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Gennadius, +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
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
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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