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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14강 강- 삶의 무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4 조회수1,549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 14강 강 - 삶의 무대

 

강의에 들어가며...

 

 강은 히브리어로 ‘나하르’다. 구약성경에 120번 이상 나오는 무척 친숙한 낱말이다.

이 말은 지리적 강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화적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강’은 ‘바다’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강은 물을 제공한다. 인류의 4대 문명, 황하,

인더스, 나일, 메소포타미아, 모두 강에서 나왔다.

 

‘삶의 조건’에 꼭 필요한 물이 흐르는 곳에 초목이 자라고, 문명도 자란다.

그래서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강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근동인들은 강에 경외심을 느꼈다. 다시 말해 강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현대의 합리적 세계관과는 무척 다른 마음으로 자연을 섬겼다.

그들은 강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백이 축적된 심원한 ‘의미의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젖줄이다. 이 강을 히브리어로는 ‘예오르’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네일로스’.라 하는데, 두 낱말 모두 ‘기간’ 또는 ‘계절’을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어에 뿌리를 둔다.

 

곧 나일강의 이름은 ‘한 계절’ 또는 ‘(돌아오는) 기간’이라는 뜻으로, 일 년에 한 번 나일

강이 범람하는 기간과 관련 있다. 곧, 나일강의 본질은 범람이다. 고대 근동의 신은

대부분 자연 현상에 기반한 인격신이다. 흥미롭게도 나일 강의 경우 강 자체는 인격화

되지 않고, 강의 ‘범람’만이 인격화되었다.

 

이 ‘나일 강 범람의 신’의 이름이 ‘하피’Hapi다. 이 신은 그림처럼 배가 불룩 나오고

남신이지만 여신처럼 젖가슴이 크다. 머리에는 파피루스 덤불이 자라고 손에도 식물을

들었다. 하피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의 19왕조(라메세스 2세가 속한다) 시대부터 상나일과

하나일의 한 쌍으로 묘사되었다. 나일강의 범람의 신 ‘하피’는 태초의 심연과 관련된

생명력의 신이자 풍요의 신이다.

 

이집트 종살이를 오래 겪은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문화에 익숙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나일 강의 종교적 의미와 하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오직

이 하피 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오히려 나일 강의 범람을 하피가 아닌,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일로 묘사한다.

 

  인류의 4대 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두 개가 바로 고대 근동 지역이다.

그 중에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과연 언제부터 이 지역을 이렇게 두 강을 중심으로 이름 붙였을까?

 

이 이름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간 것은 고대 그리스인 덕분이다.

그리스인들은 셈족의 전통을 따라 이 지역을 ‘메소포타미아’ (두 강들 사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 표현이 들어왔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강은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이미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이 두강은 모두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성을 지녔다. 이 두 강의 이름 자체가 신의

이름이었다. 고대 바빌론어 이름에는 ‘마르-푸랏팀’(유프라테스의 아들)이나

‘움미-이디클라트’ (티그리스는 나의 어머니)등이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강의 신성은 세월에 따라 약화된다. 후대의 문헌일수록 이 두 강이 신으로

언급되지 않고, 그저 지명으로 쓰인다. 왜 그럴까? 바로 엔키(Enki)신이 있기 때문이다.

엔키는 수메르 시대부터 일곱 주신(主神)가운데 하나였고, 최고신 아누(하늘신)의 아들

이자 풍요의 신 두무지의 아버지이다.

 

엔키의 아카드어 이름은 에아인데, 후대에 최고신으로 등극하는 마르둑의 아버지

이기도하다. 엔키는 선하고 좋은 신이다. 그림을 보면 엔키의 어깨너머로 물고기가

노니는 강물이 흐르고 그의 모자에는 식물(생명의 나무?)이 자란다. 수염이 긴,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인상이다. 엔키는 고대 근동지역에 정기적으로 홍수를

일으켜 비옥하게 만드는 풍요의 지하수신이요,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 해 주며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선한 신 이었다.

 

엔키는 대표적인 선신이기에 대중에게 무척 사랑받았다. 이렇게 영향력 있는 엔키가

강물의 신성을 굳건히 대표했기 때문에 이 두 강의 신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영향력이 강한 고대 근동지역에 영향력이 막강했던 ‘엔키’의 흔적을

구약성경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제14강 강 - 삶의 무대

 

안녕하세요? 예, 한님성서 연구소의 주원준입니다.

성호경 같이 바치고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건강하게 또 다시 뵙게 되니까 또 이렇게 반갑습니다.

이제 14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14회 동안, 이게 절반이 좀 넘는 강의니까

오늘 강의 처음에는 그동안 했던 거를 조금 요약을 해 드리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첫 시간에 왜 이 평신도 신학자가 나와 가지고, 한님성서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이 책을 썼는지, 구약성경과 신들이라는 책을 썼는지.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이 고대

근동의 신화와 어떻게 보면 우리 성경이나 신앙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잡신의

세계를 교양으로 알아 두면은 왜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시간 내내 말씀을 드렸지요?

 

그리고 이제 앞으로 서구에 보면은 고대 근동, 이집트라든지, 메소포타미아라든지 이런

다큐멘터리를 이 사람들이 많이 만들잖아요. 그런데 신앙인들이 많이 보거든요. 왜냐하면

우리 신앙의 뿌리와 관련이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그리스도교는 아직까지 역사가 200년, 300년 이리 되가고 그리 짧은 역사에

비해서는 굉장히 잘 하는 그런 가톨릭 교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역사가 깊어지고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우리 신앙과 관련해서 배울 교양도 많고 또 이렇게 알아야 될 것도

많고 조금더 우리 문화에 익숙해져야 될텐데,

 

우리가 이제 선교 5백만 명을 넘어가면서 아마 그렇게도 공부하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점차

나오고, 또 그동안 이제 아직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강의를 여러분들이 들으셨기

때문에 이제 좀 심화하는 강의를 들으시는 것도 좋겠다 해서 이런 시간을 저희가 마련해서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우리는 고대 근동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먼 세계이고, 또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

서도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고 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근대 합리주의도 없고, 과학의

언어도 없고, 하지만 고대 근동 신화의 세계에 살면서 어찌보면 자연과 사물에 대해서 매우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그들의 마음이 구약성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는 것이죠. 이번 시간

에도 역시 그거를 볼 수 있고요. 그거를 우리는 이제 이 전체 강의를 통해서 모두 여섯 개의

주제를 다룰 예정인데 세 개의 주제를 이미 다루었습니다.

