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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제15강 기적의 강, 심판의 강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08 조회수893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5강  기적의 강, 심판의 강

 

강의에 들어가며 ...

 

  구약성경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을 신으로 언급하지 않고 지명으로만

사용했다. 구약성경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훨씬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유프라테스’는 ‘지리적 경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이집트의 북쪽 경계를

의미했다.

 

 요르단 강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강이지만 구약성경에도 요르단 강이

신으로 나오는 적은 없다. 요르단 강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

목적지인 약속된 땅의 경계였다.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의 나아만의 치유에서

보여지 듯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기적의 장소’로서 요르단 강의 의미는 신약성경으로 이어진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장소로 예수님의 세례는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요르단 강'은 하느님께 향하는 상승 운동과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강

운동이 교차하는 곳이자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기적의 장소’로 신은 아니지만,

의미가 큰 강이라 할 수있다.

 

 한편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에는 강에게 정의를 물어보는 절차가 있었다.

흐르는 강물이 정의를 밝혀내는 것이다. 다음은 고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 법전 2조다.

 

“만일 어떤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흑마술을 했다고 증거도 없이 고소했을 경우, 고소당한

이는 강에게 보내 이드(강)에 던져진다. 만일 이드(강)가 그를 죽였다면 고소한 이가 그의

집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드(강)가 그를 무죄라 판결하여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는 고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마술을 했다고 고소한 이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드(강)에게 보내졌던 이와 그를 고소한 이의 집을 취한다.”

 

 고 바빌론인들은, 이런 경우 겸허히 강의 신에게 정의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은 지나치리만큼 단순했다. 강 복판에 피고인을 풍덩 빠뜨렸다. 물에 빠진 자가

죄인이라면 강의 신이 그를 처벌하여 익사할 것이다. 그는 흑마술을 했으므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도 빼앗긴다. 하지만 만일 그에게 죄가 없으면 어떨까?

 

정의의 신인 강의 신이 그를 자유롭게 풀어줄 것이다. 강가에서 산 채로 발견되면 그는

자유다. 흑마술을 하지 않았다는 신적 보증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바뀐다.

그를 고소한 이는 무고죄에 걸린다. 죄 없는 사람에게 거짓으로 중죄를 뒤집어 씌우려한

대가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 죄가 없다고 밝혀진 사람은 자신의 집도 지키고, 대방의

집도 취한다. 어느 쪽이거나 신을 모독한 사람은 목숨과 집을 모두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규범이 고대인의 원시적이고 미개한 악습이라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의는 인류의 종교사에서 오랜 전승을 지닌 관행이고, 지금도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한다.

종교학에서는 이렇게 특정한 징표를 사용해서 신의 뜻을 물어 죄의 유무를 가리는 고대의

재판을 ‘신성 재판’이라 한다.

 

신성 재판의 방법은 강이나 바다에 빠뜨리든지, 불 위를 걸어가게 하든지, 독약을 소량

섭취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런 위험을 이겨 내어 살아난 사람은 죄가 없다는 보증을 받은

것이다. 신성재판은 신의 최종적인 뜻을 물어 죄의 유무를 분명하게 가린다는 특징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런 ‘정의를 판결하는 강’을 찾아보자. 신성 재판에 사용되는 강을 수메르

어로 ‘이드’라고 불렀고, 아카드어로는 ‘이두’라고 한다. 그리고 이 낱말은 히브리어‘에드’로

계승된다. ‘에드’는 ‘최종적이고 분명한 심판’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의미에서 보듯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의미는 그대로 남았다.

히브리 성경을 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 낱말에서 강의 신을 연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지만, ‘신적 심판’이라는 뜻은 그대로 사용했다. 이런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에드의 날’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이란

뜻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옮긴다.

 

예레미야 예언서는 ‘에드의 날’의 의미를 비교적 정확히 보여 준다.

그들의 ‘에드의 날’(환난을 당하는 날; 재난을 당하는 날)
나는 그들에게 얼굴 대신 등을 보이리라(예레 18,17).

 

한편 모세가 유언으로 남긴 노래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심판하시는 날은 멸망의 날이요 재난의 날이다.

 에드의 날(= 멸망의 날; 재난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 32,35).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유효하다. 이 심판의 날은 이민족들에게 ‘환난의 날’이

될 것이다. 다음은 이집트에 내릴 환난의 날을 경고하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이다.

에드의 날(환난의 날; 파멸의 날)과
징벌의 때가 그들에게 닥치면
그들도 견뎌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함께 달아나고 만다(예레 46,21).

 

오바드야 예언자도 역시 ‘에드의 날’을 경고한다. ‘과거’의 지독한 고통의 때를 언급한다.

미래형인 ‘심판의 날’이 아니라 이미 체험한 ‘역사적인 고난의 날’을 언급하는 것이다.

내 백성의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는 그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했다.
그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라도 그의 불행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그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는 그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오바 13).

