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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 구약성경과 신들/ 제4강 구약성경에 하늘신은 없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19 조회수1,310 추천수0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평화신문/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4)구약성경에 하늘신은 없다

하늘신, 신격 아닌 공간 의미



  인류 최초의 문명을 일군 수메르인들에게 하늘신은 선과 악을 관장하는 최고신이었다. 하늘신은 모든 신의 아버지였으며, 왕권을 지정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최고신도 시대가 바뀌면 다른 신들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는 '물러난 신'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하늘신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히타이트와 우가릿 등이 있었던 북서셈어(가나안어ㆍ아람어ㆍ히브리어 등) 지역과 남부셈어(아랍어ㆍ에티오피아어 등)를 쓰는 이집트 일대에서는 하늘신을 최고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 하늘을 장소의 뜻으로 많이 썼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어떨까.

 히브리어로 하늘을 '샤마임'이라 한다. 샤마임은 늘 복수형으로 쓰였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파란 하늘이 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늘 위에 또 여러 겹의 하늘이 존재하며, 그곳에는 신들이 산다고 생각했다. 가장 높은 하늘에는 최고신이 산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늘을 복수형으로 썼다.

 샤마임은 구약성경에 무려 420번 이상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늘은 하늘신을 의미하기보다 공간을 뜻했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이 신적 존재로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수메르인부터 고바빌론시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하늘신은 최고신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종교에서 하늘신의 의미는 철저히 탈색됐다.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이 하늘신에 대한 표현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늘은 일차적으로 공간일 뿐이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한다.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시편 2,4),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 11,4)고 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하늘이 아니고, 하늘도 하느님이 아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공간일 뿐, 신은 아니다.

 구약성경은 하늘에 인격이 있다고 오해할 만한 표현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아브라함이 하늘에 대한 믿음을 보이고자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때 창세기 저자는 하늘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했다는 표현을 쓴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 것이다.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을 하느님의 피조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탈신화화(脫神話化, Entmythologisie rung)란?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 불트만(Bultmann)은 1920년대 '탈신화화'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신약시대 세계관은 신화적이어서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큰 차이가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신화의 언어를 탈신화화해서 그 속뜻을 합리성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탈신화화를 통해 고대 표현을 살리고 현대인들의 이해를 돕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했다.

 성경은 신화적 세계관과 신화적 언어에 익숙한 옛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다.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신화의 내용을 낯설게 느낄 수 있기에 신화의 언어에 담긴 속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불트만의 주장처럼 우리는 당시 세계관을 먼저 파악하고, 신화의 언어를 벗겨내(탈신화화) 하느님 뜻을 이해해야 한다. 탈신화화는 '의미의 현재화'다. 탈신화화는 시대를 넘어 그 의미를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한다.

 신약성경학에서 널리 수용되는 이 이론은 고대 이스라엘의 믿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유일신 신앙이란 독특한 믿음을 보존한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고유한 믿음을 지켜냈다.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화해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再神話化)라고 부를 수 있다. 탈신화화와 재신화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다. 큰 나라의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강의에 들어가며...

1. 탈신화된 '장소'로서의 하늘

- '하늘'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마임은 구약성경에 무려 420번 이상 나오는 단어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하늘 '신'을 의미하지 않고 '공간'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 하늘이 어떤 신적 존재로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인격적 요소도 제한된다. 이런 하늘관은 분명 탈신화 된 것이다. 수메르 시대부터 고바빌론 시대까지 최고신의 지위를 누려 온 하늘신의 의미는 이스라엘 종교에서는 철저히 탈색되었다.

2. 하늘에 계신 하느님

구약성경의 저자는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다.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고려할 때, 인격화된 하늘은 곧장 신격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말씀하였다' 대신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느헤 9, 13)

유배 이전 본문에서 이렇게 철저히 하늘이 공간으로만 쓰인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스라엘은 주변국과 종교적으로 활발히 교류했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하늘신이 최고신이라는 흔적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고대 이스라엘이 속한 북서셈족 종교 전승의 영향이다. 북서셈어를 사용하는 레반트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늘신이 최고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탈신화화의 신학적 작업이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둘째는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의식적인 탈신화화'를 수행했던 것이다.

하늘신만을 놓고 보자면,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야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동쪽에서 불어오는 대제국의 영향력을 의식적으로 차단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도적인 신학적 노력의 주체, 곧 탈신화화 신학을 이끈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일까? 우선 신명기계 신학자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주변 종교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3. '탈신화화' (脫神話化, Entmythologisierung)

유명한 신약성경학자인 불트만Bultmann이 1920년대에 제시한 개념이다.

불트만은 신약 시대의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다.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오해 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이런 신화의 언어를 벗겨 내서, 곧 '탈'脫신화화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와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껍질을 탈각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학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고, 현대의 성서학에서 꼭 가르치고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화해서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음을 볼 것이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再神話化, Remythologisierung)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탈신화화와 재신화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본문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다. 큰 나라의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신'도, 달'신'도, 태양'신'도 없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오직 피조물일 뿐이다. 고대 근동의 정치·종교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약소국 이스라엘이 '감히' 이런 신학을 천명하는 것이 놀랍다.



 

평화방송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4강 구약성경에 하늘신은 없다

 

안녕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어요?

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준비 운동을 이제 다 끝내고 이제 본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계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굉장히 먼 나라의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그 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멀지만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언어적으로는 훨씬 더 먼 아주 상상하기도 힘든 그런 세계였습니다.

그 시대에, 인류 최초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을 하늘이라고 생각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인류 최초의 문명 시대에 사람들은 신을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수메르의 하늘신은 선과 악을 관장하는 최고신이었고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으며,

  권력을 지정해주는 역활을 했다. 또 시대가 바뀜에 따라 최고신의 자리는 다른 신들

  에게 물려주고 뒷자리로 '물러난 신'(deus otiosus) 이기도 했다. 고대 근동 세계 중

  히타이트와 우가릿 등 북서셈어 지역과 남부셈어 쓰는 지역인 이집트에서는 하늘신

  이 최고신이 아니었다.

