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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5강 하늘의 신격화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25 조회수977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평화신문/[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5)하늘의 신격화

유배 후 다른 종교 새 호칭의 수용



  고대 근동 사람들은 현대의 합리주의와 과학, 대량 소비주의 의식이 아닌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살았다. 구약성경은 그런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탄생한 책이다. 고대 인류는 하늘을 최초, 최고의 신으로 여겼지만 구약성경은 하늘을 신으로 여기기보다 일종의 장소로만 여겼다. 이는 최고신인 하느님이 다른 이들에게 잘못 이해되지 않을까 하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우려와 더불어 애초부터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이스라엘의 귀환
 고대 근동 패권은 신아시리아부터 신바빌론 제국과 페르시아를 거쳐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제국으로 옮아갔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국으로 끌고 갔다. 이때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시키는 등 잔인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기원전 538년 새로운 시대를 연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총칼이 아닌 문화로 다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관용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유배 이후 이 시기는 구약성경의 전체적 모습이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완성되는 때이다.

 이때 고대 근동의 공용어가 바뀐다. 신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의 언어는 아카드어였다. 그런데 이미 신바빌론 제국 말기부터 고대 근동 사회에는 아람어가 실질적 표준어로 쓰였다. 페르시아 제국은 자신의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강제하지 않고 널리 쓰이는 아람어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때부터 국제공용어(lingua franca)는 아람어가 됐다. 교역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인에게도 아람어는 일상 언어가 됐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새 호칭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면서 구약성경 본문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다.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유배 이후 역사를 전하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기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늘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뜻을 이루게 해주실 것이오(느헤 2,20),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학자인 에즈라 사제(에즈 7,12) 등이 그것이다. 하늘을 하느님이 사시는 곳이라고만 여겼던 고대 이스라엘인은 이때까지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만 써왔다. 그런데 '하늘의 하느님'이라니?

 이런 표현은 함부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의 호칭, 곧 우리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신의 호칭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정 시대에 왜 하느님을 이런 호칭으로 갑자기 바꿔 부른 것일까? 하늘관이 급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 유배 이후 이어진 종교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 이때 이스라엘은 혼란스럽지만, 역동적 시대를 맞이했다. 이때 유다인들은 자연스럽게 페르시아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후 히브리어는 종교적 언어로 축소되고, 아람어는 이스라엘 일상어로 사용되는 이중 언어생활이 확산했다. 아람어가 유다인 일상에 깊이 침투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구약성경 일부는 아예 처음부터 아람어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일상 언어의 급변은 문화적 변화를 동반했다.

 #페르시아 종교의 확산
 이 시기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는 주변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교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는 다양한 호칭을 지녔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 호칭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늘의 하느님'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 호칭을 과감히 수용해 야훼 하느님에 적용했다. 따라서 유배 이후 본문에 '하늘의 하느님'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새 호칭을 수용했지만, 그 의미는 매우 다르게 사용됐다.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신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야훼 하느님뿐이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호칭의 수용은 '신학적 반론'의 성격을 띤다.

 이는 대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산하는 데 대한 적극적 대응이었다. 아마 이 호칭을 주도한 세력은 유배 이후 활약했던 사제들로 보인다. 새로운 호칭은 고대 근동 패권을 새롭게 거머쥔 막강한 문화 제국인 페르시아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다. 또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주변 종교의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려고만 하지 않고, 때로는 적절히 흡수해 야훼 신앙을 더욱 두텁고 튼튼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올곧은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명기에 잘 드러나는 이런 믿음의 태도야말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다. 그들은 이런 태도로 다른 종교에 대해 적절히 대응했던 것이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강의에 들어가며

 

제5강 하늘의 신격화



 

1.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이스라엘의 귀환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함락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역동적인 시대였고, 나름대로 이스라엘이 자신감을 회복하는 시대로서 당시 시대상은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에 잘 쓰여 있다. 또 이 시기 이후에 토빗서, 다니엘서, 유딧서 등이 구약성경에 들어와 구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시기로 결과적으로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모습이 지금과 퍽 비슷한 형태로 완성되는 시대로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2. 아람어

이 시기에 고대 근동의 언어가 바뀌었다. 신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의 언어는 아카드어였다. 그러나 이미 신바빌론 제국의 말기에 고대 근동 사회에 아람어가 실질적인 표준어로서 널리 퍼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자신의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강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널리 쓰는 아람어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에 따라 이 당시 부터 국제공용어(lingua franca)가 아람어가 되었다. 교역으로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에도 아람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게다가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어휘의 60-70%가 같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려운 언어가 아니었다.

3.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새 호칭

바빌론 유배가 끝난 다음,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서 구약성경 본문에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유배 이후의 역사를  전하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기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늘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뜻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오. (느헤 2, 20)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 학자인 에즈라 사제. (에즈 6, 10; 7, 12.21)

고대 이스라엘인은 하늘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시는 곳일 뿐이라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꼬박꼬박 표현했다. 특히 솔로몬의 기도는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하늘의 하느님'이라니? 왜 이런 호칭이 등장했을까?

이런 표현은 함부로 등장한 것이 아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신의 호칭, 곧 우리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는 중요하다. 신의 호칭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호칭 가운데 그리스도, 구원자 등은 그 분이 우리 죄를 구원하시는 분,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핵심 교리를 잘 드러낸다. 그렇다면 특정 시대에 왜 하느님을 이런 호칭으로 갑자기 부르기 시작했을까?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늘관이 급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어떤 계기로 하느님의 이런 호칭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4. 유배 이후의 문화적·종교적 변화와 대응

그것은 아마도 유배 이후의 역사·종교적 변화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 관용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혼란스럽지만 역동적인 시대를 맞이하였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유다인들은 페르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페르시아 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리하여 점차로 히브리어는 종교적 언어로 축소되고 아람어는 이스라엘의 일상어로 사용되는 이중 언어 생활이 이스라엘에 확산되었다. 일상어로 아람어 글자를 쓰다 보니, 그냥 히브리어를 아람어 글자로 적은 것도 등장했다.이런 사실도 아람어가 유다인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이 시기 구약성경의 일부는 아예 처음부터 아람어로 쓰인 것 같다. 일상어로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이런 일상어의 급격한 변화는 문화적 변화를 수반하는 법이다.

