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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12강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29 조회수1,039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 제12강-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

  

 

강의에 들어가며...

 

# 네 바람

 이집트와 그리스 신화처럼 구약성경에도 ‘네 바람’이 나온다. 고대 근동에서 ‘넷’이란 수는 동서남북,

곧 온 세상을 상징하는 완전수로 자주 쓰였다. 고대 근동에서 4는 중요한 숫자였다. 동서남북 네 방향을

뜻해서 온 세상, 완전함 등을 뜻했다. 이런 완전한 숫자 4에다 10이라는 또 완전한 숫자를 곱한 40은

정말로 의미가 충만한 숫자였다. 그래서 ‘하나의 완전하고 충만한 시간’을 표현한데 쓰였다.

 

그리고 구약성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에서 몇 년을 지냈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단식한 기간은 얼마인가. 혹시 다윗이 몇년을 통치했는지 아시는가? 솔로몬은?

예수님의 단식은 며칠 걸렸나? 왜 40인가? 히브리인들이 40년을 방황했다는 것은 39년과 41년 사이가

아니다. 예수님 광야 생활도 그렇다. 그 의미는 ‘온전히 하나의 충만한 시간, 완전하고 빈틈없는 온전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성경은 숫자를 통해 단순한 팩트,사실을 전달하지 않는다. 숫자를 통해 궁극의 의미, 참된 진리를

전달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네 바람을 보자. 온전한 바람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늘 네 끝에서 (오는) 네 바람”을 하느님의 명령을 받는 존재로 묘사한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엘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활을 꺾어 버리겠다.
 내가 하늘 네 귀퉁이에서 네 가지 루아흐들(바람들)을 몰아와,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겠다(예레 49,35-36).

 

 다니엘서 7장의 “하늘의 네 바람” 또한 고대 근동 신화의 흔적이다. 이 본문은 유배 이후에 나왔는데,

유배 이후에도 이런 신화적 모티프가 여전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이 말하였다.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네 루아흐(바람)가 큰 바다를 휘저었다(다니 7,2).

 

 # 바람은 하느님의 종
 루아흐는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존재다. 하느님의 종이다. 이집트 탈출 사건의 재앙이 나온다.

몇가지? 10가지. 그런데 그 재앙이 모두 신화적이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 재앙을 기억하시는가?  

8번째 재앙은 메뚜기 소동이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이 루아흐를 시켜 일으키신 것이다.

 

 모세가 이집트 땅 위로 지팡이를 뻗자, 주님께서 그날 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그 땅으로 동쪽의 루아흐(샛바람)를 몰아치셨다.
 아침이 되어 보니, 동쪽의 루아흐(샛바람)가
 이미 메뚜기 떼를 몰고 와 있었다. (탈출 10,13).

 

 자 그럼 이제 시편을 볼까요? 아래 시편의 두 구절은 야훼 하느님의 신원을 묘사한다.

하느님은 바람을 끌어내시기도 하고, 사자로 삼으시기도 한다. 하느님은 ‘바람을 종으로 삼으신 분’이다.

 땅 끝에서 구름을 올라오게 하시는 분.
 번개로 비를 만드시고
 루아흐(바람)를 그 곳집에서 끌어내시는 분(시편 135,7)
 
 루아흐(바람)를 당신 사자로 삼으시고
 타오르는 불을 당신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시편 104,4)

 

 이 전승은 신약 시대로 이어진다. 상징적 언어를 풍요롭게 사용하기로 유명한 요한 묵시록에 이런

고대 근동 신화의 흔적이 쉽게 발견된다. 네 바람은 네 천사의 통제를 받는다. 하느님은 천사를 통해

네 바람을 부리시는 분이다. 요한 묵시록은, 어려운 본문이지만 이 신화의 언어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다. 그다음에 나는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서는 땅에도

바다에도 그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7,1)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님이 풍랑을 가라앉히신 대목이 나온다. 호수에 작은 배 한 척을 띄워 예수님과

제자들이 탔다. 돌연히 풍랑이 일자 제자들은 허둥지둥하며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웠다. 그러자

그분이 제자들에게 겁내지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26)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도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셨다고 전한다
  (마르 4,39; 루카 8,24)

 

 이 대목에도 천방지축 바람의 신이 가장 높으신 분께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모티프가 들어 있다.

고대 근동 신화의 세계에 살던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데체 바람은 언제부터 하느님의 종이었을까? 놀랍게도 천지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바람은 하느님의 도구였다. 아래 구절의 ‘하느님의 영’은 직역하면 ‘하느님의 루아흐’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루아흐(영)가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 바람과 하느님의 현현

이처럼 루아흐는 하느님의 명을 따른다. 이제 역으로 생각해 보자.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바람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하느님이 나타나신다는 징조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바람이 신의 자리를 잃고 마치 선풍기나 진공청소기처럼 그저 하느님의 도구로 되어버렸음을 보았다.

이를 탈신화화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바람이 하느님의 전조를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야훼 신앙,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안에서 바람이 일정하게 신성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바람의

재신화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렇게 탈신화화와 재신화화 과정을 하늘신과 달신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제 바람신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 바람은 파괴의 도구
 그런데 주님의 바람이 선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꾸짖는데도 바람을 쓰신다.

이런 면에서 야훼 하느님의 루아흐는 때로 파괴의 바람이고, 공포를 일으키는 분노의 바람이다.

