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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9강 이스라엘에도 널리 퍼진 달신 숭배 문화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8 조회수568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 구약성경과 신들
제9강 이스라엘에도 널리 퍼진 달신 숭배 문화
 
강의에 들어가며...
 

엘리사 예언자와 수넴여인 이야기(2열왕 4)는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는 초하룻날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사 예언자에게 찾아가려는 수넴여인에게 남편은 "왜 꼭 오늘 그분

에게 가려 하오? 오늘은 초하룻날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2열왕 4, 23)라고 말함으로써 초하룻

날이 안식일과 같이 중요하게 취급됨을 나타내고 있다.

다윗의 행적을 전하는 책 사무엘기에도 초하룻날과 관련된 기록들이 나온다.

사울왕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다윗이 요나탄에게 하소연 하는 대목에서 "내일이 초하룻날입니다.

제가 임금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모레 저녁때 까지 들에 숨어 있도록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1사무 20. 5)"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 왕실에서 '초하룻날'에

특별한 식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특별한 식사는 특별한 전례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초하룻날에 임금과 신하가 모두 참석하는 전례와 식사. 그 기원은 아무래도 고대 근동일 것이다.

초하룻날에 어떤 특별한 전례를 행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초하룻날은 이렇게

고대 근동의 일반적 문화로 이해해도 좋을 정도로 달신 숭배가 문화적으로 이미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사실 초하룻날은 이스라엘의 전례력에서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종교적 절기를 엄밀히 지키며,

성전에서 전례를 올리는 일을 담당했던 레위인들에게도 초하룻날은 안식일과 함께 지켜야 할 기념일이었다.

예언자들도 빠질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 예언자들도 초하룻날을 매우 중요한

날로 보았다. 이사야 예언자가 거짓 경신례를 경고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에서도 초하룻날이

언급된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사 1, 13)

초하룻날을 중히 여기는 관습은 유배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유배가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에 넘쳤다. 예루살렘 시온 산에 새로 주님의 성전을 정성들여 지었다. 마음껏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매일 번제물을 바쳤고, '초하룻날'과 모든 거룩한

축일을 지켜 제물을 바쳤다. 그 뒤로 그들은 일일 번제물 외에, 초하룻날과 주님의 모든 거룩한 축일에 드리는

제물,그리고 주님께 자원 예물로 드리는 모든 이의 제물을 바쳤다. (에즈 3, 5)

초하룻날 뿐 아니라 그믐날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였다. 마치 수넴여자처럼, 유딧도 초하룻날을 경건하게

보냈던 것 같다. 두 여인은 시대가 무척 차이 난다. 하지만 달신 숭배에서 기원한 초하룻날을 잘 섬겼다는

점에서는 같다. 게다가 유딧은 그믐날도 챙겼다.

"그리고 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안식일 전날과 안식일, 그믐날과 초하룻날, 이스라엘 집안의 축제일과

경축일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단식하였다." (유딧 8, 6)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달신 숭배를 극복하기위한 노력을 펼치는데,

그러한 노력은 두 갈래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신명기계 학자들이고 또 하나는 사제계(제관계)학자들의

노력이다.


제9강 이스라엘에도 널리 퍼진 달신 숭배 문화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오늘은 전체 강의 아홉번째 시간입니다.

성호경 우리 함께 바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난 시간까지 두 시간에 걸쳐서 달신에 대해서 우리가 봤는데요. 이제 새로 오신 분들도

있고 하니까 제가 간단하게 지난 두 시간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공부했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그 다음에 본격적인 강의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 세계의 아주 작은 나라인데요. 고대 근동에서 달신이

굉장히 강한 신이었어요. 우리는 음양의 생각 때문에 태양신이 강하고 달신은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정반대였어요. 달신이 더 강한 신이었어요. 한 때. 그리고

달신이 강한 남성신이었어요.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달이 음을 상징하던 동양에서와는 달리 고대 근동에서 달은 최고신의 피가 흐르는

강한 남성신이었다

 

그리고 달신의 이름은 원래 '난나'라는 이름을 수메르 시대 때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점차 이름이 변해서 나중에는 '신'이라는. 신의 이름이 그냥 '신'이예요. '신신'이죠.

그렇게 달신의 이름이고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수메르 시대 달신의 이름은 난나(Nanna)였지만, 그 이후에는 신(Sin)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에 달신은 왕권의 상징이었고 달과 해와 별 이렇게 삼신론을 이뤘어요. 세 신이 한

세트로 다니는 그런 신이었어요. 그리고 초하룻날이 매우 중요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에서 달신은 왕권의 상징이었고 '해와 달과 별의 군대'라는 삼신론을 이뤘다

 

왜냐하면 달의 일생을 보면 처음에 초하룻날에 조그맣게 시작을 해 가지고 보름 날에는

꽉 차가지고 이제 최고가 되었다가 점차 점차 이제 작아졌다가 이제 그믐이 되죠. 그럴 때

달의 죽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인들은 특히 달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으로 여겨진 초하룻날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달신을 믿는 사람들은 그믐이 되면 "아, 이거 큰일 났다. 달신이 죽었다." 그래서 새로

초하룻날이 되어서 달이 이렇게 조그맣게 손톱만하게 비치면 "아, 이거는 이제 달신이 새로

부활을 했다." 그래서 초하룻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을 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인들은 특히 달이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으로 여겨진 초하룻날을 중요시 했다

 

참고로 우리 동양에서는 보름이 훨씬 중요했죠. 보름에 우리는 큰 축제를 벌이고 그랬죠.