 

첫째 주제는 하늘이었어요. 하늘은 최초의 신이자 최초의 최고신이었어요. 정말 엄청나게

큰 신이었고,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은 쪼그만 나라의 쪼그만 신이었고, 이

하늘신이야말로 정말 전체를 다스리는 신이었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정말 대범하게도 그

쪼그만 나라 사람들이 "아, 우리 야훼 하느님이 최고신이다. 그분이 유일신이다." 이렇게

고백했고 가장 높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에서 하늘은 최고의 신이었고 최초의 최고신이었다

 

그래서 하늘은 그냥 장소일 뿐이다. 하느님이 만드셨을 뿐이다. 처음에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많이 얘기를 했었고, 하지만 점차 점차 유일신 신앙이 이제 자리를 잡으면서

하느님을 하늘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을 해도 하늘신이라고 오해될 여지가 없으니

까 그렇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는 과정을 우리가 네 시간에 걸쳐 가지고 본 거 같애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히브리인들은 야훼 하느님을 최고신으로 받아들였고, 하늘을

  하느님이 만든 장소로 생각했다

 

그리고 달신에 대해서도 봤어요. 달신은 참- 우리민족의 정서와도 다를 신이다. 하늘신은

한국 사람들도 우리 말 속에 "오, 하늘이시여,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이런 식으로 해서 하늘이라는 어떤 우리의 원초적인 개념을 갖고 있어요.

 

단군 할아버지도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오셨거든요. 그런데 달신은 참으로 우리와 달랐어요.

우리는 음양의 사상에 의해서 태양이 중심이고 달이 참 보잘 것 없고, 음이고 좀 약하고 이런

거였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오히려 달이 왕권의 상징이었어요. 별들의 군대를 거느리는 큰.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에서 달신은 왕권의 상징으로 최고신의 피가 흐르는

  강한 남성신이었다

 

그래서 일월성신(日月星神), 해와 달과 별을 거론할 때도 달이 먼저 있고, 해와 별이 나오는.

그런데 이 달신이 생각보다 이스라엘의 구석구석에 들어와 있었어요. 달신을 믿는 초승달,

그러니까 초하룻날 문화가 굉장히 깊이 들어와 있었고, 우리가 모르는 새에 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 이런 고대 근동의 문화를 흡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은 나라로서 여러

사람들고 교류하면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언어를 알고, 또 그들의 문화를 익혀야만 됐으니까.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이스라엘에는 달신 숭배 문화가 널리 펴져 있었지만, 문화로

  받아들였을 뿐, 신으로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들어왔지만 희안하게도 그런 문화를 흡수하면서 달신에 대해서는 또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달을 신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문화로서는 받아들였지만.

그래서 "달신을 믿지 마라" 하는 게 신명기에 굉장히 많이 나오거든요. 달신 믿으면 큰일난다

하는 것이고, 달신 신앙이 굉장히 강하니까 달신을 믿지 말라라고 하는 걸 넘어서 가지고

창세기 1장이 굉장히 멋진 신학을 얘기 했었죠.

 

시편에도 나오는데 달은, 그것은 우리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일 뿐이다. 피조물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자연스레 달신은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 창세기 1장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도 볼 수가 있구나. 이런 식으로 보자면, 쪼그만 나라 이스라엘 사람들, 신학자

들이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큰 어떤 원대한 믿음을 가지고 만든 텍스트이구나.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창세기 1장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기술한 용기 있는 텍스트다

 

거기에 나오는 하늘, 별, 달, 땅 모든 게 다 큰 신들이었거든요. 그 신들이 몽땅 아무것도

아니야, 하느님이 말씀으로 나흘만에 다 만드신 그것일 뿐이다라고. 우리 하느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을, 잡신들을 다 상대화시켜 버리고, 피조물화 시켜버리는 대단히 용기 있는

텍스트이구나. 그래서 창세기 1장이 우리 성경 맨 앞에서 딱 자리를 잡아 주니까 혹시

신화적인 표상이 군데군데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죠. 앞에서 이미 중심을 잡아주고

있으니까. 또 그런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제로 우리는 바람신을 보았거든요. 바람신은 참- 잡히지도 않고, 여기저기

부는 것 같고, 또 바람신 자체가 그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신이었는데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이 바람을 부리고,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에 하느님의 어떤 싸인으로서 바람. 이런 것

도 보았고, 이게 신약시대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보았습니다.

 

* 지난 강의 요약: 바람은 하느님의 종이자 하느님 현현의 징조이다

 

그리고 바람신을 보다가 깍두기로, 곁다리로 우리가 헛것도 하나 보았지요? 한숨신도 하나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서 아, 이렇게 또 신들을 가지고 이야기 하니까 우리가 또 다르게

우리의 신앙의 핵심, 또 우리 신앙의 어떤 기본적인 영성도 다시 한번 바라볼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그래서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모든 지식들이 여러분들한테 신자로서 교양을

쌓는데 도움이 되고 또 교양을 그냥 지식으로만 쌓으면 안 되고 이걸 또 여러분이 하나하나

마음에 가시는 대로 묵상을 하셔서 여러분들 신앙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드리는데 이번

강의의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은 오늘부터는 완전히 다른 신 하나를 보겠습니다.

 

# 강(江)의 신

 

완전히 다른 신인데 오늘부터 볼 신은 '강'의 신입니다. 강의 신. 물 흐르는 강 있죠?

대하신. 강. 우리나라 말로 강이죠? 강의 신을 보겠습니다. 강을 히브리 말로 '나하르'

라고 해요. 쉽죠? 이게 구약성경에 120번 이상 나오는 굉장히 많이 나오는 강 이름이에요.

 

그런데 이 강이 지리적인 어떤 강, 그러니까 요르단 강, 유프라테스 강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신화적인 강, 신화적인 의미를 띄는 강.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이 나하르가 워낙 중요한

단어고, 워낙 큰 단어라서 나하르만 따로 얘기를 해도 몇 시간을 얘기 해야 되요.