비탄의 예언자 예레미야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발, 마지막 기회가 있을 때 잘 하자고. 예언자는 하느님이 ‘파괴하는 바람’을 일으키셨다고 전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내가 바빌론과 렙 카마이 주민들을 향하여
 파괴의 루아흐(파괴하는 바람)를 일으킨다(예레 51,1)

호세아 예언자는 파괴하는 바람이 곧 주님의 바람이라고 알려 준다. 샘과 우물을 말려 버리는 뜨거운

동풍이 주님의 바람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동풍(샛바람)은 주님이 벌을 내리시는 도구라고 말한다.

에프라임이 형제들 가운데에서 번성하여도
동쪽의 루아흐(동풍)가 불어오리니
광야에서 차올라 오는
야훼의 루아흐(주님의 바람)가 불어오리니
그의 샘은 마르고
우물은 메말라 버리리라(호세 13,15)

그분께서는 그를 내몰고 내쫓으시어 벌하시고
샛바람이 부는 날 그를 거센 바람으로 몰아내셨다(이사 27,8)

 

제12강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다

 

안녕하세요? 우리 성호경 바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 일주일 만에 뵈니 아주 반갑습니다. 자, 오늘은 12번째 강의입니다. 

12번째 강의로서 바람신에 대해서는 2번째 날입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이제 여러분들한테

계속 고대 근동의 신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벌써  2개의 주제를 다 다루었고요. 하늘신 하고

달신은 다 다루었고 이제 바람신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일주일 전에 고대 근동의 바람신에 대해서 들으셨을텐데, 이번 시간 강의를

위해서 조금 상기시켜 드리는 의미에서 저번 시간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본격적인

강의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번 시간에 저희가 바람신을 보기 위해서 준비 운동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일단 우리는 지금 현대의 합리주의, 과학의 시대에 사는데 이렇게 인류가 산지는 실은

인류 역사 한 5천 년, 만 년 어떻게 잡든지 그 수많은 역사 중에 한 500년 밖에 안 되요.

그전에는 그렇게 합리주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이 그렇게 발달하지도

않은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과거의 사람들이 불행한 건 아니거든요. 훨씬 더 우리보다 더 큰 의미의 세계에

살고 있었죠. 우리는 바람이 "공기의 흐름이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사실은 바람은 우리 인간

생활에서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바람은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의 말을 보면 여러가지 우리가 예술 작품이나 말을 통해서 바람을 여러가지

빗대어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바람을 과학의 바람이 아니라 우리가 의미의 바람, 문학의

바람, 시의 바람 이렇게 느끼는 게 일단 중요하다고 말씀드렸고요.

 

그 다음에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이스라엘 지역에서 바람은 어떻게 부는가 했는데 서쪽에서

오는 바람은 촉촉한 바람, 때로는 태풍을 동반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촉촉하고 습기를 머금

은 좋은 바람이고.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덥고 뜨거운 바람.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에는 촉촉한 바람(서풍), 뜨거운 바람(동풍)

                                등 다양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그런 아주 쎈 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도 역시 여기와 거기는 많이 다르구나. 이슬에 대한 것도 많이 다르구나

하는 것도 느꼈었고.

 

세 번째로 이제 바람신은 어떤 존재인가? 그 동네에서 했는데 동부셈어를 쓰는 지역,

메소포타미아 그쪽에서 바람신은 별볼일 없는 신, 그냥 뭐 신중에 하나, 이 정도였는데

이집트에서는 꽤 중요한 신이었는데 그 바람신의 이름이 굉장히 재미있었지요?

'슈'Shu. '슈-우' 불어오는 그런 '슈'가 바람심이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동부셈어를 사용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람신은 큰 힘이

  없었지만,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바람신 '슈'Shu가 있었다

 

복습을 하나 해 볼까요? 히브리 말로 바람이 어떻게 된다고요? '루아흐'죠. 바람도 되고

성령도 되는. 오늘은 루아흐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짝 맛배기로  지난 시간에 구약성경의 바람을 봤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 하는 표현을 봤어요.

 

바람이 마치 무슨 용이나 봉황 같은 이상한 상상력의 동물 같은 이런 걸 봤지요.

그리고 바람이 나올 때 바람과 좀 비슷하게 묘사가 된 거 같은 커룹이라는 것도

봤습니다. 그렇게 이제 그런 상상의 동물들이 성경에 나온다고 해서 성경이 비과학적이다.

비합리적이다. 성경은 뭐 옛날 책이라서 믿을 게 못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은 굉장히

잘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는 성경은 어떤 큰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표현을

갖다 쓴 것 뿐이죠.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의 어떤 표현을 잘 모르고 지금 우리 기준으로

판단하면은 안 되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한다면 지금 우리는 굉장히 미개한 사람들

이에요. 몇백 년 후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은.

 

우리는 우리 세대 안에서 하느님한테 가장 좋은 걸 드리고 하느님을 우리가 생각하는

한에서 가장 최고로 찬미하면 되는 것이죠. 인간이 허락한 공간 안에서 그렇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고, 미래의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겁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모두 똑같이 인간을 굽어 보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그 시대의 생활 속에서,

시대의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나? 이런 거를 이제 보고 있는 것이죠.

지금. 자, 이제 이번 시간에는 구약성경의 바람을 조금 더 깊게 맞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 말에 제가 여러분들한테 상징수 4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번 시간에는

그거를 다시 한번 복습하면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네 바람

 

상징수 넷이라는 숫자가 동서남북을 말하기 때문에 중요한 숫자다라는 걸 제가 말씀드렸죠.

그래서 우리 동양에서 4는 죽을 4자라고 해서 별로 안 좋은 숫자인데 고대 근동에서 4는

매우 중요한 숫자였고 길수였습니다.

