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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13강 살리는 바람 그리고 한숨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31 조회수1,051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 구약성경과 신들/ 제13강 살리는 바람 그리고 한숨  

 

  

 

강의에 들어가며...

 

#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십니다. 하느님이 루아흐를 시켜 예언자를 들어

올리시고 여기저기로 데려가셔서 환영을 보여 주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치 바람이

엘리베이터나 헬리콥터 처럼 사람을 싣고 높이 올라가서 여기 저기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상은 에제키엘서에 네 번이나 나옵니다.

 

 “루아흐(영)가 나를 들어 올리시어,
  주님의 집 동쪽 대문으로 데려가셨다” 에제 11,1

  그때에 루아흐(영)가 나를 들어 올리셔서,
  루아흐(영)가 보여 주시는 환시 속에서
  그 칼데아에 있는 유배자들에게 데려가셨다  에제 11,24

 

  신약성경에도 주님의 성령이 사람을 잡아채서 데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합리주의와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성령이 사람을 잡아채서 하늘로

데려갔다’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언어와 신화에 익숙했던

사도행전의 저자와 독자에겐 전혀 어렵지 않은 말씀이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프네우마(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사도 8,39).

 

# 바람, 살리는 숨결


 그 다음으로 볼 바람의 역할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종

같은 존재로 나오는 바람이니, 생명을 살리는 역할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바람신의

이런 구실도 역시 고대 근동 신화와 구약성경의 공통점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람’과 ‘성령’을 주의 깊게 분리하여, 바람 그 자체에 더 이상

신화적 요소가 들어갈 여지를 없애려 노력했다. 셈어인 히브리어에 남아 있는 고대 근동의

‘바람신’의 흔적을 되도록 지운 것이다. 바람은 성령의 전조일 뿐, 성령 그 자체가 아니다.

사도행전의 이런 태도를 ‘바람’을 더욱 탈신화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신약성경의 탈신화’는 사실 구약성경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런 면에서 신약은

구약의 전승을 충실히 잇는다. 이런 탈신화의 궁극적 목적은 성부 하느님에게서 불어오는

성령님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은 성령이 몸을 살릴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존재임을 알려 준다.

성령이 죄를 씻어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모티프의 근원은, 루아흐가 생명을

살리는 노릇을 한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이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고대 이스라엘이 속한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바람신의 특징은 구약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루아흐를 무척

탈신화했다. 한편 그리스어로는 루아흐를 숨, 영, 바람 등으로 다양하게 옮길 수 있다.

그리스어의 이런 언어적 특성을 사용하여 칠십인역은 루아흐를 다양하게 옮겨 탈신화화를

심화했고, 신약성경은 바람과 성령을 구분해서 이런 탈신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이런 전체적 전승을 기반으로 후대에 성령론이 발전할 토대가 마련된 것 같다

 

# 헛것

 

고대 근동에는 워낙에 다신교 세상이라서 큰 신과 작은 신이 여럿 섞여 있다.

수천 수만의 신이 있다. 이 책과 이 강의에서는 큰 신만을 다룬다. 그런데 시간이 허락되니

작은 신을 하나 다뤄보자. 유일하신 하느님의 반댓말이 있을까? 하느님이 아닌 것을 무엇

이라 불러야 할까? 하느님은 유일신이시므로 그 반댓말은 다신(多神)이라 불러야 할까?

 

혹시 이런 ‘다신’들 전체를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이 있을까? 혹자는 ‘우상’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맞는 대답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신들을 일컫는

독특한 낱말이 있다. 바로 ‘헛것’이다. 다윗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다른 민족이 믿는 가짜

신들을 모두 이렇게 불렀다.

 

  “민족들의 신들은 모두 헛것이어도
   주님께서는 하늘을 만드셨네”  (1역대 16,26).

 

 우리말 ‘헛것’은 ‘빈 것’으로서,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헛것’은

거짓된 신을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헛것’으로 옮긴 말이, 구약성경

원문에서는 무슨 말일까 궁금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펴보았다. 그랬더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은 ‘한숨’이란 뜻이었다.

 

특이하게도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의 문헌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종교심을 표현하는 낱말이고, 우리 신앙인들의 좋은

성찰 재료라고 생각된다. 이 낱말은 인간의 숨결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대개 헛된 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느님 백성이 믿으면 안되는 것 ‘헛것’ 또는 ‘한숨’은 신이 아니다.

하느님 백성이 믿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만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제13강 살리는 바람, 그리고 한숨

 

안녕하세요? 예, 일주일만에 다시 뵙게 됐습니다.

우리 성호경 같이 바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잘 지내셨어요? 예, 한님 성서 연구소 주원준입니다. 오늘은 열세 번째 시간입니다.

이 강의 전체가 26회 강의인데요. 오늘이 열세 번째니까 오늘 강의를 들으면 정확하게

절반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시간 참 빠르지요? 이제 절반을 넘었으니까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게 되는 거지요.

 

저희는 이 강의에서 모두 여섯 개의 주제를 다룰텐데 오늘이 세 번째 주제 마지막 시간

이에요. 그래서 정확하게 주제별로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정확하게 중간을 도는 그런

강의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을 통해서 그동안 고대 근동의 어떤 신화와 종교, 그 사람들의 생활상과

그것이 구약성경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 이제 배우셨는데요. 여러분이

지식만 늘지 않으시고 이 고대인들의 어떤 마음, 이 자연에 대한 감수성, 고대 이스라엘

인들의 마음을 조금 더 가까이 배울 수 있으셨으면 하는 게 저의 바램입니다.

