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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6강 마지막회/ 천상 예루살렘 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1 조회수581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방송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6강 마지막 회/ 천상 예루살렘 2

 

+ 찬미 예수님

예, 드디어 이제 마지막 강의입니다. 그죠?

예, 뭐 많은 분들이 시원섭섭하지 않느냐? 뭐 그렇게 오늘도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시원합니다. ^^*~~ 시원하고. 섭섭한 거는 여러분들 하시고 저는 시원만 할께요.

 

예, 오랫동안 강의 들으시느라 고생하셨고, 시청자분들도 고생하셨고,인터넷으로도

보신 분들도 계시던데. 부족한 강의. 예,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제 강의로 인해서가

아니라 강의를 통해서 요한 묵시록을 조금 읽게 되신 분들, 말씀 안에서 많은 은총과

복을 받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의 시작하면서 지난 시간 마지막에 언급했던 것 한번 짚어보고 넘어갈게요.

자, 우리가 마지막에 어떤 말씀을 드렸냐 하면,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거처다.

어린양의 신부다. 여기와 대비되는 개념이 요한 묵시록 18장에 나타나는 대탕녀,

창녀, 혼자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어떤 삶의 모습. 어린양의 신부는 함께 살아가는 것.

 

혼자 살꺼냐? 함께 살꺼냐? 이거 마지막으로 한번 던져보고 제가 강의를 마쳤습니다.

예, 그 논조로 오늘 이제 강의 시작은 혼자 사는 모습과 함께 사는 그 모습이 요한 

묵시록 18장과 21장, 22장이 함께 있는 그 모습을 어떻게 대비가 되는지를 한번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우스운 이야기가, 얼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우리

본당 형제님 중에 비오 형제님이라고 산에 올라가는데 더덕 캐러 가자 해 가지고

저를 고생 시켰다는 그 비오 형제님이 이야기해 주신 거예요. 비오 형제님이 완전

스타 되는데, 계속 뜨는데. 아주 되게 재미 있으신 분인데 이분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는데 우스개 소리입니다.

 

이렇게 부부가 있는데 이제 부인 되시는 분이 먼저 죽으면 남편 되시는 분이 장례식

장에서 촛불을  끄지를 못한대요. 촛불을 후 하고 끄지를 못한대요. 하도 웃느라고.

후하고 불려고 해도 자기 마누라가 죽었다고, 부인이 죽으니까 너무 신나가지고

불지를 못한대요. 그리고 바깥에 나가서 담배를 필 때도 알 빨린대요. 답배가.

우스워가지고. 그만큼 이 부인 되시는 분이 빨리 없어지면 좋겠다. 뭐 이런 식의

어떤 농담을 주고 받는 형식 자체가 저는 아직 결혼 안 해 본 사람으로서 이해가

좀 안 되는 부분인데.

 

이 우스개 소리에 어르신 들이 막 웃고 그렇게. 하~ 정말 배를 잡고 넘어가시라고요.

우리 또 연세 많이 드신 어르신들 이래 보면 또 부인 되시는 분이 역정을 낸대요.

남편 되시는 분이 또 살아 있으면. 같이 이렇게 어울려서 놀러 가갔고 뭐 이렇게

단풍 구경이라도 가고 해야 되는데 집에 밥 챙겨 줘야 될 사람이 한명 남아 있으면

이게 계속 걸리고 마음에 부담이 되니까 빨리 죽었으면. "우리 동창회 가니까 다

죽었는데 니만 살아있더라."라며 뭐 이런 식으로 우스개 소리가 많이 이야기 되는 거.

 

이 자체가 모르겠습니다. 이게 한국의 현실인가? 부부는 사랑하는 관계잖아요.

함께 살아가는 관계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리 우스개 소리라도 빨리 하나가 없어졌

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조금 이 현신의 세태 자체가. 더불어서 살아가는

가장 큰 상징체가 이 부부관계인데.

 

어떻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어떻습니까?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신나고

행복하고 사랑 가득합니까?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어떤 그런 차원에서 천상

예루살렘을 보고 있는데 우리 같이 옆에 살아가는 가족하고도 함께 더불어서 함께

못 산다면 백날 하느님하고 이야기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죠?

 

지난 시간에 저는 강아지하고 산다고 그랬는데. 옆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면 그러한 그 소통, 서로가 서로를 챙겨 주는 것. 서로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것.

이거 안 되면 지금 하느님 우리 배우는 거. 하느님과의 일치 그거 백날 이야기 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함께 살아간다는 그런 어떤 생각.

연대예요. 연대. 연대의 어떤 생각. 우리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가

연대입니다. 연대하지 못하는 것을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아닌 것은 우리는 그냥

만약 그런 정신이 없다면 성당 나오는 것은 정말 취미생활 하러 다니는 헛수고죠.

