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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6강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04 조회수680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의 구약성경과 신들] (6)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하늘, 유배 후 하느님 대체어로 사용



#하늘의 새로운 인격성



 유배 기간을 거치며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변화는 '하늘'이 '하느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받은 이같은 현상은

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데, 특히 마카베오기와 다니엘서에서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역사를 다룬 마카베오기는 사람을 구하고 도와주는 주체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표현한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1마카 12,15).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1마카 16,3).

 유배 이전 구약성경은 '하늘'이 어떤 인격성을 띠게 될까 봐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

했다. 그래서 꼭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며,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유배 이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하늘의 하느님'이

라는 표현이 급증한 것이다. 또 하늘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돼 때로는 '하느님'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하늘은 어느 정도 인격성을 부여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한다. 이때부터 하늘은

하느님의 완벽한 상징어로 사용됐다. 종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재신화화'된 것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하게 돼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유배

이후 재신화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유배 이후 하늘을 하느님으로 부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는 유일신 신앙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해도 하느님과 구별되는 '하늘 신'으로 오해할 소지가 그들 사이

에선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배 이전에는 공간과 피조

물의 탈신화화된 개념으로 인격적 요소를 탈색하는 데 주력했다. 혹시 하늘신이라는

요소가 있을까봐 걱정하는 태도를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반면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

을 상징하는 낱말이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굳건한 유일신 신앙이 자리 잡았다.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을 보고 청하며, 하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해도 하늘신을 생각할 사람들은 적어졌다. 하늘이라고 말해도 모두가

하느님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하늘들'
 여러 차례 변화해온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신약성경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하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늘의'라는 표현은 '하느님

의' 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다. 유배 이후 하늘은 하느님의 상징어로 굳어져 신약 시대

로 전승됐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가장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책을 꼽으

라면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오복음이다. 마태오복음의 특징적인 하늘관은 다음의 두 가지

호칭에서 볼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마태 5,48). "하늘의 내 아버지"(마태 15,13;

18,35).

 이 호칭들은 오직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데, 유배 이후 정착된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하느님'이 하늘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하느님

이 더욱 가까이 계신 분이 되셨다.

 구약의 하느님은 우리가 감히 다가가기 어려운 분으로 여겨졌다. 물론 구약성경을 잘

읽다 보면 그분은 정말 친근하고, 마치 아기를 돌보는 아빠의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려운 하느님을 친근한 아빠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이 밖에도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 호칭, 곧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란 호칭도

즐겨 사용한다.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마태오복음 6장에서 하느님의 호칭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는 루카복음 11장의 호칭 '아버지'와 구별된다. 마태오복음 저자가 사용한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된 하늘관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배 이전 하나의 장소로 여긴 하늘관과 더불어 유배 이후 하늘의

하느님으로 표현한 하늘관이 모두 나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오복음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요,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다.

 

신약성경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마태오복음의 하느님은 '하늘의 님', 곧 '하늘님'이다.

이스라엘 종교신학사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약 시대에 '하늘'과 '하느님'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하고, 하늘이라는 상징어를 즐겨 사용한 마태오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4번)보다 '하늘 나라'(32번)가 더 자주 나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사실상 동의어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여러 겹의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시대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것이다. 각각의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형성돼 구약

성경에 들어왔는지 알게 되면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유래했지만 그런 표현을 수용한 생각의 뿌리는 깊은 신앙심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리=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  


 

강의에 들어가며...

1. 하늘의 새로운 인격성

유배를 거치며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하늘'이 '하느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받은 이런 현상은 구

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데, 마카베오기와 다니엘서에서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역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는 마카베오기는 사람을 구하고 도와

주는 주체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여러 번 표현한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1마카 12, 15)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 (1마카 16, 3)

유배 이전 본문에서는 분명히 '하늘'이 어떤 인격성을 띤다고 오해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꼬박꼬박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며, 심판하시고, 다스리신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유배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급증했다. 또한 '하늘'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되어

때때로 '하느님'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하늘은 어느 정도 인격성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한다. 이때부터 '하늘'은

'하느님'의 완벽한 상징어로 사용된다. 종교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재신화화' 된 것이다. '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하게 되어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은 것이다.

 

이렇게 유배 이후 재신화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유배이후에는 하늘을 하느님

으로 부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 유일신 신앙이 이미 깊이 뿌리내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곧,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해도 하느님과 구별되는 '하늘 신'으로 오해할

소지가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뉜다.

유배 이전에는 공간과 피조물의 탈신화된 개념으로 인격적 요소를 탈색하는 데 주력했다.

혹시라도 하늘신이라는 요소가 있을까봐 걱정하는 태도를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다.

반면에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을 상징하는 낱말이 되어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 새롭게

의미를 찾았다. 그만큼 이스라엘에는 이제 유일신 신앙이 자리잡았고, 하늘에 기도하고

하늘을 보고 청하고, 하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해도, 하늘신을 생각할 사람들은

적어졌다. 하늘이라고 말해도 하느님이라도 다 알아들은 것이다.

'하늘'이라는 동일한 낱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탈신화되고 재신화되었지만, 그 동기는

모두 강력한 동쪽 제국(수메르, 바빌론, 아시리아, 페르시아)의 종교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같다.

2. 신약성경의 '하늘들'

이렇게 크게 변화하며 축적된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신약성경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하늘 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늘의'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다. 유배 이후 '하늘'이 '하느님'의 상징어로

굳어져서 신약 시대로 전승된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가장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책을 신약성경에서 꼽으라면 신약성경을 여는 첫 책, 마태오 복음을 들겠다. 마태오

복음의 특징적인 하늘관은 다음의 두 가지 호칭에서 볼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 (마태 5, 48; 6, 14.26.32)

하늘의 내 아버지 (마태 15, 13; 18, 35)

이 호칭들은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데, 유배 이후에 정착된 '하늘의 하느님'이란

호칭에 기반을 둔 것 같다. '하늘의 하느님'이 하늘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더욱

가까이 계시며 친근하게 되셨고, '너희' 또는 '내'라는 말이 첨가되어 친근함이 더하게

되었다.