 

학문적인 강의라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이 여러분들한테는 정말

더 중요한 거 같애요. 그리고 이 책의 부제도 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 아닙니까?

우리가 머리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마음으로 소화되지 않으면은, 우리 신앙으로

소화되지 않으니까, 마음으로 느끼는 게 중요하고요.

 

그동안 이제 여러분들한테 강의 드린 것을 짧게 상기시키면, 첫 번째 주제로 하늘신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로 또 달신에 대해서 다루었지요. 두 신 모두

고대 근동에서는 매우 강한 신이었고, 강력한 신이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신이 아니죠.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하늘신과 달신 모두 고대 근동에서는 강한 신이었지만,

  구약성경에서는 모두 신이 아닌 존재로 그려진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 한 분 밖에 없고, 그 하늘신과 달신에 대한 어떤 표현이나 표상에서

신화적인 게 분명히 남아 있는데 그 당시 시대적인 한계 때문에 그런 것이고 오히려 고대

근동의 신학자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야훼 신앙 안에서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그런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이제 세 번째 주제로 다룬 것은 바람입니다.

 

바람이 우리나라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참 많아서 뭐 바람을 피우느니, 무슨 바람이

있느니 여러 가지로 얘기도 했었고요. 바람신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세 가지 정도의

준비 운동을 했는데 이 세 가지 준비 운동은 다음 다른 주제를 볼 때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세 가지 준비 운동의 첫 번째는 바람이 과연 우리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가 얼마나 바람을 중요하게, 자연의 바람이죠. 중요한가 하는 거를 봤고.

 

* 지난 강의 요약: 바람은 우리 인간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두 번째로는 이 바람은 지역별로 많이 다른데 한반도에서 부는 바람은 가끔 태풍도 불고

겨울에 찬바람도 불고. 그런데 팔레스티나에서는 완전히 다른 바람이 분다는 거죠. 서쪽

에서는 축축하고 습기 있는 바람이 오는 반면, 동풍은 대표적으로 사막에서 불어 오는

덥고 힘든 바람이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팔레스티나 지방에는 축축한 바람(서풍), 뜨거운 바람(동풍) 등

  다양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 바람은 우리 한반도에서는 불지 않으니까 우리는 다행히 자연 조건이 거기보다는

훨씬 좋은 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이런 거는 없지만, 성경에 그런 표현이 나올 때는 자연

의 차이를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는 걸 보았고.

 

세 번째로는 고대 근동의 바람신에 대해서 봤습니다. 고대 근동의 바람신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그리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풍우신이라는 다른 신이 강했는데 그 신에 대해

서는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고, 이집트에서는 대신에 바람이 강했어요.

이름이 굉장히 많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있고 등등을 보았고.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람신은 큰 힘이 없었지만,

  이집트에서는 강력한 바람신이 있었다

 

또 고대 그리스에서도 바람이 매우 중요했어요. 고대 그리스에서 바람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해양 민족이었기 때문에. 역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도 바람신은

매우 중요했지만, 뱃사람들한테는 더욱 중요하죠. 큰일 나는 바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구약성경이 있는 ?팔레스티나 주변의 지역에서도 이렇게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고.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바람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바람신을. 그래서 보니까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 이런 표현을 봤습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 바람에 날개가 달렸다고 나오거든요. 아마 그 표현을 그대로 갖다

썼을 수도 있다 하는 것이죠. 마치 신 같애요. 왜냐하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고, 언제 불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변덕스럽다 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람에 많이 빗대잖아요.

 

그런데 바람이 마치 신 같은데 이것이 우리 눈에는 막 무질서하고 바람이 아무렇게나 부는

거 같애요 이거를 모두 통제하시는 분이 한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하느님

이시다. 그러니까 바람은 하느님의 종 같은 존재다. 우리가 그런 것도 보았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며, 하느님의 현현의 상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바람이 확- 부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가 엘리야

예언자 얘기에서 봤죠.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어떤 싸인 역활을 한다. 표징의 역활을 한다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 이 시간에는 그러면 마지막으로 구약성경에 과연 바람은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겠고,

이제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고대로 다 요약하고 있잖아요.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것이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나는 일부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까지도 쭉 이어지는 어떤 구절이 바람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바람을 부리시는 하느님

 

첫 번째로 볼 것은 이번 시간에 바람이 하느님이 마치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신다는

건데요. 어떻게 부리시냐 하면은 하느님이 예언자를 바람을 통해서 들어올리세요.

그래서 예언자가 바람을 타고 부웅 공중에 마치 공중부양 하듯이 해서 뭔가를 보는

그런 구절이 구약성경에 있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바람을 에스컬레이터나 엘레베이터나 이렇게 헬리콥터 타듯이 바람을

타고 예언자를 쭈욱 높이 올리셔서 여기저기 보여 주신다는 구절인데 이 구절은, 이런

표현은 에제키엘서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에제키엘서의 한쪽을 교재 109쪽인데요.

에제키엘서의 한 대목을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어드리는 에제키엘서의 한 구절은 우리 성경하고 조금 분위기가 달라요.

왜냐하면 바람이 예언자를 들어올리셨다는 거를 좀 드러내기 위해서 제가 히브리어에서

직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청하시는 분들이 혹시 우리 성경과 다르다 하더라도 놀라지

마시고 제가 임으로 직역한 것이라는 걸 말씀을 드립니다.