 

* 고대 근동에서 '넷'이라는 수는 동서남북, 온 세상을 상징하는 완전수로 자주 사용되었다

 

히브리 사람들만 그랬던 게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4는 중요했고, 고대 이집트

에서도 4는 중요했고 거의 전지역에 걸쳐가지고 4가 중요한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4에

대해서 많이 얘기가 나왔죠. 4는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10진법을 쓰는, 우리 지금 십진법을

쓰고 있는데 십집법을 쓰는 사람들한테 10은 또한 완전한 숫자입니다. 1,2,3,4,...9에서 딱

완성되니까. 그래서 4 곱하기 10, 그 완전한 숫자 넷이 10번 있는 것은, 40은 매우 중요한

숫자요 완전한 숫자입니다.

 

* 완전수이자 길한 숫자인 '4'에 '10'이라는 또 다른 완전한 숫자로 곱한 '40'은 완전하고

  충만한 시간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40이라는 숫자에다가 그래서 많은 표현ㅇ르 갖다 붙였습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여러 개를 봤지요?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를 40년 돌았죠?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도 40일간 단식했고, 그 다음에 다윗이 통치한 기간도

40년, 솔로몬이 통치한 기간도 자기 아버지하고 똑같이 40년, 그 다음에 예수님이 공생활

시작하기 전에 유혹을 받고 단식하실 때도 역시 40일.

 

*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 40년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단식한 시간 40일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기간 40년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 40일

 

그래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과학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어쩌면 우리가 과학의 눈으로만

보면 좀 40이라는 큰 의미를 다 못 보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드렸죠? 40은 현대인들한테

39와 41사아의 정수의 하나. 39는 40과 38 사이의 어떤 하나의 수. 이렇게 생각이 되지만

고대 근동인들한테 아까 완전수 4와 10의 40을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39하고 40은 완전

틀린 숫자에요. 39는 그냥 숫자의 하나지만 40은 그거를 꽉 채우는 숫자인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다윗이 40년간 다스렸다. 솔로몬이 40년을 다스렸다 해서 정확히

40년을 다스렸다라고 역사적으로 이렇게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숫자는 역사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온전히 충만한

하나의 시간이에요. 완전하고 비틈없는 시간이에요. 하느님이 주신 온전한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40을 채웠다라는 건 주님이 허락해 주신 그 시간 동안, 주님이 마련해 주신 굉장히 나한테

꼭 맞게 마련해 주신 시간을 내가 다 채웠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 40이라는 숫자는 과학의

눈으로 보지 마시고 우리가 때가 있다고 그러죠? 만물에는, 사물에는 때가 있고, 사람에도

때가 있고, 때의 의미로 봐야 되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을 때 크로노스로 봐야 된다는 얘기죠. 그 주님이 마련해 주신 때

를 다 채웠다. 예수님의 단식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필요한 만큼의 그 시간에서

모자르지도 않았고 남지도 않았다. 온전히 다 채웠다라고 그 숫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에요.

그 숫자는 단순히 숫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말하고 있는 거다. 숫자를 통해서.

 

성경에 나오는 숫자가 다 그래요. 그래서 이상한 신흥종교, 휴거하는 거 보면 십사만 사천

이 할 것이다. 이것도 12×12×1000 이래서 상징수들을 더한 숫자죠. 그거를 우리가

하느님은 그래서 십사만사천 명이라는 숫자는 어쩌면 다 구원하실려고 하는 거다.

하느님은. 온 인류빠짐없이 다 하실려고 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 읽어야지 십사만 사천

명을 일부터 리스트를 해 가지고 십사만 사천일 번째부터는 안 돼. 이렇게 하는 거는 잘못

읽는 거라고 하는 것이죠. 의미의 숫자로 읽어야 합니다.

 

솔로몬과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임금의 전혀이에요. 솔로몬과 다웃은 물론 우리가

지금 역사적으로 보거나 이미 성서 안에도 그분들이 잘못한 일도 우리가 겪고 있고, 그게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그 왕을 우리가 이렇게 보게 되면은 주님이 허락하시고, 주님이

마련해 주신 그 시간을 꼭 채워서 이스라엘을 충실히 잘 다스렸다. 그게 40년을 다스렸다

라는 그 의미로 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숫자를 보지 마라 하는 것은 제가 계속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숫자를 통해서 궁극의 의미, 참된 의미를 전하는 것이 우리 성경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런 거 쓸데가 있어요. 한국 사람도 뭔가 내기할 때 삼 세번을 하지요?

네 번을 해도 되고 여섯 번을 해도 되는데 꼭 세 버늘 채울려고 하는 것도 우리가

3이라는 어떤 숫자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가위, 바위 보 해 가지고 다섯 번을 해도 되는데 꼭 왜 삼 세번을 할려고 그러는지.

삼 세번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4의 의미, 10의 의미, 40의 의미를 보셔야지 지금부터

제 강의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제 바람은 본격적으로 보겠습니다.

 

바람이 숫자가 네 개인데 바람이 하나하나 셀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런데 바람이 네 개가

나올 때가 있어요. 이것도 역시 온전한 사방에서 불어오는 온전한 모든 바람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예언자 예레미아를, 비탄의 예언자라고 말씀드렸죠? 나라는 망해 가는데,

실제로 망했죠. 망해가는 그 때 어떻게 한번 이스라엘을 구원해 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당대는 실패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예언서를 남겨서 우리들한테 큰 귀감이 되는 그런 메세지에요. 예레미아 예언

자의 말씀 중에서 이런 표현이 있어요. '하늘 네  끝에서 오는 네 바람'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제가 이 책(구약성경과 신들) 101쪽에 나와 있는데 읽어드리겠습니다.

