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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희망신부님의 글)
작성자김은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28 조회수713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마태 5,17-19)

찬미예수님~~

오늘 우리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아, 이제 너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의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 곳을 차지 할 것이다.” 하고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법규와 규정들을 지키면 살고, 잘못 지키면 죽게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켜서 해방시켜 주시고, 홍해 바다를 마른 발로 건너가게 해 주시고, 사막에서 물을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만나를 주시고, 그런 수많은 은총들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우상숭배를 하던 조상들의 죄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아는 것입니다. 또 계속 하느님의 법에서 어긋나 몇 번이고 유배 생활을 하는 조상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만큼은 적어도 조상들처럼 살지 말자하면서 예언자들의 무덤을 잘 꾸미고 철저하게 법을 잘 지켜서 더 이상 조상들과 같은 잘못을 범하면 안된다하면서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 있어서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고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는 것도 다 일이다 하고, 5리 이상 걷는 것도 일이라 하고, 누가 아프고 병들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고, 성구 갑을 만들어 성구를 아침저녁으로 외우면서 아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로 변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을 섬기고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무섭고 두려운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저 사람 죄인이다 아니다 판단해서, 어떤 죄녀라든지, 죄인이라든지, 세리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거의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과 너그러우심이 이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모습으로 보여 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잣대로 계명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조상들이 계속해 하느님의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세우고서 아주 철저하게 하느님의 법을,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완성이 뭐냐 완성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에서 제외되길 바라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 죄인이든 병든 사람이든 회개하여 돌아와 구원의 길로 나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천년이 지나오면서 오늘날 이시대의 모습은 어떤가!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지금의 유럽의 신학자들은 지옥도 없다, 마귀 사탄도 없다고 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남미나 유럽이나 미국에서 낙태법 이라든지 동성 혼인법이라든지 하는 것이 국가법에서 통과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은 하느님의 계명과 정반대되는 법들이 가톨릭 국가들에서 통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하느님의 법이 하느님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수십 년 전만해도 주일에 일을 하려고 하면, 본당 신부님에게 파공신청을 해서 허락을 얻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계명들이 다 없어져서 주일에 놀러가고, 주일미사에도 지키지 안 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지금 주일미사에 40%가 나온다고 하지만 나머지 60%는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은 신자가 아닙니까?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가 십계명 중에 세 번째 계명인데 이런 계명들이 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일이 먹고 즐기는 레져생활로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속들도 아주 난잡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우리 영혼이 죄에 대하여 무디어 졌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중세에는 너무 죄 죄 해서 덜덜 떨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반대로 죄에 대해서 인간들이 무디어 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보면 말도 못할 정도여서 술 마시고 23차로 여자들이 있는 술집에 가서 즐기고 노는 이런 모습들, 죄에 대해서 아주 둔감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괜찮겠지. 많이 배운 사람이건 적게 배운 사람이건,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건, 하위직에 있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오죽하면 글로리아라는 치과 의사를 죽였다가 다시 살리셨겠습니까! ‘벼락을 맞았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얼마나 죄가 무서운가! 우리 영혼을 무디게 만드는가가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죄에 대해서 너무 무디게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을 도외시키고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 없이 자기들 끼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럽 교회를 따라가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유럽교회가 그런 모습입니다. 주일에 미사도 안 나가고, 그리스도교가 그 사람들의 풍습이나 문화지 참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탄절, 부활절에 성당에 가는 것이 풍습이지, 신앙이 아니란 것입니다. 거기엔 대죄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즐기면 된다는 문화가 만연해 있어 도도히 크게 흘러가고 있어서 젊은이들도 그런 문화에 젖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린아이들은 죽이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고 왔다고 하셨는데 예수님 시대는 너무 율법주의에 빠졌다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너무 하느님을 도외시해서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무뎌졌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도 낙태는 살인죄라고 알면서도, 나라에서 둘만 낳으라고 하니까 신자 아닌 사람들과 똑같이 남들이 하니까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이 우리 삶의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이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계명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라 했고, 다른 복음에서는 남을 죄짓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서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겠다는 표현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주일의 의무를 지키고, 가족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내게 죄에 대해 무디어진 모습들이 있다면 정말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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