 

* 직역: 영(루아흐)이 나를 땅과 하늘 사이로 들어 올리셔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시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곧 북쪽으로 난 안뜰 대문 어귀로 데려가셨다. 그곳은 질투를 일으

  키는 우상이 놓여져 있는 자리였다. (에제 8,3 참조)

 

지금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가서 어떤 일이 일어날 건지를 봤는데 어떻게 봤냐 하면,

"하느님이 나를 들어 올리셔서 저 높이 올라가서 저 멀리 예루살렘을 봤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또 하나는 에제키엘서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세 군데가

있어요.

 

* 에제 37,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들어 올리셔서 여기도 갖다 놓으시고, 저기도 갖다 놓으시고.

이걸 가지고 우리가 "야, 이게 정말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야? 이게 환시가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얘기 하셔도 상관 없고요. 문제는 이렇게

바람이 이런 역활을 한다고 예언자가 말을 했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고. 즉 하느님이 바람을 통해가지고 어떤 일을 하시는 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었다는 거죠.

 

그런 얘기가 몇 개 더 있어요. 마치 이제 바람이 헬리곱터 같은 건대. 엘리야가 승천할 때도

바람이 실어 날랐어요. 여러분 엘리야 승천기 아실텐데 주님께서 엘리야를 올리실 때 마치

주님이 스위치를 탁 누르면 엘리베이터가 쭉 올라가듯이 바람을 통해서 엘리야를 들어올리

신 거에요.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를 들어올린 바람이 루아흐가 아니라 '스하라'라는 표현

이에요. 이게 루아흐는 아니에요. 이게 회오리바람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욥기에서는 폭풍

이렇게도 표현을 해요.

 

 

 

루아흐가 됐건, 다른 표현이 됐건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여러분한테 지금 말씀드릴

거는 어떤 표현의 바람이라도, 어떤 종류의 바람이라도 성경에 나오는 바람은 하느님이

일으키시고 하느님이 거두어가신다는 거에요. 물론 루아흐가 첫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가장 많이 나오고, 성령으로 번역되는 중요한 단어이기는 하지만 '스하라'라는 다른

단어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엘리야 예언자가 올려가실 때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로 되어 있어요.

 

* 2열왕 2,11: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가 앞서 달신을 설명하다가 엘리야 예언자를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시청하신 분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얼마나 큰 예언자인지, 마치 우리나라에도 그런 얘기 많이 있죠. 아들 못

낳는 여자 아들 낳게 해 주고 그러면은 굉장히 영험한 스님이잖아요. 엘리사 예언자가 그런

일을 했죠? 그런데 그 엘리사의 스승 예언자가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죽을 때 이렇게 회오리바람에 실려서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느님이 바람을

통해서 이제 하늘로 승천시켜 주신 거죠. 그러니까 이제 쫙- 올려 보냈는데 재미있는 건

그분이 승천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때에 사람들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네."

그런 거에요. 왜 바람이 훅- 해가지고 그분을 하늘로 데리고 올라갔을까?

 

우리는 지금 성경을 봐서 "아, 이게 하느님이 엘리야 예언자를 사랑하셔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직접 올려보내셨다. 이렇게 ?이해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거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애요. 그래서 그가 승천하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가운데 그의 수제자 엘리사만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나머지 예언자 무리는 엘리사만 빼놓고는 어떻게 얘기했냐 하면, 걱정을 했어요.

왜냐하면, 회오리바람에 이 사람이 말려 올라가 가지고 어디 내동댕이 쳐지지는 않을까?

그렇게 걱정을 했던 거에요. 그래서 그런 걱정에서 그런 표현이 나와요.

 

그래서 다른 예언자 무리들이 "야, 엘리야 예언자 그 어르신께서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

버리셨다. 그런데 이 노인네가 바람 잘못 타가지고 올라가시다가 어디 내동댕이 쳐지면

어떻게 하냐? 그래서 그의 몸을 찾으러 가자. 우리 흩어져 가지고 이분 어디에 떨어지셨

는지, 떨어졌으면 빨리 찾아야 되니까. 어르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직 그의 수제자 엘리사만이 "아니다. 이 바람은

하느님께서 우리 선생님을 데리고 올라가신 것이다. 그분이 직접 받아 주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대목이 나와요. 여기서 이 대목을 통해 가지고 성경 저자는 엘리사 예언자만이

바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다 하는 거를 얘기해 주고 있는 거에요.

 

이 나중에 바람이 성령으로 발전하게 되거든요. 이 초기 단계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엘리

사 예언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거죠. 잘 이해했던 거 같애요. 그래서 그때 예언자 무리들

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다는 걸 한번 읽고 넘어갈께요.

 

* 2열왕 2,16: 여기 당신 종들에게 장정 쉰 명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님을 찾게 하십시오. 어쩌면 주님의 영(야훼의 루아흐)이 그를 들어다가 어떤

  산 위나 골짜기에 내던졌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죠. 이 대목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래요.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훌륭한 사람 하나를

이렇게 데리고 올라가셨다. 이 이야기가 신약성경에도 나와요. 신약성경에 주님의 성령이

사람을 잡아채서 데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인제 현대인들한테는, 우리는 합리주의와

과학이 발전된 시대에 사니까 비과학적인 얘기고 막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대목이에요.

 

그런데 지금 제가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의미로 썼는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이죠. 고대 근동의 언어와 신화에 익숙했던

사도행전의 시대, 사도행전의 저자와 독자에게는 하나도 어렵지 않은 말씀이었어요.

