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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엶[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6 조회수1,168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n.11,25)
 
 
제1독서 에제 37,12ㄹ-14
제2독서 로마 8,8-11
복음 요한 11,1-45
 

어제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놀랍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흑백텔레비전에서 컬러텔레비전으로 바뀌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텔레비전 화면은 자연의 생생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뛰어넘어 입체 화면까지도 보여줍니다.

사실 텔레비전만 놀라운 것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어렸을 때, 공상과학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기계가 아니었습니까? 걸어 다니면서 전화를 하고, 이 전화를 가지고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을까요? 컴퓨터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컴퓨터를 만졌을 때가 1983년도였지요. 그때만 해도 컴퓨터의 용도는 그저 심심풀이 오락을 하는 게임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컴퓨터는 우리 삶 안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현재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이 미래의 시간에 중요한 몫을 차지 할 수 있으며, 또한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미래의 시간에는 당연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금의 현재만이 모든 것인 양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빠르게 변화하는 미래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됩니다. 먼 미래의 시간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처럼, 주님께서 행하실 그 일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결론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그 결론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지요. 하지만 몇 번 이 지면을 통해서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선 사랑하는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시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곧바로 가시지 않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야 도착하시지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마르타와 마리아도 또 유다인 중의 몇몇도 원망의 말을 하게 되지요.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완전한 죽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십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몫까지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사순시기,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다시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행복이란 결국 기다림의 다른 말(김재진).

 
예수님께서 다시 살라신 라자로의 무덤입니다.

 

미래는 내가 만듭니다.

어떤 수도승과 그 제자가 산길을 걷다가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불면서 나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가 말합니다.

“스승님, 나무가 몹시 흔들리네요.”

그러자 수도승은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니? 바람이 부는 것이지.”

잠시 후에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독수리 한 마리가 토끼를 잡아채고 날아오르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모습에 “어허~~ 저 토끼 오늘 제삿날이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수도승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지... 오늘 저 독수리네 잔칫날이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뜻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미래는 늘 해석한대로 바뀐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발명왕 에디슨의 이야기도 생각나네요. 그의 연구실에 불이 나서 모든 자료가 사라진 것입니다. 다들 자료가 불타 없어진 것에 대해 아까워할 때 에디슨은 별 것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시 지으려고 했거든요.”

지금을 어떻게 바라보시겠습니까? 후회의 삶, 불평과 원망의 삶을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멋진 삶, 기쁨과 희망의 삶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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