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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는 정의 위한 싸움에서 비켜날 수 없어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21 조회수419 추천수4 반대(4)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교회는 정의 위한 싸움에서 비켜날 수 없어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176-185항 번역문

교황 프란치스코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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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0 16: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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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복음화의 사회차원

 

176. 복음화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부함, 복잡함, 역동성을 갖는 복음화의 실체를 포기하려는 모든 시도, 곧 복음화를 부분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정의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복음화를 메마르게 하고 왜곡하기까지 할 뿐입니다.” 저는 이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저의 관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사회적 차원이 적절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면, 복음화 사명이 갖는 참된 통합적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I. 공동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사회의 반향을 일으키는 케리그마

177. 케리그마는 분명한 사회적 내용을 갖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다른 이들과 결합된 생활과 공동체 생활이 있습니다. 첫 선포의 내용은 분명히 사랑에 중심을 둔 도덕적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사회에 대한 헌신

178. 무한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한 분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존엄성을 주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이 하느님의 바로 그 사랑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각 사람을 고결하게 한 무한한 사랑에 대한 의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들까지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인간 환경과 모든 사회적 유대를 꿰뚫으려 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심의 무한한 창조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심은 인간사의 매듭이 아무리 복잡하게 엉켰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압니다.”

복음화는 성령께서 하시는 이 해방의 활동에 협력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비 자체인 삼위일체는 우리가 거룩한 친교의 이미지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순전히 우리만의 노력으로 완성과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서 복음화와 인간적 진보 사이의 깊은 연계를 봅니다. 인간적 진보는 반드시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그 표현방식을 찾고 전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이신 바로 그 사랑으로 다시 그분을 사랑하라고 초대한 첫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행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응답을 가져옵니다. 그 응답이란 이웃의 선익을 열망하고, 찾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179.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과 참된 형제적 사랑 사이에는 이렇게 분리할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이 유대는 여러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데, 그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모든 본문을 잘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공동체에 실제적인 결과를 낸다는 것을 확실하게 찾아내지도 않은 채, 그냥 당연하다고 간주하거나, 거의 기계적으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해롭습니까! 왜냐하면 그 때문에 우리는 놀라움, 흥분, 형제애와 정의의 복음을 살려는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형제와 누이가 우리 각자를 위한 육화의 연장임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는 초월적 차원을 갖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오 7,2)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에 상응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죄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구절이 분명히 밝힌 것은 모든 도덕률의 기본이 되는 위대한 두 계명 가운데 하나로서, 또 완전히 거저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부응하는 영적 성장을 식별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표지로서,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서 우리 형제와 누이를 향해 가는 것”을 절대적 우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랑의 봉사는 교회 사명의 구성요소이며, 교회가 교회임을 드러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성으로 선교의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이해하고 지원하고 촉진하는 동정과 효과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도전

180. 성경을 읽어보면 복음이 단순히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은 단순히 궁핍한 개인들에게 우리의 작은 인간적 몸짓으로 나누어 주는 행동으로, 일종의 “메뉴에 따른 사랑”으로, 혹은 오직 우리의 양심을 편하게 하려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루카 4,43 참조) 복음은 이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서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이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존엄을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생활은 모두 사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오 6,33)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시작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오 10,7)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81.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으며 자라고 있는 그 나라는 우리 존재를 모든 차원에서 끌어들이고, 바오로 6세가 참된 발전에 적용한 식별의 원리를 환기시킵니다. 참된 발전은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만일 복음화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과의 상호활동, 즉 복음과 개인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 사이에 지속하는 상호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내재된 보편성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며, 그분의 구원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데 모은 것”(에페소 1,10)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로마 8,19)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은 보편 목적을 갖습니다. 사랑의 그 명령은 실존의 모든 차원, 모든 개인, 모든 공동체 생활 영역, 그리고 모든 백성을 포함합니다. 인간적인 것 어느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왕국을 찾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항상 역사를 일으킵니다.

사회가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82. 불확정적인 상황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워지고 발전해야 하며, 또한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주요 사회원리들이 그저 아무에게도 도전하지 않는 일반적 원칙들로 남지 않으려면, 반드시 - 자세하게 다루지 않더라도 - 구체적이 되어야 합니다. “복잡한 현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실질적 결론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백성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복음화 과업은 각 인간 존재의 통합적 발전을 포함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적 영역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종교는 오직 천국을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영원성에서 그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누리게 하기 위해”(1티모테오 6,17), ‘모든 사람’이 누리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적 전환은 “사회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 생활의 그 모든 영역과 측면을 특별히 검토할 것을 당연히 요구합니다.

183. 따라서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고, 시민제도의 건전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의견을 밝힐 권리가 없는 것으로서, 개인 생활의 내적 지성소에 귀속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캘커타의 복자 데레사의 메시지를 교회와 침묵 속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 절대로 편안하거나 순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데 - 항상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가치를 전하려는 열망을, 우리가 발견한 그 어떤 좋은 것을 이 세상에 남기려는 열망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 장엄한 행성을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행성에 우리를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비극과 투쟁, 희망과 열망, 강함과 나약함을 모두 지니고 이곳에 머무는 인류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의 공동 가정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이며 누이입니다. 만일 정말 “정치의 주요 책임이 사회와 국가의 공정한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서 비켜나 있을 수도 비켜나서도 안 됩니다” 사목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핵심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제안을 하고, 변화를 꾀하며, 그런 의미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에서 태어난 희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교리의 성찰 단계든 실천 단계든 사회 분야에서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의 헌신”을 결합시킵니다.

184. 지금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근심스러운 많은 사회 문제들을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일부를 제2장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교황 권고’는 사회문헌이 아닙니다. 다른 여러 주제에 관한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간추린 사회교리>(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라는 가장 적절한 도구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 <간추린 사회교리>의 활용과 연구를 추천합니다.

더 나아가, 교황이나 교회도 사회 현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혹은 현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데 독점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저는 바오로 6세의 통찰력이 있는 관찰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다양한 상황 앞에서, 통일된 메시지를 밝히고, 보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큰 뜻도 아니며 우리의 사명도 아닙니다. 각 지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185. 저는 이 시대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가장 큰 두 문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두 주제가 인류의 미래를 형성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보다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첫째 주제는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키는 문제이며, 둘째 주제는 평화와 사회적 대화의 문제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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