5. 페르시아 종교의 확산

이 시기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요소가 주변 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다. 아후라 마즈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이었다.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의 유일신으로서, 이 신은 다양한 호칭을 지녔다. 그 가운데 대표적 호칭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늘의 하느님'이었다. 아람어를 이해하는 히브리인들도 이 표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호칭을 과감히 수용하여 야훼 하느님께 돌렸다. 그래서 유배 이후 본문에 '하늘의 하느님'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른 종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새 호칭을 수용했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게 사용했다.

오히려 이 호칭의 수용은 '신학적 반론'의 성격을 띤다. 곧,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신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야훼 하느님뿐이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대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산되는 데 대한 적극적 대응이다. 아마 이 호칭을 주도한 세력은 유배 이후 제2성전을 중심으로 활약한 사제들과 밀접했을 것이다. 곧, 하느님의 이 새로운 호칭은 고대 근동의 패권을 새롭게 거머쥔 막강한 문화 제국 페르시아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는 주변 종교의 영향력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려고만 하지 않고, 때로는 적절히 흡수해서 야훼 신앙을 더욱 두텁고 튼튼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올곧은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신명기에서 잘 드러나는 이런 믿음의 태도야 말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마음에 품고 다른 종교에 대해 적절히 대응했던 것이다.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5강 하늘의 신격화

 

성호 긋고 시작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어요? 예, 반갑습니다.

오늘이 벌써 5회째 강의입니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죠?

예, 벌써 5주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강의를 다 못 들으신 분도 계시고 또 새로 오신 분도 계셔서 제가 이번

강의는 지난 네 시간 강의를 잠깐 앞에 정리하면서 새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으신 분들은 지난 강의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리에 떠 오리시면서 제 강의를 따라

오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고대 근동 세계가 얼마나 멀리 있는 세계인가?

우리의 시간적으로 얼마나 먼 세계인가를 말씀드렸고, 그 다음에 지리적으로도 얼마나

먼 세계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더욱 다른 것은 우리와 생각하는 방식이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합리주의와 과학, 대량소비 이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의미와 신화의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이런 현대 세계가 아니라 그런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해서 태어난 책이다 하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 사람들은 의미와 신화적 세계관을 갖고 살았고

  구약성경은 그러한 고대 근동 세계를 배경으로 탄생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좀 잘 이해하려면 그 고대 근동의 옛날 사람들의 생활방식

이나 세계관, 그들의 역사, 그들의 문화와 언어 이거를 잘 알아야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 고대 근동의 생활방식, 역사, 문화, 언어를 이해하면 구약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면 첫 번째로 한번 알아볼 것은 하늘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해서

하늘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하늘은 초최의 신이었고, 인류가 최초로 수메르

시대부터 하늘을 신이라고 고백했고, 다시 말해서 신을 처음으로 고백한 것도 하늘이

었다 하는 것이죠.

 

* 고대 근동에서 하늘은 최초의 신이었고 최초의 신은 하늘이었다

 

그 당시부터 하늘은 굉장히 훌륭한  신이었고, 신들의 아버지고, 최고신이었고, 임금을

지정해 주는 그런 아주 큰 강력한 신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의 유배 이전 문서에

서는 그런 하늘신이 안 나온다. 구약성경 시대 사람들은 분명히 그거를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말이 성경에 안 나올까? 유배 이전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까?

 

* 구약성경에서, 특히 유배이전 문서에서 하늘은 신으로 등장하지 않고 장소로만

  사용된다

 

특히 하늘을 꼬박꼬박 장소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우리 나라의 ..에서 해당하는

'버'라는 히브리어 전치사를 한번도 잊지 않고 대표적인게 1열왕 8장에 나오는 솔로몬

의 기도라고 했죠. 우리가 그 하나하나 보았지만 나올 때마낟 꼬박꼬박 마치 아주 조심

스럽게 걱정하는 듯한 우리가 느낌도 받았습니다.

 

혹시 하늘이 신이라고 생각할까 봐. 하늘은 신이 아니라 그냥 장소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마치 얘기해 줄려는 듯이. 그런 솔로몬의 기도를 보고 우리가 고대 근동의 정치적

인 상황, 종교적인 상황, 문화적인 상황을 우리가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아, 이건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라는 걸 봤습니다.

 

어떻게 그 최고신을 전혀 등장하지 않고 그렇게 성경을 저술할 수 있었을까?

혹시 그들은 혹시라도 최고신이 누구한데 오해라도 될까 봐 걱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애초부터 그렇게 한분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믿음이 좀

강했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 고대 근동의 정치, 종교,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수메르 시대부터 고대 근동의

  최고신이었던 하늘신이 구약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지난 네 시간 동안의 강의였고요. 이번 시간부터는 그동안의 변화에 대해서

여러분들한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고대 근동사회가 한번 크게 변화하게 된는데요.

그 큰 변화의 양상을 여러분들한테 차근차근이 설명을 드리고 그 변화가 이스라엘 우리

구약성경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잠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시간은 구약성경 얘기는 뒤에 나오고 그 앞전에는 고대 근동의 역사적인

정치적인 상황을 이야기를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이스라엘의 귀환

 

우리는 고대 근동이라는 그 큰 시간이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큰 시대가 언제 끝나냐 하면, 기원전 330년 또는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그 지역을

정복하면서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릴 때. 기원전 332년이면 엄청나게 먼 시간인데 그것이

고대 근동의 끝이기 때문에 참 먼 시간을 다룬다는 건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기억

하실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무너뜨린 나라가 페르시아인데요.

페르시아 제국은 그럼 누구를 무너뜨리고 제국이 되었을까? 그러면은 페르시아

제국은 다름 아니라  신바빌론을 무너뜨리고 그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제국입니다.

 

그러면 신바빌론 제국은 또 어느 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차지했는가? 그러면

신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머리 속에

어떤 식의 큰 덩어리를 놔 두면 되냐 하면, 신아시리아 제국이 있었고, 신바빌론

제국이 있었고, 그 다음에 페르시아 제국이 있었고, 그 다음에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시대가 왔다.