 

우리 인생만을, 우리 인간적인 삶만을 이렇게 잘 살기 위한 악세사리로 신앙생활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또 우리 연대는 또 어떻게, 함께 사는 것이

어떤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7장, 18장에 등장하는 바빌론의 모습 그리고

21장, 22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모습 그 시작을 보면, 17장 1절과 21장 9절을 

이렇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되어 있나?

 

* 묵시 17,1: 저마다 대접을 가진 그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

   니다. "이리 오너라. 큰 물 곁에 앉아 있는 대탕녀에게 내릴 심판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일곱 천사 가운데 일곱 대접으로 확 갖다 부었던 일곱 천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바빌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요. 보여 주는 거예요. 이게 시작이.

 

* 묵시 21,9: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21장 9절도 일곱 천사 중에 하나, 같은 천사가 대접을 가지고 했던 천사가 천상 예루

살렘을 소개합니다. 이 두 개가 뭐냐? 같은 천사가 다른 것을 설명한다고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데 같은 천사가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천사가 같은

것을 설명합니다. 한 천사에 의해서 두 가지가.

 

대탕녀 바빌론과 천상 예루살렘이 소개 됐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하나예요. 세상은 하나예요. 이 하나인 것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로 완전히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거예요.

 

지난 시간 첫 부분에서도 계속 제가 강조했던 것입니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 현실을 하느님의 관점으로 볼 것이냐? 나만을 위한 욕심을 차리기 위한, 그래서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그런 관점으로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서 우리 세상은 극단적으로

두 가지 양면으로 보여질 수 있다라는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곱 천사 가운에

한 천사, 같은 천사가 두 가지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 그래서 우리는 물론 천상 예루살렘의 어떤 백성으로서의, 거기 시민으로서 살아

가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나만을 위할 때는 바빌론의 모습으로 금방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던 세 가지 그 어떤 구절 중에 마지막 악에 대한 경고

있었지요? 우상 숭배, 불신, 관계 단절 이런 단어들이 바로 그 악의 어떤 근원이라고

천상 예루살렘의 묘사에서 말했습니다. 그죠?

 

그러니까 나만을 위해 살아가면 아무리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더라도 동시에 바로

악의 어떤, 사탄의 하수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자, 17장 1절과 21장 9절은

그렇게 되고요. 또 17장 3절에 보면,

 

* 묵시 17,3: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

   한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있었습니다.

 

광야로 이끌려감. 21절 10절을 보면 요한이 높은 산으로 끌려 갑니다.

 

* 묵시 21,10: 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요한이 높은 산으로 이끌려 감. 광야는 어떤 장소입니까? 광야, 사막은 아무도 없고,

단절이고, 혼자죠? 그냥 두 축을 한번 생각해 보고, 혼자냐, 함께냐?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광야로 간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의 표현이 약간 도움이 되도록 제가 말씀드릴까

합니다. 예루살렘은 높은 데에 있어요. 광야 쪽으로 간다는 것은 요르단 강 쪽으로

가고 사해 쪽으로 간다는 것으로 낮은 데로 자꾸 가는 거예요. 광야는.

 

그래서 자꾸 낮은 쪽으로 간다고 보고, 거기는 혼자 단절이고, 세상 사람들과 단절이고

예루살렘과 단절 그러니까 혼자 가는 장소의 개념이 형성되는 곳이고.

 

* 광야: 세상 사람들과의 단절을 의미

 

높은 산으로 간다는 것은, 유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산입니다.

왜냐하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다고 믿고 있고, 하느님의 현현 장소,

하느님이 등장하는 장소가 바로 산이었다. 그래서 산에서 뭐 이렇게 큰 소리가 나고,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나고, 구름이 덮히고, 불꽃이 튀고. 물론 불꽃이 파박 튀는 화산이

아니라 뭐 저녁 노을의 붉은 빛, 아마 그것을 그렇게 하느님의 어떤 현존으로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어떤 시비스러운 장면이 펼쳐지는 산은 하느님의 장소. 이는 높은

데로 올라가요. 이는 낮은 데로 가고.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극단적이죠. 천사가 끌고

가지마는 어디로 끌고 가느냐? 완전히 다른 데로 끌고 가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 구약의 '산': 신비스러운 장면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장소를 상징

 

17장 3절 후반부와 21장 10절 후반부에 보면, 또 이런 게 있습니다.

이제 끌고 가서 보니까 17장의 대탕녀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 짐승 위에 있는 여자를 보는 것이죠. 이 낮은 데는. 광야로 간 데는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독하고 있는 것.

 

 

그런데 21장 10절 후반부에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 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그 거룩한 도시를 본다는 것이죠. 하나는 하느님과 이렇게 만나는 어떤 장면이고,

하나는 여자는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느 그런 여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만나는 거고. 만남과 이별 이 두 가지 또 구조가 그렇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17장 4절에 보면 이제 드디어 대탕녀 여자의 어떤 모습으로 꾸며졌는가 보면 표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묵시 17,4: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습

   니다.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자기 만을 위해 치장. 이거 우리 리스트 그때 대충 살펴 봤습니다.