 

그런 최고신이 아니었던 거죠. 한 중간 정도 되는 신이었어요. 그 세계 안에서도 큰 

다양성이 있는데 그걸 우리가 놓치면 안 됩니다.

 

자, 이렇게 다양한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은 조그만 교통의 요충지에 있는 아주

조그만 나라였는데 동쪽에서는 신을 그렇게 최고신으로 하늘신을 모시고 이집트에서는

별신이 아니고, 자기네 비슷한 언어권에서는 좀 이렇게 맹세의 대상이나 몇 가지로만,

재물을 받는 그런 정도로만 쓰이는 그런 상황에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아주 독특한

신앙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런 것을 우리가 탈신화하를 개념으로 부를 수가 있는데 그 탈신화는 어떤 

개념인가? 하는 것을 이번 시간에 여러분들한테 천천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탈신화된 장소로서의 하늘

 

오늘은 볼 글자가 히브리어 하나밖에 없어요. 히브리어 샤마임이라는 글자만 보면

되는데요. 이거를 샤마임이라고 읽는데요.  히브리어로 하늘을 뜻하는 말이예요.

 

 

 

이 말은 언제나 복수형으로 쓰여요. 플로랄레탄툼이라고 전문용어로 얘기하는데 

하늘이 왜 복수형인일까? 하늘이 여러 개라는 말이잖아요. 복수형이라는 말은  

하늘이 여러 개라는 말이냐 하면, 하늘을 여러 개라고 생각을 했어요. 고대 근동 사람들

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 고대 근동인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저 하늘, 우리가 보는 퍼런 하늘이 있지요? 그 퍼런 하늘이 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하늘이 왜 파랄까요? 물로 차 있으니까.

바다가 파랗잖아요.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신화적으로.

 

창세기에 보면은 물을 반으로 갈라서 궁창을 만드시는데 윗쪽 물이 하늘이고, 아랫쪽

물이 이제 바다가 된 것이죠. 그래서 노아의 홍수 때 하늘문이 열렸다고 하잖아요.

하늘에 구멍이 나니까 그 물이 이제 다 쏟아져 내리는 것이죠.

 

그렇게 파란 하늘이 있고, 그 파란 하늘에는 이제 뭐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고,

새도 날라 다니고, 우리가 보는 게 다 하늘에 있는데, 그 하늘 위로 또 하늘이 한 겹이

더 있다. 거기에는 신들이 산다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 위로 또 겹의 하늘이 있고, 거기

에는 더 높은 신들이 산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가장 놓은 하늘에는 누가 사느냐 하면, 최고신이 사시는 거죠. 그러니까 높이

올라갈수록 이 지상의 속세에서 멀어질수록 더 높으시고, 더 거룩하시고, 더 큰 신이

사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하늘을 복수형으로 쓴 것입니다.

 

* 고대 근동인들은 하늘 가장 가까운 높은 곳에는 가장 높은 지위의 신, 최고의 신이

  산다고 믿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어뿐 아니라 아카드어, 아람어, 우가릿어 등 다른 셈어에서도 똑같은

'샤마임'이라는 단어를, 아까 아카드어로 '샤모'라고 했었지요? 그 똑같은 어근의 낱말을

언제나 복수형으로만 써요.

 

* 아카드어, 아람어, 우가릿어 등 다른 셈어에서도 똑같은 어근의 낱말을 언제나

  복수형으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고대 근동 세계에 거의 모두 하늘을 복수형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즉 낱말의

형태가 같으니까. 그리고 같은 형태로부터 "아, 이 사람들이 공통된 세계관을 가졌구나.

공통된 신화적 세계관을 공유했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죠. 이럴 때 낱말의

그 형태는 증거가 됩니다. 그 공통적인.

 

왜 복수형으로 썼나?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으니까죠. 하늘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마임'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무려 420번 이상 나와요. 그러니까 이 단어를 연구하려면

420 구절을 다 추려 가지고 하나하나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죠. 오래 걸리겠죠? 그런데

대부분 신으로 안 나와요. 어떻게 나오냐 하면 공간으로 나와요. "하늘은 공간이다." 하는

것이죠.

 

* '하늘'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마임'은 구약성경에 무려 420번 이상 나오는데 거의

  대부분 '하늘신'을 의미하지 않고 '공간'을 가리킨다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새들이 훨훨 나는 저 비어 있는 곳. 궁창 같은 곳으로 나옵니다.

하늘이 어떤 신적 존재로 나타내는 것은 매우 드물고, 그것도 유배 이전 문서에서는 아예

인격적 요소마저도 배제 되는데 이런 하늘은 고대근동의 우리가 저번 시간에 봤던 것과

비교해 보면 굉장히 특이한 것입니다.

 

* 구약성경에 하늘이 신적 존재로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유배이전의 문서에서는

  인격적 요소도 배제된다

 

이거를 그 당시 사회를 한번 여러분이 머리 속으로 떠올려 보신다면 정말정말 참 흥미롭

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수메르 시대부터 고바빌론 시대까지 최고신의 이름은

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지역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늘신의

의미는 그렇지만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싹 빠져 버렸어요. 탈색된 거죠.

 

빨래 빨듯이 싹 빠져 버린거죠. 이렇게 탈신화된 하늘은 유배이전 본문에서 강조하지만,

두드러지는데 이 시기의 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었거든요.