 

* 고대 근동의 패권은 신아시리아 ㅡ 신바빌론 ㅡ 페르시아의 순서로 바뀌었다

 

각자 몇 년, 몇 년 이런 거는 복잡하니까 나중에 책을 보시고요. 머리 속에 신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론 제국, 그 다음에 페르시아 제국, 그 다음에 헬레니즘 제국. 요번 시간과

다음 시간은 제가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 가지고 그게 인제 크게 바뀌면서

고대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신바빌론 제국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58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갔던, 바빌론으로 끌고 갔던 그런 아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국으로

  끌고 갔다

 

신바빌론 제국은 약간 잔인한 면이 있었어요. 왜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갔냐 하면,

자기네들이 넓은 땅을 정복하고 보니까 늘 걱정하는 게 뭐냐 하면, 그 넓은 땅에서

얘네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들한테 저항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기네 군대를 갖다

놔도 불안한 거예요.

 

왜냐하면 군대는 아무래도 인구가 적잖아요. 거기 사람들이 똘똘 뭉쳐가지고 다 저항

하면은 이기기가 힘들죠. 그러니까 민족들을 뒤섞여 버리거나 거기 사람들을 반을 뚝

떼다가 여기 다 갖다 놓고 막 이랬어요. 특히 왕족이나 권력자들 이런 사람들을 많이

갔다 놨어요. 그렇게 하면 고향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얘네들을 죽이겠다 이렇게 할 수

있으니까.

 

리고 그 사는 지역에는 다른 민족들을 섞어 놨어요. 그러면은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서로 의사 소통도 잘 안 되고, 그리고 종교도 다르니까 합심해 가지고 반란을 못 일으킬

것이다. 주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해 놨는데 이렇게 이제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그런

백성들을 좀 다스리려고 그랬던 정치적인 의도가 있지요.

 

그런데 이거는 약간 잔인한 정책이었고요. 신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페르시아

제국은 정책이 정 반대였어요.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폈어요. 총칼이

아니라 약간 덕으로, 문화를 다스리려는. 어떻게 보면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좀 더

세련된 통치방식을 썼던 거죠.

 

* 신바빌론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시키는 등 잔인한 정책을 펼쳤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 관용정책을 폈다

 

그래서 신페르시아 제국은 들어와서 아, 참 바빌론 제국이 여기 민족들을 다 섞어

놨구나. 그 중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있었어요. 이제 얘네들을 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자. 고향에 돌아가서 너희들 마음 껏 해라. 이런 식으로 좀 넓은 정책을 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오니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맘껏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되었지요.

 

* 페르시아제국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임금은 우리 성경에도 나와 있지요. 백성들을 돌려

보낸 임금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오랜 유배가 끝났구나.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굉장히 기쁨에 넘쳤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역동적 시대를

맞이해요. 이스라엘이 새로 성전도 짓고, 새로 자신감을 얻는 시대.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이제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있고, 새로 온 사람들도 있어서

어떻게 보면 약간 어수선한 시대이기도 해요. 하지만 좀 다이나믹한 시대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잘 전하는 책이 구약성경에 느헤미아기 하고 에즈라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집에 가셔서 느헤미아기 하고 에즈라기를 한번 읽어보세요.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전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약간은 혼란스럽지만 역동적인 시대였고,

  나름대로 이스라엘이 자신감을 회복하는 시대로 이 시기의 상황은 느헤미아기와

  에즈라기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엇비슷한 시기에 잠시 뒤에 쓰여지는 책이 토빗서, 다니엘서, 유딧서

등등이 그 당시에 쓰여집니다. 그 당시 그거를 보면은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역동적인 시대를 알 수 있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 구약성경과 비슷한 형태로 구약성경이 드디어 완성되게 됩니다.

그 당시는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 유배 이후 시기는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모습이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완성되는

  시대로 매우 중요한 시기다

 

제가 여기서 잠시 페르시아 제국이 그 고대 근동의 분위기를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놨는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오해(?)

 

페르시아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간 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조금 신비스럽고 멋있고. 페르시아 왕자가 와서 막 보석도 좀 전해줄 것 같고 약간

그런 느낌이 있는데요. 실제로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성경에 긍정적인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는 페르시아 역사서에서는 키루스 2세예요. 1세가

아버지였는데 성경에서는 1세, 2세를 나누지 않고 그냥 키루스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2세고요.

 

여기서 키루스, 퀴로스, 고레스, 옛날 성경에는 기로스 이렇게 나오지만 다 같은 이름

예요. 559-530년까지 재임했던 임금이고 그가 이제 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렸을  당시에

신바빌론 제국은 나라가 망하면 다 그렇듯이 별로 힘을 못쓰고 무너졌어요. 내분으로

다 쇠약해져 가지고 무너졌어요.

 

그런데 그 내분을 보면은 우리가 굉장히 재미있는 종교적인 현상을 알 수 있거든요.

종교적인 싸움이 그 내부에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제, 하늘신 다

끝내고 달신 들어가면서 거기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 키루스 2세(kyrus II BC559-530 재위)는 "키루스 칙령"을 선포하여 신바빌론 제국이

  유배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키루스 대왕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 키루스 칙령을 반포해서 신바빌론 제국이

유배시켰던 모든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어요. 

 

  

 

키루스 칙령이 지금 여러분들 앞에 그림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게 키루스 실린더라는

것인데요. 요게 쐐기문자로 페르시아 글자로 아주 깨알같이 있는데 이게 키루스 대왕의

칙령이 들어가 있는 문서입니다. 실린더죠. 토판에 적었던.

 

여기에 나와 있는 문서 중에서 제가 재미있는 구절을 한번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말씀

드릴께요. 20째 줄에 보면은 "나는 키루스다" 하면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가지고

쭈~욱 긴 호칭을 설명을 합니다.

 

* 나는 키루스다. 세계 제국의 임금이요, 강하고 큰 임금이요, 바빌론의 임금이요,

  수메르와 아카드의 임금이요, 사방의 임금이요, 안샨의 위대한 임금 캄비세스의

  아들이요, 키루스 1세의 손자요, 벨에서 나부까지 펼쳐진 땅을 지배했던 테이스

  패스의 후계자다,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살던 신들이 나를 되돌렸다. 그들 백성을

  내가 모두 모아 다시 그들이 살던 곳으로 되돌린다

 

그 호칭을 하나하나 말씀드리면,

'세계 제국의 임금이요' 내가 이제 완전히 세계 제국을 다 장악했다. 이거죠.

'강하고 큰 임금이요' 내가 가장 강하고 크다. 이 소리죠.