이러한 보석들하고 물건들, 재화들.

 

21장 2절에 보면 어떻게 표현되어 있냐 하면,

* 묵시 21,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신부가 왜 단장을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결혼식에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을 했을까요? 다른 하객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단장을 했을까요? 오직 신랑만? 두 가지 다예요? 하여튼 이 꾸미는 것 자체가 함께

하기 위해서 꾸미는 거죠.

 

그런데 여자 대탕녀 바빌론의 모습은 자신만을 위해서 꾸미는 모습으로 계속 이렇게

표현해 나가는 그 어떤 순간순간마다 완전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이렇게 묘사해 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21장 11절 조금 더 치장하는 걸 보면,

 

* 묵시 21,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묵시 21,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섰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이 보석, 수정이 단순히 나를 치장하고 나를 드러내는 이런 식이 아니라 이 보석과

치장한 것이 신부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한번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께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뭐가 돼야 된다고요? 그리스도의 향기로 내가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내 치장 해 가지고 예쁘고 내 모습이 화려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하느님의 향기가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탕녀는

다르죠.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것. 그리스도의 향기가 이렇게 나오는 그런

모습으로 천상 예루살렘은 묘사되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우리 보면, 18장 2절에

이러한 대탕녀의 모습은,

 

* 묵시 18,2: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혼자 위하면 결국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만을 위하여 살아가면.

 

* 묵시 21,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보라, 하느님의 거처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 혼자는 무너진다. 함께 있지

못하면 혼자는 무너진다라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너지고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 무인도에 뚝 떨어지면 못 살지 않습니까? 

사람 인자, 人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저 혼자 있을라 하면, 절대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신기해요. 신비스러운 존재는 맞습니다. 늘 함께라고 이성적으로는

외치지만 늘 내가 조금 더 뭔가를 하고자 한다. 이러면 인간 사회가 제대로 안 되겠죠.

가끔씩 우리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 마디기 이겁니다.

교황님의 무류권, 무류성.

 

교황님이 선포하신 거는 거짓이 없다. 그릇됨이 없다는 건대. 이거는 그 앞의 문장을

보면요 모든 주교단의 일치하에서 신앙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선포하시는 것은 그릇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전제가 주교단의 일치

입니다. 그러니까 교황님이 위이고 주교가 밑이고 이런 것이 아니라 형제적 관계에서

의 일치입니다.

 

 

요러한 정신이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가 되어 있고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데 여러분

본당에서는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본당 신부님과 여러분들이 형제적 관계에서,

일치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 되는지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형성이 되는지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혼자 이끌어가는 공동체는

망합니다. 대바빌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어우러져.

 

자, 어떻게 거룩하게 거룩한 하느님의 거처가 인간 안에서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이거는 아주 혁신적이고 정말로 대단한 그 어떤 발견이자 개혁적인

목소리입니다. 당시의 유다이즘 안에서 어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 그리스도교,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인의 어떤 하느님 백성이

이렇게 함께 부르짖고 있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우리와 함께 있다.

 

 

더 나아가 요한 복음에 이 살이, 이 살덩어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온전히 오시는

그런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거룩함은 우리와 다른 초월적인 것에서

거룩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거룩함이 있고 우리의 가장 비천한 곳에서

거룩함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 이거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거룩해지고 나 혼자 뭔가 이끌어 갈려고, 나 혼자 독단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바로 대탕녀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요거 지금 저보고 하는 말이예요. 제가 본당 신부

로서 정말 이렇게 살고 싶은 겁니다. 요한 묵시록을 공부하면 할 수록 우리의 현실의

모습이 정말 일인 독재냐? 우리 본당의 모습이, 가정의 모습이.

 

만일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을 듣는 여러분들, 우리 공동체는 망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거죠. 같이 하자, 협력해서, 함께 더불어서 서로가 목소리를

내면서, 의견을 내면서 더불어 살아가자라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 책임이 여러분 바로

평신도들 한테 있습니다. 우리 신자도 동시에 주체적으로 활동하셔야죠.

 

우리 로만 칼라한 신부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가 교회의 주인이죠.

그러면 같은 형제적 관계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열심히 더불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깨달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것이, 어루저짐이, 연대 이것이 또 등장하는 것이 21장 24절 26절에

있는데 먼저 바빌론은 어떤가 한번 보겠습니다.

 

17장 15,16절에 보면 탕녀와 민족들간에 서로 분쟁이 일어나서 콩가루 집안이 되는

거예요. 로마의 경제, 이 재화가 모든 나라에서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유럽 쪽에서

다 와서 로마에 쌓입니다. 그러니까 얘 혼자만 챙기니까 다른 민족하고 갈등 구조가

되는 거예요. 늘 다른 민족을 이렇게 억압하고 이러니까 이 요한 묵시록 저자가 봤을

때는 로마와 다른 민족과의 관계는 분쟁 관계라는 거죠. 분쟁이 일어난다는 표현이

17,15-16에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 예루살렘을 보면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다납니다. 모든 민족들이.