 

*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늘 네 끝에서 오는 네 바람'을 하느님의 명령을 받는 존재로

  묘사했다

 

* 예레 49,35-36: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엘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활을 꺽어 버리겠다. 내가 하늘 네 귀퉁이에서 네 가지 바람(루아흐)을 몰아와,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버리겠다. 그러면 엘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 나라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보면 엘람의 강력한 무기는 활이죠. 활은 전투에 쓰는 강력한 무기인데 네 가지 바람,

온전한 바람은 하느님이 쓰시는 무기에요. 바람을 종처럼 부린다고 그랬지요? 큰 신들은.

하느님이 그런 분이에요. 네 바람 전체를 다 마치 하느님이 활처럼 쏘시는 분이시죠.

 

하나 더 볼까요? 다니엘서 7장에서도 하늘의 네 바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본문은 아까

예레미아서는 유배 이전에 나왔다고 하면은 다니엘서는 유배 이후에 나왔고 계속해서 같은

신화적 표상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7장 2절을 보면,

 

* 다니 7,2: 다니엘이 말하였다. "내가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불어

  오는 네 바람(루아흐)이 큰 바다를 휘저었다."

 

바람이 네 개라니. 이제 여러분은 집에서 성경을 읽으시더라도 네 바람, 아니면 바람 말고라도

네 개가 나오면은 아, 이거는 '온전한 다'를 말하는 것이다라를 걸 알 수 있겠죠? 네 바람이

지난 시간에 제가 그리스 말에는 바람의 이름이 많아가지고 네 바람 하나하나 마다 따로따로

이름이 있다고 그랬죠? 그거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화면을 봐 주세요.

 

 

 

히브리 말에도 네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 히브리

말에도 있고 그리스 말에도 있으니까 하나하나 대응시켜서 번역을 하면은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차폰이라는 말은 북풍이라고 우리가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 자체는 사실은 그냥

북쪽이라는 뜻이에요. 북쪽이니까 그냥 북쪽에서 오는 바람이니까 북풍이라고 그냥 번역하느

건데 그리스 말에는 북풍이라는 말이 보레아스라는 말이 딱 있으니까 겨올을 몰고 온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차폰이 나올 때는 보레아스로 번역을 하면 되요.

 

마찬가지로 테만이라는 남풍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노토스라는 남풍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남풍 이렇게 말하면 되요. 재미있는 건 차폰이 굉장히 히브리 성서에서는 강하게 나와요.

북쪽이 동서남북 중에서 가장 쎄게 나오는데 그리스 신화에서도 보레아스가 쎄요. 바람

중에서 북쪽에서 오는 찬 바람이 조금 쎘던 거 같애요.

 

재미있는 것은 서풍인데요. 서풍이라는 말은 서쪽의 바람이라고 하지 않고 바닷바람이라고

그랬어요. 루아흐 얌이라고. 왜냐하면 왼쪽에서, 지중해에서 바람이 불어오잖아요. 그러니까

바닷바람이라고 그랬어요. 서풍이라는 말은 없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에

바닷바람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는 건 70인역이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서 그리스 말에는 서풍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제피루스라고. 그런데 서풍이라는 말을 안 쓰고 바닷바람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아네모스 아포 탈라세스'인데 아포 탈라세스는 바닷쪽에서에요. 바닷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이라고 고대로 번역을 했어요. 자기네 서풍이라는 말을 안 쓰고.

 

예전에 우리 공동번역에서도 그렇게 번역을 했어요. 서풍이라는 말을 안 쓰고 바닷바람이라고

했어요. 그리스어는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의미가 있어요. 그리스어는 바람을 가리키는 말이

풍부해 가지고 이렇게 하나하나 다 적용해서 쓸 수 있었지만 오직 하나 서풍만큼은 자기네

말을 안 쓰고 히브리 말의 독특한 표현을 글자 그대로 썼어요.

 

하, 이게 참 재미있는데 70인역은 그 자체로 지금 경전이기 때문에 70인역은 히브리 말을

번역할 때 자기네 뜻대로 하긴 했으되 히브리 성서에 대해서 굉장히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좀 특이한 표현이다 하는 거는 고대로 썼던 거죠.

 

바다가 원래도 중요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신화적인,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걸 썼을 거 같애요. 우리도 성경을 볼 때 좀 이렇게 번역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럴려면 큰 일이니까 어쨌든. 이런 의미가 있는 번역이 있다는 걸 여러분이

알면 됩니다. 자, 이제부터는 바람이 하느님의 종이다 하는 거를 조금 자세히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바람은 하느님의 종

 

여러분, 이집트 탈출 사건 있죠? 탈출기 앞에 나오는. 재앙이 몇 가지나 있죠?

10개의 재앙이 있죠. 그 중에서 여덟 번째 재앙은 메뚜기 재앙이에요. 기억나시죠?

제가 옛날에 고대 근동에 여행가서 메뚜기를 본적이 있는데 제 손바닥 만한 메뚜기를

봤어요. 진짜로. 사진도 찍어 왔거든요. 메뚜기가 저렇게까지 크는구나. 그러니까

저런 놈이 수십만 마리 늘어 가지고 밭을 습격하면 정말 무시무시 하겠다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역시 메뚜기도 이 동네 메뚜기 하고 그 동네 메뚜기 하고는 좀

다르구나.

 

자, 히브리어 본문에서 보면은 메뚜기를 어떻게 일으켰는지 아세요? 하느님이.