정월 대보름도 있고, 추석도 있고, 보름에 강강수월레도 하고 보름이 좋았는데 이상하게도

고대 근동에서는 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보름은 이미 꽉차 있기 때문에

이제 내려 가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초승달이 중요했어요.

 

이래저래 초승달이 하늘에 비치면 "아, 이거 굉장히 좋은 날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것은 고대 근동은 굉장히 넓은 세계였어요. 넓은 세계에서 아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나 수메르 지방에서는 달신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스라엘 바로 옆 동네 북서

셈어를 쓰는 지역 고 지역에서는 달신이 별볼일이 없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북서셈어를 쓰는 지역에서 달신은 별볼일이 없는 작은 신이었지만 이름이나 지명에서

보여지듯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섬겨지는 신이기는 했었는데 왕권의 상징 정도는 아니었고 어떤 우리가

신화를 보면 아주 형편없는 신이었어요. 그냥 인기 있는 신 정도. 즉 이스라엘의 배경이

되는 주변 나라들도 굉장히 다양했던 거예요. 어떤 데서는 달신이 매우 중요하고 어떤

데서는 달신이 중요하지 않고. 그런데 달신을 섬기던 특히 지역이 달신을 섬기기로 아주

유명한 지역이 있었는데 그 지역이 바로 우르와 하란이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달신 숭배의 중심지는 우르와 하란 두 도시였다

 

우르하고 하란 출신 사람들은 달신을 자기네 신, 매우 중요한 신, 최고신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은 이런 고대 근동의 바탕인 달신 문화를 배경으로 해 가지고

달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게 궁금했는데 우리가 저번 시간에 아브라함을 봤어요.

아브라함이 우르 출신이예요. 게다가 중간에 하란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이스라엘로 들어왔

거든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던 사람이예요.

 

그런데 우르에서 75년이나 살았고 또 이렇게 같은 종족이 같이 움직였잖아요. 아들하고

아버지하고 하인들하고 가축 떼하고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달신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아마 우리가 추측을 할 뿐이지만 아브라함이 왜 75세 되는 날 그 나이에 우르,

정든 도시 거기서 수십 년 살던, 조상 대대로 살던 그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아마 달신을 믿는 사람들과 어떤 종교적으로 갈등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인데 그렇게 추측하는 학자들도 꽤 있는 거죠.

그런데 또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달신 숭배에 대해서 상당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되요. 아브라함의 친척들과 자식들도.

 

그래서 오늘 시간에 볼 고대 이스라엘에서 달신이 문화로서 많이 그 영향이 있는데 아마

최초의 달신 문화를 묻어 왔던, 이스라엘에 문화적으로 ?수입해 왔던 사람들이 누구일까?

그러면 아마 아브라함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우리가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요번 시간은 지난 두 시간에는 고대 근동의 저 먼나라의 아주 이상한 언어를 쓰고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의 달신 숭배 얘기를 하느라고 살짝 지루하셨을지 모르지만 요번 시간

에는 구약성경 이야기만 할 겁니다.

 

# 구약성경과 달신

 

그래서 조금 더 재미있게 들으실 수가 있을 거고 여러분이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할 거고

아, 저런 데서도 벌써 달신 숭배가 이렇게 구석구석에 이미 숨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좀 아실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초하루가 오늘부터 제가 볼 것입니다. 이번 시간

내내 고대 이스라엘의 구석구석에 어떻게 초하루가 있는지를 볼 것입니다.

 

초하루가 중요한 축제라고 그랬죠? 제가 처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열왕기 하권 4장에 있는

수넴여인 이야기인데요. 수넴 여인 이야기는 집에 계신 분들은 성경을 한번 지금 펴 보시도

좋고 그냥 들으셔도 상광 없습니다. 제가 줄거리를 다 말슴들릴테니까요.

 

여기에 나오는 예언자가 엘리사 예언자예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겠지만 엘리사 예언자는

매우 매우 큰 예언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분이세요. 그래서 엘리사 예언자가 얼마나 중요

하신 분인가를 일단 말씀드리고 그 다음 수넴여인 이야기로 잠시 넘어 가겠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위대하신 예언자시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엘리사 예언자의 스승 예언자가 워낙 크신 분이셨어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은 엘리야

예언자였어요. 엘리야 예언자의 최고 오른팔, 수제자, 첫째가는 제자로서 스승의 모든 거를

이어 받은 분이 바로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분이세요.

 

엘리야 예언자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죠? 갈멜산에서 바알 예언자 하고 혼자 1대 450

으로 이긴 아주 영웅적인 분이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엘리야 예언자가 얼마나

큰 예언자이냐? 엘리야의 행적이 과연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는 걸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일화가 마태오 복음서에 있습니다. 마태오 16장에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 말은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같은 말이예요.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같은 의미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지금 엇갈린 대답을 내놓고 있어요. 누구는 "선생님, 세례자 요한 같은 분 아니세요?

그리고 다른 제자는 선생님, 엘리야 같은 분 아니세요? 선생님, 예레미아 같은 분 아니세요?"