 

* 묵시 17-15-15: 탕녀와 민족들간의 분쟁

* 묵시 21,24-26: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다니고

 

이게 뭐냐? 어우러짐이고, 나의 어떤 존재 자체가 너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너를 이끌어 가기 위한 어떠한 그런 삶의 모습이라는 거죠. 우리 본당을 요기서

잠깐만 자랑을 좀 하고 싶은데. 우리 사목 위원들 하고 내면 도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했는데 띠 두르고 역에 가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혹은 뭐 길거리에 나가서

우리 면소재지니까 가서 쓰레기 줍고, 휴지 한번 이래 청소, 자연보호, 하천 가서

다 좋습니다. 그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선교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우리

어떻게 하느냐? 

 

예, 1년을 잡든 2년을 잡든 계획을 잡아서 내 옆집에, 내 마음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당 가자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역활을 찾아 보라고

해 가지고 최소 한 달에 한번씩 하는 열두 개의 프로그램을 한번 짜 보라고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정말 재미있는 분이 있었는데 참외 농사를 하거든요.

참외 농사는 트렉터를 많이 사용한단 말이죠. 트렉터 한번 사용하고 나면 그 흙하고

엉망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한번 가 가지고 "아이, 트렉터 왜 이리 더러워요? 한번

청소 해 드릴께." 하면서 트렉터 한번 흙 털어내는 그런 거.

 

그리고 어떤 분은 내 텃밭에 상추 좀 키웠는데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이런 거.

이런 거를 통해서 서로 아, 우리 이웃이 함께 살아가는구나라는 그러한 어떤 마음.

그냥 딴 게 없는 거 같애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파는. 이 함께 살아간다라는 어떤,

그래서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거. 이게 선교가 돼야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면, 제가 만약 비신자라면, "내가 그걸 왜 믿습니까?" 라고

나오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거든요. 완전이 이거는 폭력이 되는 거죠. 명동에도 있지요?

일본어도 하더라고요. 일본어로. 이 예수 그리스도 전교를.

 

예,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꾸 "예수님 믿어라, 믿어라." 해도 믿음이 마음이 통하지

않는데 그러는 것은 폭력이 돼 갑니다. 우리 폭력적인 종교 활동 하지 마시고 사랑을

베푸는 따뜻한. 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예요. 믿어라, 믿어라 안 해도 이미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그것을 그냥 우리가 사랑을 전하면 그냥 하느님이 자연스레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이 서서히 이 사람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글어 주시는

것이죠. 하느님이 역사 하심을 믿으십시오.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믿어야지 내가 인간적으로 얘를 꼬셔 가지고 성당에 넣어야

되겠다라는 것은 그 자체도 교만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은 18장 2절의 대탕녀에 보면,

 

* 묵시 18,2: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이라고 아주 비난하시는 말씀을 하시고요. 천상 예루살렘, 함께 살아가는 것은,

* 묵시 21,27: 부정하고 역겨운 이들은 그 어떤 이도 도성에 못 들어감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정결한 사람이예요.

순결하고, 동정녀라는 거죠. 육적인 더러움을 해 갖고 그런 문제가 정결의 문제가

아니라 요한 묵시록은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일치돼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기 이것이 정결한 관계이고 이것이 정말 깨끗하고 흠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릭 너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니면 뭐 법적으로, 율법적으로 자꾸 깨끗함을

강조하지 마시고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과 신뢰의 관계가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어떤 신뢰의 관계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현에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 신뢰하지 못한 것은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못한 이.

 

* 묵시 17,8: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니 않은 이들

* 묵시 21,27: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

 

어린양의 생명의 책은 그래서 생명의 책이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계속 관계

라는 말이 자꾸 나옵니다. 진정으로 신뢰의 관계가 되느냐의 상징적 표현이 어린양의

책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상 예루살렘은 우리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내는 장소이고 그래서 흑사병과 슬픔과 굶주림과

나중에는 불에 타 버린 것이다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멸망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 일치를 표현하는 천상 예루살렘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 묵시 21,27: 도성의 등불과 성전으로서의 하느님, 어린양

 

첫 번째 등불, 두 번째 성전이라는 개념입니다.

첫 번째 등불이라는 것은 예, 불, 한쪽은 대탕녀가 불에 타 버릴거라고 그랬죠?
이 등불은 환히 밝힘이다. 아까 모든 민족들을 도성의 빛으로 밝히죠. 민족들이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서.

