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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무덤에서 나와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6 조회수2,221 추천수9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요한 11,1-45





인간의 눈물을 아시는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운데 선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힘은‘하느님께 의탁하는 데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우셨을까? 루카19,41에 보면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 멸망할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정신 못 차리고 제멋대로 살아서 죽음에 이르는 길을 보자니 가슴이 아프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5,7).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에 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사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눈물을 아십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곳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처럼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은자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마음의 울림이 없습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오늘복음 요한11장 33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 지셨다.”35절에는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들이 슬프게 운 것은 인간의 죽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그들의 슬픔은 순수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슴도 그 슬픔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눈물도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는 곳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가끔은 대성통곡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곳에서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성체 앞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묵시록 21장 4절에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곤경에서 구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울어야할 때는 마음껏 우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몇인데”, “남자가 이런 일로 울다니”하지 말고 울어야할 때는 실컷 우십시오.

 

그러면 건강에도 좋습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흘러나오는 눈물에는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로몬이 많이 붙어 있는데 이 호로몬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 몸에 대량으로 생긴다고 합니다. 이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만성위염 같은 소화기 질환이 생기고 혈중 콜레스테롤이 높아져 심근 경색이나 동맥경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 나쁜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매개체가 눈물이랍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바로 면역세포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웃음이 파도라면 울음은 해일이 이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여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어요. “울긴 왜 우냐? 하느님을 믿고 살아서 이제 하느님의 품에서 영복을 누릴텐데”,하면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혼자 숨어서 실컷 우시더라고요….그래서 지금껏 사시는 것 같애요.


어떤 연구가들은 눈물에 존재하는 항생물질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항균 효과가 그리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파를 까놓고 눈이 매워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가슴으로 울어 나오는 눈물이 진짜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에 가셔서“돌을 치워라”하시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셨습니다.“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나와라.”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무덤 앞에 섰을 때 이미 라자로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고 하셨으니 믿는 이에게 영원한 부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부활의 삶에 희망, 천상의 삶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 삶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느님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무력하다’입니다. 결국 라자로라는 이름은 ‘모든 힘없는 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썩은 냄새가 풍기는 무력함에서 자비와 안식을 주시며 위로와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진짜 죽는 것은 내가 스스로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나를 꽁꽁 묶어놓고 있는 무덤,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은 선입견, 편견, 똥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등등 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무덤에서 나와라’ 하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병은 알리고 좋은 일은 숨겨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은 누구에게 알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병을 고쳐야 하므로, 부끄럼을 무릅쓰고 알려야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감당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지닌 병을 인정해야하고 그것을 원인까지 치유하시는 명의이신 주님께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골치 아픈 모든 것이 풀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내적인 무덤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주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니 착한 사람 망하도록 절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리라)”(시편 55,22).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으로 바꾼다면 바로 그것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을 치웠습니다. 마르타가 냄새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자로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옭아매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그분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정원의 잔디밭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잔디를 심고 잡풀을 뽑아도 봄이 되면 어지럽게 피어나는 민들레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유명한 농약 회사에 편지를 했습니다. "민들레를 한 방에 싹쓸이할 수 있는 약이 없습니까?" 얼마 후 답장이 왔습니다. "민들레를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다음 날부터 민들레에게 말을 건네고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골치 아팠던 민들레가 차츰차츰 사랑스럽고 예쁜 꽃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잔디밭은 엉망이 되었지만 정원은 민들레가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이 되어 갔습니다.
할 수 없는 것에 불평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 먼저 감사하는 날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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