'바빌론의 임금이요' 내가 바빌론을 정복했다. 이 소리죠.

'수메르와 아카드의 임금이요' 이것도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수메르 하고 아카드는

이미 이 당시에 없어진 나라예요. 그런데 마치 우리나라 고조선과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 아닙니까? 그 자기의 조상, 그 임금의 적통이 나한테 왔다 이 소리죠. 그래서

그 얘기도 거기다 하고

 

'사방의 임금이요' 이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소리인데, 동서남북 사방이 다 내 땅이다.

이 소리예요. 그 다음에

'얀산의 위대한 임금 캄바세스의 아들이요' 자기네 족보죠. 자기네 왕조의.

'키루스 1세의 손자요' 우리 할아버지는 키르스 1세이시다 하는 것이고

'벨에서 나부까지 펼쳐진 땅을 지배했던 테이스패스의 후예요.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살던 신들이 나를 되돌렸다. 그들 백성을 내가 모두 모아 다시 그들이 살던 곳으로

되돌린다.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서 왔던 많은 민족들을 내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린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록하고 일치해요. 그런데 그 뒤에 왜 돌려 보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 신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나보니드 신이 모아 들인 수메르와 아카드의 신들은, 마루둑의

  명령으로 내가 다시 그들이 가고 싶은, 원래 그들의 신전으로 돌아가게 하니, 내가 그들

  의 도시로 돌아가게 하는 신들이요, 벨과 바부 신 앞에서 내 생명의 연장을 위하여 매일

  매일 기도해 주소서.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요. 민족들이 올 때 정복하고 나서 신상이나 신전 일부를 데리고

왔어요. 예루살렘 신전도 구한 물건을 다 약탈 당해서 가져 갔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신들이 좀 불편한 상황이예요. 그러니까 내가 다 돌려 보내 주겠다. 그러니까 신들이여,

제발 내가 오래 살도록 다 이렇게 돌려 보내니까 기도해 줘라.

 

그러니까 나의 신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신들한테 다 집, 고향으로 가게 해 줄테니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줘라. 이게 원래 꿍꿍이 속은 그런 거였는데, 그것이 이제 이데올로기

였지만 구약성경에는 그거와 좀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지요?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는 각자 고향에 가서 자기의 신들을 믿게 해 주는

그런 정책을 폈고, 그것을 우리는 관용정책이라고 부릅니다. 키르수 2세의 왕위는

캄비세스 2세가 이었고요. 그 다음에 그 2세를 다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다리우스 1세가

이었는데 이 다리우스 1세가 이른바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하는 어쩌면 키르스보다는 더

중요한 임금입니다.

 

* 키루스 2세 - 캄비세스 2세 - 다리우스 1세

 

여러분은 키루스 2세가 있었고,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키루스 그리고 캄비우스 2세라는

왕이 있었고, 그 다음에 다시 다리우스 대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키루스 하고 다리우스

둘 다 중요한데요. 다리우스 대왕은 굉장히 혁신적인 정책을 폈어요.

 

522년에서 485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는 제국의 구조를 실질적으로 확립했고, 놀랍게도

사람들의 임금을 어떻게 줘야 되는가? 그랬을 때 일한 시간과 경력에 따라 주어라라고

원칙을 주는 최초의 임금이었어요.

  

그러니까 신분이 높다고 많이 주지고 말고, 적게 주지도 말고 그리고 놀랍게도 여성들

한테도 동일한 임금을 적용했어요. 굉장히 선진적인 왕이었죠. 이런 혁신정책 몇 가지가

페르시아 제국을 강하고 튼튼하게 이끌었는데요.

 

*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의 구조를 실질적으로 확립하고 "일한 시간과 경력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폈다

 

* 여성에게 출산/ 육아 휴가 개념을 도입했으며, 최초로 군대에 월급을 지급한

  임금이기도 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이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출산, 육아, 휴가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여성이 임신을 하고 일을 할 수가 없죠. 그런 여자는 일을

시키지 않고 또 아이를 낳으면 이런 여자는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또

하나는 군대에 월급을 지급한 최초의 임금이기도 해요. 그 당시는 군대 월급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 전쟁에 나간 군인들이

열심히 싸워가지고 각자 알아서 챙겨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정복당한 사람들이 많이 피폐해졌겠죠. 하지만 페르시사 제국은 군대 월급을 지급하니까

군대 규율이 서고 양민들을 약탈하지 않았죠.

 

이런 매우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정책을 폈고, 세계 최초로 고속도로 개념을 또 이사람이

도입했다고 합니다. 매우 뛰어난 임금이었죠.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나라를 다스릴 때

제국을 다스릴 때 철학과 덕과 문화로서 다스려야 한다라는 개념을 도입한 임금이기도

해요.

 

*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의 고속도로 등을 정배했고, 철학과 덕과 문화로 제국을 다스리려

  했다

 

이런 점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다른 모든 제국의 좀 다른 선진적인 면을 보여 준 제국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가 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근동

언어가 바뀌었어요. 이른바 링구아프랑카라고 하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언어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소통을 하고 살려면 공통의 언어가 있어야 되요.

 

예를 들어서 예전에 우리가 동아시아에서 국제 고용어는 중국어였죠. 한국 사람, 일본

사람, 베트남 사람, 몽골 사람이 만나도 서로 한문으로 필담으로 대화를 했잖아요.

현대 세계에서의 링구아프랑카, 국제 공용어는 영어지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그래서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도, 재미있는 것은 아시아 주교회의 할 때,

아시아 주교 회의 분들이 만나서 공용어로 뭐를 쓰느냐 하면, 아시아 언어가 아니라

영어를 쓰세요. 그런데 독일 사람, 프랑스 사람, 이탈리아 사람들은 영국 사람이 없는데

그들이 만나서 대화를 할 때도 현대에서는 영어를 쓰죠. 왜냐하면 국제 공용어니까.

 

고대 근동에도 국제 공용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과연 어떤 언어가 국제 공용어였을까?

그전에는 아카드어였는데 신바빌론 제국 시대 말기에 민중들이, 사람들이 상업을 하기

위해서 많이 쓰는 언어가 아람어가 되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아람어라는 언어를

국제 공용어로 쓰기 시작을 했어요.