맨날 위협 받도 그랬는데 이런 종교적인 영향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 수메르부터 고바빌론 시대까지 최고신의 지위를 누려온 하늘신의 의미는 이스라엘

종교에서는 철저히 탈색되었다. 탈신화된 하늘관은 특히 유배이전 문서에서 두드러지

는데, 이 시기 이스라엘은 바빌론과 아시리아 등에서 문화,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고

군사적으로도 위협을 받았지만 종교적인 영향은 크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크게 위협 받고 크게 휘둘렸는데 이런 종교적인

영향은 안 나온다 하는 건 이유을 한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북서

셈어 지역에서 원래 이스라엘이 나왔으니까 자기네 토착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볼 

수 있고, 

 

두 번째로는 토착적인 영향도 받았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 집단이 혹시 의식적

으로 하늘이 신이 될만한 표현들을 조심스럽게 삭제하거나 넣지 않은 건 아닌가? 처음

부터.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거를 우리가 조금 하나하나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 종교적 영향이 크게 나타나지 않는 이유

1. 북서셈어 지역의 토착적인 종교 전승의 영향

2.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의식적인 '하늘신' 표현 배제

 

# 하늘에 계신 하느님

 

구약성경에서 일차적으로 하늘은 공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죠.

하늘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다. 요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시편 2,4에 보면은 이런 표현이 있어요. 하느님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 시편 2,4 

하늘에 계신 분, 하늘에 앉아 계신 분을 하느님으로 표현하는 거죠. 

 

*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시편 11,4

 

하느님은 하늘에 계셔서 사람들을 먼저 다 찬찬하게 보시는 분이시다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거죠. 하느님은 하늘에 좌정하신 분이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느님은 하늘이 아니고, 하늘도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시는 공간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아닌 거이죠.

 

* 하느님은 하늘이 아니시고, 하늘도 하느님이 아니다. 하늘은 하느님이 계시는 공간일

  뿐 더이상 신이 아니다

 

여러분 솔로몬 아시지요? 솔로몬 임금.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완성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남겼습니다.

그게 우리가 잘 아는 1열왕 8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노래라는 노래죠?

솔로몬은 뭐로 유명하죠? 지혜로 유명하죠. 그리고 솔로몬은 노래로도 유명하죠.

시편으로.

 

그리고 그가 이렇게 노래를 잘 짓는 임금인데 주님의 성전을 짓고 부른 노래의 일부를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에서 하늘과 관련된 구절을

제가 7개를 추려봤습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솔로몬이 하늘에 대고 기도하는 건대요.

 

*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1열왕 8,30

*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동하시어... 1열왕 8,32

*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 1열왕 8,34

*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당신 종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 1열왕 8,36

*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 1열왕 8,43

*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 1열왕 8,45

*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청을 들으시고 ... 1열왕 8,49

 

굉장히 재미있는데요. 솔로몬은 이 기도에서 단 한번도 "하늘이여, 제발 들어주소서!"

이런 말 절대 안 해요. "하늘이여,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이런 말도 한번도 안 해요.

꼬박꼬박 정말 한번도 없이, 한번의 예외도 없이 일곱번 모두 "하늘에서, 하늘에서,

하늘에서"라고 꼬박꼬박 얘기합니다. 마치 의도적으로 어떤 표현을 쓰는 것 같애요.

신중한 거 같애요.

 

하늘에서, 장소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전치사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에 해당하는

'버'라는 말은 한번도 빼놓지 않아요. 즉 하늘은 장소일 뿐이고요. 솔로몬의 기도 같이

훌륭한 기도에서 고정되고 반복된 이런 표현은 당시에 어떤 국제 정세를 볼 때 굉장히

놀라운 일이예요. 게다가 솔로몬이 누굽니까? 솔로몬이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의 외교에

힘쓴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그의 외교 정책은 주로 결혼하는 것이었죠. 외국의 신부들을 많이 데려다가 그

신부의 나라가 강한 나라면 그 강한 나라와 잘 지내고, 또 약한 나라면은 자기 밑에 두고

이런 식으로 자기 신부를 많이 데려오는 혼인 외교를 이스라엘의 대외 관계를 튼튼하게

할려고 노력한 임금이죠.

 

그런데 그의 그 혼인 외교 정책은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된 거 같애요.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죠. 그죠? 외국의 신부들이 자기네 고향의, 그래도 내가 이 나라

왕비인데, 둘째, 셌째 부인일지언정 나도 그래도 왕비인데 하면서 자기네 고향의 종교,

고향의 문화를 갖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라는 부강해졌지만 그 외국의 종교가 이스라엘에 퍼지는 효과를,

그런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작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이민족의 종교를 퍼뜨린  주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결과적으로 야훼 신앙이 흐트러지는데 아, 우리 야훼 신앙 안에서, 하느님

백성 안에서 왜 이렇게 이방 종교들이 판을 치는가? 라고 생각할 때, 아, 그때 솔로몬이

데려온 그 부인들이 씨를 뿌렸던 것이구나라는 것을 사람들이 후대에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느헤 13,26에 보면 솔로몬의 죄라고 하는 게 나와요.

 

솔로몬의 죄가 뭐냐 하면, 외국 신부들을 많이 끌어들여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흐트러지게 한 죄다. 하는 것이죠. 그런데 후대에 그런 결과를 낳았을지 몰라도

솔로몬의 이 기도를 보면은 외국신, 특히 강한 하늘신이 도저히 오르지 못하도록 굉장히

애쓴 흔적들을 우리가 볼 수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그 자신의 신앙은 야훼 신앙에서

일탈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솔로몬에 대한 것과 달리 하늘은 구약성경

에서 장소로서만 나옵니다.

 

* 솔로몬의 기도(1열왕 8,22-53)에서 하늘은 그저 장소로 나타날  뿐이다

 

  

 

 

이따금 하늘은 구름하고 병행하기도 해요. 하느님은 하늘을 타신다. 이런 표현이 있거

든요.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표현이죠? 그런데 구름을 타신다 하는 표현도 있어요.