 

그래서 나하르는 보지 않을 거고, 나하르 말고 또 강이 많이 나와요. 다른 강들. 그러니까

조금 작은 강들을 보겠는데 원래 이렇게 작고 양념처럼 있는 강들이 보면 또 재미있어요.

그래서 강의 재료나 책의 재료로 적당할 거 같고, '나하르'로는 아마 단행본 한 권을 써도

될 거에요.

 

특히 나하르 하고 얌. 얌이 이제 바다라는 뜻이에요. 얌 하고 나하르 하고는 굉장히 깊이

연관 되는 신이에요. 그래서 둘을 같이 보기도 해야 되서 조금 복잡해요. 그래서 저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강 중에서 나하르를 제외한 강을 보겠다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성경을

보시면 강에 대해서 많이 나오는데 그 나하르가 나오는 그 수많은 구절들은 이번 시간에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것만 다루는 거에요.

 

자, 그러면 우리가 하늘신, 달신에서도 보았듯이 강을 한번 합리주의가 생기기 이전의 강.

옛날 사람들이 느꼈던 그 원초적인 강을 한번 느끼셔야 되요. 그래야지 이야기가 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우리는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다 그렇지만, 우리 모든 인간은

시대의 한계에 갇혀서 살아요.

 

우리는 우리 시대가 생각하는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데 예를 들어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도 한반도를 떠나서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여기서 생각하던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죠? 그런데 시대는 더 해요. 우리는 지금 과학 기술이 발전되고, 합리주의가 있고,

민주주의 하고, 자본주의 하고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런 게 나온지는 인류 사회에서

500년도 안 되요.

 

그런데 우리는 3천 년 전, 5천 년 전으로 가서 얘기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은

강과 하늘과 이런 거를 어떻게 느꼈는가를 한번 도 쓔-욱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고 본격적인

강의를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은 다시 강에 대해서 원초적인 감을 먼저 느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강(江)을 향한 경외

 

인류의 사대 문명 있죠? 모두 강에서 나왔죠? 4대 문명이 모두 강에서 나왔다는 건, 강은

인간이 사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제공해 줘요. 물을 제공해 주는 것이죠. 강이 없으면

인간이 살 수가 없어요. 어떤 큰 도시 건, 어떤 잘 되는 곳이건, 물이 곧 큰 강이 있어야지

되는 것이죠.

 

* 인류의 4대 문명인 황하, 인더스, 나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강에서 발원했듯이

  강은 인간이 사는 가장 원초적인 조건인 물을 제공해 준다

 

우리 서울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큰 강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도시가 살 수 있는 거죠.

좀 복잡하고 정신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강마저 없었으면 큰일 날뻔 했겠죠? 우리는 강에

대해서 우리나라 옛날 사람들도 그렇지만 어떤 우리 옛날의 시골에서 성황당, 이런 거

생각하시면 되는데. 어떤 큰 나무가 있거나 큰 바위가 있거나, 어떤 그렇게 큰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거기에서 공경하고 살았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미신일 수도 있는데 종교적인 태도일 수도 있어요. 강도 그랬어요.

큰 강을 보고 그냥 이렇게 물이 흘러가는 거다. 이 강을 우리가 어떻게 잘 하면 돈 벌 수

있다. 여기서 어떻게 땅 장사하자.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큰 강 그 자체에 대해 가지고

경외심을 갖고 있었어요.

 

#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요 시간에는 잠시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우리 종교인들이 어떤 경우 경외심을 느끼

는가? 하면서 성스러움의 의미라는 그런 경외심의 본질에 대해서 잠시 여러분들한테 말씀

드릴려고 하는데, 이거 이 개념을 알아야지 강에 대한 마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저희가 지금

부터 어떤 마음을 설명드리려고 하는데 신앙생활 하셨던 분들은 이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거에요.

 

종교심의 본질은 뭘까요? 종교는 어떤 마음이잖아요. 그 종교적인 마음, 그 종교심. 그 본질

은 무엇일까요? 합리적인 것이 본질일까요? 비합리적인 것이 본질일까요? 예, 종교는 우리가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되면 합리적이라 하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비합리적이라

고 하죠. 그런데 사실 종교는 둘 다 있어요.

 

우리가 신학으로 하면은 합리적인 것이 굉장히 많이 설명이 되고,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라

든지, 이런 걸 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어요. 물론 어렵죠? 공부할려면 어렵기는 하지

만 설명을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많이 설명하려는 시도를 옛날 신학에서는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신학뿐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아, 비합리성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비합리성은 그냥 버릴 게 아니라, 왜냐하면 거기도 뭔가 들어 있다는 거죠. 인간의 어떤

감정이라든지. 그래서 어찌 보면 ?종교는 매우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비합리적이에요.

두 개가 다 있는 거에요. 합리적인 것만 하면 철학이 되겠죠.

 

* 종교는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또 지극히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종교는 비합리적인 것도 있어요. 내가 왜 나를 희생해야 되는가? 나 손해 아니에요?

비합리적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신앙의 본질일 수가 있는 거에요.

우리가 신학이나 교회 조직이나 뭐 이런 거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만 어쩌면 하느님이나

성령이나 믿음 같은 거는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은 합리와 비합리가 높은

수준에서 하나로 뭉뚱그려져 있는 게 종교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모두가 다

들어 있는 거에요. 그 안에. 그래서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종교는 지극한 합리성과

지극한 비합리성이 다 있어요.

 

* 종교는 합리와 비합리의 독특한 복합체 '성스러움'이다

 

그래서 논리로서 학자들도 어떻게 할 수 있고, 또 영성가들이나 우리가 배우지 못한 분들도

종교를 또 이해할 수가 있는 거에요. 그런데 과연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성 가운데 어느 게

더 본질적이냐 그러면 루돌프 옷토라는 종교학자는 비합리성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비합리성이 합리적이 아닌 게 아니라 합리적인 걸 넘어서는 거를 비합리

성이라고 했어요. 어찌보면 초월 같은 거 그런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어찌보면 종교는 우리의 합리적인 우리의 언어, 철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 종교는 합리적인 언어, 즉 철학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분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이 눈을 감고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이 하느님을 만난다. 진짜로 진짜로 예수님을 진짜 진짜 만난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들까? 옷토라는 종교학자 하고 그분의 설명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감정이

드냐 하면, 굉장히 좋은 감정이 들거에요. 굉장히 푸근하고, 굉장히 좋고, 내가 정말

그분이 나한테 나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실. 그쵸? 되게 좋을 거에요.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는 살짝 두려운 마음도 있어요. 내 죄도 아시잖아요. 내 잘못도

아시고. 그리고 또 그렇게 높은 분이 오시면 우리가 살짝 불안해 지는 것도 있거든요.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피조물이니까. 그러면서 어떤 마음 한 구석에는 굉장한 신비감도

들어요. 이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안 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니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매혹적인 감정이 들어요.