구약의 하느님은 약간 어려운 면이 있다. 물론 구약성경을 잘 읽으면 그 분은 참으로

친근하시고, 마치 아기를 보는 아빠의 마음을 지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런데

예수님은 약간 어려운 하느님을 쉬운 하느님, 친근한 하느님, 아빠 하느님으로 잘

보여주셨다. 그래서 '하늘의 하느님'을 '하늘의 내 아버지', '하늘의 너희 아버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하늘의 하느님'이란 표현이 페르시아 종교에서 기원한 것이라도 하더라도,

그 표현을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 안으로 도입할 때도, 오직 하느님 신앙이 관심이었다.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란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호칭이

예수님에게 가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이런 호칭이 태어난 것이다.

이 밖에도 마태오 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 호칭, 곧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란 호칭도

즐겨 사용한다.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마태 6장에서 하느님의 호칭("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은 루카 11장의 호칭("아버지")과 구별된다. 마태오 복음 저자가 사용한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된 하늘관으로서,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호칭이 가장 자주 나오는 책이 바로 마태오 복음이다.

마태오 복음은 유배 이전의 하늘관, 곧 장소로서의 하늘관과 유배 이후의 하늘관, 곧

하늘의 하느님이나 하늘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이 모두 나오는 책이다. 이런 면에서

마태오 복음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요,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라고 하겠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마태오 복음의

하느님은 '하늘의 님', 곧 '하늘님'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종교·신학사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가 같은 의미

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신약 시대에 '하늘'과 '하느님'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하고, 하늘이라는 상징어를 즐겨 사용한 마태오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4번)보다 '하늘 나라'(32번)가 더 자주 나오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나라는 사실상의 동의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라는 하나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여러 겹의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것이다. 각각의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 형성되어 구약

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을것이다.

 분명히,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수용한 그 생각은,

그 생각의 뿌리는 깊은 신앙심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경계하고 때로는 적극 수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6강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안녕하세요? 예,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지요?

성호 긋고 시작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 오늘은 모두 총 여섯 번째 시간인데요. 오늘로서 하늘에 대해서 우리가 정리하고

예수님 시대까지 정리하고 다음 시간부터는 다른 걸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까지 한 하늘에 대해서 간단하게 여러분들한테 복습시켜 드리고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하늘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하늘은 수메르 시대부터 최초의 신이었고, 최초의 최고신이었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하늘'은 수메르 시대부터 인류 최초의 신이었고, 최초의 최고신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의 기도가 잘 보여주듯이 유배 이전에는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신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꼬박꼬박 하늘에서 계신 하느님이다. 이렇게 나오죠. 아주 주의 깊게

'장소'로서만 썼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유배 이전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을 철저하게 '장소'로서만 사용했다

 

그런데 유배가 지나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이죠. 페르시아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언어도 바뀌었고, 문화도 바뀌었고, 종교도 바뀌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문화적인 관용정책을 펴서 조금 더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굉장한 혁신정책을 펴는 그런 강한 제국이어서 오히려 부드러운 덕과 문화적인 것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가 더 빨리 퍼져나갈 수 있는 그런 환경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종교의 호칭이 나오는데 '하늘의 하느님'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완전히 뒤집어 버렸죠. 자기네 믿음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정반대의 의미로 만들어진 거죠.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페르시아 종교의 최고신의 호칭이 '하늘의 하느님'이 고대 이스라엘의 문서인

구약성경에 비약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 제국의 가장 큰 신, 제국의 가장 위대한 신이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비록 우리 하느님 백성이 작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진정한 하늘의 하느님은 우리 하느님이시다 하는 것을 호칭에 넣은 것이죠.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페르시아 종교를 베낀

것이 아니라,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바로 우리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호칭은 이스라엘 안에서 비약적으로 증가해서 제가 저번 시간에 많은 걸

읽어드렸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호칭들을 여러분들이 찾으실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 새로운 호칭은 고대 근동의 패권을 새롭게 거머쥔 막강한 문화제국 페르

시아의 종교적 영향력을 딱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죠.

 

*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새 호칭은 페르시아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신학적 노력의 결과이다

 

# 하늘의 새로운 인격성

 

이제부터는 유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하늘의 하느님 말고 하늘과 관련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여러분들한테 설명해 드리고

이게 과연 신약성서 시대로는 어떻게 넘어갈까?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하느님

나라와 하늘 나라에 관해서까지 쭈욱 강의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강의는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했었던 하늘과 관련된 모든 강의의 총체적

인 결론 성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상징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배 이전과 비교해 보면 매우 다른 것입니다.

 

* 유배 이후 이스라엘 종교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하늘'이 '하느님'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어찌 보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 받았다라고 할 정도로 이런 현상은 구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더 두드러지는데 저번 시간에 우리가 본 거는 에즈라기아 느헤미

아기였죠?

 

* 하늘이 새로운 인격성을 부여 받은 현상은 구약성경의 후대 본문으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그 다음 역사를 다루는 마카베오, 다니엘 그 책에서 잘 보입니다. 이 마카베오기는

구약성경 시대의 거의 마지막 역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는 분이 누구신가? 하느님이시죠. 그런데 그 하느님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이렇게 얘기를 안 하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은 하늘이시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읽어드릴께요. 1마카 3,18: "하늘이 구하려고 할 때에는 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늘은 분명 하느님이시죠? 하느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가

아니라 그냥 하늘로부터 직접, 하늘을 얘기한 것이죠.

 

* 1마카 16,3에 보면,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 이런 표현이 있어요.

