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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01 조회수841 추천수8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3월 1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Amen, I say to you, whoever does not accept
the Kingdom of God like a childwill not enter it.
Then he embraced the children and blessed them,
placing his hands on them.
(Mk.10,15-16)
 
 
 
 
제1독서 야고 5,13-20
복음 마르 10,13-16
 

안타까운 죽음을 종종 듣게 됩니다. 얼마 전만 해도 부산외대 학생들이 불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이뿐 아니라 각종 사고, 그리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은 81세라고 하더군요(2013년 통계청자료).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평균수명이 81세라니, 그렇다면 뜻밖의 사고나 병만 없다면 소위 ‘장수’라는 것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현재 노인 인구의 36%가 독거노인이라고 합니다. 효도를 기대할 수 없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며, 나라 사정도 넉넉하지 않기에 점점 줄어드는 노인 예산에 서러울 수밖에 없는 분들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과연 ‘장수’ 한다는 것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듯이 축복의 말일까요?

그러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잘 준비해야 합니다. 즉,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 쾌락에 중독되어 있어서 쾌락을 찾으면 찾을수록 부족해서 계속 더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쾌락 중독은 행복을 집어삼키며, 오고 있는 행복을 쫓아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께 다가오는 어린이를 쪼아내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나무라십니다. 당시에 어린이는 아직 미완의 존재라고 생각했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귀찮게 하고 또 불편하게 한다고, 소위 예전 약장수들이 말하듯이 “애들은 가라.”라고 소리쳤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교육과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못합니다. 대신 쾌락을 중시하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서, 신앙생활보다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미래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만 잘 준비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요즘 각 본당에 청년들과 청소년 그리고 어린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우리 애가 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할 것이 많아서 성당 다닐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부모를 얼마나 많이 만났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의 주인공인 아이들을 절대로 성당에서 만날 수 없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요. 우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불신앙. 과연 아이들 자체의 문제일까요? 이 아이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해진 해결법 같은 것은 없다. 인생에 있는 것은 진행 중의 힘뿐이다. 그 힘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해결법 따위는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생텍쥐페리)

 
우리의 미래.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사진은 송도국제도시의 조형예술대학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합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린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군요. 그래서 중학생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했지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또 신학생이 되고, 그리고 지금처럼 신부가 되어도 완벽한 인격을 갖춘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작은 것에 쉽게 무너지고, 여전히 어린이처럼 미숙함을 그 자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금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나아질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생활에 급급했기에,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조금 더 나아질 나’를 생각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만하면 되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많아질수록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곁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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