 

* 종교적 대상 앞에 우리는 공포, 신비, 매혹감을 느낀다

 

그분을 진짜 보고 싶고, 큰 사랑의 마음도 들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어마어마하게 장엄한

굉장히 큰 어떤 것을 본다라는 느낌도 들 거에요. 이렇게 인간인 느낄 수 있는 어떤 감정

들이 지극히 높은 상태로 동시에 어떤 복합적으로 다 들어요. 하느님을 만나서 좋기만

하면은 어쩌면 조금 앝은 신앙일 수도 있어요. 이런 걸 어쩌면 모두 다 느껴서 하느님을

만나면 그래서 울컥 눈물이 나온다든지, 좋은데 왜 눈물이 나와요? 나올 수가 있어요.

 

이 모든 걸 다 느끼면은 아니면 어떤 탈혼 상태에 빠지거나 여러 가지 감정 상태가 나올 수

있거든요. 이런 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나 하면, 사랑의 지극한 감정에 어쩌면 비유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지극한 사랑을 느끼면 좋기도 하면서 그 사랑이 또 떠날지도 모르니까 또

불안하기도 하면서 이 사랑이 또 얼마나 유지될까? 또 걱정도 살짝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매혹감도 들면서 이런 것이 동시에 확 일어나는 어떤 큰 감정이 있죠? 그런 거에 비유할

수도 있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술가라면 정말 훌륭한 예술 작품을 봤을 때 그런 감정을 느낄 수도

어요. 어떤 미술가라면 정말 자기가 평생 빠져드는 어떤 그림을 평생 놓고 사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좋기도 하고, 또 그림하고 떨어지면 또 불안하기도 하고

같이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마치 네가 옆에 있어도 네가 그립다. 이상한 감정들이 막 드는

거죠.

 

하느님을 만나면 루돌프 옷토라는 학자는 우리가 어떤 감정이 드는데 그 감정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두렵기만 한 것도 아니고, 또 매혹적인 것만도 아니고 그런 것들이 모두 다

동시에 드는 어떤 마음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것이 이 사람이 뭐라고 이름 붙였냐 하면,

이게 거룩함이다.

 

여러분들이 동의하실지 모르겠어요. 어찌보면은 관심 있으신 분은 길희성 교수님이 번역

하신 [성스러움의 의미] 분도출판사에서 나왔는데요. 루돌프 옷토라는 학자가 지은 그 책을

보시기 바래요. 잘 많이 팔리고 종교학을 하는 학생들은 많이 보는 책이에요.

 

 

그런 감정 상태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이제 거룩함의 본질이죠. 그래서 거룩함을 느낀 사람,

진짜 하느님을 느낀 사람은 어떻게 하냐 하면, 표현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매우 고마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빠져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얻은

거 같으면 하는 약간 미친 사람 같은 그런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미친 거는 아니에요.

적절한 거에요.

 

그래서 루돌프 옷토라는 학자는 성스러움, 독일말로 다스할리게 이렇게 표현 했고, 라틴어

에서 루미노제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이거를 우리나라 말로 어떻게 옮겼냐 하면,

굉장히 좋은 번역이라고 하는데요. '경외'라고 그래요. 경외심.

 

공경경(敬)자에다가 두려워한 외(畏)자에요. 이 두 가지 말이 되게 재미있어요. 공경하는데

두려워해요. 공경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그런 어떤 마음 상태가 있어요. 그런 마음

상태가 거룩함의 본질이에요.

 

* '경외'란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여러분은 아마 하느님을 생각하시면 나중에 하느님을 만났다 그러면 그런 걸 느낄지도

모르고, 우리가 정말 훌륭한 성당에 들어간다든지 아니면 정말 훌륭한 전례에 참례하면은

이런 감정을 느낄 수가 있어요. 어떤 때는. 그리고 이런 감정을 잘 느끼면 더 큰 거룩함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가 또 묵상도 하고, 성찰도 하고, 또 실천도 하고 노력하는 것이죠.

 

이런 경외심을 옛날 고대 근동 사람들은 강에 느꼈어요. 이걸 느껴야지 그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강을 신으로 섬겼다 하는데 괜히 우리가 "아유, 저 사람들 미개

하니까 미신 믿는 거야"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걸 가지고 강을 보고 느꼈던 거에요.

 

여러분이 아까 성황당 얘기도 제가 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옛날에 우리 조상들, 옛날의 우리

할머니들, 시골에 계시던 분들은 큰 나무를 보면 이런 걸 느꼈을 수도 있어요. 뭔가 좀 대단

하고 이런 걸. 다시 말해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우리가 달신도 보고, 바람신도 보았지만 이렇

게 강에 대해서도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 고대 근동인들은 강에 대한 '특별한 마음' 즉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음이 거룩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거죠. 공경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강을 보는 눈이

우리랑 완전히 틀린 거에요. 우리는 지금은 너무 세속화 되고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우리가

강은 다 돈으로 보고, 막 개발하고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거와 어떻게 보면 정반대인 마음을 가지고 강을 봤던 거에요. 그리고 이게 종교적

인 마음이죠. 어떤 의미의 강을 본 것이죠.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나일 강이 있고, 나일

강에 신이 있다 그러면, 나일 강은 따로 있고 나일 강의 신은 어디 이상한 모습으로 어디 뭐

하나 들고 이렇게 막 옷도 좀 안 걸치고 있을 거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래서 이게 이제 전형적인 현대인의 생각이에요. 현대인들은 객관적인 실체하고 그 실체에

어떤 신이 깃들어 있는 거 하고 구분해요. 우리가 산신이다 그러면은 산은 따로 있고, 백두산

은 따로 있고, 백두산의 신은 어디 또 산신령처럼 나와서 이렇게 걸어다니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고대 근동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늘신 없는 하늘을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그 사람들은. 하늘은 당연히

하늘신인 것이에요. 강의 신이 없는 강은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우리는 하늘을 떼어 놓고

하늘신을 숭배할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게 하나라고 생각을

했던 거에요.

