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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6주일 2014년 2월 16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14 조회수647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6주일 2014년 2월 16일.

마태 5, 17-3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모세가 함께 계신 하느님을 존중하며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 가지로 나누어 만들었습니다. 기원 전 12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입니다. 그것이 유대교에 율법이 있는 경위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안정되면서, 그들은 그 십계명을 더 발전시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상하여 조항을 많이 늘렸습니다.

 

율법은 그 시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실천 지침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사라지고, 기원전 4세기 이후, 그 시대 유식한 사람들이 율사라 불리며, 율법 해석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등장하면서 율법 조항들은 많아졌습니다. 인간 삶의 여러 상황을 가상하여 율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것을 지키는 데에 골몰한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미를 차차 잊어버리고, 그것을 엄격히 지키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숲은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이라는 나무에만 시선을 빼앗긴 꼴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를 절대화하여 철저히 지킬 것만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런 자세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분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가게 하는 율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지킬 것만 강조하면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잊어버린 하느님을 되찾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의로움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조항 몇 개를 해석해 보이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만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치지 않으십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사람에게 자비로우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나를 대립시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면, 이웃은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형제자매는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며 축복하는 관계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예수님은 해석하십니다. 이성(異性)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기준으로 이성을 볼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이성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축복하고 배려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성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축복하고 배려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의 관행인 이혼 법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였던 그 시대의 이혼 법은 아내가 싫어지면, 남편이 이혼장을 써주고 내보냅니다. 이스라엘이 유목민이었을 때, 좁은 천막 안에서 여성이 학대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배우자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서도 해석하십니다.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말을 절대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 맹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말이나 행위를 절대화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주신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자각하면서 사람들이 만든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을 기준으로 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삶의 지침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한 지침입니다. 따라서 시대가 달라지면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지침입니다. 같은 하느님이지만, 우리의 의식 수준이 달라지면, 그분과 함께 사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몽매하였을 때, 그들은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신앙은 교회가 주는 교리를 믿고,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교회교직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사람들 각자가 자기가 필요한 정보를 얻어 자유롭게 선택하며 삽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은 각자가 하느님에 대해 듣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축복하고 배려하시는 분이라, 신앙인 각자는 자기 방식대로 그 축복과 그 배려를 실천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각종 재해(災害)를 하느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자연 재해들이 자연의 어떤 조화로 발생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이웃과 경쟁하고, 이웃을 비난하는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통, 곧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혹은 대자연이 만드는 그늘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혹은 대자연의 조화가 잘못 되어 생기는 그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였을 때, 발생한 그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그 그늘인 죽음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스도신앙공동체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런 그늘들이 있어도, 우리는 이웃을 축복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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