이렇게 엇갈린 대답을 내놓고 있는 것이죠. 왜 엇갈린 대답은 내놓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

게 자,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예요? 제자들의 눈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

신 분이 예수님이야."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죠. 그 위대하신 에수님을 그런데 어떻게

표현할까? 제자들이. 우리 스승 예수가 세상에서 최고신대 이분은 어떤 분이신가? 그러니까

자기 머리 속에 최고라는 생각을, 하여튼 이분이 최고인데  스승님은 그런 분이시다라는 대답

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 머리 속에 그래?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던 최고라는 사람은 누구

냐를 우리가 이 대답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

들은 누구를 최고로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랬더니 어떤 분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그랬어요.

세례자 ?요한은 그 당시에 매우 강력하신 분이셨어요. 매우 많은 사람들한테 영향력이 있었던

분이시죠. 그리고 두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하나는 엘리야 하고 예레미아예요.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언자, 우리 스승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분이 누구냐 하면 엘리야 하고 예레미아예요.

 

 

 

엘리야는 그 정도로 크신 분이셨어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데 그 엘리야 예언자의 바로

수제자 예언자가 바로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그런 위대한 분의 이야기다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시고 지금부터 이야기를 들으시면 됩니다.

 

집에 계신 분들은 열왕기 하권 빨리 열어보시면 거기 4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엘리야 예언

자는 승천하셨어요. 돌아가시지 않고 하느님이 높이 올려 보냈어요. 그래서 엘리사 예언자한데

모든 권한을 다 넘겨 주셨는데 엘리사 예언자는 무엇을 받았느냐 하면 스승의 겉옷을 받았어요.

스승이 입던 옷을 그대로 받은 것이죠.

 

그리고 나서 그 겉옷으로 요르단 강물을 딱 치니까 요르단 강물이 두쪽이 났어요. 기적도

똑같이. 모든 권능을 다 물려 받은 분이예요. 즉 정통성 있는 제자죠. 그리고 엘리사 예언자는

그 이후에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다녀요. 많은 기적을 행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수넴여인

이야기입니다. 2열왕 4장을 다 보셨으면 8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게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

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그냥 지나가는데 그 여자가 그 예언자의 명성 이런 걸 듣고 우리 엘리야

예언자를 잇는 큰 분이시다. 그래서 "아, 선생님한테 대접 좀 해 드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어요.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 지역을 지날 때마다 아, 저 부인이 이렇게 모셨으니까 그이 집에 가서

그의 정성을 드시고는 하셨죠.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 이 말을 보면 이 부인만 그렇게 했던 게 아니라 남편하고 같이 그 예언자를

섬겼던 거 같애요. 물론 여인이 더 섬겼던 거 같은데 남편한테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다 하며

정말 믿었던 거 같애요. 엘리사 예언자를. 그리고 그거는  맞는 말이죠? 엘리사 예언자는 그런

훌륭한 분이셨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이런 제안을 해요.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장을 놓아 드립시다.

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수넴

지방 지나가실 때마다 식사만 드시는 게 아니라 좀 이렇게 주무시고 가시거나 쉬어 가실

곳도 하나 마련해 드립시다 하고 남편하고 상의를 하는 거죠.

 

이런 면으로 봐서 이 집안 전체가 엘리사 예언자를 대단히 극진하게 모시고 있었다. 아마

엘리사 예언자도 이렇게 그 정성에 감복을 해 가지고 그 집에 쉬러 들어가게 되었는데 엘리사

예언자도 밥값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늘 옛날 이야기가 그렇듯이 어느날 엘리사 예언자가

자기 종을 불러요. 거기서 며칠 쉬어가고 하다가 이렇게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어요. 13절에.

 

엘리사가 종에게 말하였다. "부인께 여쭈어라. 부인, 우리를 돌보시느라 수고가 많으시오.

내가 부인한테 무엇을 해 드리면 좋겠소?" 그래서 몇 번 이렇게 쉬어 가시다가 뭘 해드리려고

해요. 그런데 그 여인의 대답은 "괜찮습니다." 마치 수줍은  조선의 여인 같애요. 뭘 해드릴려

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하죠. 히브리 여인인데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 것이죠.

 

그런데 엘리사 예언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종을 다시 불러요. 종한테 다시 물어본 거 같애요.

종에게 엘리사 예언자가 이렇게 물어요. "그러면 저 부인한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니가

좀 알아봐라. 이 뜻이죠. 그러니까 종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데다 남편

이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부유하고 또 남편하고 같이 예언자를 모시는 걸로 봐서 화목한

거 같애요. 둘이 함께 모시니까. 하지만 아들 없는 게 하나가 이게 큰 고민입니다 하고 말하는

거 같애요.

 

그래요. 이 여인은 아들이 없었어요. 그 당시는 지금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가부장

사회였어요. 여성을 사고 팔 고 하는 대상이 되었던 그런 세상이었는데 아들을 못 낳으니까

그 고통이 컸던 거죠. 그러니까 종은 거기를 왔다갔다 하다가 그 고통을 본 거 같애요. 그래서

"아들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어요. 하느님의 영을 받아서.

 

그러니까 그 여인이 어떻게 대답을 하냐 하면, 안 믿어요. "어르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이 여종에게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얘길 해요. 안 믿었어요.