하느님이 너희를 도와 주시기를 빈다는 것이죠. 이처럼 하늘이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 구약성경 본문에서 '하늘'은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것은 여러가지 표현으로 다양하게 등장하는데요. 그냥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하늘을 찬양한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죠. 하늘이 바라시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리

라. 이것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이 표현은 우리는 저번 시간에 우리나라의 종교심을 좀 다룬적이 있죠? 한국의 특유한

하늘 개념. 우리는 "하늘의 뜻이다." 이런 말도 쉽게 하는 민족이죠.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런 말도 하고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이런 말도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하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늘은 하느님을 칭하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애국가의 얘기도

지만 이런 표현이 낯설지 않아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의 맥락에서 보자면 조금

특이 한 거예요. 하늘이 신이될까봐 하늘에 계신 하느님으로 꼬박꼬박 얘기했었고,

또는 하늘의 하느님, 이런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아예 그냥 하늘이 하느님이 되어

버린 것이죠. 매우 놀라운 것이죠.

 

마카베오기에 보면은 또 "하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1마카 3,60)라는 표현도 있고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하늘을 찬양하

였다." (1마카 4,55) 이런 표현도 많이 나와요.

 

도대체 이거는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해서 이런 표현이 급증하게 되었을까?

얼마나 이 얘기가 널리 퍼져 있는지 여러분들한테 또 성경의 재미있는 대목을 하나

말씀드릴께요.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는 여러분들 중에서 잘 아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거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고대하고 중세 때도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고요. 유럽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성당에 가시면 성당 벽화나 아니면은 부조, 스탠드글라스에 중세 때부터 즐겨 사용

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죠.

 

일곱 아들 순교 이야기는 페르시아도 망하고, 우리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봤지만 이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헬레니즘 문화가 이 고대 근동에 들어오게 되는데 헬레니즘 문화는 또 완전히 다른

문화였어요. 이거는 그리스 사람들이거든요.

 

헬레니즘 문화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옷을 좀 적게 입죠. 그리고 조각상에 이렇게

나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고대 근동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페르시아 제국이나 아시리아 제국이나 그 당시의 부조나 상을 보면은 옷을 다 잘 입고

있어요. 지금도 아랍 사람들은 옷을 입는 걸 좋아하죠.

 

그런데 그리스 문화는 그게 아니라 "인간의 육체는 아름답다." 이런 생각이 있어서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요소에서 보이듯이 워낙 다른 문화였고, 또 언어도 완전히 달랐

어요. 페르시아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였고 그전의 셈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고

살았는데 이제는 인도 유럽어 그리스어를 쓰게 된 것이죠.

 

그 당시 헬레니즘 시대에는 헬레니즘 문화가 워낙 강력해서 이스라엘이나 고대 근동

사람들이 그 문화에 빠졌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 플라톤도 위대한 거 같고, 아리스토

텔레스도 위대한 거 같고, 또 그리스 문화는 재미가 있거든요. 극작가, 희곡 이런 것도

재미있고, 축제 같은 것도 재미있고 그래서 거기 빠져들었어요. 사람들이.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한테 재미와 즐거움은 더 위협이 되는 수가 있어요. 바빌론은

이스라엘을 탄압했죠. 그리고 막 전쟁으로 이스라엘을 페허로 만들고, 백성을 끌고 

가고  막 이랬죠. 페르시아는 문화적 관용정책을 폈는데 그리스 문화는 좀 매력적인

걸로 사람들을 꼬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임금 중에ㅐ서 아, 우리도 국제 사회의 이 헬레니즘 시대의,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글로벌스탠다드에 맞춰서 율법은 무슨 율법이냐? 율법은 그냥 종교적인

걸로 축소하고 좀 그렇게 우리도 살자.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큰 경기장 이

런 걸 지어놓고 그 헬레니즘 식의 학교라든지, 극장이라든지 이런 걸 지어 놓고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시대가 되니까 이제 본문에 보면은 어떤 임금이 하나 나오는데 뒤에 가면 이

임금의 이름이 안티오코스라고 나와요. 이 임금이 아, 이스라엘에서도 돼지고기를 먹자.

그런데 돼지고기는 율법에서 금하는 고기거든요. 먹으면 안 되는 고기예요. 그래서 이제

분란이 일어났죠.  

 

어느날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이 있었어요. 이 당시에 이 가정은 매우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하느님 백성이었어요. 그는 율법에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어라." 이런 강요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첫째가 나서서, "우리는 조상들의 법을 어기

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2마카7,3) 돼지고기를 먹고 내가 율법을 어기느니

보다 나는 그냥 믿음을 지키고 목숨을 버리겠다. 대단한 믿음이죠.

 

마치 한국 옛날의 순교 성인들 보는 것처럼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목숨을

버리겠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임금이 굉장히 잔인하게 고민을 해서 첫째를 죽였어요.

그러니까 첫째가 죽은 다음에 둘째 아들을 또 꿇어 앉혀 놓고 둘째한테도 얘기하는 거

예요. "너도 안 할테냐? 너도 돼지고지 먹지 않을테냐?" 그리고 또 둘째도 "나도 목숨을

버리고 믿음을 찾겠다. 율법을 지키겠다." 그리고 나서 목숨을 버렸어요.

 

그럴 때 둘째 대답이 재미있는데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먹지 않겠소."하고 대답하였다.

(2마카 7,8)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시 그리스어를 쓰기 시작했어요. 물론 배운

사람들 중심으로. 아람어는 셈어고 언어가 비슷하기 때문에 쉽게 배울 수 있었지만,

그리스어는 워낙 다른 언어여서 그리스어는 지금도 그리스어 시간에 학생들 가르쳐 보면

알지만 해야될 게 굉장히 많아요. 외워야 될 게 굉장히 많은 언어예요.

 

그리고 원래 그거를 모국어로 썼으면 모르지만 원래 모국어로 쓰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그리 간단한 언어가 아니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배운 사람들만 썼죠. 하지만

"조상들의 언어"라고 하느 건 여기서 히브리어예요. 아람어 이전의 언어를 이 사람들은

하는 과정이었어요.

 

즉, 원래 자기들의 조상들이 갖고 있었던 구약성경 책을 읽고, 자기들이 이해하고

기도할 줄 알 정도로 훌륭하게 종교생활을 하는 그런 과정이었다는 얘기예요.