 

여기서 에드의 날은 ‘신적 심판’ 그 자체보다는 ‘신적 심판의 날을 연상할 만큼의 큰 환난과

고통의 때’를 의미한다. 곧, ‘에드의 날’이 비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모티프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성찰을 표현하였다. 뒤집어 말하면,

고대 근동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성경의 표현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제15강 기적의 강, 심판의 강

 

안녕하세요?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 성호경 같이 바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주일 만에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 시간에 강연 드린 것을

짧막하게 정리를 하고 늘 하듯이 그리고 강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고대 근동의 종교를 이해하는 게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왜 중요한

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여러분들한테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어떻게 말하면 필수

교양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교회가 선교 300년 대를 향해서 아주 힘차게 지금 전진하고 있습니다.

선교 300년 대가 되려면 교회가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질적으로

신자 한분 한 분이 ?더 우리 성경을 깊이 알아듣고 또 우리 한국 문화가 이제 그리스도교

문화와 만나서 더욱더 그리스도교 문화와 ?더 깊이 가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 그 자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과 관련된 지식들을

두루두루 잘 알고 있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는 어떻게

보면  우리 가톨릭 교회가 하는 방식은 일방적인 선교가 아니라, 문화와 천천히 이해하면

서 서로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선교를 하고 있지요?

 

어쩌면 이 강의도 크게 봐 가지고 그런 방법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교 300년

대를 향해 가는 신자들은 말씀드렸듯이 성경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야 됩니다.

특히 성경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그때도 사람이 살고 있었거든요.

우리하고 똑같이 세끼 밥 먹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이런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분들이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었는지, 그곳은 얼마나 먼 세계이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얼마나 먼 세계이고, 특히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 그

사람들의 종교적인 상식이 지금 우리와 좀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는지, 그걸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잘 이해하기 힘든데 그런 배경 지식이나 그런 필수 교양을 조금

이라도 이해하신다면은 성경이 조금더 쉽게 다가올 수 있고, 우리가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극복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 선교 300년 대를 맞는 우리 신자들이 구약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탄생하게 된 고대 근동 세계와 고대 근동의 문화,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제로 이제 우리나라보다 그리스도교를 먼저 받아들인 나라, 유럽이라든지 미국을

이렇게 보면은 ?여러분들 잘 아시겠지만 다큐멘터리 같은 걸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

든지, 어떤 이집트의 파라오라든지 이런 게 훨씬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게 왜 관심이 있냐 하면, 전부 이게 구약성경과 관련이 있어서 신자들이  많이 보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신자들도 그런데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런 걸

좀 볼려면 어렵잖아요. 파라오 이름도 복잡하고, 메소포타미아 지명도 복잡하고, 또 이렇

게 시간을 내서 좀 본다 하더라도 구약성경과 도대체 어떻게 관련이 되는 건지 알기는 더

힘들죠.

 

그러니까 이제 이 강의는 신자 여러분한테 이 방송을 통해서 그런 연관성을 쉽게 하나

하나 이렇게 천천히 설명해 드리는 그런 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집

에서나 아니면 평화방송을 통해서 다큐멘터리가 아노면 아주 재미있게 시청하시면 좋고

하지만 이제 영상자료도 좋지만 책을 읽는 거 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보시면서 이 시간 제가 많이 설명해 드리는 교재도 같이 이렇게 보면서 교양을

늘리시면 나중에 이제 성당에서 어떤 모임을 하실  때나 아니면 혼자 성서를 읽으실 때나

조금 아, 이 구절이 이런 의미가 있겠구나 하는 걸 조금 쉽게 스스로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그래서 고대 근동의 두 가지 큰 신을 보았는데요. 일단 하늘신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그리고 달신을 보았습니다. 생각이 나시는 분도 있겠고, 생각이 안

나시는 분도 있겠고, 아니면 먼저번 강의를 놓치신 분도 있겠는데요. 책을 보시거나 아니면

이 강의를 인터넷으로 다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시간부터 새로운 신, 강의 신을 보고 있습니다. 강의 신을 보기 전에

제가 주의 하셔야 될 것이라고 말씀드린 건 강을 보는 느낌이 우리 현대인들의 느낌과

고대인들의 느낌과 많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뭐든지 다 돈으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강도 다 돈 되는 거. 아니면 굉장히

객관적인 사실로 보거든요. 그냥 물의 흐름 이렇게 보는데 고대인들은 강을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어요. 강은 어떤 큰 의미가 있는 것이고 어떤 신 같은 존재로 보았죠.

 

우리가 강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하느님만 보시면 되지만

강을 그냥 물질이나 돈으로 보지 않고 어떤 큰 의미가 있는 피조물로 보고 또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태도 자체는 매우 종교적인 것이고 현대인들한테 결핍

된 것이기도 해요.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갖고 고대인들이 이래서 강을 이렇게 신으로

보았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 더 좋겠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인들에게 강은 경외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을 물의 흐름이나 수량의 변화 아니면 어떤 재화를 만들어 내는 것.

이렇게 보지 않고 강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꼈지요. 그래서 강을 마치

신처럼 느꼈고 강에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인들은 강을 온 몸으로, 마음으로, 영혼으로 느끼며

   마치 신을 대하듯, 강에 두려운 마음, 곧 경외심을 지니고 살았다

 

내가 강에다 잘 하지 않으면 저 강이 나한테, 우리한테 어떤 큰 것을 끼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고대 근동에서 대표적인 나일 강의 신,

그런데 나일 강은  재미있게도 벌람의 신이 있었지요?