 

* 신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의 언어는 아카드어였지만 신바빌론 제국의 말기에는

  표준어로 널리 사용됐다

 

그런데 페르시아 제국이 딱 두고 보니까 "야, 너희들 페르시아어를 다 배워!" 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아람어를 배웠어요. 이것도 매우 특이한 현상인데 어느 지역을 정복한 큰

제국이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지 않고 그 사람들이 현재 쓰고 있는 언어를 자신들이

배워서 쓴 것이죠.

 

* 페르시아 제국은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강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널리 쓰이는

  아람어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것도 역시 의도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제국을 부드럽게 통치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거 같애요. 그런데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람어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스라

엘 사람들 중에 점차점차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아람어를 쓰고 히브리어를 잊어 먹게

되었어요. 이스라엘 안에서도 언어 환경이 변하였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 히브리어 하고 아람어를 배우시면 더욱 좋을 거 같애요. 왜 그러냐

하면, 히브리어 하고 아람어는 단어가 한 60-70%가 같애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는 아람어가 어려운 언어가 아니었어요. 조금만 노력하면은 누구나 다 습득할 수 있는

언어였어요. 습득하기 쉬우니까, 평소 그걸 쓰니까.

 

그래서 이미 구약성경의 일부 책은 처음부터 아람어로 쓰이게 되요. 다니엘서 같은 경우죠.

여기서 잠깐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우리 앞에 있는 어떤 편견을 조금 말하는 김에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여러분 영화 [삼백]이라는 거 있지요? 그 페르시아와 그리스.

막 근육이 많은 멋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하는 그런 영화인데.

 

거기서 나오는 페르시아 임금이 크세르크세스 1세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다리우스

대왕을 이은 사람이예요.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이 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했고 그

[삼백]에서 아주 피어싱 하고 이상하게 괴물처럼 잔인하게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 모습은

좀 너무 인종적인 편견을 갖고 있는 영화라서 한번 지적을 해야 되요.

 

유럽 중심주의의 편견, 이른바 유럽 바깥의 사람, 비백인들을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죠.

차별하는 것이고 더욱더 안 좋은 점은 그런 시각은 반성경적이예요. 성경에는 페르시아

임금들이 그렇게 나쁘게 나오지 않아요. 키루스 임금은 이스라엘을 돌려 보낸 임금이잖

아요. 그래서 얼마나 좋게 나오는지 제가 에즈라기 1장1절을 말씀드릴께요.

 

* 에즈 1,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주님께서는 예레미아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이거 굉장히 재미있는데요. 하느님께서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카루스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키루스는 어느정도 착한 사람이 되요. 하느님

의 도구가 되는 거잖아요. 그쵸? 그리고 이사야서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 이사 44,28: 나는 키루스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나의 목자. 그가 나의 뜻을 모두

  성취시키며 예루살렘을 두고 '그것은 재건되고 성전은 그 기초가 세워지리라.'고

  하고 말하리라.' "

 

키루스를 주님의 목자로까지 얘기한 것은 키루스에 대해서 성경이 어느정도 매우 긍적적

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죠. [삼백]에서 보이는 그런 페르시아 임금의 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죠. 이런 면에서 보면은 성경은 오히려 지금 우리보다 편견이 더 적은 거 같애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외국인을 대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키루스가 한 모든 정책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이고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서

움직인 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하느님은 어쩌면 민족을

가리지 않는 분이시죠. 이 민족이나 저 민족이나 다 쓰임새에 맞게 쓰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민족 그 자체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차별하면 안 되겠죠. 만약에 우리나라도 지금

외국인에 대해서 편견이 적은 나라가 아닌데, 만약에 우리가 우리와 사는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그런 외국인들을 아, 저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이 자기 뜻을

이루실 수도 있다. 저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는, 저 사람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면 마치 성경의 그 키루스 임금한테 가졌던 그 생각이죠. 그 생각을

가지시면 우리도 외국인 편견을 조금 넘어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기회를 빌어서

같이 해 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하실 때 하느님의 뜻을 갖고 오시는, 그분이 이루시는 그런데는 민족의

한계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애요. 자, 페르시아 제국이 어떤 제국이고

그 당시의 언어 환경이 얼마나 많이 변했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제 다 알게 되셨습니다.

그러면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변화가 구약성경에는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새 호칭

 

구약성경 본문에 굉장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하나 발생하는데요. 요 앞에 글씨를 봐

주세요. 이거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엘라샤마야'라는 건데 앞에 엘라는 하느님,

신 이런 뜻이고 뒤에 '샤마야'는 하늘이라는 뜻이예요.

 

  

 

이것을 직역하면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예요. '하늘의 하느님'

그런데 이 호칭이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유배 이전에는 하늘을 장소로만 썼잖아요.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어요. 그전에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꼬박꼬박 in이라는

전치사, 앞에 '버'라고 하는 전치사는 썼는데 여기서는 전치사가 없이 그냥 '하늘의

하느님'이 된 거예요.

 

이거 굉장히 특이해요. 그전에 있었던 하늘관이 변했는가? 에즈라기와 느헤미아기에

이런 표현이 아주 급증해요. 그전의 구약성경 책에는 안 나오던 표현인데 에즈라기와

느헤미아기에는 이 표현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요.

 

* 바빌론 유배 이후 구약성경 본문에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했다

 

에즈라 하고 느헤미아 시대에 사람들의 생각이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약간

바뀌었어요. 제가 에즈라와 느헤미아기의 몇 구절을 읽어드릴께요.

 

* 느헤 1,4-5: 나는 이 말을 듣고 주저앉아 울며 여러 날을 슬퍼하였다. 그리고 단식하면서

  하늘의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아, 주 하늘의 하느님, 위해하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

 

에즈라는 지금 우리 하느님을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하느님을 그전에는 그렇게 안

부르려고 너무 조심스러워 했는데 아예 대놓고 '하늘의 하느님' 이렇게 부르고 있는

중이예요.

 

* 느헤 2,20: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늘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뜻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오.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서 성벽 쌓는 일을 시작할 것이오.

  예루살렘에는 당신들에게 돌아갈 몫도 권리도 연고도 없소."

 

이렇게 말을 해요. 아주 쉽게,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이제 하늘의 하느님,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에즈라기 6장에 보면 이것도 역시 연거퍼서 나오는데요.