자신들의 조상의 언어로 대답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민족의 것을 해라라고

아마 그리스어로 얘기를 했죠. 그러니까 대답도 아예 그리스어로 하기 싫으니까

자기 히브리어로 할 정도로 둘째 아들도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어요.

 

그러자 셋째 아들을 끌어냈어요. 물론 이렇게 해서 일곱 아들이 다 죽어요.

셋째 아들의 대답이 여러분들한테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셋째 아들의

대답을 보면은 이렇게 나와요. 2마카 7,12인데, "우리 몸을 하느님한테서 받았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내가 죽으면 다시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 하는 부활 사상을

얘기하는 것인데 이렇게 얘기합니다.

 

* 2마카 7,11: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

  까지도 하찮게 여길 것이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이것은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늘을 아예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다시 한번

잘 들어보세요.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율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

들까지도 하찮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분에게서 다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죠.

 

이 인용문에서 하늘은 완벽하게 그분, 하느님과 동의어예요. 다르지 않아요.

하늘이 우리 육신을 주셨고, 그분이 원하시면, 하늘이 원하시면 다시 주실 것이다

라는 것이죠.

 

* 마카베오 2권에서 '하늘'은 '그분(하느님)'과 동의어로 쓰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유배 이전 본문에서는 이런 표현은 안 할려고 노력을 했어요.

하늘이 신처럼 보일까봐 조금이라도 안 하고, '하늘에 계신'이라고 꼬박꼬박 얘기 했어요.

 

* 유배 이전 본문에서 장소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던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유배 이후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면서 '하늘'과 '하느님'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기도를 들어주시면서, 심판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하신다라고

했는데 유배 이후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죠.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이제는 하늘이 그냥 하느님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늘이 어느정도 인격성을 부여

받았어요.

 

* 유배 이후 '하늘'은 어느 정도 인격성을 부여 받았다

 

우리가 인격성을 부여 받았다. 인격성이 있다는 건 사람처럼 인격이, 이제 얼굴이라는

말에서 나왔잖아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다. 우리의 인격이 있어야 이야기를 할 수

있죠? 돌이나 나무 같고 이야기를 못하죠. 인격이 없으니까.

 

하느님이 인격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한테 대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마치 하느님은 우리 사람처럼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아까 인용문에서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은 이 당시에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합니다.

 

* 사람들이 '하늘'에 대고 기도하고 '하늘'을 직접 찬양하면서 '하늘'은 '하느님'의 

  완벽한 상징어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은 유배 이후에, 유배 이전에는 탈신화화 되었다. 유배 이후에는

재신화가 되었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 유배 이전 '하늘'은 탈신화화 되었다가 유배 이후 재신화되었다

 

하늘이 재신화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이미 유배갔다가 오고 난

다음에 그 자신감에 찼던 느헤미아와 에즈라의 시기를 거친 다음에 이스라엘에는

유일신 신앙이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거 같애요.

 

* 유배 이후 '하늘'의 재신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이스라엘에 유일신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에다 대고 기도한다고 해도 이게 하늘신이 아니라 이건 하느님이다

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이제 오해를 안 한 거 같애요. 그만큼 예전에 있었던 수메르

시대나 아카드 시대의 신들도 다 없어져 버렸고 완전히 바뀌어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해도 유일신 사상이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초의 신은 하늘이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듯이 모든 신의 근원은 하늘이고, 우리도

이제 하늘을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이런 하늘이라는 상징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상징을 써도 이제는 위험하지 않다. 하느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야요.

 

그러니까 이제 한마디로 말해서 하늘에 대고 기도하든, 하늘을 부르든, 하늘에 용서를

청하든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도 이제 하늘을 어떤 다른 신으로 오해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요약하면은 이렇습니다. 유배 이전과 이후의 하늘관이 구약성경에서는 참

차이가 납니다. 유배 이전에는 장소, 유배 이후에는 특이한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과 함께 새로운 게 들어왔죠.

 

* 구약성경의 하늘관은 유배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별된다. 유배 이전에는 공간과

  피조물의 탈신화 된 개념으로 '하늘'의 인격적 요소를 탈색하는데 주력했다면 유배

이후 '하늘'은 하느님을 상징하는 낱말이 되었다

 

하늘을 그냥 하느님으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하늘신을 생각할 사람이 적었다고

하는 건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은 이스라엘의 종교신이 어느 정도는 딱딱해졌다. 굳어

졌다. 딱딱해졌다는 표현보다는 좀 자리를 잡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온갖 고난과 고초를 다 겪고 나서 어느 정도 유일신 신앙을 탄탄하게 자리

잡았으니까.

 

이건 참 재미있는데요. 어느 정도로 유일신 신앙이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하늘'이라는 표현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오해가 없으니까. 개인적인 차원

에서도 그런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단단하게 자리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오히려 더 관용적이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 줄 수가 있는 것이죠. 아무튼 이스라엘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늘이라는 동일한 개념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한번은 탈신화 되어서

또 한번은 재신화 되어서 다양하게 됐지만 그 동기는 똑같애요.

 

동기는 무엇이었냐 하면은 동쪽 제국, 페르시아나 지금까지 얘기했던 모든 제국은 다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거든요. 메소포타미아 지방. 지도를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동부

셈어를 쓰는 지역이었어요. 거기서 오는 종교적인 영향력에 대한 대응이었어요.

 

그리고 대응할려는 거는 무엇을 지키려고 대응을 했냐 하면, 하느님 신앙을 지키려고

대응을 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약성경 말기에 뒤에 나오는 이

하늘이 하느님을 얘기하는 이 대목, 마카베오기와 다니엘서에 많이 나오는 대목은 한국

사람들한테는 쉽게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그냥 성경을 번역해 놓으면 우리는 그냥 그대로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을 우리해서 준비라도 한 것인 양. 우리한테는 쉬운 대목이니까 마카베오기를

나중에 한번 다시 읽을실 때 고 '하늘'을 한번 다시 한번 보시면서 읽어 보세요.