바람으로 일으켰어요. 동풍으로. 제가 읽어드릴께요. 이 책 구약성경과 신들 교재

103쪽을 보시면 이렇게 나옵니다.

 

* 탈출 10,13: 모세가 이집트 땅위로 지팡이를 뻗자, 주님께서 그날 온조일, 그리고 밤새

  도록 그 땅으로 샛바람(동쪽의 루아흐)을 몰아치셨다. 아침이 되어 보니, 샛바람(동쪽의

  루아흐)이 이미 메뚜기 떼를 몰고 와 있었다.

 

두 번이나 동풍이 언급됩니다. 동풍은 덥고 힘든 바람이라고 그랬어요. 그게 아마 재앙을

불러 오는 게 동풍이 된 이유도 거기와 관련이 있을 거에요. 덥고 힘든 큰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죠. 동풍이라는 다른 말이 있는데 여기 이 표현에는 없지만 70인역이 이 동풍을 번역

할 때 동풍이라고 번역을 안 하고 '노토스'라 그랬어요. 남풍이라고 말을 바꿔 놓은 거에요.

 

* 남풍을 뜻하는 히브리어 '테만'은 그리스어로 '노토스'로 옮겨졌는데, 특이하게도 동풍

  '노토스'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여덟 번째 재앙을 일으킨 바람은 동풍이 아니라 남풍이었다 하는 거에요. 왜 여기서 번역을

잘 하지 요거를 이렇게 바꿔 놨을까를 이제 학자들이 어떻게 보냐 하면, 70인역을 번역할

때는 이 사람들이 이집트에 있지 않았어요. 팔레스티나에서 볼 때 이집트에서 부는 바람은

다 남풍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독자들한테 옛날에는 동풍으로 불었지만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남풍이야라고 해서 남풍이라고 바꿔 놓은 거에요.

 

성경 번역은 이렇게 원문에도 충실하지만 지금 읽는 독자들한테 쉽게 알려 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기능인 거 같애요. 여기서 성경 번역에서도 그렇고 여러분들 생각하셔야

될 게 '육화신비'에요. 하느님께서, 우리가 성경 번역을 왜 쉽게 해야 되고 계속 이렇게

연구하는 것, 어려운 내용들을 계속 이렇게 강의하고 또 여러분들은 같이 배우고 이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하느님이 이미 우리 세상에 오실 때 우리한테 쉽게 가르쳐 주러 오셨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거든요.

 

하늘에서 전능하서 가지고 계셔도 괜찮은데 굳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인간의 표정을 가지고, 인간의 말을 가지고, 또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가르쳐 주시고 가셨잖아요. 그거와 비슷한 거 같아요.

 

70인역을 번역할 때 그분들은 성경 말씀은 분명히 동풍이라고 되어 있는 걸 남풍으로 고쳤다.

이거 잘못 됐다. 이렇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 쉽게 알려 줄려고, 그렇게 쉽게 깨닫게 해

줄려고 그렇게 바꾸셨던 거 같애요. 70인역은 그런 걸 많이 했어요. 지금 읽는 이 독자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죠. 이 강의도 어쩌면 그런 전통에 서 있는 것이죠.

 

하느님은 어쨌든 루아흐를 부리는 분이에요. 루아흐는 하느님의 종 같은 그런 표상으로

구약성경에 많이 나와요. 하느님이 시키니까 바람은 그대로 하는 것이죠. 파라오가 여덟

번째 재앙이 나오니까 무서웠어요. 갑자기 동풍이 불어가지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니까,

그러니까 파라오가 "메뚜기 떼를 거두어 달라" 이렇게 모세한테 얘기를 했어요.

 

"내가 졌다" 파라오는 계속 그랬죠? 하나 올 때마다 졌다고 그러고 다시 하고. 왔다 갔다

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졌다. 그러니까 이거를 좀 되돌려 다오." 그러니까 하느님이 메뚜기

떼를 없애버리셨어요. 어떻게 없애버리셨는지 아세요? 이번에도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번

에는 서풍을 일으키셨어요. 책 103쪽이고 탈출기 10장 19절이에요. 이제 파라오가 잘못했

다고 하니까,

 

* 탈출 10,19: 그러자 주님께서 바람을 매우 세찬 하늬바람으로 바꾸셨다. 그 바람이

  메뚜기 떼를 몰고 가서 갈대 바다에 처넣으니, 이집트 온 영토에 메뚜기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서풍을 불러 일으킨 거에요. 바람이 하느님의 종이라고 그랬죠?

하느님은 네 군데서 불어오는 바람도 전부 다 보리시고 동풍도 맘대로 부리시고, 서풍도

맘대로 부리신다.

 

* 하느님은 동풍도 바닷바람 서풍도 마음대로 부리시는 분이시다.

 

시편 135편인데 교재 103쪽 맨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 시편 135,7: 땅 끝에서 구름을 올라오게 하시는 분. 번개로 비를 만드시고

  바람을 그 곳집에서 끌어내시는 분.

 

* 시편 104, 4: 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으시고 타오르는 불을 당신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

 

 아까 처음에 읽어드렸던 시편에서 바람을 그 곳집에서 끌어내시는 분이라고 나오는데

 아마 바람이 집이 있다고 생각한 거 같애요. 바람이 집에서 나와야지 이렇게 불어오는데,

우리가 이집트 신화에서도 바람이 바다의 네 군데서 있다고 그랬잖아요. 바람이 불어오니까

어디선가 움직이라고 해야 되는데 바람을 집에서 끌어내신 분이 누구시냐? 하느님이시다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시편에서는 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으셨다. 당신 종으로 삼으셨다라는 것이죠.

