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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8 조회수931 추천수10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5주일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복음: 마태오 5,13-16






성인들과 천사들에 싸인 성모


로토(Lotto, Lorenzo) 작, (1527-1528),  빈 미술사 박물관


     <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

     

노역장에서 돌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노예들입니다.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있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돌 깨는 데 쏟지 않으면 매질이 쏟아지거나 음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생명을 돌 깨는데 바칩니다.

돌을 조각해서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그 돌 안에 자신이 만들어놓을 작품을 빨리 보고 싶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돌을 깹니다. 그도 역시 돌을 깨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생명을 바칩니다.

과연 같은 삶일까요? 빛과 소금처럼 자신을 태우고 녹인다고 다 같은 삶일까요? 둘이 같이 밭을 갈아도, 둘이 같이 방아질을 하여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둘 것입니다. 같이 목숨을 바쳐도 어떤 이들에겐 무언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술가의 마음 안엔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이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 안에 있는 형상을 그 돌을 쪼아내는 노력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어제 교구 신부님 어머니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때는 교구 모든 신부님들이 함께 고인의 명복을 위해 주교님 주례로 미사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전에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전 날 빈소에서 미사를 하고 어제는 장례미사에 함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구청에서 회의실 온도를 맞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날짜를 다시 확인해보았더니 회의는 다음 주였던 것입니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다 헛수고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이렇게 헛수고 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안에 온전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력을 하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다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꼭 내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때에 산다고 하여도 그들만큼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 안에 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을 비추고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만약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슈바이처나 간디, 달라이 라마, 법정 스님 등이 우리보다 훨씬 세상에 필요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들처럼만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세상은 꼭 하느님에게만 영광을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 껍데기만 닮고 그분이 우리 안에 넣어주시려고 했던 가장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느끼지만 결국 헛수고를 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보다 더 깊은 상징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소금 계약’(민수 19,19; 2역대 13,5)을 맺으셨습니다. 도대체 소금계약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우리가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지 않으면 형제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없습니다. 소금은 그저 자신을 녹여서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가 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탈출기 30,35절에는 소금은 제물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 레위기 2,13절에는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바치는 곡식 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고 그 계약의 소금을 예물과 함께 바치라고 말합니다. 또 모세와 엘리사는 우물이 마시지 못할 물이 되자 그 안에 소금을 넣었더니 단 물이 되었고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소금이 되라는 말은 죽어서 이 세상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먼저 누가 죽으셨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으면서 우리를 위해 흘린 피와 그분이 내어주시는 살, 그것이 바로 계약의 소금인 것입니다. 죽어야만 내어줄 수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의 계약, 즉 내가 사랑으로 죽어서 변화되는 것, 그 사랑의 표현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가 그 맛을 잃겠습니까? 바로 내가 소금을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죽으라는 말씀뿐만이 아니라 내가 맛을 잃지 않도록 소금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참 사랑의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오지 않으면 맛을 잃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려고 해도 절대 될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옛날 원시 부족 때 어떤 한 발명가가 불을 만드는 기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기술을 자신만 쓰는 것이 아까워서 부족들을 찾아다니며 그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첫 번째 부족은 그 불을 만드는 기술에 빠져있어서 그 발명가가 자신들을 떠난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발명가는 다음 부족에게로 갔습니다. 그 부족에겐 사제들이 있었는데 그 뛰어난 기술을 들고 온 발명가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발명가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질책이 자신들에게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발명가와 불을 만드는 기술을 모두 묻어버리고 그 위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명가의 삶을 칭송하며 그에 대한 책도 쓰고 그의 가르침에서 어긋나게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추방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그 발명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게 되었지만 그 발명가가 알려주려 했던 불을 만드는 기술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안소니 드 멜로, 개구리의 기도 1, 28]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을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쩌면 그 기술을 자신 안에 품기보다는 겉모습만 그분을 닮으려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제키엘서 16,4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임을 말씀하시면서 아무도 네가 태어날 때, 네 탯줄을 잘라주지 않았고, 물로 네 몸을 씻어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녹여 우리를 깨끗한 제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참 소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맛을 잃은 쓸모없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주어도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목숨을 바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 되도록 우리 마음 안에 참 소금을 간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 소금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젊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어느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씻지도 않고 방도 청소하지 않아 돼지우리 저리가라 할 만한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엔 램프가 있었지만 그 청년은 그 램프를 켜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램프가 있는데 왜 켜지 않느냐며 그 램프를 켰습니다. 그 청년은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냐며 화를 내고 다시 램프를 껐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지지 않고 다시 램프를 켰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마침내 화가 난 청년은 램프를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집으로 돌아가 새 램프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돌아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그 청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같은 빈민굴에 살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려주는 수녀에게 데레사 수녀를 보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

 

그렇습니다. 빛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원한다는 뜻은 그분 때문에 내가 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그 빛은 당신이 자신을 태우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이었고, 소금이었고, 성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둠을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위의 청년이 마더 데레사가 놓고 간 빛을 받아들여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변화되면 저절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게 됩니다.

오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죽으라는 뜻입니다. 죽어서 내 안의 성령을 세상에 뿌려서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계약을 맺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태울 수 있는 불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으라는 뜻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먼저 죽으려고만 하지 말고 그분이 주신 소금과 빛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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