그러면은 조금 더 새롭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 신약성경의 '하늘들'

 

자, 그렇다면 이렇게 크게 변화해 가지고 구약성경에서 여러번 겹쳐지면서 새롭게 변화

한 하늘 개념이 신약성경에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신약성경에는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럼 이 구약성경의 하늘 개념을 이해하려면 신약

성경의 하늘 개념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연히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신약성경에 대해 가지고 길게 얘기하면 좋겠지만 이 강의 제목이 구약성경

과 신들이거든요. 그래서 다루어야 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아쉽지만 신약성경은 핵심만

여러분들한테 정래해 드리고 조금 넘어가겠습니다. 그 대신 너무 퍽퍽 뛰지는 않을거고

충분하게 말씀드릴 거예요.

 

신약성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절대 아니고 이 강의 제목이 구약성경과 신들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좀 집중할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 다른 강좌가 평화방송에 있으니까 그걸 들으시면 될 거 같고요.

 

일단 신약과 구약성경 두 성경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이 두 권이면 두 권이 다른

메세지를 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신약하고 구약성경은 동일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둘다 완벽한 성경입니다. 다만 인간이 처한 조건, 역사적 상황, 다양한 처지

이런 것에 따라 가지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 이끌어 주시기 위해 가지고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죠.

 

신약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을 잘 이해해야 되고요. 구약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신약성경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것을 공부하던지 간에 서로 연결되게 아주 내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느님 백성이 성찰한 것. 구약 시대에 하느님 백성이 체험한 것. 그것은

신약성경을 위한 어찌보면 거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이해

해야  되는 것이죠. 신약성경은 이제 아까 말씀드렸듯이 헬레니즘 시대가 되어서 완전히

다른 시대에 쓰였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를 쓰게 되었거든요.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어를 퍼뜨리게 된 것이죠. 일상에서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히 지식인들이,

 배운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당시 사회상을 보면은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은 교양인이고 문화인 취급을 받았어요.

마치 우리나라에 영어나 조선 시대 때 한문 쓰는 거와 비슷해요. 그게 국제 공용어니까

그걸 잘 하면은 어디가서 배운 사람 취급받고 조금 그러는 못하면은 지위가 높다 하더라

도 조금 사람들이 열등감 가지고.

 

어떻게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리스식의 학교를 만들어서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우도록 강요한 거죠. 지금 우리가 여러분 잘 이해하실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그렇게 되면 원래 율법 학교에 보내야 되는 거죠. 하느님 백성들은 자기네 전통을 배워야

되는데 거기에 안 보내고 그리스 학교에 보내니까 사람 사회가 나눠지게 되었어요.

 

좀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어요. 하지만 점차 점차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쓰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어느정도 그리스어를 알아들을 수가 있게

되었어요. 어느 정도나 널리 퍼졌는지를 알려주는 증거가 뭐가 있냐 하면,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쓰여 있어요.

 

*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여 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lingua tranca)가 되자, 일부 

  이스라엘인들은 점차 그리스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신약성경도

  그리스어로 쓰였다

 

신약성경은 일차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을 처음 쓰는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어를 썼어요. 물론 이 신약성경 그리스어는 보통의

그리스어 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백성은 벌써 3천년 정도

아니면 2천년의 큰 역사를 가지면서 자기들의 언어가 두세 번 바뀐 거예요.

 

처음에는 히브리어를 쓰다가 또 아람어를 쓰다가 다음에 그리스어를 쓰게 된 것이죠.

그리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계속 유배 가면서 계속 언어를 바꾸게 되죠. 참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죠. 언어를 바꾼다는 게 얼마나 큰 일이겠어요. 그런 큰 변화를 거쳤

는데 신약성경 그리스어를 우리가 보면은 조금 특이한 현상이 발견 됩니다.

 

왜냐하면 이게 그리스어를 이른바 네이티브로 쓰는, 자기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아니

라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이 그리스어를 썼다는 증거가 몇 군데 나와요. 그러니까 그리스

사람들이 보자면, "요고 좀 이상한 글이 있었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하게 되면 콩글리쉬가 되죠. 어쩔 수가

없어요. 어디선가 나와요. 반기문 사무총장이 영어 하시는 거 보세요. 아주 토속적인

발음을 하시죠. 하지만 이걸 보면은, 그분을 보면은 역시 중요한 건 그 발음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분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우리가 어느 기사에서 반기문 사무

총장이 영어 못한다는 얘기는 없어요. 우리가 딱 들으면 발음은 참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발음이지만 그 내용은 유엔 수준에 걸맞는 내용을 하시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우리는 콩글리쉬라고 하지만 제가 독일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독일 얘들은 독일

사람이 영어를 쓰면은 어딘가 티가 나거든요. 독일식 티가 나요. 발음에서든지, 표현

에서든지. 그걸 댕글리쉬라고 해요. 도이치의 D를 써가지고. 농담으로 하는 말이죠.

영어를 하고 있으면 저거 영어야? 독어야? 그러면서 저거 댕글리쉬라고 농담식으로

얘기를 하죠.

 

싱가폴 사람들이 영어를 쓰죠. 그런데 싱가폴 사람들의 영어를 징글리쉬라고 해요.

싱가폴식. 그래서 중국어 속담 같은 거를 그냥 영어식으로 옮겨 놓는다든지 어떤

특이한 발음이 있다든지 하는 걸 써요. 이런 건 피할 수 없어요.

 

콩글리쉬 하는 게 그렇게 창피한 건 아니예요. 모든 자기의 문화적인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전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딱  끝나고 마치 미국 사람처럼 그냥 완벽하게 쓴다

는 게 오히려 더 창피한 일일 수도 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이 있는 것이니까.

 

 

 

그리스어로 '하늘'이 무엇일까? 하면은 여러분 앞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어로 하늘을

'우라노스'라고 씁니다. 요거는 복수형인데요. 원래는 그리스 말에서는 단수로 써요.

평범한 남성 명사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도 그걸 하늘 그러면 우라노스라고 하면

되는데 요렇게 우리노이라고 쓴 거는 복수형이예요.

