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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돈이라는 우상, 경제권력의 독재---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1 조회수552 추천수2 반대(7)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돈이라는 우상, 경제권력의 독재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50-75항 번역문

교황 프란치스코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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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28  12: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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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위기에 처한 공동의 헌신

   
 
50. 복음화와 관련된 기본적인 물음을 다루기 전에 우리가 살고 노동해야 할 환경을 간략하게 다루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처치 방법을 수반하지 않는 “진단의 과잉”이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는 불편부당하고 치료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현실문제를 다루는 순수한 사회학적 분석의 도움을 언제나 제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제시하고 싶은 것은 복음적 식별에서 훨씬 중요한 것일 텐데, 선교에 나서는 제자가 취하는 이 접근은 “성령의 힘과 빛으로 육성되는” 접근입니다.

51. 현실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는 아니지만, 저는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무엇보다도 꼼꼼하게 탐구하기”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사실 막중한 책임입니다. 실제 어떤 현실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비인간화의 과정을 밟을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선한 정신의 움직임을 선택하고 악한 정신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저는 보편적 교도권의 여러 문헌들이 다양하게 분석한 것들뿐만 아니라, 지역과 대륙의 주교들이 제시한 것까지도 승인합니다. 이 교황권고에서 저는 사목적 전망에서 교회선교를 쇄신하는 추진력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할 수 있는 몇 몇 요소들을 간략하게라도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하느님 백성의 존엄함과 생활을 위협하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기구들과 교회의 복음화 사업들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I.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

52. 우리 시대 인류는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 진보에서 보듯이 역사의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의료, 교육, 정보통신 같은 분야에서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들을 칭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대다수의 현대인이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으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수많은 질병이 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부유한 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삶의 기쁨은 수시로 사라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고 폭력은 기세를 올립니다.

불평등은 점점 더 또렷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생존 투쟁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존엄성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에서 치러지는 것입니다. 이런 전대미문의 변화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양적, 질적으로 집중적인 발전을 이루어졌고, 그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자연과 생명 분야에 즉각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권력, 곧 특정할 수 없는 종류의 권력을 이끌어냈습니다.

배제의 경제를 거부합시다

53.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분명한 한계를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 같은 경제는 사람을 죽입니다. 어떻게 나이 든 노숙자의 죽음은 뉴스가 되지 않으면서, 주식시장이 2포인트 하락한 것은 뉴스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배제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선 음식을 버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평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희생시켜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로 대다수의 사람이 배제되고 주변화 되고 맙니다. 노동도 못하고, 가능성도 없고, 벗어날 수단도 없이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사용하고 버려도 되는 소비재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버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화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착취와 억압에 관한 문화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배제된 이들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일부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배제된 이들은 사회의 하층민이나 그 변두리 사람이나, 공민권을 빼앗긴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사회의 한 부분조차 되지 못합니다. 배제된 이들은 “착취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들이며, “쓰다 남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4.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이들은 낙수이론을 계속해서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 낙수 이론은 자유시장으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포용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견해는 사실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 권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선심과 지금의 경제 시스템을 신성시하는 작업들에 대해 조악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는 동안 배제된 이들은 여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혹은 이기적 이상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거의 모두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번영의 문화는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장이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전율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하여 망연자실하며 사는 사람들은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합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돈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거부합시다

55. 이런 상황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를 사람이 돈과 맺은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우리 자신과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금융 위기가 인간이 으뜸임을 부정하는 인간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합니다. 황금 송아지를 경배하던 과거(탈출 32:1-35)가 무자비한, 그러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는 돈이라는 우상으로, 참된 인간적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비인간적인 경제의 독재로 나타납니다. 금융과 경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전 세계적 위기는 그 경제적 불균형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을 단지 무엇인가 필요한 존재, 곧 소비가 필요한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습니다.

56. 소수의 소득이 증대되는 동안, 행복한 소수가 즐기는 번영에 비추어, 대다수의 사람의 소득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이 불균형은 시장과 금융투자의 의 절대자율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들은 공동선의 불침번이 되라는 임무를 맡고 있는 국가의 권리, 즉 어떤 형태로든 시장과 금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를 거부합니다. 그럼으로써 보이지도 않는, 그러나 실질적인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났는데, 이 독재자는 일방적으로 그리고 임의로 그 법칙과 규칙을 강요합니다. 부채와 대부이자의 누적 역시 각 나라의 경제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게 하며, 시민들이 실재 구매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에다 광범위한 부패와 자기 잇속만 차리는 탈세도 더해야 하는데, 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소유에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수익을 늘일 수만 있다면 자연처럼 훼손하기 쉬운 것은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런 시스템에서, 신성한 것이 되어버린 시장의 이익 앞에서 모든 것은 무력해지고, 시장의 이익이 유일한 규칙이 되어버립니다.