 

* 고대 근동인들에게 '하늘신 없는 하늘'이나 '강의 신 없는 강'은 상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 외에는 경외감을 느끼지 낳아요. 잘. 신앙인들은. 우리는 오직 하느님만

느끼고 십자가라든지 어떤 교회의 건축이라든지, 성모상 이런 것들은 하느님을 보여 주는 것.

우리를 이끄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만약에 신이면 우상이 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그것은

쇳덩이나 돌조각 같은 것이고 우리가 그걸 보고 거룩한 마음이 들어서 하느님을 향하게 되면

제대로 가는 것이죠.

 

지금 우리가 강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정도 밖에 못 가질 거에요.

강 그 자체를 정말 신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런데 고대 근동인들은 그랬어요.

강을 정말 신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일 강을 타고 가면서 나일 강 물을 이렇게 손으로

만지면 나일 강 신의 몸을 만지는 거에요.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 ?고대 근동인들에게 '강'은 그 존재 자체로 '신'이었다

 

거기까지 들어가야지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있어요. 이렇게 되면 정말 그 강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진 것이죠. 어떤 나무신을 믿는다면, 그 나무를 만지면서 그 신의 몸을 내가 지금

만지고 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죠. 바위신이면 바위 만지면서 하는 것이죠.

 

고대 근동인의 시각으로 만약에 보자면, 강의 신이 없는 강 이런 건 말도 안 된다. 그런 건

생각도 할 수 없다고 그랬죠? 그거는 마치 의미 없는 세상 이런 말하고 비슷한 거예요.

사랑이 없는 연인들 이런 거와 비슷한 말이예요. 믿음 없는 종교, 실천 없는 믿음 다 마찬

가지예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믿음 없는 종교, 껍데기로 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실천하지

않는 믿음도 있어요.

 

현대인들은 이렇게 분리해서 봐서 그래요. 자꾸. 그런데 하나로 통합해서 보는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심성을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이 창조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요. 세상을 만드신 어떤 신이

없고, 이 세상 모두 지으신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은 정말 의미가 없는 거에요. 당연히 있어야

되는 거에요.

 

우리는 창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일 학교에서도 그렇고 많은 설명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는 너무 당연했던 거에요. 이 모든 것을, 이 모든 것을 의미를 주고, 이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너무 자연스러운 거죠. 그분들한테는.

 

그래서 우리가 물론 그 강을 느끼기 위해 가지고 강을 뭐 신으로 받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강을 성당에서 묵상 중에 명상해 봐도 좋을 거 같애요. 큰 강의 의미, 큰 자연의 의미, 하느님

이 만들어 주신 피조물로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애요.

 

우리가 명상을 할 때 성서 구절 명상하는 것도 좋고, 어떤 성인의 말씀 하는 것도 좋고, 교황청

문서 하는 것도 좋은데 가끔은 한번 강, 자연 이런 것을 한번 명상해 보는 것도 여러분들 종교

심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애요. 그래서 강을 그런 존경심을 가지고 강을 바라본다. 그런

마음. 이제부터 그런 마음을 잃으시면 안 되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러면 나일 강을 볼께요.

 

# 나일강

 

나일 강은 히브리 말로 '에오로'라고 하는데요. 그리스어 '네일로스'라고 하는데 이런 거는

다 아실 필요는 없고, 이 말의 뜻이 원래 뭐였냐 하면은 '시기', '기간'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왜 '기간'이라는 말이 강의 이름에 붙었냐 하면, 나일 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잖아요.

정기적으로 범람해서 그 영양가를 땅에 이렇게 주어 가지고 곡식이 잘 되기 때문에 나일 강

의 본질은 처음부터 '범람'. 때가 되어 가지고 범람하는 그런 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 나일 강의 이름은 '한 계절' 또는 '(돌아오는)기간'이라는 뜻으로 일 년에 한번 나일 강이

  범람하는 기간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게 굉장히 재미 있는데 다른 강들은 그 강들 자체가 신이었어요. 그런데 나일 강은

나일 강의 신이, 이집트의 신들이 수천수만 그렇게 많은데 나일 강 신이 없어요. 그 대신 나일

강의 범람의 신이 있어요. 이 신이 나일 강의 신이예요.

 

* 고대 근동의 신은 대부분 자연 현상에 기반한 인격식인데 나일 강의 경우 강 자체는

  인격화 되지 않고 강의 범람만이 인격화 되었다

 

 

 

나일 강의 핵심은 범람인데 범람의 신 '하피'라고 하는데 그 하피가 어떻게 생겼냐 하면은,

이렇게 생겼어요. 두 쌍이예요. 재미있게 생겼죠? 하피가 딱 보면 그냥 이집트 신 같죠?

이것도 역시 위키피디아에서 제스달이라는 사람이 만들어 줘서 쓸 수 있는 건대, 하피라는

신이에요. 이 신은 잘 보세요. 풍요의 신이라서 머리에서 풀이 자라요. 파피루스.

 

 

 

 

범람해 주니까 파피루스가 잘 자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배가 불뚝 나왔죠? 우리는 하도

비만의 시대에 사니까 이게 안 나온 건대. 이게 많이 나온 거예요. 지금. 배가 나오면 옛날에

좋은 싸인이죠. 우리나라도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살찌고 배가 이렇게 있고 그러면 좋은

거였죠. 옛날 그 왜 이탈리아의 라파엘로 그림처럼 거기보면 여성들 이렇게 풍만하잖아요.

살도 많고, 원래 그게 좋은 것이죠. 기근이 많았던 시대였으니까. 이 신도 배가 많이 나온

신이에요. 그런데 이게 남신이거든요. 복장이나 이건 거, 수염도 나고.

 

 

 

잘 보세요. 젖가슴이 이어요. 남신인데 가슴이 있어요. 이게 풍요라는 뜻이에요. 나일 강의

하피가 남신인데 이 신이 범람을 해서 범람한 것으로서 풀도 자라고, 농사도 잘 되고, 그리고

풀을 또 먹고, 사람도 살고, 짐승도 살고, 모두 살잖아요. 그러니까 엄마처럼 이렇게 젖가슴이

있고 남신이 굉장히 희안한 모습을, 상상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죠.