 

* 에즈 6,9-10: 하늘의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에 필요한 황소와 숫양과 어린양, 그리고

  밀고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 등 예루살렘 사제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날마다

  틀림없이 대어 주어라. 그래서 그들이 하늘의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면서,

  임금과 왕자들이 잘 살도록 기도하게 하여라.

 

또 하나 볼까요? 에즈라는 여러분이 잘아시겠지만 매우 위대한 학자였어요. 위대한 사제

였거든요. 에즈라가 호칭이 어떻게 되는가? 에즈라의 공식적인 타이틀이 무엇인가?

이걸 보겠는데요. 에즈라의 공식적인 타이틀은,

 

* '하늘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법의 학자 에즈라 사제'(에즈 6,10; 7,12.21)

 

이렇게 무려 세 번이나 요 폼이 똑같이 나와요. 그런 걸 보면은 그 당시의 에즈라의 공식

호칭이었을 거 같애요. 자,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늘의 하느님'이라니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수메르 시대 대 최고신의 계보에 대해서 보았어요.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하늘은 하느님이

사시는 곳 이렇게 꼬박꼬박 말했는데 특히 솔로몬이 아주 대표적인데 왜 이런 호칭이

등장했을까? 이런 호칭이 등장한 것이 과연 어느 책에서 있을까 했는데 느헤미아기,

에즈라기 뿐만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당시에 나와 있었던 다른 책들,

토빗기, 유딧기, 다니엘서에서도 많이 나와요. 신의 호칭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신의 호칭.

 

* 신의 호칭은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뭐라고 부르시나요? 하느님을 보면은 신잗르의 기도에서 기도를

이렇게 같이 해 보면은 저는 '좋으신 아버지'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어쩌면 제가 하느님

을 좋으신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애요. 어떤 신부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그렇게

얘기 하시거든요. 하느님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그 부르는 호칭에서 잘

드러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공식적인 호칭도 있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공식적인 호칭을 그리스도라고

하죠. 그리스도, 구원자시라는 뜻이죠. 그러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 예수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라는 게 그 호칭에 축약적으로 드러나죠.

 

* 예수님의 호칭 가운데 그리스도, 구원자 등은 그분이 우리 죄를 구원하시는 분,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핵심 교리를 잘 드러낸다

 

 유일신교에서 신의 호칭을 함부로 붙이는 게 아니예요. 오래 생각해서, 특히 공식적인

신의 호칭은 함부로 바뀌지 않아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다.

이렇게 해서 2천년 동안 한번도 안 바뀌고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죠.

 

그게 바뀌면 큰일 나요.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고, 아주 핵심적인

것인데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에 대한 호칭이 이렇게 확 바꾸어 버린 거예요.

그것도 아주 너무너무 자연스러울 정도로.

 

*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유배 이후 문서에서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이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얼마나 많은 곳에서 바뀌었는지 제가 다니엘서 하고 유딧기에서도 한번 말씀드릴 거예요.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환시 유명하죠? 그런데 다니엘의 환시 시작하는 마당에 두 번

이나 연거퍼서 '하늘의 하느님' 이 너무 자연스럽게 '하늘의 하느님'을 얘기하는 거예요.

아예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늘의 하느님'을 쓰는 거예요.

 

* 다니 2,18-19: 또 자기와 동료들이 바빌론의 나머지 현인들과 함께 죽지 않도록, 그

  신비와 관련하여 하늘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다니엘에게 그

  신비가 밤의 환시 중에 드러났다. 다니엘은 하늘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유딧기에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 유딧 6,19: "주 하늘의 하느님, 저들의 교만을 내러다보십시오. 그리고 비참하게 된 저희

  겨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오늘, 당신께 봉헌된 이들의 얼굴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 토빗 7,12: "율법에 따라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모세의 책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아내다. 그러니 네가 맡아서 네 아버지께 잘 데려가거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번영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토빗기에는 아주 여러 번 나오는데 다 읽지는 않겠어요. 다시 한번 이런 표현은 함부로

등장하는 게 아니예요. 뭔가 크게 바뀐 게 있어요. 그런데 특정 시대에 왜 이 시대에 하

느님을 이런 호칭으로 갑자기 변하게 불렀을까?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늘관이 급변하기

라도 한 것일까? 어떤 계기로 도대체 이런 것을 부르게 되었을까? 그 답으로 학자들이

찾는 게 유배 이후의 변화예요.

 

# 유배 이후의 문학적. 종교적 변화와 대응

 

유배 이후의 정치적인, 종교적인, 문화적인 상황이 전체가 다, 고대 근동 세계가 다 변했고

이스라엘도 그 여파에 따라 가지고 변했어요.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폈다

말씀드렸죠. 그래서 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펴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를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역동적인 시대를 맞을 수 있었어요. 거기다가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어는 아람어로 바뀌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아람어를 쉽게 배워서

잘 쓰는 민족이 되었어요.

 

*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 문화를

   받아들이기 쉬웠다. 그래서 히브리어는 점차 종교적 언어로 축소되고 아람어는 이스라

   엘의 일상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제가 잠시 느헤미아기에서 한 대목을 읽어드리려고 하는데요.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잊어먹고 얼마나 아람어를 일상어로 쓰게 되었는가를 잘 알려주는

일화가 여기에 나와요.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한번 들어보세요. 느헤미아기 처음에 보면

느헤미아가 이제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얼마나 기뻤겠어요. 유배 생활이 다 풀리고 "야,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구나.

우리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구나." 해서 매우 기쁨에 찬 그런 역동적인 상황인데요.

와서 처음에 느헤미아기에 보면 느헤미아가 처음으로 한 일은 성벽을 수리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을 수리해야 되겠죠? 그래서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예루살렘 성벽 공사가

어느 정도 끝났죠. 성경에 보면 어떻게 나오냐 하면, 이 당시 상황이 7장 4절에,

 

* 느헤 7,4: 도성은 넓고 컸지만 그 안의 백성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들도 아직

  지어지지 않은 채였다.

 

그러니까  성벽만 외적이 쳐들어 오지 못하게 성벽만 대충 쌓고 그 안에 인구도 별로 없고

집도 없는 그런 상황이예요. 귀한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때 느헤미아가 온 백

성을 다 모아 놓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 느헤 8,1-3: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 물물'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가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유법서를

  가져왔다.

 

아직 성벽 공사가 어느 정도 되고 집도 다 지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먼저 읽어요. 그게 더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애요. 왜 하느님 백성일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인 성경을 읽는 백성이기 때문이죠. 성경의

가르침 대로 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 백성인 것이죠.