처음에는. 난 너무 나이가 들었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동안 많이 노력을 해 봤지만

잘 안 된다. 이런 얘기겠죠. 계속해서  수줍은 조선의 여인 같애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그 여자는 임신하여 엘리사가 말한대로 이듬해 같은

때에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결국 그 정성이 통했어요. 엘리야의 정통을 이은 그 큰 엘리사

예언자는 그 정도 일을 해 줄 수 있었던 거 같애요. 그래서 아들을 얻었어요. 그런데 이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예요. 여기서 끝이 아니예요. 아들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여자가 팔자가 기구했나 봐요.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 어느날 돌연사 해요. 죽었어요. 그냥.

 

그것도 어떻게 죽었냐 하면, 성경에 제 어머니 무릎에 누워 있다가 죽고 말았어요. 그 아이가

어느날 그래서 죽었다. 그래 가지고 엄마가 그 마음에 빨리 달려가서 집에 뉘었는데 그 엄마

무릎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 굉장히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죠. 그런데 영문도 모르

게 자기 무릎에서 죽으면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여기서부터 보통 여인이 아니예요. 여인이 어떻게 하냐 하면, 보통 아들이

죽으면 울고불고 남편한테 알리고 그러잖아요? 이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닌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남편한테 아들의 죽음을 말하질 않아요. 아들이 있던 방, 자기 무릎에서

아들이 죽었는데 그 방을 닫아버리고 남편한테 이렇게 말을 해요.

 

종 한사람과 암나귀 한 마리를 보내 주십시오. 하느님의 사람한테 얼른 다녀와야 되겠습니다.

예언자에게 직접 따지로 가는 거 같애요. 왜 아들을 주셨냐고? 아니면 호소하러 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 여인은 예언자를 만나서 이렇게 얘기를 해요. 28절에,

"제가 언제 어르신께 아들을 달라고 하였습니까?" 워낙 답답한 마음에 예언자를 만나서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죠.

 

수줍은 여인이 아들을 잃고나니까 갑자기 예언자한테 대드는 말도 하는 강한 여인이 됐어요.

그런데 여기서 제가 달신과 관련해서 알려드릴 것은 그 남편의 반응이예요. 남편은 어리둥절

하죠. 아들 죽은 걸 몰라요. 갑자기 아내가 와 갖고 빨리 예언자를 만나고 와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왜 갈려고 그러냐? 왜 오늘 갈려고 그러지? 하고 물어봐요.

 

"왜 꼭 오늘 그분에게 가려고 하오? 오늘은 초하룻날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

이렇게 물어요. 예언자를 만나러 안식일에 가는 건 우리가 이해가 되요. 안식을은 하느님이

일주일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7일만에 쉬신 날이 우리한테는 중요한 날이죠. 그런데 초하룻

날은 달신한테 중요한 날이예요.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는 초하룻날에 예언자를 만나러

가고 그런 일이 있었나봐요.

 

남편이 초하룻날 가는 거 괜찮아. 안식일날 나가는 것도 괜찮아. 오늘은 초하룻날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왜 당신은 찾아가려고 하느냐고 묻죠? 좀 이상하죠? 안식일에 예언자를

만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왜 초하룻날일까? 적어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어요.

 

수넴지방, 이 여인이 사는 곳,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는 초하룻날이 어쩌면 중요한 날이었을

수도 있겠다. 초하룻날에 달신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러 가면은 아마 용서가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측해 볼 수도 있죠.

 

* 구약성경의 '수넴여인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신앙에서 초하룻날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 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부터 얘기드릴 건 수넴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의 이야기인데요. 거기서도

나와요. ?지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실에서도 초하룻날이 중요하였다 하는 걸 말씀드리

려고 해요. 수넴여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수넴지방에서는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걸

남편의 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의 왕실입니다. 다윗 이야기예요.

 

사무엘기로 갈 겁니다. 사무엘기는 다윗의 행적을 전하는 훌륭한 책이죠. 여러분 잘 아시겠

만 다윗은 굉장히 예쁘고, 노래도 잘 하고, 뭐든지 다 잘하는 그런 아주 용모도 출중한

아이였고 처음에 사울의 총애를 받았죠. 그런데 사람들이 점차점차 사울보다 다윗을 좋아

하게 되니까 ?사울 임금이 시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윗을 없애버리려고 했죠. ?요놈을 그냥 놔뒀다가는 나중에 내 왕위를 넘보겠구나.

사실 그 말은 맞았어요. 그 사람이 쫓겨나고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사울은 그래서

다윗을 경쟁자로 여기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어요. 1사무 20장을 보면 다윗이 목숨을 간신히

건져서 여러 번 다윗은 위기를 맞았는데 그 중에 한 번이예요.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윗이

어디로 누구를 찾아가냐 하면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을 찾아가요. 왜냐하면 요나탄은 자기

아버지보다는 다윗 편이었어요. 요나탄에게 가서 이렇게 하소연을 해요.

 

* 1사무 20,1: "제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왕자님의 아버님께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분께서 이렇게 제 목숨을 노리신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소연을 해요. 왕자한테. 그러자 요나탄이, 왕자가 "아, 그럴리가 없다." 그러면서

만약에 아버지가 너를 죽이려고 하면은 내가 아버지 편이 아니라 네 편을 들어주겠다. "

이런 말을 해요.