여기서도 역시 이집트 탈출에서 나왔던 것과 똑같은 표상이 사용되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은 바람을 마치 선풍기처럼, 아니면 에어컨처럼 그냥 부리시는 것이다. 이러면서

바람은 탈신화되요. 신이 아닌 게 돼 버려요. 하느님이 그냥 부리시는 게 돼 버려요.

 

독자적인 신으로서 뭘 한다기 보다는 그냥 하나의 자연 현상 비슷하게 하느님이

움직이시는 그런 게 돼 버리는 것이죠. 이 전승은 구약성경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나오고 예수님한테도 이어져요.

 

요한 묵시록에 이런 게 많이 나오는데 바람이 네 천사의 통제를 받습니다. 제가 묵시록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재 104쪽이고요. 요한이 요한 묵시록에서 이런 환상을

보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 묵시 7,1: 그 다음에 나는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서는

  땅에도 바다에도 그 어던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 사방이죠. 동서남북 사방 끝에 네 천사가 있고 거기에 네 바람이

있는데 천사가 바람을 잡고 바람을 불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건대, 지금 여태까지 저번 시간

과 이번 시간에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린 신화적 표상이 똑같이 드러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이 재미있어 하실 마태오 복음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릴께요.

 

예수님이 풍랑을 가라앉히신 적이 있어요. 호수에 작은 배 한척을 띄워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탔어요. 돌연히 풍랑이 일었어요. 제자들은 허둥지둥 했어요. 큰일 났다.

이 조그만 배의 우리는 다 빠져 죽게 생겼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제자들한테 "겁내지 마라"라고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교재 104쪽에 있는 것인데

 

* 마태 8,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는 거에요.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똑같이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셨다. 이렇게 나와요. 여기서도 역시 바람은 천방지축으로 막 부는 그런 존재인데,

하느님 한테, 가장 높으신 분한테 바람이 순종하는구나. 그분이 바람을 꾸짖으시는구나.

그러면 제자들은 허둥지둥 댔지만 금방 딱 조용해지는구나 하는 것이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예수님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이런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우리 현대인들이 느끼지 못하는 거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역시 예수님은 바람을 부리시는

분이시구나. 바람이 이분한테 순종하는구나. 역시 이분은 우주에서 가장 큰 분이시구나 

하는 거를 직감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거죠.  

 

여러분, 우리 같은 현대인들은 공부를 해야지만 알고 있는 것이죠. 성부 하느님은 탈출사건

에서 일찌기 동풍하고 서풍하고 마음대로 부리셨고, 시편 이런 데서 보면은 바람을 잘 부리

시는 분이시다라고 나와요. 성자 하느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바람을 꾸짖어서 역시 바람을

통제하는 분이시다 하는 게 나오는 거죠.

 

즉, 이 이야기를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전에 그 성부 하느님, 바람을 부리셨던 그분이

역시 여기서도 바람을 꾸짖으시는구나 하고 두 분이 같은 분이시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고대 근동의 신화적 맥락을 읽으면 역시 삼위일체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이 하느님의 종이잖아요. 언제부터 하느님의 종일까? 언제부터 하느님의

종일까? 언제부터 바람이 하느님한테 잡혀 가지고, 포로가 돼 가지고 종으로서 기능을

했을까? 언제부터 하느님이 스위치를 트셨을까? 하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는데 이미 천지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루아흐는 하느님의 종이었어요.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나와요.

창세기 1장 2절이죠.

 

* 창세 1,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루아흐를 바람으로 옮기지 않고 하느님의 영이라고 옮겨요. 왜냐하면 70인

역이 이 말을 프뉴마라고 옮겨서 그래요. 프네우마라고 옮겨서. 그런데 히브리 말로는

루아흐에요. 왜 히브리 사람들이 여기서 루아흐라고 했을까?

 

하느님은 바람을 종처럼 부리시는 분이신데 그게 어느 순간에 바람을 잡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아예 천지창조 맨 처음부터 부리고 계셨다. 이미. 하는 것을 창세기 맨 앞에

갖다 놓은 것이죠. 그렇게 고백을 했던 거에요. 그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창세기 1장은 태초의 하느님을 창조 사업과 그분이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분임을 신학적으로 잘 표현하는 그런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은 우리가 아마 이번

강의에서 물은 보지 못할텐데 물은 혼돈의 상징이에요. 옛날부터.

 

아까 바닷바람도 그랬고, 여러 가지로 물은 혼돈의 상징으로 자주 나오는데 물을 따로

한번 여러분들한테 강의해도 좋겠지만 그거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될 것 같고요.

하느님의 영 루아흐가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라는 건 그 혼돈을 이미 통제하고 있었다

라는 뜻이 되요. 하느님이 루아흐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으로 이미 혼돈을 통제하고

계셨다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 하느님의 영(루아흐)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는 말은, 하느님이 루아흐를 통해서

  혼돈을 제어하셨음을 의미한다.

 

신화적인 표상을 통해서 그걸로 이미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쩌면 천지창조를

통해서 그 권능을 우리한테 나타내 보이기 그 이전부터 이미 바람을 부리시고, 혼돈을 제어

하고 계셨다. 아예 태초부터. 그 얘기를 하고 있느 것이죠. 이렇게 ?신화의 언어를 이해하면

성경의 의미를 본문으로 가가올 수 있습니다.

 

# 바람과 하느님의 현현

 

자, 그렇다면 이제 역으로 한번 생각해 봐요. 지금까지 여러분은 하느님이 태초부터 루아흐

를 통제하고 있었다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루아흐는 하느님의 종으로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면 바람이 불면 하느님이 나타나신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오시기 전에

어떤 바람을 통해서 어떤 싸인을 주신다. 그래서 바람이 하느님의 전조다. 이렇게 표현하는

사상이 구약성경에 남아 있어요.

