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세는 행동을, 예수님은 마음을.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15 조회수1,266 추천수1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6주일


<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복음: 마태오 5,17-37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모세는 행동을, 예수님은 마음을. >

         

제임스 C. 브라운은 소아과 의사이며 개인 병원을 열심히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바빠서 낮이고 밤이고 한가할 틈이 없었습니다. 낮에는 열심히 환자들을 만나고 밤에도 늦게까지 서류정리를 하며 자신이 만나는 환자들에 대한 문제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밤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도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명상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도 환자 진료 기록표를 훑어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났습니다. 브라운은 그날 당직 의사인 줄 알고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 앞에는 이전에 그가 담당했던 환자였던 브라이언이란 열여덟 살의 아이였습니다.

밤 두 시가 넘었는데, 어쩐 일이니, 브라이언?”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거리를 걷던 중이었어요.”

그럼 잠시 들어와라. 코코아를 먹으며 함께 생각해 보자.”

브라이언은 최근에 헤어진 자신의 여자친구, 또 생각만큼 나오지 못하는 학교 성적 때문에 크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는데 자신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지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브라운은 아주 가끔 조언을 해 주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브라이언의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주려고만 애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가진 고민들과 두려움들을 자신 안에만 감추어두지 말고 밖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브라운은 그를 차에 태워 브라이언 집에 데려다 주고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브라이언은 그 다음부터는 정상적인 시간에 가끔 병원에 들렀고 더 밝고 적극적인 학생으로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브라운은 그로부터 여섯 달 뒤 다른 곳으로 병원을 옮겼고 옮긴 일 년 뒤 브라이언으로부터 직접 쓴 편지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먼저 그날 밤 저와 대화를 나눠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셨겠지만, 그날 밤 저는 기분이 무척 우울했고, 자살을 할 결심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모든 것이 나빠져 있었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선생님의 병원을 보게 되었고,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어떤 이유에선지 저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눠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의견과 제안들은 저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제가 원했던 대학의 건축학과에 합격을 했습니다. 최고로 행복합니다. 저는 제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제가 그 힘든 시기들을 잘 헤쳐 나가리라는 것도 압니다. 그날 밤 선생님이 계신 곳에 불이 켜져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브라운 의사 선생님에게는 브라이언에게 해 준 행동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귀찮고 피곤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내면에는 이 있습니다. 그리나 그 빛이 빛나고 있거나 꺼져 있거나는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참조: 101가지, 그 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브라운이 브라이언에게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그에게 해 주었던 그 날 밤의 행동이 그의 생명을 구하고 인생을 바꾸어놓았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억지로 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혹은 본질에서 저절로 나온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돈을 빌려주었다면 그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겠지만, 그냥 사랑으로 준 것이라면 그것을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억지로 한 선행이 가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렇게 모르고 한 행동이 가치 있는 것일까요? 답은 억지로 한 선행은 매우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정말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갇혔을 때 찾아봐 주었으며, 아플 때 돌보아 주었다.”라고 하십니다. 얼핏 보면 선행을 하면 구원해 주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을 당연히 구원받아야 하는 보증인양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약 당신이 그렇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면 저희가 반드시 그렇게 선행을 했을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항변합니다.

우리는 행위로써 구원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두 사람이 같이 맷돌을 갈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둘 것이며, 또 둘이 같이 밭을 갈아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 심판받을 사람들은 이미 양과 염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양은 양으로써 산 것이고 염소는 염소로써 산 것입니다. 염소가 양인 척 해봐야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말의 대선사 경허 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수도승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스님에게 도움을 구하자, 젊은 스님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우리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젊은 처자가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노승 경허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경허는 선뜻 등을 내밀며 그거 어려울 것 없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허는 처녀를 등에 업어다 건너편에 내려주고는 계속해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젊은 스님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젊은 스님은 자기의 스승 경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습니다. 그러나 젊은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하고 따지며 대들고 말았습니다.

젊은 제자의 화난 목소리를 듣던 경허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행위에 치중하는 사람들입니다. 행위로는 어떤 누구도 그들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법, 십일조, 단식, 기도 등 그들은 613개나 되는 모든 항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키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주일에 일을 해야 하고 기도할 시간도 없는 우리들로서는 그들을 행위로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로움으로 뛰어넘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행위는 몸의 수준이라면, 의로움은 마음의 수준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행위에 치중하여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이 모든 계명들을 마음에 치중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뜻입니다. 행위로는 마음의 차원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마음, 즉 본질이 변화되면 행위는 본질에 따라 저절로 나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를 내는 사람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살인은 행위로 표현된 것이지만 화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예물을 바칠 때 마음에 원망을 품고 있으면 빨리 가서 화해하고 오라고 합니다. 미운 마음을 지니고 예물을 바쳐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쳐다봐도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십니다. 즉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그런 마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쳐다보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문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란한 생각인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계속 죄에 빠지는 이유는 행위를 고치려 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을 고치면 행위는 저절로 고쳐집니다.

 

한 독실한 신자가 80세 생일을 맞아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전 평생 교회에 빠진 적이 없고 기도를 거를 적이 없고 주님께 여쭈어보지 않고 행동한 적도 없으며 봉헌하고자 결심한 것을 하지 않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쥐처럼 가난하게 평생을 살게 하시고, 평생을 술 마시고 노름하고 늙은 나이에도 여자들과 놀아나는 저의 동업자는 호화롭게 살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를 벌하시려고 이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왜, , 왜 그는 잘 살게 하시고 저는 이렇게 대하시는 지만 알고 싶습니다.”

왜냐하면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정말이지 따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참조: 개구리의 기도 1, 38]

 

우리는 행위만 강조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처럼 되지 맙시다. 먼저 내 안에 불을 밝힙시다. 그 빛이 나를 통해서 좋은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빛이 필요한 이는 나를 찾아와서 자신의 어두움을 밝히고 갈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빛은 말씀과 성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보잘 것 없는 육체에서 성스러운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나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분입니다. 그러니 행동하기에 앞서, 내 안에 빛을 간직하려 하고 또 그 빛에 집중하는 것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 죄송한 말씀: 제가 2주 동안 성지순례를 갑니다. 그동안 묵상 글이 없겠습니다. 갔다 와서 뵙겠습니다. ^.~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