 

왜 빛이, 등불의 모습이 나오는가? 요한계 문헌에 보면 라자로 죽음, 살리시지 않습

니까? 살리는 거 보면 예수님께서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밤에 돌아다니면 자빠

진다. 낮에 걸어다니면, 해가 있을 때 걸어다니면 잘 걸어 갈 거다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빛은 예수님이라는 거죠. 빛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걸어가면

예수님께서 등불이 되어 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도성 안의 등불이 예수님이 되고 바로 하느님이 등불이 되십니다. 두 번째

성전 개념. 도성에 성전이 이제 필요가 없습니다. 성전이 뭐였습니까? 전통적으로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였고, 그래서 일년에 세 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조건

성전으로 갑니다. 세 번은 뭡니까?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

 

* 유다인들이 성전으로 가는 세 축제: 파스카, 오순절, 초막절

 

당시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인구가 2만오천 명. 그런데 축제 때 가는 인구가 15만

명입니다. 엄청난 숫자가 성전에 몰리는 것이죠. 그러나 이 도성에는 하느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루는 사람 안에는 그 도성. 거기에는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그 어좌에 계신 분과 일치를 이루면 굳이 그 건물에 갈 필요성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뤘다면 성당 갈 일이

없다라고 표현하면 조금 이건 말이 안 되고. 성당 가거나 어디에 있거나 진정으로

신앙인이라면 그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성전이고 그 장소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니까 오늘도 성당에 가 보고, 내일도 성당 가 보고,

활동도 열심히 하고 그것 못지 않게 삶도 열심히 살아 가보고, 맨날 성당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바빌론과 천상 예루살렘을 요렇게 다 비교하면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을 우리가 한번 봤습니다. 또 반복해서 말씀 드리자면, 두 축은 결론적

으로 한 마디 밖에 없어요. "니 혼자 살거냐? 더불어서 살 것이냐?" 이 구조를 잘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요한 묵시록 전체는 이런 아까 제가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같은 현실이 천상

예루살렘이 될 수 있는 동시에 바빌론이 바로 될 수 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 묵시록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계속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4장, 5장이 그랬고요.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같은 천상의 모습을

두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했고 6장, 7장에서 보면 뭡니까?  십사만 사천 명 그리고

수많은 군중. 같은 구원받는 백성인데 십사만 사천 명으로 표현했다가  수많은 군중

으로 표현했고요. 그리고 두 증인의 모습 그리고 방금 봤던 바빌론과 천상 예루살렘.

같은 현실을 늘 두 가지 관점으로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요것이 그노시스, 영지주의의 영향인데요.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이죠? 그런데 이원

론적인데 이게 너무 갈라 놓고 있어요. 천상은 좋은 것, 지상은 나쁜 것, 빛은 좋은

것, 어둠은 나쁜 것. 그러나 우리 요한계 문헌, 그리스도교의 이 문헌은, 우리 성경은

이 부분을 깨부숩니다. 

 

그노시스의 영향으로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이런 것들을 다 이야기 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를 가지고 와서 아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다. 빛과 어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이 왔다라는 식으로 해서 그것을 연결해 주고 우리에게 이게 하나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빛이 어둠 속에 왔다. 그러나

어둠을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면 어둠이 어둠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어둠 

속에 오신 거예요.

 

빛과 어둠을 완전히 갈라 놓고 따로 보는 그런 그노시스, 영지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드러내는 것 조차도

가지 관점이었죠. 어좌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

두 분은 다르지만 두 분은 같은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한 그런 모습으로 또 하느님에

대한 모습도 그렇게 다양하게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 요한 묵시록 전체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 또 우리는 마음의 자세, 관점의 자세, 어떠한 하느님을 모시고,

어떠한 현실을 내가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 혼자 살아

간다면, 정말 요기 있는 것이 내 혼자만 어떻게 살아가는 그것이라면 그 삶 자리를

내가 어떻게든 바꿀 수 있겠죠?

 

바꿀 수 있겠지마는 더불어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이기 때문에, 내가 나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같이 해야 되고, 같이 해야 되기 때문에 내 뜻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그러한 어떤 삶의 어떤 신비라고 할까요? 그런 어떤 논리를 우리가

빨리 깨치는 것만이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가 독단적이고 제가 하나는 부붑이 그거예요. 뭔가 혼자 할려고 할 때,

그것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약속을 우리,

우리 또 본당 자링이 자꾸 되는데... 본당 신부되니까 너무 자랑하고 싶어요.^^*~

 

 

우리 본당에 많은 경우에 결국에는 사람이 모이면은 돈이 제일 문제가 되고, 위협이

되고, 또 잘 쓰면 엄청나게 큰 복이 됩니다. 돈을 본당 신부님이 맘대로 할 수가 있어

요. 지금 분위기가 그죠? 그래서 이랬어요. 돈을 10원이라도 총회장님과 정평회

위원장님과 본당 신부와 평협 회장님이 동시에 합의를 보지 않으면 절대 10원 한장

못 쓴다고 그렇게 우리가 다 합의를 봤습니다. 함께.

 

이게 내 돈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의 돈이잖아요. 모든 재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돈 저기 쓰고, 이 돈 저렇게 내고 이렇게 하는 것.