 

젖이 큰 배도 나온 남신이었는데 재미있는 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 다음에 메소포타미아

에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또 어떻게 신으로 나오는가도 보았는데 재미있게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은 굉장히 큰 강이고 의미 있는 강인데 그 강 자체가 신이라기

보다는 그 강의 신성이 상대적으로 약했지요.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 있었지만

  지하수의 신 '엔키'가 워낙 강해서 두 강의 신성은 비교적 약했다

 

약한 이유가 우리가 엔키신 때문이라고 그랬어요. 엔키신이 물의 신, 지하수의 신인데

이 신이 워낙 인기가 있고 워낙 큰 신이고 워낙 높은 신이어서 강의 신이 상대적으로

좀 죽었던 그런 정황을 좀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번 시간에는 경계의 강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요르단 강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그 다음에 매주 재미있을 겁니다. 함무라비 법전 일부를 읽어 드리고 거기서

나오는 아, 옛날에는 강을 가지고 이런 일도 했구나 하는 사람들이 하는 재미있는 거를

하나 말씀드릴께요. 그러고 나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들어주시면 되고요.

 

# 경계의 강

 

첫 번째로 경계의 강입니다. 구약성경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말할 때 어떤

큰 저 멀리 경계를 짓는 그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이게 지리적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여기서부터 몇 키로미터라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 멀리

어떤 경계를 짓는, 저승에 넘어가는 그런 식의 강으로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이게 굉장히 신화적인 강의 의미인데 어디에 나오냐 하면은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은 여러분 교재 124쪽입니다. 처음에 에덴 동산을 묘사할 때 에덴

동산이 과연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묘사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인류가 죄짓기 전이지요.

그런데 에덴에서 강의 네 개가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 창세 2,11-14: 첫째 강의 이름은 피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 흘렀다.

  ...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에티오피아 온 땅을 돌아 흘렀다. 셋쩨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그래서 첫째 강, 둘째 강의 이름은 피손과 기혼이고, 셋째외 네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그런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하고 이 네 강이

에덴 동산에서 나오면 우리가 그 강의 상류만 찾아 올라가면 에덴 동산이 나올 거

아니예요? 그런데 그렇게 안 나와요. 이 강은 어떤 지리적인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신화적인 의미를 얘기하는 거예요.

 

* 창세기 2장에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신화적 의미, 곧 태초의 심연에서 흘러

  나오는 '창조의 강'의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실제로 이 강의 어디 어디 있다더라 하고 찾는 건 별로 무의미하고요.

아, 태초에 그 먼 옛날부터 나왔던 그 강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도 거기에

속하는 강이구나. 그것처럼 이 두 강은 보통 강이 아니라 신성이 굉장히 강한 강이구나

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태초에 창조 너머의 세계, 저 멀리 있는 세곌르 한번 가보고

싶다면이 두 강을 건너면 되겠지요? 그런데 신화적 의미로 넘는 것이지 진짜 유프라테스

강을 찾아가서 다리를 건넌다고 되는 일이 아니예요. 태초에 심연에서 그러니까 지하 저

멀리멀리 가면은 아주 큰 샘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고대 근동사람들은.

 

그 큰 샘에 엔키가 있는데 지하수의 신이죠. 거기서 나오는 물이 이제 큰 강이 되었다

라고 생각을 한 것죠. 과학적인 사실은 아니고 신화적인 의미인데 이 신화적인 표현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어떤 의미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에덴 동산의 강을 두신 분이 누구세요? 하느님이시죠. 결국 창세기는 그

얘기를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고대 근동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큰 강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 다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거다." 이 얘기를 할려고 하는 것이죠.

 

구약성경의 유프라테스 강은 지리적인 경계로 몇 번 나옵니다. 그리고 또 신화적인

경계가 있어요. 이집트가 과연 어디인가? 이집트의 끝이 어디인가? 이집트가 나일 강

유역이라는 거는 여러분이 다 아시죠?  나일 강 삼각주 유역인데 그래서 이집트의

힘이 강할 때는 이스라엘도 이집트의 영토였어요. 그래서 과연 파라오의 힘은

어디까지 미치는 것일까? 얘기할 때 보통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렇게 얘기 합니다.

 

* 구약성경에서 유프라테스 강은 이집트의 북쪽 경계를 뜻하는 '지리적 경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제가 2열왕 24장에 나오는 얘기를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재 125쪽입니다.

 

* 2열왕 24,7: 그때에 바빌론 임금이 '이집트 마른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집트 임금에게 속한 땅을 모두 점령하였으므로, 이집트 임금이 다시는 자기

  영토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바빌론 임금이 이집트에 쳐들어 가서 이집트의 영토를 다 점령한 것인데 이집트의 영토를

어떻게 얘기하냐 하면 이집트 마른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라고 얘기합니다. 이집트의

임금이 다스리는 영역은 유프라테스 강까지다. 거기가 제일 한계다 하는 것이죠. 이렇게

신화적인 의미의 경계로 쓰는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 그러면 여러분 머리 속에 어떤 것이 떠오르세요? 저는 처음에 유프라테스

강이 맨날 이렇게 책에서만 봐서 어떤 굉장히 신화적인 강이고 가기 어려운 강인 줄 알았

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공부할 때 저희 지도 교수님하고 같이 고대 근동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공부하러. 유프라테스 강에 갔었어요.