 

* 1사무 20,4: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겠네." 여기서 다윗고 요나탄은 굉장히

우정의 대명사로 나옵니다. 우리가 동양에 관포지교가 있다고 그러면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우정의 대명사도 다윗고 요나탄이 있지요. 요나탄은 어떤 면에서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죠.

아버지의 경쟁자 다윗을 돕고 있으니까.

 

그래서 큰 우정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고 여러분이 신학공부를 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부 성서학자들은 다윗과 요나탄이 동성애 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구절은 구약성경에 없고요. 어쨌든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남자가 각별했던

거는 사실이예요. 왜냐하면 1사무 20,17에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였다 라는

구절이 나오거든요.

 

그걸 굳이 동성애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애요. 남자들 간에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까요. 다윗은 자기 목숨을 걱정하였어요. 그래서 요나탄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내일 임금과 우리 왕자들과 같이 하는 식사가 있다. 거기 내가 꼭 가야 되는 식사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가면은 임금이 나를 죽일꺼다. 그러니까 내가 갈 수가 없다. 거기 식사에 못 간다.

 

그런데 식사에 못 가는 핑게가 있어야 되지 않냐? 그러니까 왕자가 그 자리에 있다가 아빠가

나를 찾으면 잘 좀 얘기 좀 해 줘라. 이렇게 부탁을 해요. 그런데 그 말이 재미있어요. 다윗이

하는 말이 이래요. 1사무 20,5입니다.

 

* 1사무 20,5: 그러자 다윗이 요나탄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내일이 초하룻날입니다.

  제가 임금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모레 저녁때까지

  들어 숨어 있도록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초하룻날에 뭔가 왕궁에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식사를 하는 게 있는 거예요. 그 식사

자리에 가야 되는데 초하루라서. 내가 못 가게 됐다. 그러니까 요나탄이 다윗에게 내가 그렇게

해 줄께 내일은 오지 말고 몸을 숨겨라. 이렇게 하면서 의리 있는 모습을 보여 줘요. 그러면서

또 한번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나탄이 다윗에게,

 

* 1사무 20,18: 요나탄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일은 초하룻날이니, 자네 자리가 비면

  아버지께서 자네를 찾으실 걸세."

 

비면 찾는다는 거죠. 이 대화에서 이스라엘의 왕실에서는 초하룻날에 특별한 식사가 있었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임금의 식사는 그냥 사사로이 하는 게 아니죠.

그런 특별한 식사는 어떤 특별한 전례나 특별한 의미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죠.

 

초하룻날 적어도 이스라엘의 왕실에서는 적어도 사울시대 초창기에서는 뭔가 특별한 전례와

특별한 식사를 한 거 같애요. 이런 면에서 초하룻날은 마치 우리가 아무 인식도 못하고 우리가

불교 문화도 누리고 살고, 샤머니즘 문화도 누리고 살고, 유교 문화도 누리고 살잖아요. 천주교

신자지만.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공통된 문화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종교라고 인식을 안 하고 사는 거죠.

아마 그렇게 초하룻날을 인식하면서 살았던 거 같애요. 그런 식으로 달신 숭배는 아주 간접적

이지만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쳤던 거 같애요.

 

* 사무엘기 상권의 다윗고 요나탄의 대화는 이스라엘 왕실에서 '초하룻날'이 특별한 전례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게 이스라엘 왕궁에서 영향을 끼쳤다면은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이스라엘의 성전에서도,

야훼를 믿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달신 숭배의 초하룻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씀을 여러분

한테 드릴 겁니다. 이스라엘 성전에서 초하룻날은 어떤 의를 지녔을까? 초하룻날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전례력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어요.

 

* '초하룻날'은 이스라엘의 전례력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레위인 아시죠? 성경에 사제도 나오고, 레위인도 나오고, 예언자도 나오고, 여러 사람이 나오는

는데 레위인들의 임무는 성전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레위인도 그렇지만

다른 성경 구절 곳곳에서 레위인들은 이날 뭐를 어떻게 해야 된다. 이날 뭐를 어떻게 해야 된다

라는 규정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굉장히 촘촘한 규정들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예요. 중요한 사람들이죠.

 

그거를 안타깝게도 우리가 성경 구절만 가지고는 그거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지금은. 하지만

몇몇 구절에는 아주 자세히 규정되어 있죠.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은 특히 절기를 잘 지키는

거예요. 어느 날은 뭐 하고?, 어느 날은 뭐 하고 하는 거를. 지금도 그렇지요. 성당에 가 보면

그 날짜가 굉장히 주요하죠.

 

* '초하룻날'은 성경에 기록된 종교적 절기를 엄격히 지켰던 레위인들의 여러 기념일

  중 하나였다

 

레위인들이 지켜야 되는 기념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초하룻날이 있어요. 하느님을 믿는

레위인들이 초하룻날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1역대 23,31에 보면

 

* 1역대 23,31:또한 안식일과 초하룻날과 축일에 주님께 제물을 바칠 적마다, 법규에

  따라 정해진 때에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 ?

 

즉 안식일에 번제물을 바치는 건 우리가 이해가 되죠. 축일에도 돼요. 여러 가지 축일들.

하지만 초하룻날에도 주님게 번제물을 바쳤던 거 같애요. 그리고 그 때에 그들은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지금 안식일과 초하룻날과 축일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만일에 ?이 축일을 나열한 순서가 만약에 중요한 것대로 순설를 나열했다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거든요. 중요한 걸 앞에 놓죠.?

