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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5 조회수1,096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사순 제2주일


<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복음: 마태오 17,1-9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조토(Giotto) 작, (1302-1305),  파도바 아레나 경당


     <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 >

 

      오늘 복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당신이 높은 산에서 변모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여 당신을 믿게 해야 하는 것이 복음 선포인데 복음 선포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베드로는 그 곳에서 영광 속에 머물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산은 기도하는 장소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데 왜 하느님의 만남을 포기하게 세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일까요?

 

어제 밤에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본당 출신 후배 신부님의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 경위를 듣다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손녀 아기를 안고 뒷좌석에 타고 계셨는데 어머니만 큰 사고를 당하고 운전하신 분과 아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상을 가서 주위 분들의 설명을 듣고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가드레일을 받기는 하였지만 사실 사고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운전자나 아기가 아무런 외상도 입지 않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아기를 안고 있었던 어머니는 사고를 순간 직감하고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은 사고로 인해 오는 충격에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어머니는 앞으로 튕겨져 나갔고 그렇게 머리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순간 당신이 품에 안고 있었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당신 목숨을 던지는 결단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은 한 아기의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뉴스에서 인면수심(人面獸心),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짐승의 마음을 지닌사람들의 사건을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됩니다. 아기를 낳고는 아기를 무책임하게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하였다면 부모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요? 육체만 낳아주었다고 해서 부모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태어나서도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속 부모로 남고 싶다면 자신이 낳은 아기가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합니다.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낳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부모로서 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를 실천해야만참으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당신의 아드님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즉 세례 받으실 때와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하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두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어째서 이 두 사건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참으로 당신 아들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을까요?

부모가 부모가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부모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세례 받으실 때와 오늘 변모하실 때, 바로 하느님 아드님으로서의 소명이 드러나는 장면일 것입니다.

 

세례란 바로 옛 자신을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카 12,49-50)라고 말씀하신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세상에 성령의 불을 뿌려주시고 당신은 다시 부활하시어 새롭게 태어나신다는 뜻입니다. 즉 요르단강에서의 세례는 앞으로 당신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참다운 세례의 표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시겠다는 결심을 당신 세례를 통해 보여주셨고, 아버지께서는 하늘을 열어 성령을 내려주심으로 아버지로서의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동시에 아드님의로서의 인류구원 소명도 함께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니코데모는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느냐고 반문합니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느냐며 따집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요한 3,5-6)

즉 육적으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참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바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난자는 그 자체로 한 일생을 산다는 것을 아십니까? 난모세포 -> 여포-> 난자 -> 황체 -> 백체순으로 아기로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정자를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체로 새로 태어나 수천 배는 오래살 수 있는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때 성령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 즉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재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몸만 태어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분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 재탄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세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자가 정자를 받아들인다고 바로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수정되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수가 착상되지 못하고 배란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완수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의 세례에서 머무시지 않고 바로 참다운 세례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가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의 연속을 나타내줍니다. 즉 세례 때 받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소명을 이어가기를 결심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모세가 나타난 이유는 모세도 80살이 되었을 때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이 소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면 결코 지금 우리가 공경하는 모세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고, 하느님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엘리야 또한 예언자로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은 이 세상에 성령의 불을 내려오게 하여 온갖 우상과 싸워 이겨 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있느냐?”라고 하시며 마치 엘리야가 목숨을 걸고 바알 예언자들과 싸웠던 것처럼 당신은 이 세상과 싸우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야 하심을 결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은 얼마나 이런 상황과 맞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위해 내려가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야 하시는데, 베드로는 그냥 천막을 짓고 여기에 머물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주저 없이 세상으로 내려오시면서 베드로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온전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선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완전히 소명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온전히 키워냈을 때야만 온전한 부모로 불릴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소명을 온전히 성취한 이후에 당신이 누구이신지 선포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또한 우리도 그렇게 본받아 세례만 받았다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십자가의 실을 끝까지 걸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냈을 때야만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승전을 통과하기까지 누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 소명을 죽음으로써 이루어내실 때까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불림을 받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 또한 지금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그 순간까지,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타볼산에서 내려와야 하는 이유는, 아직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산에 올라 기도하면 에너지는 얻어야겠지만, 거기서 얻은 힘으로 그분의 소명을 온전히 성취할 때까지는 그 산에서 머물러 있으려고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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