자주 나와요. 시편에도 자주 나오고, 예레미아서에도 나오고, 욥기에도 나오는데 자세한

것은 책을 보세요.

 

이를테면 하느님 호칭이 나오는데 '구름을 타시는 분'이라는 호칭이 있어요. 그런데

구름을 타시는 분 옆에는 '하늘을 타시는 분'이라고 바로 밑이나 바로 위에 나오기도

해요. 비슷한 표현이죠. 신명기에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 그분께서는 너를 도우시러 하늘을 타고 오시며 당신의 권능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

신명 33,26

* 하늘을, 태초의 하늘을 타고 달리시는 분께  시편 68,34

* 주님께서는 빠른 구름을 타시고 이집트로 가신다. 이사 19,1

 

마치 하늘이 하느님이 계시는 의자, 옥좌 아니면 뭐 하느님이 타시는 무슨 자가용처럼

하늘은 물건이나 장소인 것이죠. 자, 이러한 표현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하나 더 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하늘을 타신다'라고 할 때 그 하늘은 이렇게 탈신화된 신화적인

얘기가, 탈신화는 조금 있다가 볼꺼예요. 그런 신화적인 얘기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느님이 '구름을 타신다' 그럴 때 마치 하느님이 손오공처럼 구름타고

다니시는 그런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그게 다 하늘을 얘기 할려고 했던

거라는 걸 아시면 되겠습니다.

 

이밖에도 구약성경에는 하늘에 혹시 인격이 있다고, '하늘이 듣는다. 하늘이 말을 한다.

하늘이 나를 위해서 신경을 써 준다.' 이런 표현이 혹시라도 있을까봐 그런 표현을 다른

말로 돌려서 하는 표현들을 우리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늘이 신이 될까 봐

걱정하는 거 같애요. 그런 표현을 조금이라도 줄까 봐.

 

* 구약성경에는 하늘에 인격이 있다고 오해할 만한 표현을 최대한 피하여 애쓴 노력을

  찾을 수 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 중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 알죠? 아브라함이 나이

100 살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지요? 그분은 우르에서 나올 때 이미 나이 70살이었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애 보시려고 굉장히 늙으막에 난 귀한"아들을 바쳐라."

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뜻밖에도 순종을 했죠.

 

그래서 그는 외아들 이사악마저 하느님한테 바치리라. 그래서 이제 그 믿음이 드러나는

그 이야기의 클라이막스, 이사악을 바치려는 순간 어떻게 했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럴 때 바로 그 순간에도 '하늘이 말을 했다.' 이런 표현을 안 써요. 하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런 표현도 안 써요. 대신에 창세기의 저자는 두 번이나 '하늘에서 주님의

천사가 말했다.' 반드시 이렇게 써요. 제가 창세기 22장에 몇 구절을 읽어 드릴께요.

 

*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클라이막스 그 순간이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조금 더

  내려 가면,

 

*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까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창세 22,10ㅡ 11,15

 

*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지금 하늘에서 천사가 말했다는 것이죠. 이처럼 구약성경의

  저자는 하늘이 인격화 되는 표현을 삼가합니다.

 

고대근동의 종교심을 고려할 때 인격화된 하늘, 하늘이 말을 했다. 하늘이 들어 줬다.

하늘이 우리한테 뭘 해 줬다라고 말을 하면 곧 하늘이 신격화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신이 되어버리니까 아예 인격화 되는 단계부터 막아버리는 거 같애요.

 

그리고 하늘이 말씀하셨다 대신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로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같은 이유로 "하늘이 심판한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당신께서  하늘

로부터 심판하신다."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시편 76,9

 

* 이렇게 하늘을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죠.

  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으로 하늘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창조하신 분,

하느님이 하늘을 열고 닫으신다. 하느님이 하늘을 어떻게 하신다는 표현은 구약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렇게 굉장히 하늘이 어떤 피조물이나 장소와 이런 것으로 많이

나오는데 거의 한번도 "하늘이 뭘 하였다" 한번도 안 나오는 거 보면 분명히 어떻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신경을 거기에 쓴 거 같애요. 우리가 그렇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죠.

 

유배 이전 본문에서 이렇게 하늘이 철저히 공간으로만 쓰인 것은 당시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변국과 활발

히 교류했어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에 위협을 가하고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하늘신이 최고신이라는 흔적조차 구약성경에서는 발견하기 힘듭니다.

 

* 이스라엘은 주변국과 종교적으로 활발히 교류했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지속적

  으로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쳤지만 하늘신이 최고신이라는 흔적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대 이스라엘이 속한 북서셈족의 종교적인 토착종교의 영향이죠. 북서셈어는

사용하는 그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늘이 최고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장소로

말하기가 비교적 쉬웠을 거 같습니다.

 

* 이스라엘이 종교적 영향을 덜 받은 이유

1. 이스라엘이 속한 북서셈족 토착종교의 영향

   북서셈어를 사용하는 레반트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하늘신이 최고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에 시간에 잠깐 얘기했듯이 그래도 신으로는 나오거든요. 전 시간에 말했듯이

제물을 받는 대상으로 나오고, 맹세의 대상으로도 나오고. 그런데 그런 것들도 안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두 번째 이유 곧 구약성경을 썼던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의식

적으로 어떤 일을 했다. 탈신화화 했다는 것이죠.

 

* 이스라엘이 종교적 영향을 덜 받은 이유

2. 구약성경 저자들이 '의식적인 탈신화화'를 수행했다

 

하늘신만을 놓고 보자면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야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이 동쪽 거대 제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려고 매우 노력을 한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백성 안에 그 종교 영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이런 의도적으로 이 방패 역활을 한, 우리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지키려고 한

그들은 누구였을까를 우리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두 집단을 얘기할

건데요. 첫 번째로 이번 시간에 말씀 드릴 거는 신명기계 신학자들입니다.