 

하피가 굉장히 오래된 신이에요. 신왕국 19왕조부터 나오는데 이 19왕조는 람세스 2세가

다스리던 그 왕조에요. 우리가 출애굽 할 때, 이집트 탈출 할 때 다스리던 그 파라오인데

이걸로 봐서 그 당시 있던 신이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에 오래 살았으니까 특히

람세스 시대  때 나왔으니까 이 하피신을 들어서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 나일 강의 범람의

신이라는 걸.

 

하피의 호칭이 뭐냐 하면, '늪의 물고기와 새의 주인이요. 풀을 자라게 하는 강의 주인'이에요.

모든 걸 다 먹여 살리는. 하여튼 강 주위의 물고기, 새, 풀 다 먹여 살리는 그런 아주 좋은 신

이라는 얘기죠. 참고로 하피신이 이렇게 쌍으로 묘사될 때가 많은데 왜 이 두신이 쌍으로

묘사되냐 그러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때문에 그래요. 이집트는 옛날부터 두 나라였어요. 이집트를 현대

이집트어로 이집트를 '미치리', '마치리' 이렇게 표현하는데 히브리 말로는 '미츠라임'

이라고 그래요. 히브리 말로 '미츠라임'은 쌍수거든요. 두 개 있을 때. 우리는 단수, 복수

이렇게만 알고 있는데 영어에서. 쌍수가 있어요. 히브리 말에. 두 개 있을 때는 또 따로

보는 쌍수예요.

 

이집트를 왜 쌍수라고 부르냐 하면, 이집트는 두 나라예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달라요.

상이집트는 남쪽이죠. 하이집트가 위에 있는데 하이집트는 농사가 잘 되고 나일 강 삼각주

때문에 풍요롭고, 상이집트는 나일 강 주변을 빼면 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두 지역

사람들이 생각도 다르고, 약간 말도 다르고, 또 정서도 많이 달라요.

 

제가 이집트 갔을 때, 이집트 가이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감정이

어디인 줄 아느냐고 그러면?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지역 감정이래요. 서로 워낙 사이가 안

좋아가지고 옛날 파라오 문서에서도 하이집트 출신이 권력을 잡으면 "저 상이집트 놈들은

몹쓸 놈들이다. 믿지 못할 놈들이다." 그렇게 나오고, 상이집트 쪽에서 어떻게 잡으면은

하이집트 쪽에다 대고 파라오 그 벽화에 그렇게 써 있대요. "저 믿지 못할 놈들" 똑같이.

 

그래서 제가 그 가이드한테 여담이지만 질문을 하나 했죠. 당신은 어디 출신이냐고?

그러니까 하이집트라고. 그래서 상이집트 사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니까, 상이집트

사람들이 전구를 바꿀 때는, 천장 전구를 바꿀 때 탁자 위에 올라가서 이 전구를 바꾸잖아요.

그때 5명이 필요하대요. 한 명이서 못 한대요. 사람들이 바보 같아서.

 

왜 5명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탁자 위에 올라가서 누가 전구를 잡고 있잖아요. 그러면 4명

이서 네 다리를 붙잡고 돌려야 된대요. ^^*~~~ 바보다. 이거죠. 이걸 못해서, 그래서 돌려야

된다. 이거는 말도 안 되는 그냥 개그 같은 이야기인데 그런 얘기를 해요.  그가 하이집트

출신이라기에  상이집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까 ?그 이야기가 곧장 나오는 거예요.

자기도 이렇게 약간 농담이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심각한 건 아닌 거 같고, 농담이지만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뭐 지역 감정이라고 하는데 그 정도로. 그래서 하피도 두 개로 그린

거예요. 하나는 상이집트이고 하나는 하이집트.

 

나일 강은 두 개로 다 관통해 가니까 하피도 둘이고, 이집트의 파라오 관을 이번에 그림을

안 가져 왔는데 이집트 파라오 관은 두 개예요. 이중관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상이집트의

관하고, 하이집트의 관이 다른데, 통일 된 파라오는 두 개를 다 써야 되요. 두 개로 인식했던

거죠. 그걸 인제 이 신에서도 알 수 있는 거죠. 나일 강의 범람으로 모든 피조물이 다 살 수

있으니까, 이 배 불룩 나온 남신이 젖가슴까지 가진 그런 표현은 이제 여러분 이해하시겠죠?

 

자, 우리는 이 하피신이 이집트 실권 람세스 2세가 다스리던 시대에 이미 이집트에서 살던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어요. 그러면은 히브리 사람들도 이

신을 분명히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히브리 사람들이 성서에서 이곳에 들어가

살기 시작하잖아요. 거기에.

 

창세기만 하더라도 38장부터 50장까지 거의 한 14장, 탈출기 1장에서부터 12장, 그리고

나올 때 얘기 조금 더 있고,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집트 살이 한 것에 하례를 한 거죠.

사실은. 그러고 나서 광야의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면 히브리 사람들은 그리고

이집트의 영향권, 바로 옆 나라에서 살았고 이집트는 큰 나라였고 이스라엘은 조그만

나라였기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문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건대, 하피가 구약성경에

한번도 안 나와요.

 

* 이집트 종살이를 오래 겪은 히브리인들은 나일 강의 종교적 의미와 하피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구약성경에는 이 하피 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는 '침묵의 탈신화'

  현상이 나타난다

 

하피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들도 안 나와요. 왜 하피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할까?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 이것도 일종의 탈신화예요. 탈신화는 이렇게 있는 신을 "아, 그 신이

우리 하느님 밑에 있는 신이야" 아니면 "피조물이야" 이렇게 만드는 법도 하나 있지만

'침묵의 탈신화'가 있어요. 말을 아예 안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피신을 몰랐나? 구약성경에 한번도 안 나오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야, 몰랐을 리가 없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이 신이 워낙

풍요의 신이고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여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라는 거를 알고 있는 거죠.

 

침묵은 아주 큰 무기죠. 이렇게 설명해 주기 전에는 모르잖아요. 그런데 ?아모스서 8장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 이게 아마 하피신을 얘기한 거 같은데 워낙 확실하지 않아서

약간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교재 119쪽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 아모 8,7-8: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 온 땅이 나일 강처럼 불어 오르고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부풀었다가

  잦아들지 않겠느냐?"