이게 현실적으로는 아주 빠른 것 같지마는 대바빌론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이 떠나게 되죠. 제일 민감한 부분이 돈이기 때문에.

 

그래서 돈이라는 부분, 재화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더불어서 있어서도 더불어서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은 혼자만 내가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할 것이냐? 망하느냐,

승리하냐? 복 받고 하느님과 일치 하느냐? 같은 것을 놓고도 완전히 극단적인 모습

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요한 묵시록을 이렇게 배우시면서 제가 마지막

부탁 드리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내가 더불어서 말할 수 있는 그런 힘을 키우시라는

것입니다. 누구 혼자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시지 마시고 나도 교회의 주인으로서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승리를 하고 생명을 지향할 것입니까? 멸망을 지향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 달려 있다라는 것. 그것을 많이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요한 묵시록 천상 예루살렘을 우리가 이렇게 봤는데 사실 더불어서 살아

가는 것은 창조때부터, 지금 우리가 창세기부터 갑니다. 정리하면서. 성경 한번에

짜~악 다 정리할 거예요. 지금.

 

* 천상 예루살렘, 새하늘 새땅이 왔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창조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왜? 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창조 설화를 보면

딱 그 답이 나옵니다. 창조 설화에서 첫 번째 창조 설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제 종류

대로 창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하신 거는 제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만들어 지고.

 

그래서 빛과 어둠, 낮과 밤 창공 위의 물과 창고 아래의 물이 만들어지고, 뭍과 물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난 얘가 좋아, 이것이 좋아, 이것 만이야. 나 이거

좋으니까 딴 거 모르겠어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

 

이것을 보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표현합니다. 낮이 있고 밤이 있어야

하루가 되는 거고, 하루가 가서 다음 날이 오는 것이지 낮만 좋다고 빛만 좋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하루가 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 눈이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을 인식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제 종류, 각각의 종류가 조화를 이루는 그것에서

우리는 참다운 하느님의 어떠한 창조 섭리, 그것이 바로 새하늘 새땅에서 천상 예루

살렘에서 말하고자 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어떤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자세. 하느님의

거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

 

그래서 이것이 인간의 모습에서 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

졌습니까?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한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인 동시에 다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ㅣ

 

그래서 히브리 말 성경에 보면, 내가 사람에게 이야기 하는데 동시에 뒷부분에 가면

바로 그들에게 이야기 한다라는 것. 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있어요. 단수이지만 동시

에 복수로 이야기 됩니다. 그리고 하나인 것은 누구와 하나냐?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나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 하느님'입니다. 그 어근이

앞에 '야'라는 그 어근이 남자의 히브리 말로 '이슈'입니다. 여자는 '이샤' 입니다.

그 어근이 그대로 사용됩니다. 

 

* 히브리어 남자(이슈)와 여자(이샤)의 어원은 하느님(야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하느님의 단어에 쓰였던 어근이 남자라는 단어와 여자라는 단어에 똑같이 쓰이고

있다. 이슈와 이샤는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느님

으로부터 뿌리는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르다. 구별된다. 이것을 보십시오. 

 

구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카인과 아벨처럼 되어 버립니다. 내가 너를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는 존중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나는 내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내 뜻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 나니까 내 뜻대로,

내가 보기에 거슬리는 것을 없애고 죽여 버리고 그것이 인간 세상이라는 거죠.

 

하느님의 창조 섭리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폭력이 있고 살인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 잘 나고, 나 혼자만 뭔가 이렇게 막 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여지 없이 부셔 버리는 거죠.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그죠?

 

바벨탑에 나의 이름을 드높이자. 우리의 이름을 드높이자. 같은 말 같은 낱말을 쓰는

세상 안에서 내 것을 드높이자 할 때 하느님이 내려 오셔서 바벨탑을 부셔 버리고 다

서로가 알아 듣지 못한 말, 그러나 다양한 말 이런 말들로 섞어 버리십니다. 창조 때

제 종류대로 각자가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어떤 그런 존재로 거듭

나기를 바란다.

 

천상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인류가 되라는 것. 새롭다라는 것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해석의 문제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내가 새롭게 나의 삶을 변화시켜서

제 종류대로, 옆을 보고, 이웃을 보고, 우리 사회를 보고, 세상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내가 새롭게 변화라는 것은 결국에는 내가 함께 더불어 가는 사람으로 변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해야 그것이 창조의 섭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인간의

원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악이라는 거죠. 악.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허황된 사건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리는 철저한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의 책입니다.

 

창세기 첫 권과 이 성경의 마지막 권 요한 묵시록이 그래서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아이구야, 하느님 뜻이 이런 거구나."

물론 배욱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배우기 위해서. 그러나 그 책은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인간의 삶의 어떤 모습을 기록한

인간학의 책입니다.

