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세상의 소금과 빛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9 조회수811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연중 제5주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죄도 없으신 분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떤이가 “빛으로 오시는 당신은 제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둠을 비추려 빛(“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8,12))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빛과 소금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미 소금이요, 빛이거늘 짠 맛을 내지 못하고 밝게 비추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이미 존재의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 없어 결국은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이 되고, 빛을 비추어 주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을 통해 비추어진 모습은 “착한 행실”입니다. 의도적인 착한 행실이 아니라 삶에 젖어있는 나의 모습이 다른 이의 모범과 표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시기 때문입니다.

 

착한 행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대로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58,8).입니다.

 

우리본당이 첫째주일을 ‘이웃을 생각하는 날’로 지내는 것이 바로 빛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명절에도 여러분이 정성을 모아주셔서 42가정에 금일봉과 고기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빛의 역할은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사야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60,19). 우리는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명절에 세뱃돈을 많이 받으셨나요? 어디에 쓰셨나요? 부디 좋은 일에 쓰셨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10).하고 기록한 대로입니다.

 

“네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명절에 서로의 만남을 위해 모였지만 얼마나 많은 다툼이 많았는지....상처를 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흉보고, 비난하고 모함하는 말을 내려놔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콜로4,6). 올해가 무슨 해라고 합니까? ‘청마의 해’라고 합니다. 말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말꼬리 잡는 것도 싫어하며 말을 뒤집는 것도 싫어한답니다. 헛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어머니, 성모님을 보세요! 우리가 모신 매괴성모님은 수난 받으신 어머니이십니다. 인민군에게 7방의 총탄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깨지지 않고 미소를 담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상대에게 총을 겨눈다는 것은 시기, 질투, 미움, 증오, 분노, 적개심,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원수에게 총을 겨눕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품으신 어머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을 품고 천상을 바라보시며 자비와 용서, 화해와 평화, 더 큰 사랑을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어머니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속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마음 흔들리고 속상해 하지 말고 차원 높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금이 쉴까”라는 속담을 아세요? 어떤 일에도 절대로 굽히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틀림없어 매우 미더움을 강조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미더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암흑이 대낮처럼 되리라”(이사58,10).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관심을 두면 사랑의 나눔과 말조심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희생의 봉헌을 하고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을 한다면 그 자체가 소금이요,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뭡니까? 자신을 녹여 맛갈지게 하고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부패하지도 않고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한 소금은 절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도 절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 불만이 많고 교만한 사람을 감사의 사람,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소금의 절정은 맛을 내는데 있습니다. 소금은 일단 사용이 되면 그 형체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기능은 여전히 발휘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제 맛은, 드러나지 않게 이웃 안에서 사랑으로 녹아나야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며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인생의 맛을 잃었던 이들이 우리들의 희생으로 맛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촛불을 보십시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녹이지 않고서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없이는 세상을 비출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둡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이렇게 어둡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빛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어둡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해서입니까? 과학이 미발달해서입니까? 학문이 부족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삶의 현실은 과거에 비해 소비는 늘어났지만 더 가난해 졌고, 기쁨도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 수는 줄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는지 모르지만 소중한 가치는 줄어들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줄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나 개신교, 불교등 제도 종교의 의례와 가르침 그리고 계율은 따르지 않으면서 개인적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두운 것은 의롭고 밝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알면서도 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됨이 적어서입니다. 진리가 부족해서입니다. 정의가 바로 서 있지 않고 사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이 더 필요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간절합니다.

 

어떤 분을 만났는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열흘을 입원했대요. 특별히 아프지도 않은데 일행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아프지 않았답니다. 이쪽, 저쪽 보험금을 받게 되었는데 치료비를 제외하고 1백 여 만원씩 받았다고 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이지요. 우리 신자가 이정도인데.....사도 바오로는 선언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2,15).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을 가리는 어두움, 정신의 어두움, 마음의 어두움을 비춰야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현실은 진실을 진실로 드러내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구제역, 조류인플루엔자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진실은 고사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진실을 진실로 보도하거나 방송을 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이 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도 카드회사들의 개인정보유출사건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자기기득권 유지와 잇속에만 관심이 크지 물가 안정, 서민의 복지와 생계안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소금의 역할을 하고 어둠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오늘 이렇듯이 빛을 비추라고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대해 말을 못하고 침묵하며 숨기는 것만이 최선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왜 정치에 관해서 얘기하느냐? 왜 교회가 제주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고 밀양 송전탑, 원전문제에 간섭하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한때는 4대강 사업을 왜 반대하느냐? 두물머리에서는 왜 교회가 환경문제에 개입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왜 대기업들의 문제와 경제문제, 쌍용자동차 문제, 용산 철거민 문제에 대해 간섭하느냐? 이밖에도 생명공학문제, 낙태반대, 이라크 파병문제등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못마땅해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게 정의롭지 못한 경우에는 교회는 예언자적인 선포와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빛의 역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월간 '경향잡지' 1월호 기고문에서 강우일 주교님께서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말씀의 선포자로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사제가 펼치는 복음 선포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그러므로 사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힘없는 이들, 짓밟히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지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이 정의롭게 발전해 가도록 지켜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는 이를 고발하고 비판과 저항도 불사하는 것이 예언자의 직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강우일 주교님은 "성직자는 현실사회로부터 유리되어서도 안 되고 예속되어서도 안 된다. 사제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로이 사회를 평가하고 비판하면서 바로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며 성직자의 예언자적 직무를 상기시켰습니다.

 

하늘의 별은 어두운 밤에 더 빛나게 보입니다. 사회가 어둡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의 빛이 비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생각될수록 우리에게 소금의 역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까만 밤에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