 

이 말의 문맥은 나일 강이 범람하고 잦아 드는 것. 부풀었다가 잦아드는 것도 사실은 내가

하는 일이다. 하느님게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즉 하피신이 없고

나일 강의 범람도 우리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라고 아모스는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건대.

 

요 한 구절 외에는 학자들이 찾아내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침묵하는 가운데에서 아, 하피

신도  사실은 없는 신이고 그 나일 강의 범람도 역시 우리 하느님이 주재하시는 일이다라고

하는 그런 신앙을 이분들은 갖고 있었구나 하는 거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죠.

 

이런 태도는 하피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나일 강의 하피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하는구나. 말 안 하려고 일부러 침묵한 거 같애요. 어떤 이유가 있겠죠. 공부를

더 하셔서 우리가 이런 걸 논문이나 이런 걸로 알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애요.

 

#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나일 강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서

거기서는 또 완전히 다른 신에 대한 이야기인데 메소포타미아 얘기를 여러분들한테

조금 하려고 합니다. 메소포타미아가 무슨 뜻이죠? 여러분 아시죠? 두 강 사이라는

뜻 이예요. '메소'는 '가운데'라는 뜻이고, '포타모스'는 '강'이니까.

 

*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언제부터 이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는가?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이 그리스

말이예요. 그리스 사람들이 이 지역에 들어 온 거는 알렉산더 대왕 때부터라고 그랬고,

그 때는 고대 근동이 끝나는 시기였거든요. 이게 그리스 사람들이 만든 말로 알고 있어요.

여러분 역사책 같은데 보면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서 알려드릴 거는 그게 아니에요. 그리스인들이 오기 전에도 이미

'두 강 사이'라고 이 지역을 부르고 있었어요. 그것을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릴려고 하는데

앞에를 봐 주세요. 이 지역을 일컫는 이름들을 제가 정리는 해 봤어요.

 

 

 

히브리 말로 강이 뭐냐? 기억나세요? '나하르'라고 했죠? 나하라임 하면 이것도 역시

쌍수예요. 강이 두 개 있을 때. 나하림 그러면 복수고. 나하라임 하면 쌍수예요.

강을 두 개로 표현한 거죠. 그래서 '두 강'이라는 뜻이예요. 이 지역을 구약성경에서

두 강이라고, 두 강 사이는 아니고. 왜냐하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큰 강이 두 개

있으니까, 두 강 지역이다. 이렇게 부른 것이죠.

 

'아람 나하라임' 이렇게 부르면 아람 사람들이 사는 두 강. 이런 식으로 두 강의 지역

이렇게 나오는데 구약성경에 아람 나하라임이라고 다섯 번 등장해요.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오기 전에도 두 강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죠. 똑같은 표현, 강의 쌍수형으로

쓰는 표현이 이집트 문헌에도 나오고, 가나안 문헌에도 나오고, 여러 가지 많이 나와요.

 

그리고 이런 표현도 나와요. '빈 나하라임' 빈은 ..사이라는 뜻이예요. 그럼 두 강 사이

라는 뜻이죠. 이런 표현도 있었어요. 이것이 이제 쿰란 문헌에도 나오고, 70인역이 아마

이것을 옮겼던 것 같애요.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이 나왔어요.

 

즉 이런 언어를 보면 메소포타미아,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에 나중에 들어와서 이 지역을

그냥 번역한 거 뿐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 로마 그러면 굉장히 굉장히 옛날 일로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거보다 훨씬 더 이전에, 몇 천 년 간의 기정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을 통해서 강조하는 거죠. 그리고 구약성경은 그 이전 시대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여기서 구약성경은 그 이전 시대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하나만 어떤 고대의 격언을 하나 볼려고 하는데 이게 잘 발음하셔야 되요.

 

 

 

엑스 오리엔테 룩스, 엑스 옥시덴테 렉스

어렵죠? 간장공장공장장처럼 어렵죠? ^^*~~~

 

동방과 서방이 로마 시대를 중심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보기에 로마 사람들이 보기에

인류의 훌륭한 종교 있지요? 힌두교가 어디서 나왔어요? 인도죠. 동쪽에서 나왔단

말이에요. 우리 그리스도교도 예루살렘쪽 동쪽에서 나왔죠. 뭔가 인류의 지혜와 종교,

빛 이거는 동쪽에서 나오고 로마는 뭘로 강했냐 하면 사실은 철학이 없었어요. 법과

제도와 기술 이런 게 발전했어요.

 

그러니까 법, 우리가 이렇게 따지고 과학하고 이런 것은 서쪽에서 나온다. 이게 로마의

격언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대충 맞아요. 그래서 뭔가 좀 깨달음, 지혜, 교훈 이런 건

동방쪽 사람들이 좀 잘하고, 서방쪽 사람들은 기술, 법, 철학 이런 거를 좀 잘하고.

이게 동양식으로 얘기하면 동도서기(東道西器)죠. 동양에 도가 있고 서양에 이런 것이죠.

동도서기. 아마 이런 말을 했던 거를 보면 로마 사람들도 비슷한 거를 좀 느꼈던 거 같애요.

 

우리가 동방 이런 걸 따지는데 메소포타미아가 사실은 오리엔트의 대명사로 쓰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이 강의가 오리엔트를 향한 것인가?
옥시덴트, 서방을 향할 것인가?

 

우리는 사실 동방의 지혜나 고대 근동의 영성이나 이런 걸 제가 계속 강조하지만 여기

굉장히 새로운 지식들이 많고 여러분들이 새로운 지식들 이거를 통해서 시청자분들이

지금 배우고 계시지만 사실은 어떤 지혜나 깨달음을 우리가 영성을 제가 가르치려고

그래서 그거를 써볼려고 책을 쓰고 강연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저는 동방이나 서방은 어느정도 비빕밥 식으로 비벼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하나만

일방적으로 따라 가서는 안 되고 우리가 다 같이 해야 되는데 이 강의는 어떻게 보면

오리엔트를 향하고 있는 강의예요. 우리가 인제 지혜나 빛을 향하고 있는 강의인데

이 오리엔트, 메소포타미아는 한국에서 또 서방이예요.