 

* 탈신화화 신학을 이끈 사람들은 신명기계 신학자들이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신명기라는 문헌을 적었고 신명기계 신학자들의 손으로 쓰여진

구약성서는 판관기, 여호수아기, 열왕기 1.2권, 사무엘기 1.2권  같은 역사서가 있고요.

그리고 대표적인 신명기계 신학자 예언자는 예레미아,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등등이

있습니다.

 

* 신명기계 학자들에 의해 쓰여진 구약성경에는 신명기, 판관기, 여호수아기, 열왕기

  1.2권, 사무엘기 1.2권 등 역사서가 있다. 신명기계 예언자로는 예레미아,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등이 있다

 

굉장히 구약성경에서 큰 세력을 갖고 있는 어쩌면 구약성경의 허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신학자 집단인데 그분들의 신명기계 신학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고 우리가 물어

본다면, 신명 5,7이나 신명 6,5의 예를 많이 듭니다. 신명 5,7은 뭐냐하면 여러분들 잘

아시는 거죠.

 

*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신명 5,7

이 구절이죠. 그리고 6,4은 첫 번 시간에 읽어드린 거죠.

*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 6,5

 

이게 신명기 신학의 핵심인데 그런 신학을,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의식적으로 차단한 거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강의의 두 번째 주제, 도대체 이분들이 했던 작업, 탈신화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게 아마 이 강의에서 진행적으로 가장 어려운 강의가 될 거예요. 전문용어 하나를

여러분들한테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전문용어로 간단하게 하면 어렵지만 길게 제가

아주 샅샅이, 천천히 얘기할려고 준비를 많이 해 왔으니까 여러분 어렵지 않을 거

같아요. 잘 한번 따라와 보세요.

 

자, 개념 하나를 여러분들 설명하고 오늘의 강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바로 탈신화화,

독일말로 Entmythologisierung 이라고 하는 건데요. 유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불트만

(Bulemann)이라는 신학자가 1920년대에 제시한 개념인데 제시하자마자 아주 학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지금은 이제 아주 기본적인 개념이 되어서 신학교나 아니면 평신도

들한테 한번 꼭 알아두어야 할 개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불트만은 처음에 어디서부터 시작했냐 하면 신약성경 시대의 세계관은 신화적이라는

거부터 시작했어요.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몇 가지 개념을 알려 드릴 건 이 탈신화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다 그전에 사전 개념을 말씀드려 놨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밑밥을 다 깔아 놨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쉽게 설명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납니다. 그래서 일종의

이해의 틀을 위해서 해석학적인 여과 필터가 우리가 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이해할려면 이런 신화적인 언어를 벗겨내서 그  신화의 언어에 들어있는 속 알맹이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된다.

 

그래서 탈신화는 탈박한다. 껍데기를 벗겨낸다. 이런 뜻이죠. 탈신화는.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고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 고 속뜻을 우리가 잘 이해하면은

된다. 대신에 신화의 언어에 우리가 빠져버리면 미신 같은 걸 믿게 되고 잘못 신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 탈신화화(脫神話化): 불트만은 신약시대의 세계관은 신화적이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큰 차이가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즉 현대인

  이 오해없이 이해하려면 신화의 언어를 (탈신화화 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와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탈신화화는 고대에 발생한 의미를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어떤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개념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어서 의미를 해석하고 우리가

과거의 의미를 그 의미, 고 원래의 의미를 고대로 잘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그런 교량,

다리 같은 역활이나 필터 같은 역활을 해 주는 겁니다.

 

* '탈신화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의미를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필터 또는 교량을

   제공한다

 

자, 우리가 성경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까 예로 들어가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얘기해 봅시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불트만 시대의 학자들은 무엇으로 표현해 냈느냐

하면, 이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신화적 표현을 쓰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가 신화적 표현을 다 이해했으니까 그 신화적 표현이 쓰인 속뜻만을 말하자.

그래서 어떻게 얘기했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무궁이다, 초월이다, 궁극의 거룩함

이다. 이런 식의 표현으로, 철학적으로 바꿨어요.

 

그렇게 바꿔 써가지고 표현을 하다보니까 더 쉬울 때가 있어요. 정말로. 그리고 더 잘

통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난해한 용어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더 드러내는 쉽고

직관적이고 그리고 깊은 의미를 고스란히 다 잘 가지지 못하는데요. 더 큰 문제는 이런

철학적인 언어는 성경이 발생했었던 그 성경의 언어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해요.

사람들의 종교심을.

 

*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대신한 철학적 단어들은 사람들의 종교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 그러면 머리 속에서 많은 상상이 피어오르고, 기도할 때

많은 도움을 받게 되죠. 그런 상상이. 그런데 궁극, 무궁 이렇게 철학적인 단어를 쓰면

왠지 잘 그런 문학적인 상상, 그런 종교적인 상상이 머리 속에 잘 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삭막한 용어로 하느님의 꿈을 꾸지 못해요.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꿈을

꾸면서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궁극의 우리의 꿈은 하느님이신데 이상하게 신화의 언어로

얘기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은 그 꿈이 잘 꿔져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잘 다가오시는 거 같은데 철학의 언어는 삭막해서 그게 잘 안 되죠.