봉사하기는커녕 지배하는 금융 제도는 거부합시다

57. 이런 태도의 배경에는 윤리의 거부, 그리고 하느님의 거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윤리는 비웃어도 되는 조롱거리쯤으로 간주됩니다. 윤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 곧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돈과 권력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윤리가 이런 현상을 인격을 실추시키고 상황을 조작한다고 단죄하기 때문에, 윤리를 위협으로 느낄 뿐입니다. 실제로, 윤리는 시장의 범주를 벗어난 어떤 헌신적인 응답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시장의 범주가 절대화될 때 하느님은 오직 통제할 수 없는 그 무엇, 경영할 수 없는 그 무엇, 위험하기까지 한 그 무엇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기실현과 모든 형태의 노예화로부터의 자유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윤리(비 이데올로기적인 윤리)는 시장이 균형과 보다 인간적인 질서를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저는 금융 전문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고대 현인의 격언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부를 이웃과 나누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계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부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것이다.”

58. 윤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하여 금융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접근방법에 대한 확실한 변화를 요구합니다. 저는 정치지도자들이 결단력을 갖고, 또 미래를 바라보며 이 도전에 응답하기를 촉구합니다. 물론 각각의 경우가 갖는 특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이란 인간에게 봉사해야지 절대로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똑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교황에게는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존중하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환기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관대한 연대를 권고합니다. 저는 경제와 금융이 인간을 위한 윤리적 접근으로 돌아올 것을 권고합니다.

폭력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거부합니다

59. 오늘날 우리는 많은 곳에서 보다 더 큰 안전을 요구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그리고 백성 사이의 불평등과 배제가 없어지지 않으면, 폭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더 가난한 백성들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가 없다면,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공격과 갈등은 증가하기 좋은 토양을 만나고 결국에는 폭발할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 - 지역, 대륙, 지구 차원이든 - 과격한 그룹에게 여지를 남겨둔다면, 어떠한 정치 프로그램이나 사법부나 감시 시스템에 쏟는 정치적 자원도 안정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평등이 시스템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폭력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경제 시스템이 그 뿌리부터 부당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이 확산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을 묵인하는 것 역시 그 악영향을 확산시켜 어떤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도, 그것이 아무리 견고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소리 나지 않게 붕괴시키고 맙니다. 만일 모든 행동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한 사회의 제도화된 악은 지속적인 해체와 죽음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은 부당한 사회구조들로 구체화된 악입니다. 우리는 소위 “역사의 종말”(지금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시장 자유주의로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의)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발전의 조건들은 아직 적절하게 구체화되고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0. 오늘날 경제 메카니즘은 터무니없는 소비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등과 고삐 풀린 소비주의는 사회조직에 겹겹이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불평등은 궁극적으로 폭력을 낳습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그 폭력은 해결할 수도, 해결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무력에 의존하는 폭력은 안전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 희망만 제공할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해결책을 마련하기는커녕 무기와 폭력이 새로우면서도 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나라와 더 가난한 나라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합니다. 검증되지 않는 일반화에 빠짐으로써 그들은 그 나라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을 오히려 분통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에서 - 그 나라의 정부들, 기업들, 기구들에서 - 그 지도자들의 정치 이념이 어떤 것이든,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패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문화의 도전

61. 우리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려 할 때 복음도 전해야 합니다. 이 도전들은 종교 자유에 대한 분명한 공격이나 그리스도인에 대한 새로운 박해의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종교 탄압과 박해가 증오와 폭력의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광범위한 무관심과 상대주의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관심과 상대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와 환멸에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조직 전체에 해를 끼칩니다. 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주관적 진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개인적인 성취와 인간적 욕망을 뛰어넘는 공동의 계획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정해야만 합니다.

62. 오늘날 주류 문화에서는 외적인 것, 즉각적인 것, 가시적인 것, 빠른 것, 표피적인 것, 그리고 잠정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실질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밀려납니다. 많은 나라에서 세계화는, 경제적으로 발전했지만 윤리적으로는 쇠약해져버린 다른 문화를 쫓아서, 그 고유의 문화적 토대를 급속하게 해체한다는 것, 사상과 행동 양식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러 대륙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주교들이 제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수년 전 회칙 <사회적 관심>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을 “기계의 한 부품, 거대한 바퀴의 톱니”로 만들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지고 있습니다. 또 주교들은 “이것은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대개 북반부에 있는 센터들에 의해서 운영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아프리카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같은 취지로, 아시아의 주교들도 “아시아 문화를 향해 다가온 외부의 영향을 주목하였다. 대중매체에 과도하게 노출된 결과로 새로운 행동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미디어와 오락 산업의 부정적 측면이 전통적 가치들, 특히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63.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종교운동의 확산은 가톨릭 신앙에 도전이 됩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근본주의가 되려하고, 어떤 것은 하느님이 없는 영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물질주의, 소비주의, 그리고 개인주의 사회에 대한 인간적 반작용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빈곤에 처한 사람들과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사실 인간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겨우 살아가면서 즉각적인 문제 해결책을 찾고 있습니다.