 

이제는 지구가 동그랗게 때문에 지금은 다 섞여 있어요. 동양인으로서는 조금더 참고할

필요가 아직은 더 있어요. 우리 천주교가 처음에 들어올 때 무슨 학이었죠? 서학이었죠.

서쪽에서 들어 왔다고. 이것도 재미있어요. 우리는 처음에 어떤 지혜를 받아들이려고

했던 건대. 처음에 들어올 때 실학자들은 또 기술 이런 거와 같이 받아들였잖아요.

그것도 참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신앙인들이 아, 우리 천주교의 방위는 어디일까?

동방일까? 아니면 서방일까? 아직도. 지혜와 법과 이쪽에서 또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하나? 이런 것도 한번 생각을 같이 한번 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애요. 어쨌든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떤 일방적인 방위보다는 좀 섞여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갖고

있습니다.

 

자, 이제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이 두 강은 모두 신성을 지녔어요.

신이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나와요. 에누마 엘리쉬라는 창조설화가 있는데 티아맛이라는

최최의 엄청난 혼돈의 괴물인데 이 혼돈의 괴물이 졌어요. 질서의 신한테.

그래서 그 눈에서 두 강이 쭉 뿜어져 나오는데 그 두 강이 하나는 티그리스고 하나는

유프라테스예요. 한 몸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신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신이죠.

 

*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강은 수메르 시대 이전부터 이미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강의 능력은 크게 세 가지가 있어요. 세례를 생각하시면 되요. 씻는 능력이 있어요.

강에 가서 씻으면, 강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거룩한 그 강에 가서

내가 몸을 씻으면 나의 죄가 사해진다.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이제 나중에 얘기하면

세례로 발전 되겠죠. 그런 경외심을 가지고 강에 몸을 씻는 능력이 있고 하나는 재판을

하는 게 있는데 이거는 다음 시간에 할꺼예요.

 

그런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굉장히 강한 신인데 이 두 신이 생각외로 하는 역활이

적어요. 신화에서. 학자들이 되게 재미있게 생각을 했어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굉장히 중요한 강인데 강의 신으로서는 얼마 안 나온다. 왜 얼마 안 나올까? 그거는 다른

신이 있어서 그래요. 지하수의 신 엔키라는 신인데 앞으로 보시면 엔키신이 나올 거예요.

 

 

 

이 신 때문에 그래요. 엔키신. 이 신이 지하수의 신이고 고대 수메르 시대부터 일곱 주신

가운데 하나였고 굉장히 중요한 신이예요. 우리가 최고신 할 때, 하늘신 할 때 최고신

아누를 배웠는데 아누가 하늘로  사라지고 나서 아누의 대를 잇는 거의 최고신 반열에

오르는 굉장히 중요한 신인데 이 신 굉장히 좋은 신이예요.

 

* 엔키Eniki는 수메르 시대부터 일곱 주신(主神) 가운데 하나였고, 최고신 아누(하늘신)의

  아들이자 풍요의 신 두무지의 아버지이다

 

인간한테 언제나 좋게 하고, 지하수의 신이니까 이 신이 있으면 땅이 축축해져 가지고

농사가 잘 되고 다 좋은 신이죠. 이 신의 모습을 보시면 수염난 좋은 할아버지 같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인데 엔키의 어깨 너머로 강이 흐르죠?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 속에

물고기가 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 신이 가면 물이 퀄퀄 넘쳐 흐르고, 거기 물고기가 막 노닐고, 그 다음에 이 신의 머리

에도 나무가 자라요. 생명의 나무 같애요. 수염이 긴 자애로운, 이렇게 퍼 주고 물이 흐르

게 하는 신이니까 사람들이 다 좋아했겠죠. 엔키가 와야지 역시 이 지역에도 홍수가 나서

땅이 비옥해지고, 또 엔키가 와야지 지하수가 축축해져서 농사가 잘 되고, 그래서 고대

수메르 신화를 보면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고, 풍요를 가져와 주고 하는 굉장히 좋은 신이예요.

 

* 엔키는 고대 근동지역에서 정기적으로 홍수를 일으켜 비옥하게 만드는 풍요의 지하수

  신이예요. 언제나 사람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며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선한

  신이었다

 

그래서 이 엔키가 워낙 인기가 있고 영향력이 강해서 강의 신을 다 흡수해 버린 거 같애요.

굉장히 큰 신이었던 것이죠. 엔키도 굉장히 재미 있는데 ?우리가 하피도 잘 안 나왔잖아요.

엔키도, 엔키의 다른 이름은 에아인데 엔키나, 에아나 구약성경에 거의 안 나와요.

 

엔키도 몰랐을까? 분명히 하늘신이나 달신 이런 거 보면은 근동 신화를 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그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고대 근동 신활르 다 알고 있었을텐데, 굉장히

유명한 두 신이 쏙 빠져 버렸어요. 의도적으로 이것도 아마 침묵한 거 같애요.

 

* 고대 근동 지역에 영향력이 막강했던 '엔키'의 흔적을 구약성경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탈신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학자들이 엔키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구절이 구약성경에 단 몇 구절이 있어요.

이 책의 124쪽의 각주 92번에 있는데요. 만약에 고것만 보시고 다른 거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셔도 좋을 거 같애요.

 

자, 이번 시간은 우리가 강에 대해서 처음 시작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언제나 새로운 신을

소개시켜 드릴 때마다 그렇지만 그 신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원초적인 어떤 인간의 문명으로 돌아가서 그 원초적인 어떤 종교심을 가지고

그 신을 읽어야 되고, 구약성경을 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고, 하느님을 대하고, 우리 인간을 대했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하느님을 대하고, 인간을 대하면 하느님의

가르침에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좀 어렵지만 그런 마음을

또 우리가 갖고 있다면 더 좋겠죠. 그러면 여러분 신앙에도 도움이 되고 또 이런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도 훨씬 더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잘 들어주셔서 고맙고 다음 시간에는 강의신 2부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15강 기적의 강- 심판의 강

 

강의 자료 출처: 평화방송

http://www.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6875%26menu_fid%3D6891&program_fid=6875&menu_fid=6891&cid=&yyyymm=

 

강의 하신 주원준 박사님 계신 곳: 한님성서 연구소 http://www.biblic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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