 

그래서 불트만 식으로 탈신화화를 많이 한 책을 읽으면, 도대체 예수님의 얘기는 굉장히

쉽고,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비유나 그분의 설교를 이렇게 성경에서 읽으면은

아, 참 쉬워가지고 하느님의 꿈이 잘 꿔지고 우리 마음이 막 울리는데,  그 꿈을 탈신화

하는 학자들이 철학적으로 풀어낸 것을 보면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부리'라는 학자가 약간 탈신화를 비꼰 것이죠. 꼬집은 것인데 탈신화화는 탈복

화다 도대체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탈신화화는 탈선포화다. 예수님이 말

씀하셨던 그대로의 언어 그대로 쓰면 우린 더 쉬운데 괜히 정확하게 한다고 해서 더 어렵

게 만들어 놓은 거 아니냐? 하는 표현을 하는 거죠.

 

* '탈신화화'는 '탈복음화'와 '탈선포화'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불트만이 이런 얘기를 했을 때 그 영향력은 굉장히 커서 사실은 우리 신학뿐이 아니라

종교학, 해석학, 철학, 신화학, 고전 언어학 등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어요. 그래서 그쪽

공부하시는 분들도 이건 많이 배워요. 그래서 인문학 전체에 자극을 준 것이지요.

 

불트만은 사실은 개신교 신학자였어요. 목사님이셨거든요. 그런데 그분의 성과는 교파를

초월해 가지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가톨릭 신학자들이 좋아하게 됐어요.

어쩌면 이 탈신화화는 고대 옛날의 의미도 살리고, 그 표현도 살리고, 그리고 현대의 우리

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살리는 굉장히 훌륭한 해석학적 틀이죠.

 

* '탈신화화'는 고대의 표현을 살리고 현대인들의 이해를 돕는 휼륭한 '해석학적 틀'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버리면 탈신화화 하는 거가 근본적인, 성경을 그냥 문자 그대로만 믿자

하는 학자들은 그거를 해석해서 어떤 뜻을 알려야 된다. 그 들어 있는 다른 뜻을 한다. 

이런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거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개신교 진영에서는 불트만을 

이성주의자라고 공격 했고, 요즘은 가톨릭에서 더 좋아해요.  가톨릭 신학자들이 더

좋아하는 그런 학자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경의 원어가 지닌 그것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거 하나 하고 두 번째로 성경을 너무 과학의 언어로 읽어서도 안 된다.

 

* 성경의 언어가 가지는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되고 성경을 과학의 언어로만 읽어서도

  안 된다

 

창세기 1장 얘기는 제가 다시 한번 얘기 하겠지만, 제가 독일에서, 독일은 이성의 나라

잖아요. 철학의 나라고 신학의 나라인데 제가 독일 유학 중에 궁금해 가지고 도대체

얘네들은 주일 학교에서 창세기 1장을 어떻게 가르치나? 그때가 한창 한국에서 창조

신학회니 뭐 창세기 1장을 막 이렇게 얘기할  때였거든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이제 제 친구들 중에는 종교 교사, 그러니까 성당이나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려고 신학을 공부할려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이 쓰는 교재,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재를 볼 수 있었는데 창세기 1장을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아름다운 노래로

가르치더라고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우리가 노래로 찬미하는  노래다. 그분이 하신 일 하나하나,

그분의 업적을 우리가 찬미하는 노래다. 찬미하는 노래라고 그래서 비과학이라는

얘기가 아니예요. 오히려 그 노래는 신화의 언어로서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언어의

가장 높은 형태로 하느님의 언어를 찬미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게 보면은 창세기 1장은 운률이 딱딱 맞아요. ... 하시고, 첫째날이 되었다.

또 ... 하시고 둘째날이 되었다. 이렇게 운률이 딱딱 맞는. 어쩌면 그렇게 인간의 모든

종교심을 성찰해 다 담아서 내 놓는 걸작인 노래가 아닌가 해요.

 

구약성경 시대하고 현대는 매우 다릅니다. 사회, 법률, 종교, 문화, 음식, 복식, 주택,

상식, 생활방식 거의 모든 면에서 같은 게 없어요. 과학과 기술 문명, 물질 문명, 대량

생산, 대량 소비 같은 거는 2천 년 전, 3천 년 전, 4천 년 전에는 아예 없었습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젖어 살았어요. 그들이 일상 생활에서 신화의

언어에 익숙했음을 말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도 그런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 성경은 신화적 세계관과 신화의 언어에 익숙한 옛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여졌다

 

그런데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눈으로 그거를 보면은 매우 낯설어서

우리는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신화에 담겨진 속뜻을 잘 새겨서

이해해야 됩니다.

 

*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 고대의 신화적 언어는 무척 낯설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눈으로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다시 한번 예를 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 하는데요.

여기서 하늘이 우주선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그런 지나갈 수 있는 공간,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면 우리는 대기권을 막 찾고 헤메고 다니면 하느님을 볼 수 있을까? 아니죠.

상층권 어디쯤에서 조우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우주의 저 멀리 어떤 행성에서 하느님이 거기에서 성인들과 함께 딱 집 차려

놓고 살고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는 절대로 틀린 얘기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성경과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빠져든다면 하느님을 만나가 위해서 우주선

이 필요하다. 비행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티칸이 아니라 나사 본부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거는 완전히 오해 한데서 벌어진

현상이죠.

 

불트만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지금 성경을 오해하고 있다. 하느님을 만나러 나사를

간다거나 우주복을 찾고 있는 거다. 원래 그런 식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다. 어찌보면

창조학회가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닌 것이죠. 물론

하느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교회로 가야 되고 성경으로 가야 됩니다. 아주 자명한

사실이죠.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 하는 뜻은,

 

*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인간이 사는 속된 지상 세계에 속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곧 지상의 속된 것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속된 것과는

  다른 완전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거룩한 분이시다.

 

  지상에 사는 우리 인간과 달리 한없이 선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어쩌면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아주 숭고한 것이다라는 그런 함축적인 표현이죠.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불트만은 신약시대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어요.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인 세계관과 크게 차이나기 때문에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한테 그때의 신화적인 계게관으로 그거는 이런 뜻이었다라는

걸 가르쳐야 되는 거예요. 그걸 가르치지 않고 그냥 떡하니 성경책 주고 그냥 국어책

읽듯이 과학책 읽듯이, 사회책 읽듯이 성경을 읽어서는 오해하는 거죠.

