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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글:김찬선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5 조회수1,336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인간 존재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설움에 복받쳐 우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함께하며 그 슬픔을 나누십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캄캄한 죽음 속에 있던 라자로는 주님 사랑의 능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은 우리를 모두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우리는 언제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소통하지 못할 때입니다. 생명이신 주님과 단절되어 있으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사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주님과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안에 막혀 있는 돌 때문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숨 쉬기조차 힘들게 하는 단단한 돌이 박혀 있어서입니다. 미움, 분노, 집착, 탐욕 등이 단단하게 뭉쳐져 마음의 돌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돌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막혀 있는 돌 너머에는 빛이 없는 어둠만 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곳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라자로의 무덤처럼 시체가 썩고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십니다. 돌을 치워야 빛이 들어오고 소통이 시작됩니다. 라자로를 살렸던 주님 사랑은 우리 무덤가를 떠돕니다. 우리가 돌을 치우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안으로 스며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돌처럼 뭉쳐 있는 마음을 어서 풀어야 합니다.


☆ ☆ ☆

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자로를 살리시는 얘깁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주님은 나자로와 생명을 맞바꾸십니다. 나자로를 살리는 대신 당신은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엣가시 같은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그런 것이라지만 누구를 위해 누가 죽는다는 것, 이것이 쉽게 이해되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누가 대신 죽는다면, 대신 죽지는 않아도 나를 살리다가 누가 죽는다면 미안해서 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죽음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죽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는 어떤 일 때문에 수원을 다녀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늘 있는 풍경과 또 마주쳤습니다. 노인이 타셨는데 젊은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앉은 줄에 저 말고 다 젊은이였는데, 어떤 젊은이들은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보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연신 음료를 먹고 있고, 연인들은 손잡고 서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젊은이 중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일어나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네가 자리를 앉으시는데 미안한 표시는 없고 고맙다는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냥 쑥 않고는 그만입니다.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어떤 눈인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 할까봐 옆으로 비켜서 있던 제가 정말로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분 앞으로 가서 섰습니다. 미사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혹시 미안한 마음에 그 가방이라도 당신 무릎에 놓으라고 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씀이 하나도 없었고 저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럴지라도 어른들은 사랑을 알 거라고, 그래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했는데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노인네를 보고 더 슬펐습니다.

그리고 더 생각해보니 그들이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을 줄 모르기에 사랑할 줄도 모르는 그들. 사랑을 받고도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니 사랑을 받고도 미안하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그들. 이것보다 더 큰 장애나 불능이 어디 있습니까? 일생 그런 식으로 사랑을 못 느끼며 산 인생, 일생 그 사랑의 미안함과 감사함을 모르고 산 인생, 그래서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인생은 얼마나 딱합니까?

이런 딱한 인생의 우리에게 주님께서 사랑의 빛을 주셨습니다. 나자로를 살리며 돌아가시는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태워야지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없는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우리를 사랑 장애로부터 구출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외치십니다. “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 없는 죽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장애에서부터 해방되라고 하십니다.


[말씀자료 : -김찬선신부- I 편집 : 원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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