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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 사랑에 눈 떠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30 조회수1,207 추천수14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일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요한 9,1-41





주님 사랑에 눈떠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바람을 들어 주십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에 눈 뜨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자가 되게 하려는 것’(요한 9,39)이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눈이 잘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잘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눈이 가려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눈뜬장님입니다. 그가 참으로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멀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다르소사람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췄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를 들었고 사울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셨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의 안수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바로 본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였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서 먼저 그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빛을 받아 비로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2독서의 말씀대로 사울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선과 의로움과 진실”의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선하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10,18). 의로움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십니다”(신명32,4). 진실은 자신에게 솔직한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34,6-7). 용서하시는 주 하느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확신하고 고집함으로써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는 사람” 다시 말하면 눈은 있으나 ‘정확한 안목과 식견으로 분별’해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아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우리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미국의 헬렌 켈러(1880-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 태어난지 19개월 만에 고열로 눈, 귀, 말을 잃었지만 ‘설리번’이라는 가정교사를 만나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달은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과 미래도 보지 못하는 인생, 성경은 이런 사람을 영적인 소경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시련과 역경, 예기치 않은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야 말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시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진흙을 발라주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사랑의 표현을 드러내셨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고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련도 바로 이런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눈먼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었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영혼의 때를 씻음으로써 자비의 주님,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눈을 3가지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 남이 나를 바라보는 눈, 하느님께서 바라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어느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의 눈은 어디에나 계시어 악인도 선인도 살피신다.”(잠언15,3)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에 계시고 주님의 옥좌는 하늘에 있어 그분 눈은 살피시고 그분 눈동자는 사람들을 가려내신다.”(시편34,16)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루카11,34)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처음에는 엘리압을 보고 임금이 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사무엘 상 16,6-9). 그리하여 사무엘은 주님의 비추임을 받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영이 그에게 줄곧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에 들기 보다는 사람의 눈에 들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 것에 줄을 섭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들은 크신 사랑으로, 자비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하고 마침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세상의 헛된 암흑을 멀리하고 깨끗한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호소합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십시오.”

 


어떤이는 우리의 눈을 육안(肉眼), 뇌안(腦眼), 심안(心眼), 혜안(靈眼)으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욕구의 수단으로 바라볼 것이고, 뇌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생각하고 따지는데 필요한 내용을 먼저 취할 것이며 심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현실의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될 것입니다. 혜안(영안)이란 앞을 내다보는 눈입니다. 그는 참된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고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에페1,18).


 

1961년 4월12일 인류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108분간 지구를 일주한 옛 소련의 ‘가가린’ 우주비행사는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감상을 말하던 중 “지구는 푸른 빛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곳에서도 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몇 달 뒤인 8월6일 ‘티토프’는 하루 동안 지구궤도를 비행했습니다. 그도 “지구를 몇 바퀴 돌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62년 2월 미국의 ‘글렌’중령이 미국인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뒤 말했습니다. “우주는 정말 찬란했습니다. 그러한 우주와 지구가 같은 자연법칙으로 운행되어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볼 때 과연 하느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과 닫힌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영적맹인’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이 성지 순례를 오셨습니다. 전국 순례를 다니는데 이제 제주만 가시면 된답니다.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봉사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전국의 200여 곳을 순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 것을 택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은 육안이 없어서 불행하지 않고 영안이 뜨여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넘어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음에도 세상 것의 욕심으로 영의 눈을 자꾸 가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눈이 뜨이고, 날마다 맑은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는 지혜를 청하며.. 사랑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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