 

그래서 지도 교수님이 조금 있다가 차로 가면 유프라테스 강이 나온다고 그래서 저는

굉장히 멋있는 강 하나가 있고, 거기에 수풀이 이러헤 있고, 페르시아 공주가 이렇게

탁 배를 타고 나올 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참 가도 안 나오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지금 우리가 그 위에 있어" 그러시는데 한 중앙천 만한 거를 이렇게 지나가고 있어요. 

유프라테스 상류가 그런 것이죠. 하류에 가면 좀 커요.

 

그런데 이제 그걸를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태도가 그거하고 비슷해요.

실제로 이스라엘 가서 보거나, 실제로 터키에 가서 보거나, 실제로 성지순례 여기도 갖다

오신 분도 많고, 성지 순례 갖다 온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겠지만 그냥 보면은 거기도 사람 사

는 땅이고 그냥 거기의 풍토대로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믿어서 아,

여기가 바로 그곳이었구나"라고 의미를 가지고 볼 때에만 그 의미가 우리한테 들어오는

것이죠.

 

그거는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도 마찬가지예요. 서울도 그냥 밥 먹고 사는 곳으로 생각하면

사는 곳 이상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 다, 여기에 보면 구석 구석 많잖아요. 의미가.

여기는 뭐 하셨던 곳이고, 어떤 의미가 이렇게 이렇게 보면 서울도 굉장히 의미있는 도시죠.

어쩌면 신앙은 이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있느 것인 거 같애요.

 

여러분들 구약성경 읽으실 때도 구약성경을 어떤 신문기사처럼 읽으시면 재미 없어요.

구약성경을 어떤 소설책처럼 읽으시면 어떤 부분은 재미있지만 어떤 부분은 재미 없어요.

차라리 다른 소설책 읽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저의 이 책에서 강조하듯이 어떤 의미의

텍스트로 읽으면 구약성서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어떤 의미들이 다 들어가 있어서 그것을

아시면 신앙인들한테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강도 마찬가지죠. 유프라테스 강은 지리적인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저 북쪽의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어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은 유프라테스 강이 북쪽에 있으니까

유프라테스 강, 그러면 아, 여기서 몇 키로미터 가면 있는 어떤 강, 차로 몇 시간 걸려

이렇게가 아니라 아, 그 강에 가면은 거기는 북쪽 끝이다 하는 것이죠.

 

* 유프라테스는 지리적 경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신학적 '경계;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게 미카 예언서 7장 12절에 나옵니다.

 

* 미카 7,12: 그날에 아시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집트에서 유프라텟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 온갖 곳에서 사람들이 너에게 오리라.

 

마지막 날 이제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너한테 모여 올 것이다라고 이제 예언자

한테 말하는 것인데 우리 같으면 요새 지구 전체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올 것이다. 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한테는 경계가 어디까지 였냐 하면 아시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스라엘을 중간에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지리를 한번 생각하시면 좋을텐데요. 이스라엘

을 중간에 놓고 보면 아시리아는 동쪽의 큰 제국이고 이집트는 서쪽의 큰 제국이예요.

그러니까 동쪽 끝 제국에서부터 서쪽 끝 제국까지, 그리고 이집트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 저 산 다 오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식으로 어떤 지리적인 강이나 산을 의미의 강으로, 의미의 산으로 쓰는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 그런 말을 쓰느냐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할 때 그래요. 백두에서 한라까지가 저 남쪽 끝에서부터 저 북쪽 끝까지의

의미죠. 백두에서 한라까지가 백두산 어디까지인지 우리가 알 안 따지죠. 그렇게 말할 때

는 백두산 천지까지인지, 몇 번째 나무까지인지 이런 거 안 따지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쓴 적이 있어요. 성경에도 강을 이렇게 지금 몇 군데 말씀

드렸지만 이거 외에도 강을 신화적인 어떤 경계로 쓴 적이 있거든요. 이걸 갖고 어디까지

이렇게 재고 막 현대 일부 학자들이 하는데 그런 거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고 여러분

들이 이걸 의미의 텍스트로 알아들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 기적의 장소 유프라테스 강

 

자, 그러면 우리가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과 관련해 가지고 몇 가지 사실을 하나

보았고 이번부터 볼 것은 요르단 강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요르단 강을 여러분들이 조금

익숙하신 강인데요. 성경에 강하면 아마 대표적인 강 중에 하나로 요르단 강이 나오죠?

 

요르단 강도 신이었어요. 요르단 강을 신으로 묘사하는 고대 근동의 문헌들이 나와요.