 

그것은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그것이

죄고 악이고 원죄도 거기서부터 왔다. 하느님과 살기 싫어서 나온 거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이고, 남의 뜻을 뜻을, 타 존재의 뜻을 받아들이기 싫으니까

내가 저걸 어겨 가지고 저걸 내 뜻대로 가져와야 되니까 그렇게 시작한 것이 원죄

아니겠습니까? 그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가 한번 잘 이해하고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너무 이런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은 너무 화려해요. 온갖

보석들로 치창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의 이 보석들은 그만큼 하느님과

일치, 더불어 사는 것의 화려함, 풍성함, 풍요로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이 표현

하는 방식이고요.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것이 도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다 똑같다

합니다.

 

* 묵시 21,16: 도성은 네모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그가 잣대로

   도성을 재어 보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얼마냐? 만 이천 스타디온입니다. 자, 만 이천이라는 숫자부터 이제 보겠습니다.

만 이천이 어떤 식의 숫자입니까? 만 이천? 천은 뭐라고 했습니까? 묵시 문학적인

어떤 표현이 천?  하여튼 모든 것. 많다. 최고로 많다. 우리 100점이예요. 100점.

그런데 천 이예요. 그다음에 12잖아요. 앞에 12. 그리고 천이 있지 않습니까?

동그라미 세 개. 만 이천이죠.

 

12라는 숫자. 우리 너무 잘 알고. 모든 것인데 또 거기에 보편적이고 모든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것 그러니까 만 이천 스타디온 이라는 것은 완전 최고로 넓은 것이다.

그런데 계산해 보면요. 만 이천 스타디온은 2000km 입니다.

 

* 만 이천 스타디온: 2천 킬로미터

 

자,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동시에 2천 킬로미터 되는 도시는 존재할 수 있습니까?
서울서 부산까지 몇 킬로미터죠? 4백에서 4백 50킬로미터. 그러면 한 다섯 배 되는

길이의 도시. 높이도 뭔 빌딩을 높이 지어야 그렇게 2천 킬로미터.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만큼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최고로 많이.

 

그런데 최고로 많이라는 개념이 천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거기다 12를 더하자.

12를 앞에 내고 만 이천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과의 일치는 그만큼 풍요롭다.

인간적으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규모를 가진다. 그리고 온갖 보석이

거기 다 등장을 한다.

 

이 등장하는 그 어떠한 거기 천상 예루살렘은 그럼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가? 이 도성이 뭔가 강물이 싸악 흘러요. 물이 이 도성에로 물이 짜악

흘러갑니다. 뭐가? 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입니다. 요거 에제키엘서에 나타나는

모습과 또 생명수. 거기 사시사철 많은 열매를 내고 물이 흘러간 곳에는 생명이 늘

살아 움직이고 이거 에제키엘서에 있습니다.

 

* 묵시 22,1-2: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

   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는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는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고거를 요한 묵시록이 고대로 받아 와서 하느님의 어좌,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

내려서 이 도성을 전체적으로 다 생명을. 자, 이 중요한 단어는 생명. 이 화려한 것은

정말 하느님과의 관계 일치. 이 일치가 뭐를 위한 일치인가? 하느님과 인간의 생명의

나눔입니다.

 

* 일치(묵시록 22장): 하느님과 인간의 생명의 나눔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요한계 문헌에 있어서 중요한 게 부활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십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시기 위한 하나의 예수께서 보여 주신 정말 처음으로, 최초로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 길을 열어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여기 적힌 것을 보고 믿어서. 믿은 것은 뭘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

이심을 믿어 고백해서 뭐를 얻으려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고자 이 글을 요한

복음이 쓴다라고 분명히 결론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어린양을 통해서 일치를 이루는 것은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이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치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우리 삶의 규범이라고 해야 될까요? 원칙이 나옵니다.

 

더불어 살아가자고 계속해서 반복했죠? 무엇을 지향하는가? 생명을 지향해야

됩니다. 니캉내캉 좋아가지고 우리 뭐 뜻 맞춰 가지고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은

집단주의가 될 수 있어요. 예컨대 니캉내캉 뭐 맞춰 가지고 극단주의로 변해 가지고

"쟤 없애 버리자." 이게 일치입니까? 이게 화합입니까? 아니죠.

 

우리 공동체에 지향점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생명을 위한 지향점.

연대도 잘 해야 좋은 방향으로 연대 해야지 으샤 으샤 해 가지고 뭐 어떻게

조폭들도 연대입니다. 그죠? 그러니까 어떤 우리 그리스도교의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우리의 연대, 우리의 일치, 관계의 어떤 풍성함은 생명을 지향해요.