 

예전에 바람이 하느님의 종이었어요. 지금도 하느님의 종이고. 나중에 성령님이 되셔서

우리는 하느님과 한 분처럼 고백을 하는데 예전에 엘리야를 데려 가셨던 그 주님의 바람,

에제키엘 예언자를 높이 들어 올려서 저 멀리를 보여주게 하셨던 바람이니까 그 바람이

한 명 더 데려간다 한들 하나도 이상한 게 없는 거에요. 이분들한테는. 그래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 사도 8,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프네우마)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길을 갔다.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실제로 데려가셨는지, 데려가셨으면 저 대기권 어디로 데려가셨는지

우주 어디로 데려가셨는지, 구름 위로 데려가셨는지 이런 걸 따지는 것보다는, 주님이 이렇

게 바람을 통해서 일하셨다라는 걸 우리가 알아들으면 되겠습니다.

 

# 생명을 살리는 바람

 

그 다음으로 이제 바람의 역활 가운데 아마 마지막 역활일 거 같은데요. 바람이 생명을

살리는 역확을 해요.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종이니까 바람이 생명을 준다 하는 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거죠.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니까.

 

이것도 역시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몇 구절을 읽어드릴

텐데 이 구절을 읽으시는 분들은 만약에 집에 개신교 성경이 있거나 하면 같이 놓고 보세요.

왜냐하면 이 대목은 가톨릭 성경하고 개신교 성경하고 조금 달라요. 번역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참 고심고심해서 한 거 같애요.

 

어떤 성경은 이 루아흐, 바람을 숨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내 쉬는 숨. 어떤 성경은 영이라고

했어요. 주님의 영이라고, 또 어떤 성경은 생기라고 했어요. 또 어떤 성경은 영이라고 했어요.

조금 다르게 나오지만 다 같은 말이에요.

 

우리는 어떤 대본을 중심으로 보냐 하면, 가톨릭 대본을 중심으로 당연히 보는데, 개신교

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한번 비교해서, 어려운 구절이니까 보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에제키엘서인데요. 에제키엘서 37장 9에서 14절입니다. 교재는 111쪽이고요. 잘 보시면

이거는 굉장히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마치 여기서부터 루아흐가, 그 바람이 사람인 것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바람하고 얘기를 해요. 하느님이. 여기서 잘 보세요.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루아흐(숨: 생기)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루아흐(숨: 생기)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루아흐(숨: 생기)야, 사방에서 와 이 학살 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루아흐(숨: 생기)가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

14 "내가 너희 안에 내 루아흐(영)를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에제 37,9-14)

 

이렇게 루아흐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듯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고대 근동 신화에도 많지

않아요. 고대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새로운 신학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거에요. 그 대목

이에요. 이 대목에서 신학적으로나 종교학적으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는데 루아흐가

마치 인격체인 것처럼 루아흐한테 말을 건네는 거에요.

 

그전의 루아흐는 다른 신화에서는 큰 신의 종이었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건데,

여기서는 루아흐한테 말을 해서 시켜라 하는 거죠.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루아흐에게

말하라 하고 명하시듯이,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명하시듯이,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서 루아흐한테 말씀하신 거죠.

 

루아흐가 독립된 이렇게 인격체처럼 취급되는 것은 고대 근동 신화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루아흐를 막 시키고 하는 것은 사람들한테 익숙했던 거 같애요.

지금 여러분이 구약성서를 읽으시면 어느 대목에서나 마찬가지실텐데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은 전체적으로 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다 이바지

하거든요. 루아흐도 마찬가지에요.

 

루아흐가 어떤 일을 했다는 건 혹시 루아흐한테 거기서 말을 했다고 해서 루아흐가 독립된

신이다. "야, 구약성경에 하느님 말고 신이 또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전반적으로

하느님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진 그런 시각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을 읽어보시다가 한번은 숨으로 나오고, 한번은 영으로 나오고

한번은 생기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것임을 여러분이 알면은 좋으실 거 같애요.

그래서 번역어가 이렇게 달라지는 거는 성경 번역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말을 옮기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요.

 

우리 같은 사람 간에도 말을 한번 옮길 때마다 말이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큰 책을

하나 옮기려고 그러면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사실은 여러분이

초보적이라도 성경의 언어로 공부해 주시면 좋아요. 이게 참 재미있는 게 한국 사람들이

우리 문화 전통이기도 하지만 논어나 이런 거는 쉽게, 한문이기도 하니까 배우러 다니시는

분도 꽤 많이 게세요.

 

그래서 공자님 말씀도 한번 제대로 한문, 한자로 하나하나 읽으면 다르잖아요. 또 그렇게

읽어야지 깊이 알 수도 있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아직까지 성경을 그렇게 읽는다 하는 걸

많이 안 하시는 거 같애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더 발전하고 그러면은 그렇게 용기는 내서

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또 그렇게 공부하는 기회도 더 많아졌으면 우리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무릇 글은 특히 경전은 원문을 그대로 읽는 거만큼 좋을 수가 없거든요. 영어 번역이나

한국어 번역은 번역본일 뿐이니까요. 자, 그래서 시편은 어떻게 하느님을 노래하냐 하면

아,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많이 노래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루아흐를 시켜서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를 것이 있습니다.