'요르단의 주인' 뭐 이런 신의 이름이 나오는데 요르단 강의 신성은 지금 우리가 얘기했던

나일 강의 신성, 티그리스 강의 신성, 유프라테스 강의 신성에 비하면 아주 형편없이

작아요. 거으 신으로 안 나와요. 왜 그럴까?

 

* 요르단 강의 신성은 고대 근동 유적에서 매우 적게 나타나고, 구약성경에도

  요르단 강이 신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사람들이 생각해 보면 두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은 강이 작아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큰 강이 큰 신이고 작은 강은 작은 신이 되겠죠? 개울 같이 작을 때도 있으니까. 또 하나는

저번 시간에 말씀드린 것인데 지하수의 신 엔키가 워낙 커가지고 그 지하수의 신 엔키가

다 이렇게 강의 신성을 잡아 먹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요르단 강의 신은 작은데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도 어떤 경계의 뜻으로

썼던 적이 있어요. 그게 언제냐 하면, 이집트 탈출해 가지고 광야를 떠돌던 백성들이

뭐라고 그랬냐 하면은 요르단 강 건너라고 얘기했지요. 그 요르단 강 건너는 실제로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이 광야 시대를 끝내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땅으로 우리를 드디어 넘겨 주신다.

 

* '요르단 강을 건너'라는 표현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하신 땅으로

  넘겨주시는, 이스라엘이 새로운 역사의 시기로 넘어가는 경계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의 한 시기로 넘어간다라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요르단 강 건너. 우리 노래에도 있지요. 그래서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의 최종 목적지

그리고 약속의 땅의 경계 그리고 요르단 강 건너 그 땅에 우리가 들어가면 그 가나안 그

복지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 끝 행복시작 이렇게 됐지요.

 

* 요르단 강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 목적지인 '약속의 땅'의

  경계, 즉 신화적 경계였다?

 

실제로는 안 그랬어요. 그죠? 들어가서는 온갖 고생 다 하고 막 그랬는데 하여튼 요르단

강이 나올 때는 그런 의미의 언어, 그런 걸 담고 있는 신화적 상징의 강이었다 하는 것입

니다. 이것 말고 요르단 강은 또 하나의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강이기도 한데, 요르단

강은 기적이 잘 일어나는 강이기도 했어요.

 

*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은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구약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요르단 강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이제 이번 시간을 통해 가지고

엘리야, 엘리사 예언자를 계속 보고 있는데 엘리야 예언자는 겉옷을 가지고 물을 쳐가지고

요르단 강을 이렇게 멈춘적이 있지요? 요르단 강이 이제 기적의 장소로 되는 것이죠.

2열왕 2장에.

 

그리고 엘리사 예언자는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할 때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게 했어요.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고 몸이 나았지요? 그때 어떻게 얘기했냐 하면 엘리사 예언자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교재 127쪽인데요. 나아만의 병을 낫게 할 때 이렇게 얘기해요.

 

* 2열왕 5,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요르단 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병이 나을까? 지금 그렇다고 그렇게 하지는

마세요. 이거는 이제 예언자들이 했던 것인데 기적의 장소로서의 이 요르단 강에서 구약

성경을 잘  아는 신약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 여기가 바로 옛날에 엘리야

예언자가 물을 멈추게 한 바로 그 강이다라는 걸 알 수 있겠죠?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라서 문맹률은 굉장히 높았지만 성경 지식은 우리보다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아, 이 요르단 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굉장히 많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아, 여기는 옛날에 엘리야 예언자가 물을 멈추게 한 곳. 또 아, 여기서 엘리사

예언자가 일곱 번 몸을 담그고 사람을 낫게 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바로 이거하고 비슷한 일을 하셨어요. 요르단 강에 들어

가셔서 물에 잠기셨죠.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는 엘리야가 승천한 적도 있거든요.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이 하셨던 행동, 그리고 거기서 영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와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행동이 구약성경에서 요르단 강에서 일어났던

어떤 기적들을 종합해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올리는 효과가 있었을 거예요.

아, 예수님은 다른 분이시구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우리가 이 요르단 강에서 예전에 있었던 그 많은 일들이

우리 머리 속에 연상되는구나 하는 그런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르단

강은 하느님께로 올라갔던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께로 올라갔었는데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는 그 올라갔던 게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서 예수님한테 오시고 또 다시 물을

담궈서 그때는 나아만의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의 세례와 그 공생애를 통해서 우리의 몸이

낫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영혼이 낫게 되는.

 

* 요르단 강은 하느님께 향하는 상승 운동과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강 운동이

  교차하는 곳이자 예수님의 신원이 드러난 '기적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런 복합적인 기적의 장소로서의 강인 것이죠. 만약에 여러분이 성지순례에

요르단 강에 가시면은 이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그 요르단 강을 보시면은 여러분

여행에도 의미가 되고 그 다음에 여러분 신앙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이렇게 공부를

안 하고 그냥 가서 보시면 재미없겠죠? ?그냥 뭐 조그만 개울천 하나 흘러가는 거고,

물은 그렇게 맑지도 않고요. 그렇게 될 것입니다.

