on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Signs like these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Mk.16,15-17)
 
제1독서 사도 22,3-16
복음 마르 16,15-18
 

요즘에는 특별히 예의를 갖출 일이 아니면 제 발에 편한 등산화를 신고 다닙니다. 산에 갈 때 신어야 제격인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 안에서도 등산화는 걷는데 무척 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가는 것도 아닌데 늘 등산화를 신고 다니세요?”라고 말하지만, 다행히도 예전과는 달리 무겁고 딱딱한 등산화가 아니라 가볍고 부드러운 등산화라 그 어떤 신발보다도 편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 신지 못하겠지만, 그 시선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면 기왕이면 편한 신발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 역시 한때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무척이나 신경 썼습니다. 특히 인터넷에 매일 같이 부족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 이 글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글에 대한 댓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확인하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시선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각을 내 손을 이용해서 글을 쓰고, 내가 직접 인터넷에 올리는데, 왜 남의 생각에 영향을 받고 신경을 써서 힘들어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지요.

그 뒤 댓글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댓글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라고 종종 말하면서 댓글 달기를 종용하기도 했지만, 이제 댓글을 전혀 보지 않다보니 그러한 말을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혹시 이솝 우화 중에서 박쥐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땅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나는 쥐’라고 말하고, 하늘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나는 새’라고 말하는 박쥐이지요. 하지만 땅에 사는 동물에게도 또 하늘에 사는 동물들의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다는 내용이지요. 어렸을 때에는 이곳에도 붙고 저쪽에도 붙는 기회주의자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왜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다르면 그냥 ‘다르다’라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틀렸다’라면서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선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다르다’라는 것을 ‘틀렸다’며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모습을 갖추고 있는 제자들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당신을 박해하던 바오로를 회심시켜서 당신의 커다란 일꾼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주님의 시선을 따라야 합니다. 틀렸다면서 거부하는 세상의 시선이 아닌, 다른 것 역시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사랑 가득한 주님의 시선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바오로가 회심해서 주님 증거하는 큰 일꾼이 되었던 것처럼, 그 주님의 시선이 복잡하고 힘든 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것입니다.

겨울이 길다고 걱정하지 말자. 겨울이 길면 봄은 순식간에 찾아오니까(이애경).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기다림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야 먹고 살까를 고민하다가 공기 좋은 시골에서 가계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이 가계가 잘 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글쎄 장사가 전혀 되지 않아서 얼마 안 가서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은 하느님이 너무나 야속했습니다. 열심히 성당을 다녔고, 또 열심히 기도했는데 전혀 응답이 없는 하느님에 대해 의심까지 생겼지요. 결국 그는 시골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도시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열심히 또 다른 가게를 운영했지요.

그런데 이 가게가 너무나 잘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었고, 그는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가계를 차렸을 때, 하느님의 응답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의 축복이었음을 말이지요. 만약 망하지 않았다면 시골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성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단지 중요한 때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이 중요한 때를 참고 기다리는 것, 이것 역시 우리들의 소중한 믿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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