 

신약성경 그리스에서 대략 3분의 1정도가 이렇게 복수형으로 씁니다. 하늘들로 쓰는

거예요. 왜 하늘들로 쓸까? 원래 그리스 사람들은 하늘들이라는 말을 잘 안 쓰는데

신약성경에 3분의 1이나. 그런데 우리가 히브리어에서 '샤마임'이 복수형이라고

배우셨죠. 히브리 말로, 셈어로는 하늘이 여러 겹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들로

썼던 거예요.

 

그리고 아까 '엘라 샤마이'에서 아람어로도 '샤마이'가 복수형이예요.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옮기면 '하늘들'이 되는 거죠. 하지만 하늘들이라고 해 가지고 하늘이 여러 개

있다고 해 가지고 복수형이라고 우리가 번역하지 않는다고 그랬죠. 그냥 그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랬기 때문인데 이게 여기서 티가 나는 거예요.

 

그리스 말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하늘들로 쓰는 게 편한 거예요. 자기네는

원래 그렇게 썼으니까. 이런 걸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하면은, '헤르라이즘'이라고 부르

는데요. 그리스어 안에서 히브리적인 요소가 나올 때가 있어요. 정통 그리스어 하고

조금 다른. 즉 콩글리쉬적 요소가 나오는 것이죠. 그거를 '헤브라이즘'이라고 불러요.

 

* 오랫동안 하늘을 복수형으로 썼던 유다인들의 전통은 그리스어 사용에도 같은 형식

  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현상을 신약성경 그리스어 히브리적 특징, 즉 '헤브리아즘

  (hebraism) 이라고 부른다

 

요걸 찾으면 아, 이 사람들은 역시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의 후예일 수 밖에 없구나.

이런 걸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죠. 유다인들은 말씀드렸듯이 하늘을 복수형으로 쓰는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이런 표현을 썼다. 신약성경 대부분의 책에서 제가 3분의

1 정도가 복수형으로 쓴다고 그랬는데 어느 한 책에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신약성경

전반적으로 섞여 가지고 단수형으로 나왔다가 복수형을 나왔다 막 이래요.

 

그럼 우리가 성경을 번역할 때 복수형으로 쓰일 때는 '우라노이'라고 쓸  때는 하늘들로

번역을 하고 '우라노스'라고 나왔을 때는 '하늘'로 번역을 해야지 맞잖아요. 하늘을 한번

은 복수형으로 나오고, 한번은 단수형으로 나오니까. 그런데 그렇게 번역하지 않아요.

의미가 없어요. 이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 조상들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를

알기 때문에 '우라노이'로 나오든 '우라노스'로 나오든, 우리 말로 쓸 때는 그냥 '하늘'

이라고 이렇게 옮깁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시대와 거의 같은 시대에 이제 플라비우스 요세프스라는 역사서가

쓰여요. 이분들은 제대로 그리스 말을 공부한 사람들이예요. 아까 말씀드렸던,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예요. 이분들 저작에서는 이 표현이 거의 안 나와요.

 

이것도 역시 신약성경을 썼던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제자들이 별로 그렇게 교육을 잘

받은 분들은 아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 당시 프로, 전문적인 학자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지만 이제 보통 배웠던 학자들은, 사람들은 이런 실수를 하고 살았다는

것이죠. 신약성경에서 이제 이런 배경 지식을 여러분들이 갖고 있으면서 신약성경의

하늘을 보겠습니다.

 

# 하늘은 하느님

 

신약성경에서 하늘이라는 표현은 이제 하느님이라는 표현하고 거의 같습니다. 그것은

유배 이후에 마카베오기에 나왔던 그 표현이 그대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역사적

으로 가까운 시기잖아요. 그래서 하늘 그러면은 거룩한 또는 하느님 이런 뜻으로 쓰입

니다.

 

* 신약성경에서 '하늘의'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또는 '거룩한'이라는 의미이다

 

마태 5,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산상수훈의 끝자리인데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구절인데요. 이 말은 너희가 하늘에서 상을 받는다.

우리가 뭐 공중 부양 해 가지고 하늘 어디서 상을 받는다. 이 뜻이 아니죠.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을 수 있다. 그 상이 크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이 말이죠.

 

하늘에서는 그냥 하느님이 이런 말로 그냥 쓰인 거예요. 다른 구절 하나 볼까요?

마태 6,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그 하늘에 쌓는 보문은 녹이 슬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도둑이 들지도 않고, 없어

지지도 않는다. 이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그랬다고 집에 있는 패물을 하늘 어디에

갖다 놔라. 이런 말이 아니죠? 저 멀리 하늘의 우주 정거장에 갖다 놓으면 거기서는

산소도 없으니까 녹도 슬지 않고, 좀도 먹지 않고, 도둑도 들어오지 않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없겠지요? 그런 말씀 하시는 게 전혀 아니라는 거를 여러분 알고 있죠?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건, 여러분들이 참된 보물을 하느님한테 쌓아라. 여러분이 기도

하고, 착한 마음을 가지고 또 선행을 하고 그래서 하느님한테 점수를 따 두면 그것이 참

된 보물이다. 이런 것이요. 이게 참 보물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역시 하늘이 그냥 하느

님으로 쓰였어요. 이것은 마카베오 시대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중에 하늘에서 온 것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고, 거룩한

곳이다는 뜻이예요. 이런 하느님을 상징하는 신약성경의 하늘관은 한국인의 하늘관 하고

매우 비슷해요. 우리가 정말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어요. 이것은 정말로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두신 거 같애요.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요한복음서에 보면은 위하고 아래라는 말을 잘 써요. 위에서 온 것은 거룩한 것, 예수님

한테 오신 것이고, 아래서는 그 반대의 뜻이죠. 요한 복음서는 위에서라는 말을 잘  쓰는

데 그 '위에서'라는 말도 사실은 '하늘에서'라는 뜻이예요.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죠.