 

# 신성재판의 강 '이드'

 

자, 이렇게 의미의 강을 보는 시간에서 이번 시간의 본론은 신성 재판의 강을 보겠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률 조문을 여러분한테 알려드리고 그것을 이제 설명하는 시간을 갖도

록 할텐데요. 흐르는 강물이 정의를 상징하는 그런 상징 세계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

합니다. 지금부터 읽어드릴 것은 여러분이 많이 들어보시기는 하셨을 거예요.

 

함무라비 법전. 고대 최초의 고대 근동 법전이라고 하는 것이죠. 함무라비 법전 2조예요.

1조, 2조 이렇게 나가는데 서문이 있고. 그런데 제가 한국말로 번역을 해서 여러 가지

읽어드릴께요. 이런 식의 법률 조항이 있었어요. 교재 127쪽이예요.

 

* 만일 어떤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흑마술을 했다고 증거도 없이 고소했을 경우, 고소당한

  이는 강에게 보내 이드(강)에 던져진다. 만일 이드(강)가 그를 죽였다면 고소한 이가 그의

  집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드(강)가 그를 무죄라고 판결하여 그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는 고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마술을 했다고 고소한 이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이드(강)에게 보내졌던 이와 그를 고소한 이의 집을 취한다.

 

조금 복잡하죠? 법조문은 옛날 것도 복잡하고 요즘 것도 복잡해요. 제가 여기 설명을 좀

해드릴께요. 함무라비 법전 2조는 어떤 경우를 다루냐 하면, 도저히 인간이 가려낼 수

없는 굉장히 애매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경우 하나를 다루는 거예요.

 

만일 한 시민이 다른 시민을 보고, 그냥 민주주의는 아니예요. 노예들은 자격이 없었고

일단 시민들만 있었어요. 시민들이, "저자가 나에게 흑마술을 걸었소." 흑마술이라는

말이 아카드어로 '키슈프'라는 말인데 누가 잘못되라고 마술을 거는 거예요. 제발, 저

놈의 소원이 들어지지 말라고.

 

우리나라에도 있었죠? 지푸라기로 인형 만들어 놓고 쿡쿡쿡 찌르고 막. 그럼 가슴 아프고.

그러는 거와 비슷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믿지 않지만 옛날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 기원전 19세기니까 지금부터 3900년 전 사람들은 굉장히 심각하게 믿었어요.

그때는.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같은 사람들끼리.

 

당대의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정당하게 경쟁하지 않고 어떤 시기하고 있는 사람

들이 서로 어떤 마술사 하나 불러가지고 자기 집 뒷뜰에서 뭔가 해가지고 흑마술을 걸면

일단 기분 나쁘죠? 우리도. 그런 거 당하면 기분은 나쁘겠지만 우리는 그거 믿지 않잖아요.

 

미신이다 하고 넘기지만 그때 사람들은 그런 소리만 듣고 어떤 증거를 잡으면 야, 이거

큰일이구나. 우리 집안이 저놈이 비싼 마술사 불러가지고 이런 짓을 우리 집안한테 했으

니까 우리 집안이 큰일 났다 이거 뭔가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법정

으로 끌로 갔어요. 저 사람이 나한테 흑마술을 걸었다. 이 나쁜 놈이다. 이렇게 했었죠.

 

그런데 문제는 증거가 없을 경우예요. 뭔가 불을 피웠든지 흑마술을 했는데 증거를 싹

치웠어요. 그런데 이 흑마술을 한 걸 자기가 봤어요. 증거도 없이 흑마술을 했다고 걸었

어요. 이걸 누가 알겠어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아무도 가릴 수가 없어요.

이건 오직 신만이 아시는 거예요. 진짜로. 흑마술을 걸었는지 안 걸었는지. ?

 

그래서 신한테 물아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실효성이 좀 없다고

믿지만 그 사람들은 실효성이 있다고 믿었을 경우에 자,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
흑마술을 한 것인가? 안 한 것인가? 이럴 때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뭐라고 그러냐 하면은

'강에 가라' 이때 강은 보통  강이 아리나 '이드'라는 강인데 여기 앞에 여러분 보시면은

고대 수메르어로 쐐기문자로는 제가 쓰지 않고요. 그냥 풀어서 썼어요.

 

  

                    (신성재판에 사용되는 강)

 

이렇게 '이드'라는 강이예요. 그런데 앞에 d라고 조그맣게 붙은 건 이 강의 이름이

그냥 보통 이름이 아니라 d라고 하는 건 다이어트라고 신의 이름이라는 뜻이예요.

요렇게 조그맣게 붙어가지고 이게 신의 이름인지, 장소인지, 사람 이름인지 하는

걸 알려 주거든요.

 

자, 그러면 이게 이드라는 강이예요. 그러면 이드한테 물어봐야 되요. 그런데 강의

신이 어떻게 알려 줘요? 어떻게 하냐 하면, 흑마술을 걸었다고 고소를 하면은 그

사람을, 피고인을 강 한가운데로, 유프라테스 강 한가운데는 넓거든요. 강 하류로

데려가그 사람을 빠뜨려요.

 

이 사람이 만약에 진짜 흑마술을 했잖아요? 그러면 강의 신이 이 사람을 삼켜요.