 

* 시편 104,30: 당신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하느님이 내보내시는 이 숨 때문이다. 자, 이제 이렇게 되면 구약성경

에 구약성경에 대해 많이 보셨고 지금부터는 신약성경을 잠시 보실텐데요. 교회가 생겨나는

대목 잘 아시죠? 성령이 내리실 때 지금까지 배워 놓으셨던 구약성경의 표상들이 여러분들

한테 도움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성령이 임하시는 이 대목에서 굉장히 성찰할 것도 많고 신학적

의미가 많은데 우리는 지금까지 얘기됐던 바람에 관한 그런 표상만 조금 보겠습니다. 하늘

에서 부는 거센 바람은 어떤 역활을 하나 했었냐 하면 하느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징조 역활

을 했어요.

 

* 하늘에서 부는 거센 바람은 성령이 임하시는 전조처럼 묘사된다

 

하느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 때 확- 바람이 불었는데 그게 첫 번째 싸인이었어

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이런 묘사는 구약성경의 전승을 다 그대로 잇는 거고요.

그리고 이런 묘사는 바람이 불어서 우리 사람들, 우리 생물체들의 생기를 돋게 한다라는 것

도 지금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여기에 나옵니다.

 

자, 이제 보시겠습니다. 사도행전 잘 아실 대목인데요. 2,2-4까지 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배웠던 바람의 모티브를 가지고 잘 들업보세요.

 

* 사도 2,2-4: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게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바람이 첫 번째 싸인이에요.

바람이 이제 확 불면 하느님의 성령이 내려오시는 첫 번째 싸인이에요. 바람이,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우선 바람이 확 불어서 확-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악 해 놓고 한 명 한 명

한테 성령이 임하셔가지고 그들이 생기로 가득 차 가지고 여기서는 방언하는 거지요. 막

이상한 말을 하고 자기네들도 모르는. 생명력이 확 높아지는 그런 상태 이런 상태의 표현을

지금까지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봤던 모든 바람하고 표상이 그대로 농축된 겅에요.

 

  

 

그런데 여기서 바람하고 성령을 그리스 원문이 구별한 게 굉장히 재미있어요. 자세히 보면

우리가 저번 시간에 했었지요? 그리스어 말에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아가지고 번역

할 때마다 하나하나 골라서 번역할 수가 있었는데 앞에 거는 바람이라는 뜻이에요.

 

'프노에' 그 다음에 뒤에 거는 성령이라는 뜻이에요. 이거는 바람이 아니라 '거룩한 바람'

뭐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건대 '프뉴마 하기온' 길죠? 두 단어에요. 뒤에 '하기온'은 거룩

하다라는 뜻이고 '프뉴마'는 성령이세요. 이 두 단어를 구별했어요. 이렇게 구별한 이유는

사도행전 저자 때부터 이미 그냥 바람하고 성령하고 다르게 생각할려고 한 거 같애요.

이미 이때부터.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람과 성령을 주의 깊게 분리해서 이제 바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하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성령으로 번역을 하면은 이제 신화적인 요소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져요. 더 탈신화한 거에요.

 

* 사도행전 저자는 '바람'과 성령을 주의 깊게 분리하여, 바람 그 자체에 신화적 요소가

  들어갈 여지를 없애려 노력했다

 

처음에 바람신을 우리 야훼 신앙 안으로 옛날 신화적 색체를 조금 탈색해 가지고 탈신화

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거의 완전히 탈신화한 것이죠. 바람신의 요소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어요. 이렇게 신약성경의 탈신화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약은 구약성경이 하던 일을 고대로 충실하게 받아서 완성 짓는

그런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탈신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 하느님에게서 불어오는 성령님의 개념을 확립하는 것일

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 봤듯이 고대 근동 신화의 껍질을

벗겨서 야훼 신앙 안으로 소화해서 계속해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도 사실은 이런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에서 나왔던

표현이나 이런 것이 아, 좋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우리 식으로 다시 한번 소화해 가

지고 좋은 걸 취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 것과 비슷한 겁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고대 근동 신화의 흔적을 여전히 구약성경처럼 담고 있고요.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바람은 성령을 비유하는 것이면서 도 성령이 아니에요.

성령님은 다른 것.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3,8을 보겠습니다.

 

* 요한 3,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우리가 하느님의 속성을 안고 있다면 어쩌면 바람처럼 살 수 있을 거에요.

아무한테도 매이지 않고 오직 주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는. 주님의 심부름꾼,

주님의 종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죠. 바람에서 주님의 종이 된다는 그런 얘기를

우리가 많이 안 해봤지만 고대 근동 신화의 맥락으로서는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죠.  순례하는 인생에서 훌쩍 떠날 수 있는. 주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성령이 우리의 몸을 씻겨 내고 우리의 몸을 살릴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신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이 죄를 씻어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다. 이것도

역시 루아흐는 우리한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다 하는 표징에서 다시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 20,22-23 바람에 관해서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 요한 20,22-23: 이렇게 이르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뒤의 말씀 여러분 잘 아시는 것이죠? 그런데 고 앞에 구절을 지금부터 한번 주의해서

다음에 구절 읽으실 때 보시기 바래요. 하느님께서 숨을 넣어 주셨어요. 그런데 그게 아까

에제키엘서에서 본 그대로 죽은 사람한테 이렇게 하느님의 숨이 닿으면 다 살아났잖아요.

그 숨을 우리한테 넣어 주셨고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영으로 누구를 용서해 준다든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자, 이렇게 지금까지 이제 우리가 고대 근동 신화와 바람신이 탈신화 되는 그런 과정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 성경은 야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되게 탈신화 했어요. 그리고 그리스어는 루아흐를 숨, 영, 바람, 성령 등 다양하게 옮길

수가 있는데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탈신화 해가지고 나중에는 신화적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지요. 우리는 그냥 그 뿌리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긴 탈신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닫는 그런 과정

이기도 했습니다. 수천 년 걸려서 벌어진 일이지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신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아주 필연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믿는 그 교리가 그전에 성경 시대에 어떤 식으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이렇게 조금식 조금씩 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하느님께서

주재하셨고 하느님이 인간 한테 가르쳐 주셨다.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

이죠.