요한 3,31을 읽어드릴게께요.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위에서 오시는 분, 우리는 땅에 있는 것. 그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그런 식으로

나누는 것이죠. 베드로서 첫째권에 보면은 성령도 하늘에서 내려 오셨어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 오실 때도 어떻게 해요? 하늘이 열리죠.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늘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말씀이 내리는 것도 역시 하느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하느님이 말씀을 주셨다. 이 의미죠.

 

루카 복음은 "성령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늘관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복음서뿐이 아니라 서간 여러 곳에서도 많이

나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봤듯이 하늘이 하느님을 상징하는 건 유배 이전이 아니라

유배 이후지요.

 

그런데 유배 이전에 하늘관도 신약성경에는 없어지지 않고 있어요. 예를들면 루카복음서

11장을 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이런 식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을 써요.

이 표현은 매우 오래된 표현이예요. 신약성경은 어느 한 전통의 표현을 없애버리지 않고

다 갖고 보존하면서 적절하게 쓰고 있는 것이죠.

 

* 루카복음서에서는 구약 시대 유배 이전 하늘관의 표현이 사용되기도 한다

 

방금 전에 얘기한 루카 복음서는 유배 이전의 하늘관을 표현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곳에서 보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죠. 하늘에서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니까 성령님은 누구실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파견되시는 분이시죠.

신약성경의 이런 하늘관은 하느님의 호칭으로도 이어집니다.

 

* 신약성경이 이런 하늘관은 하느님의 호칭으로도 이어져 묵시록은

  '하늘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을 칭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을 보면요.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제법 많이

나와요. 그것도 왜일까요? 역시 유배 이후에 있었던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예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은 여러 겹의 하늘이 있어요. 진짜로.

신약성경의 다양한 호칭들 하나 하나가 다 구약성경에서 그때그때마다 기원이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이 세 번의 강의를 통해서 그럴 하나하나 지금 다 배우신

거예요. 중요한 것들을.

 

# 하늘관에 정통한 마태오 복음서

 

자, 그럼 지금까지 논의된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책이 신약성경에

있을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 마태오 복음서예요. 마태오

복음서에 보면은 이 모든 하늘 개념을 다 써요. 그것도 아주 잘 쓰고 있어요. 마태오

복음서에는 이런 표현이 나와요. 하느님을 어떻게 부르냐 하면은 '하늘의 너의 아버지'

또는 '하늘의 내 아버지' 라고 불러요.

 

* 마태오 복음서의 특징적인 하늘관은 "하늘의 너의 아버지"(5,48)

  "하늘의 내 아버지"(15,13) 라는 호칭에서 잘 드러난다

 

이 호칭은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데 이 호칭의 기원을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

하느냐 하면 '하늘의 하느님'으로 생각해요. '하늘의 하느님'에서 '하늘의 내 아버지'로

뒤에 부분이 바뀐 것이죠. 하늘의 하느님이 하늘의 내 아버지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더욱 친근해지셨어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거와 비슷하죠. 하늘의 하느님 그러면 조금 무서워 보이는데

하늘의 아버지 더군다나 내 아버지 이렇게 하니까 조금 더 친근하게 보이는 것이죠.

구약의 하느님은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약간 어려운 면이 있어요. 조금 무서운 면이

있죠.

 

물론 구약성경을 잘 읽으면 자애로운 부분도 굉장히 많이 나오고 마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 같은 게 많이 나오는 걸 알 수 있지만 약간 어려운 면도 있다는 것을 부정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느님은 굉장히 친근하시고 사랑이 훨씬

넘치시고 또 착하시고 또 우리의 말을 너그럽게 잘 들어주시고 그런 좋은 하느님이시죠.

아빠 하느님이라고 하죠.

 

그런데 그 하느님, 예수님이 다시 한번 잘 가르쳐 주신 그 하느님의 표현이 이 표현에서

잘 드러나요. 그러면서 마태오 복음서에는 아주 핵심을 찌른다고 할 수 있죠. 하늘의

하느님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얘기했지만 하늘의 나의 아버지 이렇게 표현되요.

 

* '하늘의 하느님'을 '하늘의 내 아버지', '하늘의 너의 아버지'로 바꾼 마태오 복음의

  호칭은 하느님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 주고 친근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이런 것은 지난 시간에 신의 호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드렸죠. 신의 호칭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한번 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어요.

 

비록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페르시아 제국에서 기원했고 그것이 우리 구약성경에

다시 발전했지만 그 표현을 이스라엘의 신앙 안으로 들어올 때도 생각은 우리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었고 하느님 백성 안에서 이 표현이 새롭게 발전될 때도 역시 똑같이 믿음이

기본에 깔려 있었어요. 그리고 이 호칭이 예수님한테 가 가지고는 완전히 새롭고 참신한

표현이 된 것이죠.

 

이밖에도 마태오 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인 호칭을 써요. 지금 첫 번째로 본 것은

'하늘의 하느님'이 새롭게 업그레이드 됐다는 것이고 유배 이전의 고전적인 호칭이

있죠. '하늘에 계신' 그것도 마태오 복음서는 즐겨 씁니다. 주님의 기도 아시죠?

마태오 6장에 나오는 걸 보면은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죠.

 

* 마태오 복음은 유배 이전의 고전적 호칭, 곧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란 호칭도 즐겨

  사용했다

 

루카 복음서는 그냥 '아버지'라고 했는데 마태오 복음서의 이 표현은 다시 잘 생각해

보면은 "아, 원래 고전적인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구나"라는 걸 알 수 있죠.

 

*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6장(주님의 기도)에서 사용한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

  된 하늘관으로서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이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유배 이전에 어주 옛날의 호칭 '하늘에 계신'이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 마태오 복음서예요. 마태오 복음서에 자세히 보겠습니다. 호칭이

어디어디에 자주 나오는지. 마태오 복음 5장에 보면

 

* 마태 5,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마태 6,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

  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쓰고요. 10,32-33에서는 두 번이나 나오는데요.

* 마태 10,32-33: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마태 7,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는냐?"