익사해서 죽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고 이 사람이 흑마술을 안 했어요. 그러면 강의

신이 얘는 죄가 없다고 그래서 이 사람을 뱉어요. 그래서 저 하류 어디에선가 발견

되서 집까지 걸어와요. 굉장히 우숩지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냐 하면 흑마술을 했다고 고소한 사람, 이 사람이 잘못했잖아요.

이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면. 그 사람은 집을 뺏겨요. 몽땅. 여기서 집이라는 건 아내와

자식과 집에 있는 가축과 노예를 다 뺏기는 거예요.

 

만약에 이 사람이 죽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이 이긴 거잖아요? 이긴 사람은 또 그 사람

의 입을 다 뺏어요. 양쪽 모두 집 전체를 놓고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

히 미개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데 그 당시는 함무라비 법전 2조에, 2조면 중요한

거는  앞으로 가잖아요. 지금 법률도. 굉장히 중요했던 거예요.

 

이런 강을 '이드'라는 강으로 불러요. 이걸 이제 접한 여러분들, 집에서 보시는 분들은

야, 이건 참 원시적이고 미개한 악습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사실은 이런 식으로

정의를 가리는 거는 인류 종교사에서 드문 게 아니예요. 오랜 관행이고 지금도 어느

정도 이렇게 하는데. 이거를 전문 용어로 신성재판, 오디얼이라고 불러요.

 

신성재판은 어떤 게 있었냐 하면은 강이나 바다에 빠뜨리는 방법도 있었고, 불 위를

걸어가게 하는 방법도 있었어요. 불 위를 걸어가서 크게 안 다치면 이 사람은 정의가

있는 거고, 아니면은 독을 먹이는 방법도 있었어요. 독을 아주 조금 먹여서 이 사람이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나면 죄가 없구나 하는.

 

* 특정한 징표를 사용해서 신의 뜻을 물어 죄의 유무를 가리는 고대 재판을 '신성재판'

  이라고 하는데 신성재판의 방법에는 불 위를 걷게 하고, 독약을 소량 섭취하게 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게 미개해 보이지만 정의냐 아니냐를 가르는 아주 확실한 방법이예요. 살아나면 정의

고, 죽어버리면 끝이거든요. 이런 식의 종교 생활을 한 적도 있었어요. 인류가. 그런데

이게 참 여러분도 웃으시고 집안에서 이거를 보시는 분들도 다 웃으실테지만, 현대에서

도 있어요. 현대에서도 어떤 게 있냐 하면,

 

인간이 어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우연, 강에 빠진다든지, 독을 먹는다든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정말 그 사람이 살아나는지, 못 살아나는지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그거를 우리는 공정하다. 공정하다라는 건 정의롭다라는 것이거든요.

 

받아들여요. 그거를 어디서 볼 수 있냐 하면은, 월드컵 조 추첨할 때 보세요. 월드컵

조 추첨할 때 전부 브라질이랑 한편이 안 되려고. 죽음의 조잖아요. 브라질 들어가면

다 지는 거잖아요. 그리고 또 독일이랑 어떻게 안 될려고 전 세계 모든 축구 팬들이

제사라도 지내고 막 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우리 잘 되게 해 달라고.

 

그러면 아주 공정하게 뽑아야 되잖아요. 그때 어떻게 해요? 뺑뺑이 돌리잖아요.

추첨하잖아요. 소량의 독을 먹이지도 않고, 강에다 빠뜨리지도 않지만 비슷한 거예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우연을 가장을 해가지고 거기에다 모든 걸 다 걸고, 거기

우리가 다 승복을 하면 이거는 정의롭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런 게 인간의 심리기지에

그런 게 있어요.

 

제비뽑기 과정이 월드컵 조 추첨에서 극도의 우연성을 보장하고 우리가 그걸 통제할 수

없는 게 확실하다면 사람들은 죽음의 조에 걸리더라도 이것은 공정하다라고 받아들여요.

일반인들도 그렇고요. 이런 경우가 또 하나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로또가

그래요. 집을 걸어요. 정말. 집보다 더 큰 돈이죠? 어떻게 한번 맞으면.

 

그런데 우리가 조금 조금씩 모아서 한 사람한테 모든 걸 다 주자. 이렇게 하는데 그 과정

이 정말 공정하다면. 이렇게 생각 해요. 이게 공정하다는 게 아니라 사실은 우연하다는

거예요. 그 우연성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인데 우리는 그거를 공정한 방법

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천문학적인 돈을 거는 것이죠.

 

복권 당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많이 있겠죠? 복권 당첨을

기도하는 사람이나 3900년 전에 함무라비 시대에 강에서 제발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이예요. 그 똑같은 심리를 갖고 있는 게 있어요. 어떻게 보면

그 현대인과 그런 고대인들이 어떤 같은 수준의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 고대 근동인들을 무시하면 안 되요. 우리와 거의 같은 수준의

사람일 수 있고요.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이 우수워질 수도 있지요. 우리가 옛사람을

보고 가끔 이렇게 아, 그때는 이런 식으로 이런 걸 했다고 웃을 수가 있는데, 우리가

역사에 겸손해져야 되는 이유는 200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보고 그럴  거예요. 그쵸?

