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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2 조회수939 추천수11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3월 12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Lk.11,29)
 
 
제1독서 요나 3,1-10
복음 루카 11,29-3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이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내 자신이 먼저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듣기, 이해하기, 공감하기’ 입니다. 문제는 내가 먼저 이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하는데, 언제나 상대방이 이를 먼저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면서도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의 말을 듣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들어준다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접어야 하며 상대방을 존중해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만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의 말에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듣기보다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해하기보다는 오해 속에서 색안경을 쓰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공감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 주님 앞에서도 이러한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을 향한 잘못된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참으로 회개하지 못하고, 항상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깜짝 놀랄만한 표징을 보여준다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체험해도 예수님을 절대로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듣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며, 주님의 그 큰 사랑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무엇일까요? 도저히 회개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방 민족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깊이 뉘우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 주님 곁으로 나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네베라는 도시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지요. 그런데 요나는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는 이들이 쫄딱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정성껏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외쳤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성의 없는 말에도 곧바로 회개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먼저 듣고 이해했으며 주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언제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원칙을 지켜나가는 과정 안에서 요나 예언자의 놀라운 표징은 내 안에서도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 뜻에 공감하기!!!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큰 기쁨이 아니다. 작은 기쁨을 큰 기쁨으로 만드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진 웹스터).

 
이스라엘 욥바에 있는 고래분수. 요나가 사흘동안 갇혀 있던 곳이지요?

 

 
주님을 만나는 길

제가 신학생 때 다리를 다쳐서 며칠 동안 깁스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난생 처음 깁스를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체험은 저에게 매우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깁스를 통해서 그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거든요. 가장 큰 한 가지는 세상 사람들은 너무 빨리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꼭 가야만 해서 깁스를 한 채로 힘들게 걷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바쁜 사람들이 많을까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느린 느림보 거북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1초라도 아끼려는 마음 때문일까요? 단 한 사람도 천천히 여유를 즐기며 걷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느리게 걸어도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것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제로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이유는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가 어쩔 수없이 느리게 걸어야 하다 보니 그제야 보이더군요.

내가 먼저 아래로 내려가는 낮춤 안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방향은 항상 윗자리고 대접 받으려는 마음에 있다 보니 볼 수 없는 것들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직접 겸손을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 겸손을 왜 따르지 않을까요?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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