 

그러니까 안식일이 가장 중요했고, 초하룻날이 그 다음으로 중요했고, 그 다음에 다른 축일들,

기타 축일들 이렇게 분류하는 거죠. 그러니까 초하룻날은 그냥 축일이 아니라 초창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축일로, 그 정도로 깊이, 널리 퍼진 문화였다는 것이죠. 적어도 안식일 다음이

지만 다른 축일보다는 앞서는. 그 다음으로 갈 것은 예언자입니다.

 

* 고대 이스라엘에서 초하룻날은 안식일 다음 가는, 다른 축일보다 앞서는 중요한 축제일이었다

 

시간의 한계상 제가 규정을 여기서 더 읽어 드릴 수는 없는데요. 이 구절 말고도 초하룻날을

축일도 규정한 것들은 구약성경에서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구약성서를

보시다 혹시 초하룻날이 나오면 아, 이거는 우리가 달신을 믿었던 게 아니라 그냥 그 당시의

문화구나. 이렇게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넴지방에서 그렇게 했었다는 걸 봤고, 왕궁에서 그랬다는 걸 봤고, 성전에서

그랬다는 걸 봤죠? 이제는 예언자들이 어떻게 말을 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

의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예요. 점쟁이가 아니예요. 미래의 점을 치는 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시는 분들인데 그들도 초하룻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예언자들마다 살아

온 시대가 다르고, 또 살아온 환경이나 임무가 다 다르기 때문에 말하는 맥락은 다 틀려요.

 

그런데 ?여러 예언자의 말씀 속에서 초하룻날이 중요한 축제로 얘기되고 있어요.

제가 세 분만 말씀드릴텐데 첫 번째는 아주 유명한 예언자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중요한신 분이죠. 이사야 예언자는 거짓 경신례를 경고한다. 이런 걸 많이 하셨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제물을 아무리 잘 바치고, 아무리 행을 잘 피우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셔야 되는 거죠.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종교적인 축제를 아무리 크게 열고, 아무리 축일을 잘 지킨다 하여도 소용이 없죠.

우리 마음이 일단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진심으로 믿어야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씀인데 성당에 다닐 때도 껍데기만

다니면 안 되죠. 마음으로 다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아, 이렇게 껍데기로 다니는

사람들한테 좀 경고를 하세요. 어떤 식으로 경고하냐 하면, "주님의 말씀이다"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 이사 1,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어떤 축제 모임, 축일 아무리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재미있어요.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여기서는 초하룻날이 더 앞우로 갔어요.

아마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도 사람들이 초하룻날, 안식일 이렇게 지켜 가면서 뭔가 했는데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형식적인 거 다 필요없고 마음으로 믿어야 된다. 이런 말씀을 주신 거

같애요.

 

마음이 없는 금, 은 보화는 필요가 없다라는 것을 여러분이 루카 복음서 21,1-4에 나오는

과부의 동전 한닢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부자들이 아무리 많이 바치는 것보다

과부가 동전 한닢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죠? 두 가르침이 이제 같습니다.

그런 중요한 대목이고요.

 

두 번째로 볼 예언자는 미카 예언자와 아모스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은

예언자이시고 ?요즘 식으로 하면 이분들은 아마 운동권이셨을 거예요. 예, 성경에서 아주

정의 얘기를 많이 하시는 분들인데 이 두 예언자도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 하고 굉장히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아모스는 경제적인 착취를 일삼는 불의한 계급을 많이 경고했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 경고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도량형을 속이는 비열한 자들이다. 저울추를 속이는 거죠. 그런 식

으로 이제 뒤로 돈을 빼돌리는 사람들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했는데 어떤

식으로 비판을 했느냐 하면, 겉으로는 종교적인 축일을 나는 잘 지키네 하고 축일도 안 빠지

고 잘도 다니지만 사실은 축일 다 끝난 다음에 장사를 하면서 도량형을 속인다.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신 거죠. 여기서 그 비판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보겠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이 쎄신 분이시죠.

 

* 아모8,4-5: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그들이 하는 말들을 예언자가 받아서 질타하는 내용이예요. 비판을 하는 내용인데 그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죠.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초하룻날 빨리 잘

지킨 다음에 고 전례에 앉아 가지고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요고 빨리 지나면 언제 또 뭘 팔자.

이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그리고 에파하고 세켈은

단위인데 에파는 작게 하고 세켈은 크게 해서 가짜 저울을 만들어서 속일 생각을 그 축제에

와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겉으로 아무리 와서 축제에 다녀봤자 소용이 없다. 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예언자 한 분만 더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 예언자

입니다. 호세아 예언자 잘 아시죠? 사랑의 예언자. 왜 사랑의 예언자라고 하냐 하면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 하고 우리 하느님의 백성, 우리 교회의 관계를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표현을 했거든요. 그리고 이거는 굉장히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을 해서 예수님도 그렇고

우리 교회도 굉장히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하고 우리 교회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인데 그런데 하느님은 변하지 않고

계속 사랑을 주시는데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한테 계속 사랑을 드리면 좋겠는데 그렇게 못

하죠. 그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표현을 했냐 하면, 우리 하느님 백성을 하느님을 배신한

여성 남편을 이렇게 배신한 바람난 여성 이렇게 표현을 했지요. 사랑의 배신자. 이게 우리죠.