 

그런데 유배 중에 그렇게 하기 힘들었겠죠? 아무래도. 그러니가 갖다 와 갖고 이제 고향에

귀환 해 갖고 야, 집은 다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성벽이 어느정도 수리되었으니까

모든 백성이 앉아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자. 우리가 바빌론 유배 때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던가? 시온산에서. 그렇게 고대하던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진 거죠.여러분 이 장면을 매우

기쁨에 찬 공동체의 장면으로 읽으셔야 되요.

 

자, 율법학자 에즈라가 이제 청해서 율법서를 들고 백성들에게 그거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왔어요. 그 사람이 한 일은 나무 단 위에 올라가는 거예요. 백성들이 잘 보이도록.

 

* 느헤 8,5-6: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굻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그냥 여러분 이걸 보면 마치 미사 하는 거 같죠? 아마 미사의 그 뿌리도 여기와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러자 에즈라와 다른 레위인들이 이제 모든 백성이 다 듣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는 확성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백성으로

들어가서 또 다시 읽어 주었던 거 같애요. "다른 레위인들이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대로 서 있었다."라고 해요.

 

지금의 미사 시간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 그 성경 말씀을 해설해 주는 강론 시간에는

앉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냥 강론 시간까지 쭈~욱 서 있었던 거 같애요. 이 집회를

보면. 성경을 읽고 설명할 때도 서 있었습니다. 다리가 좀 아팠겠지요? 그 대신 매우 기쁨의

축제였기 때문에 그거를 다 넘어설 수 있었던 거 같애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한테 이

이야기를 왜 드리냐 하면 지금 요 대목을 읽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주었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헤 8,8)

 

그들은 그 책,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게 참 이게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조상의 책이잖아요.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설명해 준 다음에야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었다라고 나오는 것이

거든요. 왜 일까? 왜 번역하고 설명해 주었어야 했을까?

 

그것은 여러분한테 말씀드린 대로 고대 근동의 언어 환경이 다 바뀌어서 이스라엘 사람들

마저도 아람어를 얼마나 친숙하게 섰고, 자신들의 조상 히브리 말에 얼마나 어색했는가를

알려주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아마 유배를 거치면서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성

을 곧바도 알아듣기 힘든 정도가 되어 버린 거 같애요.

 

잠시 돌아보면은 우리 나라도 사실은 그래요. 몇 백 년 전의 글을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만약에 조선 시대나 구한 말에 나온 한문으로된 문서들 있잖아요. 요즘에

TV에 진품명품 같은 시간에 글이 나오잖아요. 그러면은 전문가가 나와서 번역하고 설명해

주기 전에는 저도 도대체 못 알아 들어요. 복잡한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죠.

 

한글도 마찬가지인 거 같애요. 한글 소설이라고 우리가 아는 춘향전도 보면은 그걸 그대로

쓴 거를, 원문을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아마 못 할거예요. 너무너무 어려워서

현대식으로 조금 풀어주어야 할 수 있겠죠. 축문에 쓰는 유세차, 이런 것도 한글, 한문으로

쓰는 사람들, 젊은 세대나 아니면 나이드신 분들도 조금 저는 많이 없을 거 같애요.

 

예전에 불과 백 년 밖에 안 된, 백 년 남짓 전에 기미독립선언문 있지요? 삼일절.

"오등은 자애 아 ..." 이렇게 나오는 것도 고등학교 배울 때로 그것도 저는 어려웠어요.

우리나라 하고 너무 틀리니까 하나하나 다 배워야 되는 것이죠.

 

유배 갖다 온 이스라엘의 처지가 그렇지 않았을까? 라고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어요.

유배 가서 바빌론에서 워낙 다른 환경에서 살고 거기에서 적응하고 살아 남아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돌아와서 자기 조상들의 책이라고 해 보니 들어도 잘 모르겠고. 그러니까 번역해

주어야 되는 것이죠.

 

그 당시 실제로 유배를 가는 바빌론 제국, 그 당시 실제로 야예 없어진 민족도 많아요.

이스라엘은 아주 큰 위기를 겪은 거예요. 그러니까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레위인들과 사제들이 꼭 필요했습니다. 이들이 구약성경을 읽고 이해해야 했던거죠.

그래서 번역하고 설명해 줬던 거죠.

 

* 유배생활 이후 정체성의 위기를 겪은 이스라엘 민족은, 레위인들이나 사제들이 번역하고

  설명해 주지 않으며 성경을 이해하가 어려울 정도로 문화적, 종교적인 상황이 급변하던

  시기에 살고 있었다

 

이제 상황이 이해가 되시겠죠?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까 그 '엘라 샤마이'를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사실은 이 글자는 아람어 글자예요. 히브리 사람들이 페르시아 시대 이전에 쓰던 히브리

원래 글자는 이거 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걸 그냥 히브리 말로 평소 배울 정도가

된 것은 아람어를 얼마나 익숙하게 썼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예이기도 합니다. 거의 두

단어가 그냥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죠.

 

실제로 이 시기에 구약성경의 일부는 아예 처음부터 아람어로 썼어요. 이게 많이 바뀐

거예요. 일상어로 아람어를 썼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겠지요.

 

* 바빌론 유배이후 구약성경의 일부는 처음부터 아람어로 쓰였는데 이는 아람어가

  일상어로 사용됐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언어가 많이 바뀌는 이 시대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와 문화가 고대 근동에 확산

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폭압적으로 누르고, 막 때리고, 막 끌고

가고, 이런 거 보다 오히려 이렇게 부드럽게 통치하는 게 더 잘 퍼져나갈 때가 있죠. 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니까.

 

페르시아의 종교가 뭐였죠? 조로아스터교였죠.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이 '아후라마지다'

하는 신이었죠. 우리가 배화교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아후라마지다'의 호칭이 뭐였

냐 하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었어요.

 

그 호칭이 아람어를 쓰는 히브리인들도 그 호칭을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대제

국의 신이었고, 페르시아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 얘기를 했을 거 아니예요. 그러니 그

언어를 그냥 알아들을 수 있었겠죠. 그러니까 유배 이후 본문에 '하늘의 하느님'이 급격

하게 많이 증가하게 된 거죠.