 

쓸데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화의 언어를 벗겨내서, 탈박해서, 탈신화해서 그 속 알맹이, 원래 하느님이

우리들한테 주실려고 하는 그 뜻 그것을 우리가 합리와 과학에 익숙한 우리 현대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면은 그럼 우리가 그 뜻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죠.

 

* 현대인이 오해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신화의 언어를 벗겨내서 '탈신화화'해서

  하느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 뜻, 그 알맹이를 합리와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그래서 신화의 껍질을 탈박하고 해석해야 된다.

 

그래서 아, 학자들이 아주 굉장히 좋은 개념이다. 우리가 그거를 해야 된다.

이렇게 해서 많이 히트를 쳤습니다. 쉽게 말해서. 제가 조금 한 마디만 어려운 말을

쓰겠습니다. 현대 신학을 위한 굉장히 훌륭한 방법론이라서 고대 문서인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적절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거를 '의미의 현재화'라고 합니다. 과거의 의미를 우리가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 과거의 의미 따로 놀고, 현대의 의미 따로 놀게 됩니다.

 

* 탈신화화라는 개념의 가장 큰 장점은 고대에 발생한 의미를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마치 이거는 춘향전을 연구하는 것과 비슷한데요. 이제 우리는 성경이 책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책의 원래 속뜻을 볼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춘향전을 알려면

한국말을 알아야 되죠. 그리고 조선조 말의 한국의 문화를 알아야 되죠. 그래야지 뭐

기생집이 뭐고, 상을 잘 차린 게 뭐고, 남원에서 이렇게 그네를 타는 것은 무엇이고,

뭐 종은, 향단이는 무엇이고, 암행어사는무엇이고 이런 것을 다 알아야 알 수 있는

거죠.

 

만약에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을 해서 아니면 춘향전을 에티오피아 말로 번역을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번역된 춘향전만 보고 야, 이거 뭐 어디 술집에 갔다고 하더니 어디

뭐 팝에 갔나보다, 재즈 바에 간건가 보다. 뭐 이런 생각 할 수 있죠. 완전히 오해하는

거죠.

 

그 당시의 문화를 갖고 탈신화 해서 그 문화적인 것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영어로 번역된 춘향전만 읽고, "나 춘향전 다 알았어." 하면은 한국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많이 아쉽죠. 그렇게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신약성서 안에서 널리 쓰이는 이 이론은 고대 이스라엘의 믿음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이라는 독특한 믿음을 보존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주변 강대국의 문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이 탈신화화라는 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어쩌면 했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교류를 하면서 그 당시에 다른 나라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다른 나라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그 아누 종교 아니면 수메르 종교의 외피를 벗겨내어서 야훼

신앙 안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죠. 그래서 이거를 구약성경에 한번 적용시켜 여러분들께

설명을 드려보는 겁니다.

 

그들은 고대 근동의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냥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서 판단하고, 선별하고, 섭취해 가지고 또 나름대로 소화해 가지고 자기의

종교를 단단하게 만드는데 다 사용한 것이죠.

 

*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저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 판단하고 선별해서 섭취, 소화하여 고유한 믿음

  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가 좀 하늘신을 본 거는 고대 근동의 종교적 색채를 뺄려고,

탈색할려고 노력했지만 또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경우의 수는 제가 계속해서

여러분들한테 보여드릴 거예요.

 

하늘은, 오늘 본 예는 그렇습니다. 거룩하고 신적인 최고신의 상징물이지만 하늘이

하느님처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고대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해서 야훼 신앙 안으로 소화

했던 것을 볼 건데요.

 

 

이렇게 고대 근동 종교의 세계관을 벗겨내서 이해하는 것을 탈신화, 신화를 벗겨낸다

하고 다시 야훼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전문적인 학자들이 뭐라고 부르냐 하면은

재신화라로 합니다. 다시 자기의 야훼 신화, 신앙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죠.

 

*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표상을 탈신화화해서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는데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신화는 나쁜 의미가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적에 자기 식으로

껍질을 분해하고 이해해서 소화한 다음에 자기 식으로 다시 재신화화 하는 것이죠. 그러

니까 이 탈신화와 재신화를 우리가 잘 보면 고대 이스라엘 문서에 다른 종교, 다른 고대

근동의 표현들이 똑같이 있다고 그래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이 똑같은 표현이 있는 거지만 다른 의미로 보는 게 신앙인들이 알아야 될 것이죠.

이런 탈신화하고 재신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본문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 탈신화화와 재신화와가 가장 잘 드러나는 본문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이다

 

전 시간에 큰 신 50 중에서 일곱 신은 더 크고, 그 중에 네 신은 더 크다고 그랬죠?

이 일곱 신과 네 신이 모두 창세기 1장에서 단 나흘만에 하느님이 말씀으로 만드세요.

그러니 하느님은 그 신들보다 훨씬 더 큰 분이다. 이런 거를 굳이 막 뭐 이렇게 뭐

토론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멋있는 이야기 하나를 만들므로써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구약성경 맨 앞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오해

할 여지가 없어진 것이죠. 그런 면에서 창세기 1장은 신학적으로 매우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큰 나라의 큰 신들은 피조물이 되어 버렸어요. 구약성경에서.

 

그 권의는 추락해 버렸어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하늘신도, 달신도,

태양신도 아주 훌륭한 신들을 단 나흘만에 만들어 버렸어요.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이것들은 오직 피조물일 뿐이예요.