 

그래서 고대 신화의 의미, 구약성경의 의미, 그리고 이제 현대의 의믹 조금씩 다르게

보여도 그 의미의 어떤 연속성이 있다. 이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예전부터

이렇게 천천히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내심을 갖고 마침 훌륭한 선생님처럼

마치 엄마처럼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가르쳐 주신 결과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고대 신화와 현대의 생명론 사이에는 '의미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고대 근동의 신화의 표상을 여러분들이 조금 공부하시면 구약성서를 조금 더

가까이 느끼실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여기까지가 바람신인데요. 바람신에

대해 가지고는 여기서 일단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거는 없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남아요. 그래서 제가 다른 신을 하나 깍두기처럼 하나 말씀드릴려고 해요.

 

이 교재에는 없는 신인데 그 신을 준비해 왔어요. 워낙 고대 근동 사회가 다신교 사회에요.

그래서 수천수만의 신이 있어요. 도대체 신이 몇 개가 있는지를 몰라요. 그리고 같은 신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서 여기서는 이렇게 나오고, 저기서는 저렇게 나와서 이게 이름만

같지 이 두 신이 같은 신이냐? 그래서 그 신 사전을 이렇게 전문 사전을 보면,

 

이 신은 1번 이 지역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2번 다음 지역에서는 이렇게 나온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수천수만의 신이 있는데 고기서 굉장히 쪼그만 신 하나만 여러분한테

말씀드릴텐데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신이에요.

 

# 헛것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지요? 뒤집어 보면 우리가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한번쯤 이렇게 우리 신앙을 고민하실 때 한번 뒤집어서 스스로 한번 질문을 해보시는 게 도

움이 될 때가 있어요. 어떤 질문을 하는 거냐 하면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잖아요. 하느님 한

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인데 하느님의 반댓말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반댓말을 우리가 안다면 그거를 안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죠? 어떻게 보면 쉽죠?

맨날 한 군데만 보지 마시고 머리가 있으니까. 우리가 다신을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거지요.

우리가 고대 근동에 신들이 굉장히 많은데, 하느님 아닌 신. 하느님의 반대되는 신이 있을까?
그래서 우리 하느님이 유일신이니까 하느님을 반대되는 신들은 다신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죠.

잡신들, 다신들.

 

혹시 제가 이렇게 질문 했던 어떤 분이 저한테 어떻게 대답 하시냐 하면, 하느님의 반댓말은

우상이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 그것도 맞아요. 다신도 맞고 우상도 맞는데 혹시 신의

이름에서 하느님에 반대되는 ?신이, 그 신의 이름을 여러분한테 말씀드릴께요.

1역대 16,26에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 이스라엘은 하느님만을 믿고 다른 민족들은 다른 잡신들을 믿는데 그걸 뭉뚱그려서

뭐라고 하냐 하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 1역대 16,26: 민족들의 신들은 모두 헛것이어도 주님께서는 하늘을 만드셨네.

 

헛것이라고 해요. 하느님 아닌 것들은 헛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헛것이라는 신이 있을까?
혹시. 헛것이란 무엇일까? 해가지고 국어사전을 찾아봤어요. 헛것이 뭐냐 하면, 헛일이나

허깨비래요. 허깨비. 허깨비는 뭐냐 하면 사전에 나오는 말이에요. 기(氣)가 허해서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 헛것: 국립국어원[표준어국어대사전]

'헛일'이나 '허깨비'의 동의어로 '허깨비'는 기(氣)가 허하여 착각이 일어나, 없는데 있는

 것처럼, 또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물체를 말한다.

 

한자말로 헛것이라는 말이 빌허虛?자에다 사이 ㅅ이 붙은 거에요. 빈 것이에요. 빈 것.

없는 것이죠. 우리말 헛것은 빈 것으로서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에요. 그래서

헛건을 거짓신이라고 표현하는 거는 굉장히 적절해요. 우리 말로도 딱 맞고 히브리

말로도 딱 맞아요.

 

* '헛것'은 곧 '거짓된 신'을 말한다

 

그런데  그러면 헛것이라는 히브리어는 또 어떤 뜻일까? 그래서 제가 히브리어 사전을 또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아, 이게 히브리어 말로 '헤벨'이라고 하는데요. '헤벨'이라는 말의

첫 번째 뜻은 헛것이 아니에요. 첫 번째 뜻은 한숨이에요. 푹 쉬는 한숨이에요. 지금 우리가

바람신을 봤는데 바람신 하고 조금 통하는 말이에요.

 

우리가 지금 바람신을 봤는데 바람신 하고 통하는 말이에요. 숨이니까. 특이하게도 고대

근동에서 그러면은 이 헛것이라는 신이 나올까? 그래 가지고 도 거기서 맞는 고대 아카드어

사전, 고대 수메르어 사전, 고대 우가릿어 사전 여러 가지를 찾아 봤더니 잘 안 나와요.

 

아, 이거는 정말로 히브리인들의 구약성경에만 조금 잘 나오는 단어구나 해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정리한 내용을 말씀드릴께요. 아마 이게 여러분들한테는 신앙을 성찰하는데

어떤 좋은 재료가 하나 될 거 같으니까 집에서 방송 시청하시는 분들은 한번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는 거를 한번 들어보시고 혼자 기도하실 때나 오늘 저녁에 주무실 때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래요.