 

* 마태 12,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참 많이 나와요. 다 읽어 드리지 않았는데 속된 말로 수두룩 빽빽하게 많이 나와요.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서는 어찌 보면은 하늘에 관해서 굉장히 화려하게 쓰는,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면서 아주 총체적으로, 복합적으로 쓰는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배 이전의 하늘관, 곧 장소로서의 하늘관과 유배 이후의 하늘관

곧 '하늘의 하느님'이나 '하늘'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이 모두 다 나오는 책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 책에서, 이게 연구상 받은 책이라고 말씀드렸죠.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개념인데 이런 생각으로 신약성경을 더 연구해 볼 여지가 있을 거 같애요. 아직까지

신약성경 분야에서, 이 분야에서 많이 연구가 안 된 거 같은데 요런 걸로 더 연구해

보면 마태오 복음서의 다른 면을 또 우리가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번 강의에서는 이런 면에서 마태오 복음서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다. 모든 표현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다.

모든 표현을 다 쓰고 있다라는 것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겠습니다.

 

* 마태오 복음은 구약성경의 하늘관에 정통한 책이요.

  구약성경의 하늘관을 종합하는 책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신약성경의 첫 머리를 차지하는 마태오 복음서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인가? 마태오 복음의 하느님은 하늘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하늘

표현을 다 쓰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한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종교. 신학사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제 오늘의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 것 '하늘 나라'는 '하느님 나라'와 같은

말이예요. 다른 나라가 아니예요.

 

* 마태오 복음은 '하늘의 하느님', 곧 '하늘님'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종교. 신학적

  맥락에서 하늘이 하느님의 강한 상징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신약시대에 하늘과 하느님을 딱 구분하기란 불가능한 얘기라고 그랬죠?

구약성경 말기부터 벌써 동의어로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하느님과 하늘 특히

하늘에 대해서 모든 구약성경의 것을 종합한 책이 마태오 복음서라고 했죠? 그 모든

표현을 잘 쓴다고.

 

그런데 하늘 나라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책도 마태오 복음서예요. 마태오 복음서에

제가 책을 보니까 통계로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32번 나오고 하느님 나라는 4번 밖에

안 나와요. 이것도 역시 마태오는 책을 쓰다가 하늘 나라라고 하면서 하느님 나라와

다른 나라를 생각했던 거 같지는 않아요. 하느님 나라를 그냥 하늘 나라라고 쓴 거

같애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는 사실상에 동의어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나라는 하나다라고, 하나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이다.

두 개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는 사실상 동의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라는 하나다

 

자, 오늘의 이 대단원 첫 번째 하늘의 개념에 대해서 이제 정리를 하는 결론의 시간

입니다. 구약성경 시대에 고대 근동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성경 시대에도 보면 하늘이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마치 여러 겹의 하늘처럼 여러 가지의 개념들이 서로 중첩

되어서 있습니다.

 

*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마치 하늘이 여러 겹인 것처럼 여러 겹의 하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아까 말씀드렷듯이 구약성경이 마치 거름처럼, 베이스처럼 작용을

해서 그 위해서 커다란 집을 짓는 것처럼 된 것이죠. 우리는 한겹한겹 다 들춰 보았고

그것이 종합적으로 되어서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로 이어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여러 겹의 하늘은 구약성경에서 각 시대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하늘을 보니까 이렇게 신약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들 특히 중요한 개념들을 원래 구약성경에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이게

발생된 것이고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변형되어서 더욱 발전했고, 그래서 신약성경

으로 이해되어 들어왔는가를 우리가  하나하나 다 알게 되면은 신약성경을 보는

눈이 더욱 풍부해질 것입니다.

 

* 각각의 하늘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의 어느 시대에 어떤 상황에서 형성되어

  구약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면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이 강의가 원하고 있는  이기고 하고 저의 연구가 거기에 도 지향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을 수용할 때의 생각도 그리고 그 표현이 이스라엘 안에서 새롭게 발전될

때에 그 베이스가 됐던, 기초가 되었던 생각도 굉장한 신앙심이었습니다. 한 분을

생각하는 마음이었습니다.

 

* '하늘'과 '하느님'에 대한 어떤 표현은 이스라엘 밖에서 기원했지만 이런 표현을

  수용한 그 생각은, 생각의 뿌리는 깊은 신앙심이었다

 

그리고 신학이라면 이런 표현의 변화를 공부하면서 그 핵심적인 마음, 그 깊은 신앙심

을 들여다 봐야 됩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심을 들여다 볼려고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거든요. 고대 이스라엘은 그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종교심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어떤 종교의 표현을 거부하기도 하고, 주의 깊게 안  쓰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같은 모습도 보이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다양한 모습들을

보이는 것이죠.

 

여러분은 이렇게 고대 근동 종교의 역사적인 전기, 어떤 영향, 문화적인 흐름 이런

것을 중심으로 해 갖고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를 더 잘 들여다 보자. 그래서 결국 그

믿음을  들여다 보자 하는 방법론을 처음 접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조금 신선하게 받아들이셨는지 아니면 여러분 신앙에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이 강의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고대 근동학과 구약학의

기반에서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그런 방법론이 더 필요하고 그런 신학이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장부터는 이제 이런 방법론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완전히 다른 주제 하나를 다뤄

보겠습니다. 그 다른 주제는 뭐냐 하면,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입니다. 그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생각보다 구약성경에 매우 깊이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는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보셨겠지만  다음 시간부터는 "아, 달이 이렇게 중요한 상징

이었다"는 거를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의 하늘관이 워낙 뿌리 깊기도 하거니와

그것과 비슷하게 조금 말기에 가서는, 구약성경 뒷머리와 신약시대의 하늘은 하느님을

뜻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그것과 비슷하게 접목되었지만 구약성경에서의 달은 처음

부터 끝까지 굉장히 달랐어요.

 

우리 민족한테도 추석이 중요하고 달이 중요하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완전히 다른 

마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까지, 일주일 후까지 기다려 주시고 일주일 후에 여러분들 뵙도록 하겠습니다.

강의 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7강 달신을 숭배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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