 

그런데 다른 호칭의 종교에서 이 호칭이 기원한 것이기는 한데 이게 그냥 히브리 사람들이

페르시아 종교를 베낀 거냐? 그러면 그게 아니예요. 오히려 정반대예요. 저 제국의 큰 신,

페르시아의 신, 그 신의 이름은 '하늘의 하느님'인데 아니다, 그 '하늘의 하느님'은 가짜

하늘의 하느님이고 진짜 하늘의 하느님,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우리 야훼 하느님이다.

이 호칭이 거기에 담긴 거예요.

 

* 유배 이후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타 종교의 호칭을   

  수용한 차원을 넘어 신학적 반론의 성격을 띤다.

 

사실 그 '아후라마지다'의 호칭을 이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그냥 가져더 쓰는 것도 그

당시에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인데 이거를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했던

거죠. 신학적인 반론의 성격을 띠는 거예요. 페르시아 종교는 틀렸고, 진짜 '하늘의 하느

님'은 우리 하느님이다라는 얘기가 들어 있는 것이죠.

 

대제국의 문화적인 영향력을 가졌는데 그 영향력이 오히려 이스라엘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이죠. 아마 이런 호칭을 하느님한테 드린 신학자 집단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아마 사제계 사람들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중심지는 제2성전

이었을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늘의 이 새로운 호칭은 고대 근동의 패권을 새롭게 거머쥔 강력한 문화

제국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고 한 거고,

결과적으로 야훼 신앙을 업그레이드하는 신학적 노력이 되는 것이죠.

 

*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이다

 

잘 생각해 보면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이런 면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티나에 굉장히 초라하게 시작한, 세속적으로 보면 굉장히 작은 종교였죠? 예수님

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훌륭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고, 돈도 많이 없었고, 그런

분들이었는데 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런데 예수 운동은 세속적으로는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였죠.

 

십자기에 매달리시고, 첫째 제자 베드로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리고 금방 확산되기는

했지만 많이 박해를 받고, 그런데 이 작은 종교가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여서 삼위일체론

이라든지 이런 걸 세우고 더 강력해졌고 또 로마의 법과 제도를 배워가면서 교회가 더 [

튼튼해졌고 또 중세에 가가지고 또 많은 것을 섭취하면서 커졌고, 또 아시아에 오고, 또

미국에 가고 이래가지고 점점점 커지지 않았습니까?

 

어떤 것이 가장 큰 것이고, 어떤 것이 우리 하느님의 참뜻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이렇게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마 이 당시 페르시아 제국 시대

에 이미 이런 일을 한 거 같애요. 그 당시 최고 신은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제국 전체가

울려 퍼졌지만, 그건 틀린 것이죠. 진짜 '하늘의 하느님' 우리가 기도해야 될 바로 그

하늘의 하느님은 우리 야훼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그 호칭을 하느님한테 드린 것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죠.

 

우리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신학사를 보면서 외형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기원이 우리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도 많이 볼 수 있어요. 어쩌면 성탄절도

그렇고, 다른 것들도 외부에서 기원한 게 있어요.

 

그런데 그럴 외부에서 기원한 것이 우리 교회에서 지금 하고 있다고, 야, 우리가 외부에서

이걸 베낀 거냐? 아니면은 그냥 우리의 기원이 다는데 있는거냐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거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가져올 때 생각을 우리가 봐야 되요. 그 참뜻을 봐야 되는 것이죠.

 

그 참뜻은 뭐냐하면은 아주 올곧은 하느님 신앙이었어요. 가장 큰 것은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느님 신앙을 읽어야 되는 것이죠. 바로 하느님께

대한 올곧은 믿음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요. 지금 한국 현대 가톨릭 교회 모습과 고대 근동에 있었

던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모습은 외형적으로 보면 굉장히 다르죠. 사람들 생김새도 다르고,

하고 다니는 것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완전 이 두 종교, 3천년 전, 2천년 전에 이스라엘

이 믿던 하느님이 과연 지금 현대 한국인이 믿는 거를 만약 외계인디 와서 딱 본다면, 아,

아 두 사람들이 같은 신을 믿는 거야? 할 정도로 굉장히 다르죠.

 

하지만 이렇게 외형적으로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이 두 집단의 마음은 다

어디 가 있는가? 다 하느님한테 가 있는 거죠.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쭉 보면서 그

런 핵심적인 신앙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오직 변하지 않은 태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꾸준하게

믿고 있는 그 믿음의 태도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저는 그것이 이 책의 부제인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 고대 근동 시대부터 현재까지 구약성경에서 변하지 않는 핵심적인 사상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은 잠시 말씀드렸지만 약소국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갖고, 인구도

얼마 없고, 땅도 별로 좋지 않고, 그리고 늘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는데 오직 믿음 하나로

이런 모든 것을 견뎌낸 나라이죠.

 

그리고 그 믿음 하나로 견뎌내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종류의 종교를 흡수하기도 하고,

어떤 종교의 종교적인 요소는 또 배척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굉장히 치열한 신학적인

과정을 거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가장 핵심적으로 남아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명기 6장 4-5의 말씀입니다.

 

* 신명 6,4-5: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니이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잘 들어보시면 그냥 하느님을 우리가 편안하게 믿어야 된다. 이 말씀이 아니예요. 열심히

믿어야 된다는 말이예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여러분 신앙에서 우리가 추구, 영성이라고 할 때 어떤 면은 편안한 그런 것을 추구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것도 영성이예요.

 

그런데 영성은 어떤 면도 있냐 하면, 매우 강렬한 면도 있어요. 끊임없이 추구하는 거예요.

어쩌면 쉴 틈도 없이 계속 하느님만 찾아야 되는 그것도 영성이기도 해요. 이스라엘 역사는

쉴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늘 무슨 일이 닥치고, 잡혀가고, 끌려가고, 안에서 내분도 있고,

별 일이 다 있었거든요.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어떻게 하는 게 하느님의 뜻일까? 우리가 여기서 과연

어떻게 어떤 신학을 해야 될까? 이런 작은 결단들을 무수하게 내렸고, 그 결단들이 쌓이고

쌓여 가지고 지금 구약성경이 된 것이죠.

 

여러분들도 열심히 하는 신앙, 그래서 외부 것에 어떤 개방적인 태도를 지니는 그런 신앙

생활을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6강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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