 

우리 주위에서 생명을 지향하지 못하는 사건과 일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첫 번째, 우리 말로써 이웃에게 얼마나 생명 문화를 없애고 생명 문화를 처참히

짓밟는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우리 사회의 정책이 우리의 이 모든 강산과 혹은

우리의 모든 피조물을 괴롭힌 적은 없습니까? 우리의 모든 어떤 작은 생각 하나

하나가 "아이구마, 저 거는 없어져야지!"라고 실제적으로 우리 속에서 무수히

살인하고 죽여버린 그런 것들은 없는지 한번 살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교회는 저항해야 되는 거죠. 그런 것들에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는 죽은 공동체입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가는 대탕녀, 대창녀 바빌론의

그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연대를 해서 생명 문화를 살려는 방향으

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나 혼자만 배부르려면, 나 혼자만 등 따시고 배 부르려면 사실 옆에 사람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근원이, 악의 근원이 어디 있습니까?

혼자냐, 더불어냐? 이 관점의 차이가 하나의 세상을 극단적으로 파멸이냐,

극단적으로 정말 풍요로움이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거는 연대, 생명 이 두 단어입니다.

요한 묵시록 강의 싹 다 잊어도 좋아요. 앞에 있는 거 다 잊어도 좋으니까 함께

살아가자, 생명을 지향하자. 이것만 머리속에 넣어 두신다면 요한 묵시록 정말

여러분 제대러 배우시고, 공부하시고, 묵상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결국에는 생명입니다. 생명.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셨을까?

우리가 하느님과 떨어져 있으니까 하느님과 엮을라고, 만나게 할라고요.

우리가 왜 하느님가 떨어졌습니까? 처음에는 잘 만들어 놨어요. 에덴 동산에서

비유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했단 말이죠. 하느님과 정말 생명을 나누고 함께 살았다는 거죠.

괜히 떨어져 가지고 뒤에 나와 가지고, 예수님까지 오셔가지고 고생시킬려고. ^^*~

그래서 이제 예수님 부활하셔 가지고 일치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그 일치의 길을 열어 놓은 길 따라 가면 됩니다. 요한 묵시록 14장에 어린양이

가는 그 어디든 십사만 사천 명이 따라 간다는 표현. 이들은 흠없는 이들이고,

이들은 동정을 지킨 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 묵시 14,4: 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에에서 속량되었습니다.

 

전적인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논하죠. 용기를 가지시고 어떠한 삶의 자리에서도

정말 어떠한 삶이 나에게 주어져도 그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마시고 꿋꿋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고. 마지막으로 요한

묵시록 최종 정리하면서 그 지하철에서 이걸 봤어요. 이걸 나눠주더라고요.

 

 

 

 

2012년 예수 재림이라는 거 이것. 이거 요즘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 같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정리하면서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는 것은 요한 묵시록을 처음에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요한 묵시록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냐고

그러니까 하, 미래에 무시무시한 뭐 종말, 심판 이런 것들이고 했는데.

 

2012년 이분 정말 만나고 싶어요. ^^*~~~ 성경에도 그때 그 시간은 모른다고

했는데 우예 알았는지 ^^*~~~ 한번 꼭 뵙고 싶습니다. 2012년 예수 재림.

내년 도에 한번 기다려 볼 거고요. 그런데 그때 제가 처음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이것은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가 아니다.

 

* 요한 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가 아닌 당시의 묵시적인 분위기 안에

   묵시적인 기법(문학양식)을 가지고 와서 지금 현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모습으로 재조명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어떤 모습으로 재조명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

습니다. 미래에 펼쳐질 사건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이태리에 요한 묵시록에

아주 전문가 분이 계신데 코르지니라는 학자가 있는데 이분이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 코르지니(성경학자): 요한 묵시록은 세상의 끝이나 새로운 세상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처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여러분이 지금 요한 묵시록, 처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을 살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시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우리가 체험했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뜻에 맞는

것인지 우리가 배웠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고 거기에 합당하게 살아 간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2012년에 예수가 오시든, 2013년에 오시든

여기에(찌라시) "어마야, 오는 모양이다. 우야지? 내 어떻게 펀드 들었는 거,

주신 있는 거 우야꼬? 내 아파트 해 놓은 거 어덯게 할까? 우리 아들 우예하노?"

이러한 생각으로 있다면 이미 나는 예수님과 관계 없는 거죠. 그런 표현 자체가.

 

그분과 일치해서 구원 돼 있고 나는 이미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건 현재, 지금 예수님을 만나는 삶의 태도를 그런 태도를

바꿔 나가라. 예수님과 보다 더 일치된 삶으로 나아가라라는 그런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삶을 사시든 어렵고 힘드시러다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는 놓지 마시고 이런

것. 제가 찌라시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마시고 지금 내가 구원을

사십시오. 힘들면 예수님께 매달리시고, 기도하시고, 이웃과 더불어서 나보다 더

힘든 곳에 사랑을 베풀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요한 묵시록을 읽은 사람의 당연한

도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동안 강의 들어주시느라고 고맙고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행복하십시오."

예, 건강하시고 "주 예수여 오소서!" 라고 마지막 했는 거 예수님 안에서 기쁜

나날들 보내시고, 늘 행복 충만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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