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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봉헌 축일 2014년 2월 2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1-29 조회수527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봉헌 축일 2014년 2월 2일 -

루가 2, 22-40.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모세의 법이 명하는 대로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출생 40일 만에, 딸이면 출생 80일 만에 어머니는 정결례 절차를 밟아야 하는 당시 유대교의 법이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시므온의 노래는 루가복음서를 쓴 사람이 채집하여 수록한 초기 교회의 노래입니다. 루가복음서는 마리아의 노래(1,46-55), 즈카리아의 노래(1,68-79), 시므온의 노래, 이렇게 세 개를 채집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하였다는 예언,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갈등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언 내용은 예수님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역할을 해석하면서 발생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원의대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와의 이해관계 안에서 보려합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감춰져 있습니다. 자기의 직장이나 사회를 보는 우리의 눈은 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는 데 필요한 재물이고, 지위이며, 권력이라 생각합니다. 신앙도 그런 것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주변을 보지 말고, 하느님 중심으로 주변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하느님은 심판하고 벌주고 군림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온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탈출 33,19) 선하신 분입니다. 사람도 하느님을 본받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도록 유도하는 지침인 율법이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라는 말은 사물을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고 처리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봉헌하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선한 실천을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맏아들을 봉헌하는 것은 이제부터 태어나는 모든 자녀를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실천을 바꾸기 위한 봉헌의례입니다.

 

일반 종교 현상에서 봉헌은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인간은 그 봉헌으로써 신의 마음에 들고 신은 그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거래를 성립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높은 사람 혹은 강한 사람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기 위해 하는 행동과 같습니다. 신에게 먼저 무엇을 바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부터 비롯된 봉헌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마음을 움직여서 혜택을 받아낼 대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변하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이 그 봉헌된 것 위에 내려오게 해서, 그 시선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보고 처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현세적 사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시선으로 부모와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효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쉽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우애(友愛)라고 말하고,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는 것을 부부애(夫婦愛)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에게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세례에서 끊어버릴 것과 믿을 것을 약속하면서 하느님에게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위에 내려오도록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도 우리는 믿었습니다. 현세적인 우리 욕심의 시선을 접고, 하느님의 숨결을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봉헌생활이라는 말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은 세례에서 봉헌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숨결로 새롭게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자기와 자기 주변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한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그분의 숨결이 이 세상에 살아있게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세례로써 봉헌된 사람이면, 우리도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시선과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넘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그분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높이기보다는 비우고, 많은 것을 가지기보다는 베풀고, 이웃을 미워하고 무관심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을 찾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교회의 오랜 관례에 따라, 오늘은 앞으로 일 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여 성당과 각 가정에 비치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된 우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촛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당 전례 때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즐겨 촛불을 밝힙니다. 우리가 세례에서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베풀고, 사랑하는 우리의 노력은 연약하지만, 하느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촛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빛입니다.”(마태 5,14).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일이 나타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세상에 작고 약한 빛 하나를 더 밝히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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