 

이게 이제 바람을 지금까지 본 거는 바람이 어떤 신으로 오해될까봐,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놈이 될까봐 아, 그런 놈이 아니다. 바람은 하느님이 부리시는 분이시다. 이런 표현을 하나

보았고, 만약에 하느님이 그렇게 부리시는 놈이 바람이라면 그 바람을 우리가 어떤 느낌을,

하느님을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바람은 하느님이 나타나신다는 징조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신의

  자리를 잃고 그저 하느님의 도구로 '탈신화화' 되었던 바람의 '재신화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람이 하느님 신앙 안에서 재신화화 되는 거에요. 탈신화화 됐다가 이 신앙 안에서

어떤 신앙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예로 엘리야 예언자를 볼 텐데요.

엘리야 예언자는 이번 시간에 우리가 자주 보고 있지만 굉장히 강한 중요한 예언자로

나옵니다. 바알 사제 450명과 대결해 가지고 갈멜  산 전투에서 이긴 아주 큰 예언자죠.

 

그런데 엘리야 예언자한테 주님이 나타나시는 대목이 있어요. 하느님께서. 그 대목을

보면은 여러가지 싸인이 와요. 그걸 보고 엘리야 예언자가 아,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

하는데 그 중에 첫 번째 싸인, 주님이 싸-악 나타나실려고 하는 첫 번째 싸인이 뭐냐 하면,

루아흐에요. 바람이에요. 책 106쪽입니다.

 

* 주님이 엘리야 예언자에게 나타나실 때 몇 가지 징조 중 첫 번째가 루아흐다.

  곧 루아흐는 주님 현현의 첫째 표징인 것이다

 

하느님이 이런 식으로 엘리야 예언자한데 나타나셨구나 하는 걸 그림을 그리듯이, 이게

마치 그림처럼 나오거든요. 그림을 그리듯이 한번 떠올려 보시면 좋을 거 같애요.

 

* 1열왕 19,11-13: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느님이 나오실 때 그냥 싹- 나오실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표징을 주셨어요. 첫 번째는

뭐였죠? 바람이었어요. 굉장히 큰 바람. 바위를 부술 정도로 큰 바람이었죠. 그 다음에는

지진이 일어났어요. 그 다음에는 불이 났어요. 그런데 그 불에도 계시지 않았어요. 이 바람,

지진, 불 세 개가 다 중요한 표상인데 결국 주님은 어떻게 오셨어요?

 

굉장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불러 주셨어요. 이게 주님이시죠. 이 걸 따로 우리가 묵상

해 봐도 좋은 주제이고 여러분들이 집에서나 아니면 방송 들으시고 오늘 저녁에 주무시기

전에 한번 이렇게 묵상해 봐도 굉장히 좋은 주제에요.

 

이 강의에서는 일단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나타나시는 엘리야한테 어떤 표징을, 싸인을

보여 주셨는데 그 중에 첫 번째 싸인이 바람이었어요. 우리가 바람이 불면 그래서 혹시

하느님이 나타나 말씀하시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겠죠? 엘리야 예언자처럼.이것도

역시 고대 근동인들이 자연 속에서 의미의 생활을 한 거에요.

 

우리는 바람이 불면, 아, 지금 비가 올려나? 아니면 날씨가 저기압인가? 이런 거 생각하지만

혹시 바람을 통해서 하느님이 나한테 뭘 가르쳐 주시는 건 아닌까?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게 바람을 통해서 하느님은 혹시 느낄지도 모른다 하는 게 고대

인의 성경의 생활에 더 맞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현에서 마지막 욥기를 보겠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은 폭풍 속에서 말씀하세요.

여기서도 루아흐가 아니라 폭풍우라고 나왔는데 비슷한 뜻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역시

106쪽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욥 38,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역시 욥은 의인이죠? 주님과 많은 대화를 하고 또 자기의 의로움을 가지고 주님께 맞선 그런

사람인데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다양하게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람 속에서

말씀하세요. 바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읽은 것이죠.

 

하느님이 현현하실 때 왜 바람에서 나타나셨을까?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애요.

저는 여러분한테 어떤 답을 드리지 못하고 그런 표현이 구약성경에 있고 우리한테도 혹시

그렇게 오실지 모른다. 성경을 통해서 바람처럼 오실지 모른다. 그런 걸 말씀드리면서

넘어가겠습니다.

 

# 바람은 파괴의 도구

 

마지막으로 이번 시간에 볼 것은 바람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하느님이 바람으로 우리

를 혼내실 때가 있다 하는 거에요. 하느님의 바람이 파괴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하느님이

진노하실 때 내는 바람은 우리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하는 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느님

이 인간을 꾸짖는데도 바람을 쓰십니다.

 

* 하느님께서 인간을 꾸짖으실 때도 바람이 사용되었다

 

여러분, 비탄의 예언자 예레미아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예레미아가 "야, 좀 잘 좀 해라.

얘들아. 나라가 망하기 전에." 이렇게 할 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우리한테 주셨는데 그 마지막 기회를 우리 이스라엘, 하느님 백성이 잘 살리지 못하면

우리는 큰 일 난다. 그거를 어떻게 말을 하냐 하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107쪽에 보면,

 

* 예레 4,11: 그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두고 이런 말씀이 들려오리라.

  "벌거벗은 언덕의 열풍이 내 딸 내 백성의 길을 향햐 광야에서 불어온다.