일정부분 독특함이 없지는 않지만, 이런 종교운동은 개인주의적 문화가 팽배한 곳에서 세속적 이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진공상태를 채워주게 됩니다. 만일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본당이나 공동체의 구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혹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 관료주의적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곳에서 행정적 접근이 사목적 접근을 압도합니다. 복음화 활동은 제쳐두고 대신 성사를 관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64.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은 신앙과 교회를 사적이며 인간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키려 합니다. 더 나아가, 초월적인 것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세속화 과정은 윤리의 타락을 가져오고, 개인과 집단의 죄의식을 약화시키며, 상대주의를 키웁니다. 이런 것들은 전체적으로 방향감각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특히 변화에 민감한 사춘기와 청년기에 그렇습니다. 미국 주교들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객관적 도덕규범을 주장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교회의 이 가르침이 부당하다고, 즉 기본 인권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주장은,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개인의 권리를 절대시하는 신념과 결합된, 도덕 상대주의의 형태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교회가 특정한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우리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에게 데이터를 퍼붓고 있습니다. 모든 정보는 그 중요성에서 동등한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이는 도덕적 통찰 영역에서 현저한 가벼움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고, 성숙한 도덕적 가치의 발전을 격려하는 교육을 제공해야 합니다.

65.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세속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 여론은 그리스도 신자가 소수에 불과한 나라에서조차, 가톨릭교회를 신뢰할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가장 힘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과의 연대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제도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회는 평화, 사회의 조화, 토지와 생명 수호, 인권과 사회적 권리 등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의 답을 찾는데 있어서 중재자로서 항상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가톨릭 학교와 대학들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에 관한 신념에 충실해서 어떤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여론에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 충실성을 알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66. 가정은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와 사회적 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경우, 이 유대의 약화는 특별히 심각합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세포이며,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서로에게 속한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혼인을 마음만 먹으면 수정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구축할 수 있는 것쯤으로, 단순히 감성적 만족을 위한 형식쯤으로 여기려 합니다. 그러나 혼인이 사회에 기여하는 불가결한 요소는 남녀의 감정이나 일시적 요구를 초월한다. 프랑스의 주교들이 가르친 것처럼, 혼인은, “그 정의상 덧없는, 사랑의 감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서로 완전한 생명의 친교를 맺는다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인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67. 오늘날 세계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개인주의는 인격적 관계가 갖는 안정성과 발전을 약화시키며, 가족의 유대를 왜곡하는 생활태도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친교는 인간 상호 인격적 유대를 치유하고, 증진하고,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관계는 이 친교를 요구하고 촉진합니다. 사목 활동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특히 일부 나라에서, 여러 형태의 전쟁과 갈등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을 존경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중개하고, 관계를 강화하고, 그리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려는 확고부동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상한 목표를 추구하고 권리들을 수호하려는 여러 다양한 단체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신앙의 토착화에의 도전들

68. 어떤 민족의 - 대부분 서구에 있는 - 그리스도교적 토대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가장 궁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가 갖고 있는 가치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성령이 씨를 뿌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 그곳에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령의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활동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통상적인 “말씀의 씨”를 인정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씨는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이 있는데,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교회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고유의 표현과 수단을 갖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특색으로 하는 문화가 갖는 막중함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대 세속주의의 맹공이 있기 전에, 복음화된 문화는 그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단순히 신자들의 숫자를 합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화된 대중문화는 보다 공정하고 믿음이 가는 사회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연대와 신앙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훌륭하다고 인정할만한 특별한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69. 복음을 토착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들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가톨릭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이미 존재하는 풍부함을 촉진하고, 기르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종교적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나 철저하게 세속화된 나라들에서,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를 복음화하기 위한 새로운 과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는 장기적 계획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각 문화와 사회 그룹은 정화와 성장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대중문화에서도 복음으로 치유해야 할 결함을 볼 수 있습니다. 남성우월주의, 알코올 의존증, 가정폭력, 저조한 미사참여, 마술로 이어지는 운명론적 혹은 미신적 생각등을 그 결함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대중적 경건함은 그 자체로 이런 결함들로부터의 해방과 치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70. 때때로 그리스도교적 경건함이 갖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특정 그룹의 전통과 외적 표현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혹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하려는 사사로운 계시로 추정되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인적이며 감성적인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교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대중적 경건함’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의 진보나 평신도의 양성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이런 외적 표현을 보급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들은 경제적 이익이나 다른 이에 대한 권력을 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근 수 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가 젊은이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데 실패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톨릭 전통에 환멸을 느끼며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부모들이 그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해주지 않으며,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신앙 공동체를 향한 분명한 이탈(exodus)도 있습니다. 이런 실패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가정 안에서 대화할 기회의 부족, 소통 매체의 영향, 상대주의의 주관주의, 시장을 먹여 살리는 무절제한 소비주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의 결여, 환영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 못한 교회 기구들,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서 신앙적 충실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 따위가 포함됩니다.