 

*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단 나흘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

  (하늘신, 달신, 태양신)을 한낱 피조물로 만드셨다

 

다시 한번 고대 근동의 정치적, 종교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약소국 이스라엘의 처지를

고려한다면 과연 조그만 나라의 신학자들이 감히 이런 식의 신앙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놀라게 됩니다.

 

어쩌면 신앙은 그렇게 담대함, 용기를 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놀라게 되는

건 그 작은 나라 신학자들 안에, 그 마음은 어떻게 심어주셨을까? 왜냐하면 다른 이스

라엘 주변의 나라들에서는 이런 문헌이 안 나오거든요. 참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대단한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은 우리가 탈신화와 재신화와, 창세기 1장을 보았다면 하나만 더 생각해

봅시다. 신학적으로 성경의 본질은 어떻게 되는가? 성경 언어의 본질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탈신화화 한다는 데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단 하나가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마치 바나나처럼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화적인 표지를

벗겨버리고 바나나 껍질 버리듯이 고 안에 우리가 속살만 먹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

하시면 안 되요. 이게 처음에 불트만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많이 했던 얘기입니다.

 

불트만은 원래는 신화적인, 우리가 그 껍질을 해석을 해서 그 속뜻을 알게 하는 거였지

우리가 속뜻만 알고 껍질을 버리자는 얘기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많은 후대 학자들이

"우리가 알맹이만 알면 돼. 껍질은 다 버려." 그래서 어떻게 하는 흐름이 생겼냐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초월자이시고, 거룩하신 분이니까 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거기다가 무궁하신 분, 초월자, 영원자. 이렇게 한번

바꾸어 보면은 훨씬 뜻이 잘 통해요. 그래서 인제 '하늘' 같은 신화적인 말을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성경에 있는 모든 말들을 다 그렇게 바꾸어 놓으면 성경이 갑자기 어려워

져요. 철학책이 돼 버려요. 어려운 개념이 막 난무해요.

 

그러니까 아, 이거 탈신화화 한다고 하더니 그 학자들의 책을 읽으면 어렵다.

우리한데 의미를 전달해 준다고 한다는 일이었는데 오히려 의미를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그 신화적인 표현들은 쉬워요. 예수님의 비유도 쉽고.

 

아, 그래서 그 껍질을 버리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그 껍질의 언어도 하느님이

주의 깊게 고르신 언어구나. 그래서 5천 년  이렇게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걸 보면은

쉽게 이해할 수 있구나. 오히려 탈신화화 한다는 학자들의 글은 어려워 가지고 저도

읽기 어려운데. 지금 한 몇십 년 안 지났지만.

 

그런데 성경의 언어는 쉽거든요. 그래서 아, 성경 언어의 본질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어요. 그래서 신학적으로 성경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은, 성경은

바나나처럼 껍질을 버리고 과육만 얻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양파 같은 거예요. 껍질하고 과육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어디까지

껍질이라서 다 버리고, 어디까지 과육만 먹자. 이런 게 아리라 그냥 다 한 덩어리예요.

그래서 그 자체를 다 섭취해야 되는 거예요. 오히려. 버릴 게 없어요.

 

신화적 언어는 외피나  껍데기일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그 신화적 언어가 주는 적절한

비유, 직관적인 통찰, 그 쉬움 그것이 우리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뭐 초월자이시고, 뭐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읽는 게 가장 쉬워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역사적인 고뇌, 삶의 알찬 성찰 같은 게 있는데 그것이 그 언어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그 신화의 언어는 성경의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적절하고도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저는 그런 비유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수입 바나나가 아니라 유기농 사과 같은 거예요. 수입 바나나는 농약을 많이

쳐가지고 알맹이만 먹고 껍데기는 드시면 안 되죠. 하지만 유기농 사과는 껍질채 다

먹으면 그 속살도 맛있고 껍질도 그 의미가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한테 제가 좀 쉽게 의역을 해 드린 것이죠. 이제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

하지만, 이제 성경을 불트만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학자들은 요즘 그래서 불트만이

처음에 탈신화를 얘기하고 초창기 학자들은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 외피를 벗겨내서 자꾸자꾸 철학적 용어로 만들면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인제 아, 불트만의 뜻이 원래는 그게 아니었고 우리가 성경 언어는 그렇게 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신화적 표현은 미신의 언어도 아니다. 벗겨내서 페기 처분할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 신화적 표현은 미신의 언어도 아니고, 페기 처분할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신화적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어찌 보면, 완전히 벗겨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성경이 아니 게 돼 버릴 수가 있어요. 신화적 표현과 함께

성경의 의미가 따로따로 존해하는 게 아니라, 최초의 구원 사업이 발생하던 그때 나온

언어기 때문에 그 언어가 왜 그런 표현으로 나왔는지도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 신화적 표현과 성경의 의미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최초의 구원 사업이 발생하던

  그 시기부터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때는 성경의 언어를 쉽게 철학적으로 얘기해서 설명할려고 했지만, 이제는

저 같은 방법론을 써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의 신화적 언어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려 드리고, 여러분들이 그 신화를 이해한다면 그 신화적 언어가 우리 성경 구절 여기

서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그래서 우리 하느님 신앙을 믿던 그 옛날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계승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듣는 분들도, 말하는 저희도 성경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 그렇다면 오늘의 결론은 짧습니다. 단 두 개입니다. 첫째, 수메르 시대부터

하늘신은 최고신이었지만 유배 이전 성경 본문에 하늘은 신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굉장히

치밀하고, 굉장히 신중하고 오랜 노력을 들여서 그리고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굉장히

큰 용기를 가지고 그런 일들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성경은 수입 바나나가 아니라 유기농 사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껍질을

버리고 알맹이만 드시지 마시고 껍질채 다 드시면 그게 우리 영육간에 큰 도움이 되는

문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 예고: 제5강 하늘의 신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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