  그 열풍은 키질을 위한 것도, 스레질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 열풍을 일으켜 가지고 너희들을 혼낼 것이다. 주님의 열풍을 두려워 해야 된다.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열풍이라고 말한 것은 동풍이에요. 저번 시간에 얘기했죠? 동쪽

에서 불어오는 큰 더운 바람은 힘들다고. 열풍이라고 얘기한 히브리 말이 재미있는데요.

'루아흐 카 짜흐'라는 말인데 이거를 직역하면 '어른거리는 바람'이에요.

 

아지랑이 같이 어른거르는 바람인데 바람이 얼마나 더우면 그 바람이 불어올 때 아지랑이

처럼 어른거리는 그런 바람입니다. 이 더운 바람이 한번 더 나오는데요. 얼마나 더운지

호에사서에 나오는 거는 굉장히 쎈 표현이에요. 108쪽인데 얼마나 더운 바람인지 보세요.

 

* 호세 13,15: ?에프라임이 형제들 가운데에서 번성하여도 동풍(동쪽의 루아흐)이 불어오리니

  광야에서 차오라 오는 주님의 바람(야훼의 루아흐)이 불어오리니 그의 샘은 마르고 우물은

  메말라 버리리라. 그 바람이 보물 창고에서 값비싼 기물들을 모조리 앗아 가 버리리라.

 

동쪽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 때문에 샘과 우물이 메말라 버릴 정도로. 우리는 그런 더운

바람을 못 맞고 살죠? 한반도에서. 하지만 그런 바람이 있는 거 같애요. 이사 27장 8절에

서도 비슷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 이사 27,8: ?그분께서는 그를 내몰고 내쫓으시어 벌하시고 샛바람이 부는 날

  그를 거센 바람으로 몰아내셨다.

 

여기도 샛바람이라고 나오는 것도 여기는 열풍이라고 안 나오지만 더운 바람으로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게 참 알기 어려운 바람인데요. 역시 자연이 다른 거에요. 여러분,

여기서 성지순례 가보신 본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집트나 근동에 가면은 거기서 햇볕을 맞아

보셨어요? 햇볕을 맞으면 굉장히 따갑거든요.

 

저도 독일에서 공부할 때 독일 학생들하고 가서 일부러 사막을 걷게 하는 게 있어요. 아주

짧은 거리지만. 중간에 차를 내려서 피라밋까지 그냥 걷는 거에요. 차가 피라밋까지 갈 수도

있는데 중간에 내려서 한번 걸어보라고 하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 내려서 그런 준비를 다 해요. 다 가리고, 썬크림 다 바르고, 여자들은 굉장히 두껍게

바르고 내리는데 소용이 하나도 없어요.

 

정말 태양이 막 이렇게 콕콕콕콕 찌르는 것처럼 강한 태양이거든요. 거기다가 그 더운데

다가 더운 게 바람으로 온다고 그러면 ?온 세상이 큰 헤어드라이기 켜 놓고 그 앞에 있는

거 같애요. 그런 느낌이 들 거에요. 오죽하면 샘하고 그 저수지가 말라버린다고 하겠어요.

그 앞에 우리가 있으면 괴롭겠죠. 하느님의 바람은 우리를 혼내살 때는 그렇게 거센 바람

일 수도 있다 하는 것입니다.

 

동풍은 그렇게 내륙에서만 더운 바람은 아니었던 거 같애요. 동풍이 파괴의 모티브,

동풍이 파괴한다라는 말은 바닷바람으로 나와요. 바다에서 무서운 바람이 이는데,

 

* 에제 27,26: 노 젖는 이들이 너를 큰 바다로 저어 나가자

  샛바람(동쪽의 루아흐)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부수어 버렸다.

 

이것 되게 재미있는데요. ?여기서도 바다로 나왔기 때문에 동풍이 그렇게 덥고 그러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 동풍 그 자체, 샛바람 그 자체가 강하고 덥고 파괴의 바람으로

그냥 쓰인 겅에요.

 

한반도에서 동풍은,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잖아요. 우린 더운 바람도 아니고, 나쁜

바람도 아니고, 좋은 바람이죠.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동풍(샛바람) 하실 때는 이런

뉘앙스가 들어있다라는 거를 잊지 마시고 앞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자, 지금까지 여러분 강의를 잘 들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성경의 바람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봤습니다. 이제 그 전에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은, 우리 미사 때 들으실 수도 있고,

이니면 집에서 성경을 보실 수도 있고, 또 성경을 필사하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구약성경을 접하실텐데, 아니면 구약성경의 어떤 장면을 묘사해 놓은 것을 보실 때가 있는

데 하늘을 보시거나, 달을 보시거나, 아니면 바람이 묘사된 것을 보실 때,

 

조금 다른 시각에서, 그 당시는 이런 신화적인 표현으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이런 거를

썼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실 수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마치기 전에, 지난

시간에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이 강의를 듣는 바람에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평화방송을 강의를 들는 바람에 참 좋아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저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저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라는 걸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 바람을 하느님께서 바람을 마음대로 부리시는 분이시니까, 우리 마음에 있는 그런

바람을 하느님의 바람으로 꽉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13강 살리는 바람, 그리고 한숨

 

* 주원준 박사님이 계신 곳 안내: 한님성서 연구소 http://www.biblicum.or.kr/

 

*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ww.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body.php%3Fprogram_fid%3D6875%26menu_fid%3D6891%26cid%3D452309%26yyyymm%3D201305&program_fid=6875&menu_fid=6891&cid=452309&yyyymm=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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