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월8일(토) 聖예로니모, 聖女요세피나 바카타 님♥
작성자정유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7 조회수537 추천수2 반대(1) 신고

 

 

 

2월8일(토) 음1/9

聖예로니모, 聖女요세피나 바카타

 

 

 



 

예로니모 에밀리아니(2.8)

성인명

 에로니모 애밀리아나(Hieronymus Aemiliani)

축일

2월 8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86-1537년

같은이름

 에밀리아노, 에밀리아누스,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148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 태생인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예로니모)
젊어서 군인이 되어 트레비소(Treviso)의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에 주둔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511년에 지휘관이 되었지만
캉브레(Cambrai) 동맹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감옥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적적으로 지하 감옥을 탈출한 그는
곧 트레비소의 마돈나 그란데(Madonna Grande) 성지를 순례하였다.

1518년 사제 서품을 받고 고향인 베네치아에 부임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페스트가 만연하고 또 기근의 희생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불행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특별히 고아들을 돌보기로 맹세하고
브레시아(Brescia), 베르가모(Bergamo) 그리고 코모(Como)에 고아원을 세우는 한편
베로나(Verona)에는 병원을 지었고,
참회하는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1534년 그는 다른 두 사제와 함께 후에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로 변경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자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 이름은 그들이 첫 수도원을 세운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수도회의 주요 목표는 고아들을 돌보고 어린이들과
사제들을 교육하는데 있었다.





그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다가 결국 페스트에 감염되어
1537년 2월 8일 소마스카(Somascha)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인 1540년 6월 4일에 그가 설립한 성직 수도회는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1747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하여
고아들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 3월 14일에 성 히에로니무스를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포로생활을 겪는 동안 주님을 더 알게 되었고
사제가 된 후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자회' 를 설립하여
고아들과 어려운 이들을 돌보셨던

버림받은 청소년의 수호성인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 님이시여

저희가 깨끗한 사랑만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필 수 있도록
 천상의 기도를 보내주옵소서!...아멘+


 

 


 

 




 



요세피나 바카타(2.8)

성인명

요세피나 바카티(Josephine Bakhita)

축일

2월 8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869-1947년

같은이름

요셉피나, 조세피나, 조세핀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는 1869년 아프리카 수단(Sudan)
다르푸르(Darfur)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9살쯤 아랍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바키타’라는 이름도 노예상인들이 지어준 것으로 ‘행운’이란 뜻이다.
이름과는 달리 그녀는 수단 중부 엘오베이드(El Obeid)와 현 수도(首都)
카르툼(Khartoum)노예시장에서 팔리고 또 팔리는 신세가 되어
모진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1883년 이탈리아 공사(公使) 칼리스토 레냐니(Callisto Legnani)에게
팔리면서 그녀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으로 욕설이나 매질이 아닌 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그녀는
그 후 공사의 친구인 아우구스토 미치엘리(Augusto Michieli) 가족에게 보내졌고,
1885년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 가족의 유모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치엘리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자신의 큰딸과 유모인 성녀 바키타를 베네치아(Venezia)에 있는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맡겼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1890년 1월 9일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상징으로
요세피나라는 세례명을 정했다.
그리고 1893년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입회하여
3년 뒤인 1896년 12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 후 남은 50년의 생애를 이탈리아 북부 비첸차(Vicenza)에 있는
시호(Schio)라는 곳에서 카노사(Canossa)의 수녀로서
또 하느님의 겸손한 딸로서 살았다.

그녀는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고,
어떠한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며,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흑인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47년 2월 8일 선종하였다.
그녀가 선종하자 그녀의 덕행을 기억하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녀의 겸손과 높은 덕행으로 인해 선종 12년 후부터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역시
그녀의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했다.
그녀는 1992년 5월 1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아프리카 교회의 현양 열기와 사랑은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단의 수호성녀로서 존경받고 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식민지 아프리카의 슬픔을 온몸에 담아
노예로 팔리고 또 팔려야 했던 님

그러나 언제나 주님 사랑 안에 사셨기에

아프리카의 꽃,

수단의 수호성녀로 피어나신
성녀 요세피나 바카타 님이시여

저희가 어려움을 현세에서 겪더라도
주님 사랑을 잃지 않도록

천상의 축복을 보내주옵소서!......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