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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8 조회수1,586 추천수16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Jn.8.29)
 
 
제1독서 민수 21,4-9
복음 요한 8,21-30
 

다음 주간이 벌써 성지주일로 시작하는 성주간이네요. 길게만 느껴졌던 사순시기도 벌써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생각과 함께 이 시기동안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부활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보면서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아마도 지난주와 이번 주 계속해서 판공성사 보시는 교우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저 역시 이 기간에 많은 분들에게 고해성사를 드리는데, 종종 이런 분을 만납니다.

고해소에 어떤 자매님께서 들어오셔서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미사에 나오지 않는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 매일 밤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다.’ 등등의 말로 한 5분 이상을 자식의 죄만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상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난감합니다. 그래서 한 번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자매님, 아드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 이제 자매님 죄를 말씀해주세요.”

그 뒤에 어떤 말을 하셨을까요? 대부분 ‘침묵’을 지키십니다. 아니면 “저는 없는데요? 사는 게 다 죄죠.”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솔직히 자신의 죄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남의 죄는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잘 보이고 심각하게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시선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죄에 대해서는 잘 고백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과연 남의 탓만을 외치고, 다른 사람을 단죄하려는 사람들을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는데, 그 이유는 상반된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찾았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찾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떠나겠다는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이렇게 죄 속에서 죽은 사람은 결국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는 것, 율법의 기준을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잘못만 그들 눈에 큼지막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이들에게 과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돌아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신은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잘잘못만을 따지고 단죄하려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다시금 죽이겠다고 덤비는 참으로 어리석은 길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겸손의 옷을 입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생은 피아노와 같다. 건반 위의 흰색 키는 행복을 나타내고 검은색 키는 슬픔을 뜻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검은색 키 또한 음악을 창조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이원종).

 
교황님의 고해성사

 

 
지켜보면 정직해진다(이민규, ‘실행이 답이다’ 중에서)

누군가 곁에서 지켜볼 때나 시시티브이로 자신이 감시당한다고 생각될 때는 물론이고 단지 사람처럼 생긴 로봇만 옆에 있어도 우리 행동은 달라진다. 모금액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했다. 그 결과 로봇이 있을 때는 없을 때보다 모금액이 30퍼센트 더 많았다.

심지어 사진 속의 눈이 지켜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영국 뉴캐슬대 연구 팀은 구내식당에 자율 판매점을 설치해 커피, 우유 등을 팔았다. 무인 판매대의 돈 넣는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메뉴판에 한 주는 꽃 사진을, 그다음 주는 사람의 눈 사진을 붙였다. 주별 매상을 비교한 결과 메뉴판에 눈 사진이 붙었을 때 매상이 2.76배 올랐다.

내가 아는 교수 한 분은 아끼던 난 화분 세 개를 아파트 복도에 내놓고 키우다 잃어버렸다. 그 뒤 그는 종이에 눈동자와 속눈썹까지 예쁘게 그려 넣은 뒤 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수십 년 동안 키운 화분을 요즘 누가 자꾸 가져가요. 하지만 화초들이 그 집에 가서도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날 이후 화분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사진이나 그림 속의 눈이 우리 행동을 변화시킬까? 우리 뇌가 사진 속의 눈을 실제 눈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림 속 눈도 실제로 누군가가 지켜볼 때와 비슷한 효과를 일으킨다.

재미있는 내용의 글입니다. 즉,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느낌을 받을 때 정직해진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정직해지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이면서, 왜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며,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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