도시문화에서 오는 도전들

71. 새로운 예루살렘, 거룩한 도시(묵시록 21:2-4)는 모든 인류가 가야할 목표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인류와 역사의 완성이 도시에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호기심을 끕니다. 우리는 도시의 가정에,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신앙의 시선으로 우리 도시들을 관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개인이나 그룹이 자기 생활에서 용기와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동반합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가운데서 연대, 형제애, 그리고 선과 진리와 정의를 향한 열망을 키우십니다. 이 현존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드러내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 사람에게서 숨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들이 불투명하고 투박한 태도로 모호하게 그분을 찾더라도 말입니다.

72. 도시에서는 시골과는 다르게, 생활에 있어서 종교적 차원이 여러 생활태도로 나타납니다. 도시의 일상생활 리듬은 장소와 사람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빈번하게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는 종종 심오한 종교적 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우물가에서 나눈 대화처럼(요한 4:1-15), 우리 역시 (도시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이 점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73. 새로운 문화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이 의미를 만들어내고 또 해석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곳에서 말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이 문화에서 새로운 언어, 기호, 메시지와 패러다임을 취하는데, 이 새로운 언어와 기호, 그리고 메시지와 패러다임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그렇지만 종종 이 새로운 접근법은 예수님의 복음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가 생겼으며, 도시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시노드는 오늘날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발생한 변화와 그 변화가 만들어낸 문화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우선적 현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와 친교를 가져다 주는 혁신적인 공간을 상상하도록 부추깁니다. 도시 주민에게 보다 의미가 있고, 도시 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합니다. 매체의 영향을 통해, 도시 지역은 동일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변화들은 도시의 생활 방식도 뚜렷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74. 하느님과 다른 사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빛을 비출 수 있고, 핵심적인 가치들을 불러일으키는 복음화가 요청됩니다. 새로운 이야기방식과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있는 곳에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도시의 깊숙한 영혼에 가져가야 합니다. 도시들은 여러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도시에서는 공동의 상상력과 삶에 대한 꿈을 공유하는 그룹들 안에서 연결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적 상호작용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문화들과 비가시적 도시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다양한 하위문화들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종종 분리와 폭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루기 어려운 대화를 위해 봉사해야만 합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적 생활과 가정생활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수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비 시민” “반쪽 시민” 그리고 “여분의 도시 사람들”도 많습니다. 도시는 일종의 영구적 유동성을 만들어냅니다. 왜냐하면, 도시는 그 거주민에게 수없는 가능성을 제공하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삶의 완전한 발전을 가로막는 특정한 장애물을 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명암은 고통스러운 아픔을 가져옵니다. 세상의 많은 지역에서, 많은 도시는 수천의 군중이 자유와 정치 영역의 권리와 정의와 다양한 것을 요구하는 군중의 시위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위는 무력으로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75. 우리는 도시에서 인신매매, 마약거래,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 노인과 영아의 유기, 다양한 형태의 부패와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교류와 연대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 빈번하게 소외와 상호불신의 공간이 됩니다. 주택과 단지는 서로를 결합하고 통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격리되어 보호하기 위해 건설됩니다. 복음 선포는 이 같은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기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도시들에 생명의 풍부함을 부어주시려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0:10 참조)

복음은 통합되고 온전한 인간적 생활을 제시합니다. 이 인간적 생활이야말로 도시가 앓는 질병에 가장 좋은 치료약입니다. 비록 단일하고 확실한 어떤 한 복음화 프로그램이 이 복잡한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문화와 모든 도시에서 인간적 생활을 충만하게 살고, 복음의 증인이라는 누룩으로서 모든 도전에 응하는 것은 우리를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것이며,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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