 

헛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구약성경은 헛것, 한숨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거죠.

헛것은 첫째로 신이 아니에요. 하느님 백성이 믿어서는 안 되는 거에요. 하느님 백성은 하느

님만 따라야 되요. 우리가 만약에 헛것을 쫓잖아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질투하시고 분노하신

다는 표현이 있어요.

 

* '헛것' 또는 '한숨'은 신이 아니며 하느님 백성이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신명기에 나오는데요. 여러분 교재에는 없으니까 그냥 잘 들어보세요. 신명 32,21에 나옵니다.

 

* 신명 32,21: 그들은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헛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다

  나 또한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하리라.

 

헛것을 따르면요 하느님이 질투하셔서 하느님 백성이 안 된대요. 하느님이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잖아요. 그 계약을 파기하시겠다. 이거에요. 헛것을 믿는 것은 아주 핵심적인 우리의

구원을 우리가 얻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거에요.

 

북왕국이 남왕국과 경쟁을 하다가 먼저 망했지요?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잘 아시죠?

북왕국이 멸망했을 때 북왕국의 임금들이 왜 망했을까? 물론 나라가 힘이 없어서 망했겠죠.

그런데 구약성경은 그거를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이 사람들이 하느님이 굉장히 좋은 선물을

주셨잖아요. 이스라엘한테.

 

그런데 그 선물을 잘 지키지 못해서 망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믿음이 강해서 망한 것이다.

결국은 성서는 그렇게 풀이를 하죠. 그런데 이거를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들이, 북이스라엘

의 임금들이 하느님한테 충실하지 못하고 헛것을 섬겨서 그렇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러니

까 헛것이 이렇게 자주 쓰이는 말이에요. 1열왕 16,13을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북이스라엘의

임금들이 망한 이유를.

 

* 1열왕 16,13: 그것은 바아사가 지은 모든 죄와 그의 아들 ?엘라가 지은 죄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죄짓게 하여, 그들이 만든 우상들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었다.

 

"그들은 자기들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죄짓게 했다." 임금 혼자 죄를 지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 백성들까지 죄짓게 했다. "그들이 만든 헛것들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었다." 헛것, 우상을 만들었다는 거죠. 헛것은 정말 주님 아닌 것을

표현하는데 어쩌면 딱 맞는 말이에요.

 

구약성경은 헛것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 하는데요. 헛것을 섬기는 것은 주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거에요. 우리가 헛것을 섬기면 큰 죄를 짓는 거에요. 우리가 헛것을 섬기면 우리는

하느님의 백서이 되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 자신을 참되고 알찬 인생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우리가 파멸하게 되는 그런 일이 됩니다.

 

* 헛것을 섬기는 것은 주님과의 약속을 파기하는 일이요. 큰 죄를 짓는 일이며, 우리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해요. 헛것을 쫓아다니면 네가 헛것이 된다. 진짜 그렇게 표현을 해요.

우리는 헛것이 되어 버리는 겅에요. 하느님을 쫓으면은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받아 그렇게 사는 것이고, 헛것을 쫓으면 내가 헛것이 되는 것이죠. 한심한

인생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한숨'이라고 그랬잖아요. 아까 헛것이. '한숨', '한심한 인생'

이것도 통하는 것이죠. 2열왕 17,15을 보면 이렇습니다.

 

* 2열왕 17,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

  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이 되었다. 그들은 또 주님께서

  본받지 말라고 명령하신 주변의 민족들을 따라다녔다.

 

주님이 율법을 주시고 구약성서 시대 때는. 그 다음에 계약을 주시고, 그 다음에 또 거기서

모자라서 거기서 벗어나니까 또 경고도 해 주셨어요. "좀, 잘해라" 그런데 다 없신여겼어요.

그러니까 헛것을 따라 다니다가 헛것이 되었다. 그들이 헛것이 된 거지요. 이거는 참 성찰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따르는가, 헛것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 생활 속에서, 여러분들 부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성당에서 2열왕 17,15의 말씀을

한번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에서 시편의 저자는 헛것을 섬기는 자를

멀리하자. 우리가 좋으신 주님만을 따르자.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결국 우리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얘기 하죠. 그래서 시편 3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

니다.

 

* 시편 31,7: 저는 허황된 우상 섬기는 자들을 미워하고 오로지  주님만 신뢰합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바람도 보았고, 바람이 종이고 우리도 이제 바람처럼 열심히 일할 수도

있고, 도 이제 그 바람이 하느님께서 나중에 성령이 되시고 훌륭한 바람이고, 생기를 넣어

주시느 바람이고 하는 걸 다 보았잖아요. 그런데 한숨은 아주 안 좋은 겅에요. 한숨은 헛것

이고 우리가 따라가서는 안 될 것이죠.

 

헛것을 우리가 멀리 해야 되는데요. 이 헛것을 멀리하는 이야기 중에 여러분들한테 중간에

잠간 소개시켜 드릴 게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선교하는 여행이 있어요. 사도행전 14장인데요.

거시도 역시 헛것 이야기가 나와요.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었지요. 그래서 어디에 가서도 이렇게 또 한 명을 고쳐 준 거에요.

 

그래서 앉은뱅이를 고쳐 주니까 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했냐 하면 바르나바

는 제우스가 내려 오신 분이고,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 내려오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그래서 아, 제우스 신전에 가서 황소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우리가 감사 표시를 하자.

