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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돈이 독재하는 세상, 천국인가 지옥인가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4 조회수714 추천수9 반대(7)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돈이 독재하는 세상, 천국인가 지옥인가[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3] 마르 3,31-35

박동호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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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03  10: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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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한편 끝에 있다면, 다른 한편 끝에는 지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지대는 ‘연옥’ 쯤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쯤에 있을까요? 천국을 향하고 있을까요?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을까요? ‘지금 이대로 영원히’를 노래하는 분들(집단이나 나라들)은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할 것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탄식하는 분들(집단이나 나라들)은 지옥이 따로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반문은 ‘나’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론부터 간단히 정리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을 형제로, 누이로, 어머니로’, 그러니까 하느님을 한 분 아버지로 삼아 온 인류가 새로운 차원의 가족관계를 맺고 사는 곳이 바로 지상의 천국일 것입니다. 거꾸로 형제든 누이든 어머니든, 그러니까 혈연마저도 황폐하게 된 곳이 바로 지상의 지옥일 것입니다.

제주교도소 담장도, 매서운 바람도 막지 못한 ‘평화’와 ‘사랑’

우선 ‘천국’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요약하는 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신 것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마도 ‘둘째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아버지’가 아닐까 합니다.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도 그렇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도 그렇고, 이 가르침들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그분이 ‘이웃’이라고 부른 사람들 역시 ‘약자’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신체적이든 문화적이든, 하다못해 정치적이든, 그 모든 영역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내던져지고 차별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그분에게는 ‘이웃’이었습니다. 물론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나 지도자급의 사람들도 그분에게는 ‘이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간의 존엄함을 철저하게 존중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웃을 당신과 동일화하기까지 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며, 헐벗고 떠돌아다니며, 병들어 누워있고 감옥에 갇힌’ 그 사람과 당신을 말입니다. 그 동기는 물론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고 희망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죽기까지 말입니다. 복음은 이를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라고 한 것입니다. 천국이란 그런 곳입니다.

엊그제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현장 정문에서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다녀왔습니다.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던진 양윤모 선생이 제주교도소에 갇힌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설을 앞두고 평화지킴이 청년들이 추운 밤 교도소 앞에 모였습니다.

두 장면이 ‘천국’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나는 ‘설’을 앞두고 담 넘어 계신 분께 ‘세배’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독자께서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제주라지만 바람이 참 차갑습니다. 그렇지만 밤하늘의 별은 아름답습니다. 천국이 아닌가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다른 한 장면은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청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어 뭍에 계신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밤 인사를 합니다. 엊그제 따뜻한 방에서 잤는데 이번 겨울 들어서 처음이었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며 행복해 합니다. 힘이 들면 짜증이 날 법한데, 오히려 서로 따스함을 나눕니다.

이 두 모습의 공통점은 ‘평화’와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의 실현이었습니다. 교도소의 담도, 매서운 바람의 추위도, 불편함도 이 숭고함을 꺾지 못하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요?

   
▲ 제주 강정마을, 이른 아침 해군기지 공사장 문앞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백배를 바치고 있는 사람들 ⓒ한수진 기자

사랑하는 가족과 오순도순 사는 꿈
그 꿈을 위해 불철주야 일했건만, 현실은…

그렇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형제, 누이, 어머니’는 가족관계를 드러내는 말들입니다. 특징이라면 우리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형성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일 것입니다. 형을 선택하고 아우를 선택하며, 누이를 선택하고 어머니를 선택한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냥 그는 내 형제고 누이고 어머니입니다. 말 그대로 자연입니다. 혈연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사람의 인위적인 개입 이전의 그 무엇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그 관계를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키거나 해소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집단의 부도덕함과 악마성, 그리고 인간성의 철저한 파괴를 가져온다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무자비한 무력충돌, 곧 가장 악랄한 범죄라는 전쟁마저도 이 혈연을 끊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문학작품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아주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계, 지연, 학연, 교우관계는 살면서 만나는 여러 사건과 이유로 그 관계가 왜곡되었다가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물 무엇으로도 허물어뜨릴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가족관계, 혈연관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력을 동원한 집단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 자연의, 천연의 가족 및 혈연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바로 ‘돈’입니다. 점잖게 말해서 ‘경제’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정당한 공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절대자유를 누리는 ‘시장(경제)’과 ‘금융투기’입니다. 부부 사이든, 부모 · 자식 사이든, 형제 · 자매 · 남매 사이든 돈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그 관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회는 ‘경제’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경제와 시장’이 엄살로 재채기를 하면 사람과 사회는 실제 몸살을 앓거나 병들거나 죽기까지 합니다. ‘경제와 시장’을 달래고 섬기느라 심혈을 기울이고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판입니다. 사람이 사회를 형성하고, 사회가 사람을 키우는 이 상보관계의 성장과 유지를 위해 사람들이 창안해낸 것에 불과한 ‘경제’와 ‘시장’이 거꾸로 사람과 사회를 폭력으로 지배하는 절대권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경제든 시장이든 혈연관계를 포함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건강한 관계(공동선) 증진과 사람의 사람다움(인간의 존엄함) 실현을 위한 여러 도구 및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데도, 거꾸로 ‘목적’이 되어버린 형국입니다. 그런 도구들이 이 공동선과 인간의 존엄함을 위해 선하게, 그리고 유용하게 활용되도록 그 힘(권력)을 위임받은 ‘정치’는 오히려 ‘경제와 시장’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 전락했습니다. 어쩌면 ‘경제와 시장’이 그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치’를 마름으로 고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수천만의 사람이 주인으로 살고 있는 정치공동체, 곧 ‘대한민국’에서 어느 기업이 고용 방법을 발표했다가 취소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기업에 불과한데, 이 땅의 수백만 젊은이와 그 부모의 마음을 한꺼번에 요동치게 만들었습니다. 오죽하면 경제민주화란 말이 유행을 했고, 그 유행어의 덕을 본 집단이 생겨났겠습니까. “경제(시장)의 주인은 ‘돈’이 아니라 민(民 : 사람들, 사회, 공동체)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구호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것으로, 대단한 것으로 먹힌(?) 것이었습니다. 돈이(점잖게 표현해서 자본이든 금융자본이든) 주인인 세상보다는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그만큼 갈망한 것일 터입니다.

그렇게 대단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희망하는 소박한 꿈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지내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서로 지지해지고 슬픔을 함께 짊어지며, 기쁜 일이 있으면 내 일처럼 기뻐하는 가정을 이루고 사는 꿈 말입니다. 이 소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가 불철주야 노동을 했는데, 현실은 그 소박한 희망마저 사치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형제든 누이든 어머니든, 그러니까 혈연마저도 황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급기야는 혼인을 미루고, 혼인을 하더라도 출산을 기피하는 일이 ‘자연’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세상이 과연 천국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모든 이를 형제로 누이로 어머니로’ 여기며 함께 평화롭게 사는 곳을 향하고 있을까요? 누군가 사람과 사회를 다음과 같이 강제로, 때로는 교묘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돈(시장, 경제)이야말로 섬겨야 할 절대 주인이다.’ ‘모든 이는(형제 · 자매 · 남매, 부모, 부부까지도) 서로 싸워야(경쟁해야) 하고, 그 승률로 줄을 서야 한다.’ ‘승률 높은 ‘소수’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잉여의 대다수’는 그 앞에서 숨죽이며 연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야말로 발전이며 성장이다’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혹시 ‘사적 이익’이나 ‘이념적 목적’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점하려는 소수의 ‘폐쇄된 지배집단’이 자기들만의 ‘이대로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그렇게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5)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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