무슨 영화 제목 같죠? 우리가 사랑의 배신자예요.

 

그 사랑의 배신자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축제를 기뻐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하느님한테

마음이 돌아가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무슨 전례를 나간다. 무슨 축일을 나간다. 이런 거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죠.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바람난 이스라엘 한

테는 축제가 필요없다. 마음이 먼저 돌아와야지.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 호세 2,13: 그 여자의 모든 기쁨 축제와 초하룻날과 안식일 그 여자의 모든

  축일을 없애? 버리시리라.

 

너한테는 이런 축일이 필요없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도 역시 축제와 초하룻날과

안식일 이렇게 나열을 해요. 아, 이렇게 중요한 달신 숭배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이렇게

널리 퍼져 있구나. 여러분들도 이 강의 전에 많이 못 들어 보셨지요? 달신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들아와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강의에서 볼 것은 우리는 지금까지 유배 이전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녔어요.

예언자들도 가고, 지방도 가고, 왕궁도 가고, 성전도 갔는데 그러면 이게 언제까지 지속이

되었을까? 유배 이후에도 지속이 되었어요. 그래서 유배 이후에 그것을 말하는 문서를

여러분한테 이제 말씀드리려고 해요.

 

* 고대 이스라엘에서 초하룻날을 중히 여기는 관습은 유배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진다

 

초하룻날을 중히 여기는 관습은 유배 이후에도 면면히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생명력이 질긴 문화라고 할 수 있죠. 문화는 사실 잘 안 변하죠.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 안 변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지금 여기가 평화방송이 명동에 있잖아요. 여기 종로

이쪽에서 500년 전에도 일하고 나서 여기서 국밥을 먹었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국밥을 먹고 있죠. 옷이나 말이나 생활상이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 우리가 먹는 문화는 잘

안 변하죠. 그거 비슷한 거 같애요.

 

저번 시간에 우리가 유배가 끝나고 귀환한 백성들이 유배에 끌려 갔을 때는 아, 하느님이

우리를 다 버리셨나보다. 아주 절망에 빠져 가지고 한탄하고 비탄하고 이랬는데 이제 돌아

오면서 기쁨에 들떴어요. 아,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역시 우리 하느님이시

구나. 우리가 하느님 신앙이 잘못되지 않았구나. 이렇게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지으면서 백성들이 굉장히 기쁨에 찼고 굉장히 자신감이 차 있는 장면을 우리

가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주님의 성전을 정성들여서 다시 짓고 거기서 다시 야, 우리가 유배가서

잘못했지만 이제는 하느님을 거기서 제대로 모실 수 있다라고 하면서 이제 기쁨에 들떴어요.

그런데 이제 돌아와 갖고 새 성전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전에 하던 대로 번제물을 바쳐야

죠. 제사를 바쳐야죠. 제사를 바치는 그거를 어떻게 표현을 하는가?

 

* 에즈 3,5: 그 뒤로 그들은 일일 번제물 외에, 초하룻날과 주님의 모든 거룩한 축일에

  드리는 모든 이의 제물을 바쳤다.?

 

일일 번제물은 성전을 다시 지었으니까 거기서 매일 미사 바치듯이 매일 이렇게 바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축일에 따라서 바쳐야 되는데 여기서는 초하룻날과 기타 이렇게

분류가 됐어요. 갖다 와서도, 유배 갔다 와서도 초하룻날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거죠. 기껏 유배를 다 끝내고 하는 일이 초하룻날을 지키는 것이었어요. 그만큼 이 사람

들은 초하룻날이 아마 달신 숭배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던 관습으로 생각했던

거 같애요.

 

비슷한 시기에 에즈라기 하고 비슷한 시기에 나온 느헤미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아기에 보면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을 지상 최고의 보배로 여겨서

굉장히 그 성전을 귀하게 여기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의 집의 전례를

정성스럽게 다듬고 꼼곰하고 정확한 규정을 마련하였지요. 그래서 이런 규정을 씁니다.

 

* 느헤 10,33-34: ?우리는 또한 이러한 규정을 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의 집의

  전례를 위하여 해마다 삼분의 일 세켈씩 바친다. 이는 두 줄로 차려 놓은 빵, 일일 곡식

  제물, 일일 번제물, 안식일 제물, 초하룻날 제물, 축일 제물, 거룩한 예물,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속죄 예물,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하는 모든 일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느헤미아기에서도 똑같이 초하룻날을 다시 챙기는 어떤 날로 이렇게 나와 있습니

다. 이걸 보면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종교를 연구하는데 우리가 초하룻날을 중요하게 생각

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왜 고대 근동

의 달신을 보는가는 사실 이것 때문에 그래요.

 

문화적으로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달신 숭배 문화가 구체적으로 어디서부터 왔는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우리가 알면은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래서 저번에 두 시간에 걸쳐 가지고 조금 복잡하지만

고대 근동의 달신에 대해가지고 우리가 쭉 봤던 거죠.

 

강의를 다시 보기로 들으시는 분들은 한번 들어보시면 아, 그래서 이스라엘도 이렇게 널리

퍼진 문화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큰

나라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살았잖아요. 조공 바치고, 끌려가고, 패하고. 그러니까 큰

나라의 문물을 수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마지막으로 볼 것은 유딧기입니다. 유딧기는 여전히 초하루가 중요한 날인데 경건한 여인

유딧의 행실을 전하는 구절입니다. 유딧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영웅적인 여인인데 그

유딧은 어떤 여인으로 소개되냐 하면, 처음에 굉장히 하느님을 곧이 곧대로 믿고, 착하고

신앙심  깊은 아주 경건한 여인으로 나오거든요. 그 여인이.

