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겸손한 사도 요한/묵주기도 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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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4-03-30 | 조회수71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십자성호를 그으며)
영광의 신비 2단[4/7] :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사실 요한복음 사가는 첫 제자들을 만날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고 만나려고 돌아서셨단다. 그 때의 시간과 장소, 상황이 아주 뚜렷하게 설명되어 정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스승 요한의 허락을 받고 예수님을 따랐단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증언을 한 후 사흗날, 그것도 오후 네 시쯤이었다.
이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라자로의 고향이 아닌,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강 동쪽 페래아 지방에 있던 한 고을이란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요한 1,40). 그럼 베드로의 동생 말고 또 한 사람의 요한의 제자는 누구란 말인가? 육하원칙에 의거 이렇게 정확한 내용을 기록한 그 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익명의 제자인 복음사가 사도 요한일 게다. 다시 말해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야고보의 동생 요한이리라.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따라간 이들 가운데 하나는 시몬의 동생 안드레아라고하면서 왜 다른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을까? 이 사람은 분명히 복된 사도 요한일 텐데. 그는 항상 이렇게 자신과 관련된 일들에서는 조용히 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관련된 경우에도 이름을 밝히는 것을 피한다. 이렇게 가능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할 때에는 그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정도라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교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익명의 제자들을 대표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지 않게 겸손과 사랑으로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대단한 직책을 맡은 것인 양 생색내기보다는 공동체와 가정 안에서 작은 일을 통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유받고 있다. 이런 평범한 일상을 통해서도 그분께 대한 사랑을 우리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분은 분명히 아시기에 그게 더욱 귀하고 소중할 게다. 이 겸손과 작은 사랑이 모여 교회 전체의 큰 힘이 되고 세상을 정화하는 알찬 디딤돌이 될 것이기에.
그렇다. 베드로의 뒤에서 졸졸 따라오는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이기도하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베드로는 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았던 일을 우리에게 떠올려 주는 것일까?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뒤 어떤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일 게다. 최후의 만찬 때만 해도 감히 예수님께 묻지 못해, 묻는 걸 그분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넘긴 그가 이제는 형제들을 감독하는 최고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베드로는 물었고 요한은 그 뒤를 따랐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숭고한 일을 감탄하면서 천천히 따라오면서 말이다.
베드로의 앞날이 수수께끼 같은 말로 표현되었듯이 사도 요한의 운명 또한 비슷한 것 같기만 하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였는데도 형제들 사이에서는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초기 교회 시대에 만연했던, 임박한 재림의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사랑받던 그 사도 요한도 결국은 죽었다. 이는 요한이 이 부분을 직접 썼더라면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없었다는 걸 증언하는 것이고, 아니면 천둥의 아들 사도 요한의 제자들이 썼다면, 그들의 스승 사도 요한도 분명히 죽었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일 게다.
암튼 부활 후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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