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예로니모)는
젊어서 군인이 되어 트레비소(Treviso)의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에 주둔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511년에 지휘관이 되었지만
캉브레(Cambrai) 동맹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감옥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적적으로 지하 감옥을 탈출한 그는
곧 트레비소의 마돈나 그란데(Madonna Grande) 성지를 순례하였다.
1518년 사제 서품을 받고 고향인 베네치아에 부임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페스트가 만연하고 또 기근의 희생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불행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특별히 고아들을 돌보기로 맹세하고
브레시아(Brescia), 베르가모(Bergamo) 그리고 코모(Como)에 고아원을 세우는 한편
베로나(Verona)에는 병원을 지었고,
참회하는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1534년 그는 다른 두 사제와 함께 후에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로 변경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자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 이름은 그들이 첫 수도원을 세운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수도회의 주요 목표는 고아들을 돌보고 어린이들과
사제들을 교육하는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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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다가 결국 페스트에 감염되어
1537년 2월 8일 소마스카(Somascha)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인 1540년 6월 4일에 그가 설립한 성직 수도회는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1747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하여
고아들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 3월 14일에 성 히에로니무스를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