 

유딧도 그렇지만 수넴여인도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 두 분이 좀 비슷한 면이 있는데 두 분이

다 초하룻날을 믿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딧은 과부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와 있어요.

 

* 유딧 8,6: 그리고 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안식일 전날과 안식일, 그믐날과 초하룻날,

  이스라엘 집안의 축제일과 경축일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단식하였다.

 

유딧은 안식일만 지킨 게 아니라 안식일 전날도 지켰어요. 그믐날과 초하룻날. 초하룻날만

지킨게 아니라 초하룻날 하고 그믐날도 지켰어요. 이 사람은. 그런데 둘 다 하루 차이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집안의 축제일과 경축일 말고는 하루도 빠짐 없이 단식을 하였다.

중요한 축일 외에는. 여기 단식하였다는 건 다이어트를 했다는 말이 아니라, 몸매를 위해서.

하느님을 믿는 그거를 위해 가지고 종교적으로 단식하였다. 이 뜻이죠.

 

수넴여인으로부터 우리가 봤어요. 고대 이스라엘의 달신 숭배가 얼마나 많이 퍼졌는지.

지금 요기 한 시간(45분) 강의를 제가 마련 하느라고 다른 구절을 많이 뺐는데 이 외에도

초하룻날은 많이 나옵니다. 처음에 수넴여인서부터 마지막에 과부 유딧까지 한번도 빠짐

없이.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정황을 이야기 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달신 숭배를 믿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문화가 퍼져 있었다는 거예요.

 

고대 이스라엘은 위치가 굉장히 절묘하게 되어 있어요. 계속 강조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자리잡은 약소국이예요. 그런데 전략적인 요충지에 약속국이 자리잡으면 그 약소국은 사기

힘들어요. 큰 나라 사람들이 자꾸 휘두르니까. 그리고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랬고. 이 작은

나라는 땅도 좁고 인구도 적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큰 나라 사이에서 교역을 하는

것 밖에 없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장사를 잘 했지요.

 

교역이 ?잘 되서  잘 크면서 돈을 잘 벌고 잘 되는데 만약에 큰 나라들이 쳐들어오면 속절

없이 망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 문물을 잘 알고 있었고

많이 배웠고, 또 그들과 장사를 오래 할려면 신용도 쌓아야 되고, 서로 편지도 교환하고

이야기도 하며서 그 문물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던 거 같애요.

 

그래서 아마 사울 왕실에서도 다른 나라 왕실에도도 초하룻날을 지키니까 지켰던 거 같고,

그런 풍습이 널리 퍼졌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과연 수용하기만

했을까? 달신 숭배가 그냥 문화로만 들어왔을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 중에서 그거를

비판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아무런 저항이 없었을까? 고대 이스라엘은 유일신 신앙을 키워

나가는 공동체, 하느님의 백성이었잖아요.

 

?달신 숭배가 아무리 널리 퍼져 있다 하더라도 야, 그거 그래도 달신 문화는 원래 다른데서

온 거야. 초하룻날은.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안 하는 게 사실은 더 좋아라고 얘기하는 그런

집단들이 없었을까? 있었어요. 지금 여러분한테 말씀드린 건 수용되는 측면만 말씀드린

거예요. 그에 저항하는 뭔가 있었어요. 원칙을 세울려고 하고 이스라엘의 신앙을 세울려고

하는 뭔가가 있었어요.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이시잖아요. 달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세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죠? 가난한 히브리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신 하느님이세요. 그분만 믿어야

되고 그분 믿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다 없애 버리자. 아니면 우리가 다 뒤로  미루자 하는

그럼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달신 숭배가 널리 퍼진 것을 불안해 하고 달신 숭배를

우리가 극복하자 하는 신학자 집단ㄷ르이 있었고 또 그분들의 기록도 구약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그 신학자들의 노력을 크게 두 가지 길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명기계의

길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달신 믿지 마라 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 길은 제관계의

길인데 창세기 하고 창조시편에 많이 나오는 길입니다.

 

*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의 달신 숭배 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신명기계와 사제계

  (제관계) 학자들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달을 다른 신이 아니다.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달은 자동으로 신에서 떨어지는 것이죠. 그냥 이렇게 물건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땅이나 무슨 돌처럼. 그렇게 되면 달신도 믿지 않겠죠?

 

이 두 가지 노력이 있는데 고 구조를 제가 말씀드리고 마지막으로 욥기에서 달에 대해서

욥이 한탄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걸 보면은 아, 우리와 이렇게 참 다르구나 하는 걸 여러분

이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거를 다음 시간에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주일만 참아 주시면 강의를 들으실

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10강 달의 날과 해의 날ㅡ 일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옮겨 온 곳 주소: http://cafe.daum.net/bible100weeks

* 주원준 박사님 계신 곳(성경 관련 질문하실 수 있는 곳): http://biblicum.or.kr/bbs/board.php?bo_table=QnA

* 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6875%26menu_fid%3D6891&program_fid=6875&menu_fid=6891&cid=&yyyy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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