이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러니까 사도들이 그걸 듣고 어땠겠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어, 이러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말하

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사도 14,15: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헛된 것을 버리고 우리 창조주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그런 복음을 전파하려고 내가 여기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고 앉은뱅이를 고쳐 주고 한 것이지, 내가 무슨 신이 되어서 뭐 할려는

게 아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사도들이 썼던 말 중에 '헛된 것을 버리고 창조주 하느님께 돌아선다."라는

그 '돌아선다'라는 말을 쓸 때 똑같이 이 표현을 써요. 아, 그러면 우리가 원래 사도들이

'돌아서다.' '회개하다'라는 말을 어떻게 쓰셨는지도 알 수 있어요. 이 헛것을 가지고 알 수

있어요. 회개하는 건요. 헛것을 등지는 거에요.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잘못 오해해서 이 사람이 신이다 해서

누구 사람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받들어 모시고, 하느님한테로

돌아서는 것. 헛것을 뒤로 하고, 허깨비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것이 회개에요.

 

* 회개는 '헛것'을 등지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신약성경의 핵심 메세지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다'

잖아요. 우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과연 어디서부터 돌아서는 것인가? 우리가 죄에

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죠. 그런데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동안 믿었던 허깨비를 물리치고 참하느님한테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을 회개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말의 헛것이 허깨비이고, 빈 거라고

그랬잖아요. 있는 거 같은데 없는 거.

 

다석 유영모 선생이라고 동방의 성자, 이렇게 표현하시는 분인데 그분이 우리나라 말로 남기

신 성찰집 중에 굉장히 좋은 표현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표현인데 하느님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없는 듯이 계시는 분"

 

하느님은 없는 거 같애요. 우리가 "하느님, 누가 만져봐라. 내놔봐라" 그러면은 할 수 없잖아

요. 그런데 하느님이 계시잖아요. 그쵸?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들은 그분이 여기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없는 듯이 계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헛것은, 허깨비는 정반대에요. 없는데 있는 거 같은 거에요. 그쵸?

 

하느님과 허깨비는 정반대다. 어찌보면 이렇게 사실은 허깨비고, 없는 것이고, 한숨인데

마치 대단한 것처럼 우리 앞에 나와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상의 본질일 수도 있어요.

신앙인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까 국어사전에 헛것, 허깨비가 왜 보이냐 하면, 사람이 기(氣?)가 허해서 보인다고 나와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허깨비를 안 볼려면 우리가 기(氣)가 차 있으면 되요. 기(氣)가

충만하게 차 있으면 되죠. 그런데 아까 성령의 바람께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한테

참 생기를 넣어 주시는 것이었어요. 하느님을 잘 믿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튼튼히 살면

허깨비를 그렇게 보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살겠죠?

 

그리고 이제 ?제가 역지사지를 해 보자고 그랬잖아요. 뒤집어 생각하기. 한번만 뒤집어

생각하면, 허깨비는 빌허(虛)자라고 했잖아요. 그 虛자의 또 반댓말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말에. 실(實), 그것도 맞고요. 실을 순수 우리나라 말로 하면은 참이 되겠죠.

참. 헛바람은 나쁜 바람이고, 참바람은 좋은 바람, 실한 바람은 우리 하느님의 바람이죠.

아귀가 딱 맞아요. 이렇게 실과 허.

 

여러분은 참바람을 쐬시기 바래요. 그리고 바람 얘기 하니까 제가 제 생활에서 잠시 느낀

거를 말씀드리면은, 저희 아파트가, 조그만 아파트에 사는데 제가 결혼하기 전에 혼자

심심해 가지고 식물을 키워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님은 굉장히 잘 키우세요.

그런데 저는 다 잘 죽여요. 잘 못키우겠어요. 죽어나가 식물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빈 화분만 이렇게 늘어나는 그런 삶을 살았던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저의 어머니는

딱 보시고 물만 조금 주시면 어머니만 다녀가시면 화분이 이렇게 살더라고요. 굉장히 신기

한데 제가 어머니한테 왜 이렇게 제가 하면은 죽냐고, 어머니가 하면 살고. 그걸 여쭤본 적이

있어요. 어머니께서 뭐라고 그러시냐 하면은 바람을 쏘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창문을 좀

열어 놓고 물을 좀 주고 얘들은 바람을 좀 쏘여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까 저는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그냥 물만 냅다 주니까 얘들이 쪄서 죽었던 거

같애요. 아, 이럴 때도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바람이 이렇게 통해야지 모든 식물들이 사는

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 물 쭐 때마다 문 열어 놓고 바깥 바람이

통하게 이렇게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덜 죽더라고요. 그래도 어머님은 쫓아갈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도 좀 죽였어요.

 

여기저기서 불어와서 수분도 공급하고, 찬바람도 주고, 그런 찬바람이 여러분한테도 모두

다 불으셔서 여러분들 신앙생활이 잘 되시고, 신앙생활이 잘 되면 여러분들 인생이 참되고

알차게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헛것에서 더 멀리 있게 되겠죠. 그렇게 되기를 여러분

기원하면서 딱 절반의 강의 모두 세 번째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강의 예고: 삶의 무대

 

* 주원준 박사님이 계신 곳 안내: 한님성서 연구소 http://www.biblicum.or.kr/

 

*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ww.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body.php%3Fprogram_fid%3D6875%26menu_fid%3D6891%26cid%3D452309%26yyyymm%3D201305&program_fid=6875&menu_fid=6891&cid=452309&yyyymm=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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