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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18 조회수1,148 추천수15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Watch out,
guard against the leaven of the Pharisees
and the leaven of Herod.
(Mk.8,15)
 
 
제1독서 야고 1,12-18
복음 마르 8,14-21
 

어느 산부인과에서 한 산모가 세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산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옷이니 기저귀나 젖병.... 무엇이든 세 개씩 필요할 텐데, 정말로 큰일 났네요.”

하지만 세쌍둥이 산모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셋을 함께 재울 때, 자장가를 한 곡만 불러도 되잖아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갖추기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찾는데 더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걱정을 발생시키는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참 많습니다.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 걱정이 생길 때마다, 즉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상관없이 걱정이 생기면 그 내용을 종이에 적어서 상자 안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상자에 넣은 그 걱정의 내용을 파악했지요. 그랬더니 그중 90퍼센트 이상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는 사실조차 대부분 잊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걱정이란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힘이나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문제를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반대로 내 힘이나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위 지배층에 있는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쓸데없는 걱정 안에 사로 잡혀 있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걱정에 사로잡혀있을수록 어리석어 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통제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즉, 걱정을 불러 일으켜 자신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 안에 빵이 하나밖에 없어 걱정을 합니다. 좁은 배 안에서 빵을 어디 가서 구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빵의 기적을 이미 몇 차례 보았지요. 따라서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을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지배층인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누룩이란 숨기기 쉬울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이 누룩이 밀가루 반죽 안에 들어가면 빵을 크게 부풀리지요. 이처럼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말과 행동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이가 그 영향을 받아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쓸데없는 걱정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걱정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면서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아우구스티누스).

 
인천교구가 운영하는 국제성모병원의 개원미사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할까요?

얼마 전에 읽은 파울로 코엘료 소설 ‘아크라 문서’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가 베두인족 친구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부탁했다. “빚을 갚아야 해서 그러니 4천 디나르만 빌려줄 수 있겠니?”

친구는 아내에게 말해 가진 돈을 전부 모았지만 부족했다. 그들은 집밖으로 나가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4천 디나를 채워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가 떠난 후, 아내는 남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그렇게 슬퍼해요? 이제 우리가 이웃들에게 빚을 졌으니 그 빚을 못 갚게 될까봐 걱정돼서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야. 사랑하는 내 친구가 저런 곤경에 처할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 때문에 그래. 친구가 찾아와 내 집 문을 두드리며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후에야 내가 친구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니.”

형제가 도움을 청하기 전에 미리 도울 수 있도록, 다들 가서 오늘 저녁 들은 이야기를 전파하기를...

친구가 돈을 못 갚을까봐 걱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형제의 어려움을 미리 알아채고 도움을 주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전자의 모습을 더 많이 가지려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습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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