 

우리 인간은 모두 시대의 한계 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이 모든 걸,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지고 완벽하신 분은 하느님 밖에 안 계시는 거죠. 인간은 다 이렇게 시대의 한계에

갖혀 사는 사람들이죠.

 

자, 그러면 앞에서 우리가 '이드'라고 하는 걸 봤는데 재미있게 여러분들이 아,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는 걸 보셨고, 그리고 신성재판이라는 게 있었구나. 각 종교에는.

우리나라에도 있었고 하는 걸 배우셨는데 과연 그러면 이게 구약성경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에 대해서 이제 이번 시간의 본론이죠.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 수메르어로 그런 강을 '이드'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수메르 시대가 접어들고

우리가 첫 시간에 역사를 대략적으로 했어요. 수메르 시대가 이제 끝나고 아까 얘기

했던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 시대는 아카드 시대인데 어느 한 왕조가 끝나고 다음

왕조가 들어섰어요. 그런데 언어가 바뀌었어요. 그래서 '이드'를 뭐라고 불렀냐 하면

'잇투'라고 불렀어요. 이드라는 말을 조금 변형시킨 말이예요.

 

 

            (신성재판에 사용되는 강)

 

보통 강의 이름은 많아요. 이렇게 신성재판에 사용하는 특별한 강만 잇투라고 불렀어요.

아카드 사람들은 수메르 사람들이 살던 그 지역에서 그 왕조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수메르 문화를 계승하는 정책을 썼고 이 낱말을 거의 그대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거는 히브리어로 '에드'라는 말이예요.

 

 

                       (최종적이고 분명한 재판)

'에드'는 '잇투'를 히브리말 사람들이 받은 거예요. 히브리 말로는 후대에 이드, 잇투

에드리고 불렀어요. 이거는 히브리 말에서 에드라고 나오는 건 족보가 신성재판에

사용하던 함무라비 법전 2조에 나오는 바로 그 강이었어요. 그래서 에드는 강이라는

뜻으로 안 쓰이고요. 히브리말 사전을 찾아보면은 '심판'이라는 뜻이로 쓰여요.

 

히브리 사람들의 이 심판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강의 신은 사라졌고, 강이 하는 신성재판은 사라졌지만 강이 뭔가 공정한 판결을

최종적으로 내리는 어떤 역활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심판, 판결 이런 의미로

쓰입니다.

 

* '에드'의 의미에서 보여지듯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의미는 그대로 남아있다

 

자, 그러면 그 다음 이런 날이 있어요.

 

 

                (강의 심판의 날, 환난의 날)

 

히브리어는 어떻게 읽냐 하면, '욤 에드' 욤은 날, 우리의 day. 날이라는 뜻인데 에드는

여러분 배웠어요. 형용사가 뒤로 간 것이죠. '날 에드'인데 '에드의 날'이라고 해요.

 

자, 우리가 함무라비 법전에 나왔던 강에 빠지는 날, 어떤 날이예요? 내가 심판을 받는

날이예요. 내가 정의로운지, 내가 정의롭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가리를 날이죠. 에드의

날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강의 심판의 날이라는 뜻인데 지금 우리나라 성경에서도 이거

를 어떻게 번역을 하냐 하면, 다른 나라 번역도 같애요. '환난의 날; 이렇게 옮겨요.

마지막 우리 심판의 재난을 받을 때 날이예요.

 

* '에드의 날'은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강의 심판의 날'이란 뜻인데, 문맥에 따라

  '환난의 날'  또는 '재난의 날' 등으로 쓰였다

 

예레미아 예언서는 에드의 날을 어덯게 쓰냐 하면, 아주 확실히 써요. 예레미아서 18장

17절. 교재 131쪽이고요.  예레미아 예언서에 대해서 우리가 이 시간에 말씀드렸어요.

이제 곧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다. 너희들 이제 하느님한테 등돌리고 이렇게 나라를

엉망으로 운영했다가는 너희들 이제 큰일난다라는 거를 사람들한테 회개를 계속해서

예레미아 예언서는 촉구했는데 불행하게 사람들이 말을 안 들었어요.

 

그래서 예레미아는 비탄의 예언자라고 그랬죠? 계속해서 사람들한테 잘 해라, 잘 해라.

했거든요.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 하십니다.

 

* 예레 18,17: 그들의 '에-드의 날'(환난을 당하는 날; 재난을 당하는 날)

  나는 그들에게서 얼굴 대신 등을 보이리라.

 

하느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가지고 ?너희들 잘못하면 너희들의 '에드의 날'에 내가

너희한테 등을 보이겠다. 너희를 안 도와주고 너흐들을 외면하겠다라고 무서운 말씀을,

꾸짖으시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 말에서 에드의 날을 우리가 '환난의 날'로 옮겨요.

 

그래서 이거를 우리의 성서에는 어떻게 되어 있냐 하면은, 그들이 환난을 당하는 날,

그들이 환난을 당하는 날 나는 그들을 도와주지 않겠다. 이렇게 번역을 하죠. 그들이

재난을 당하는 날. 자, 구약성경에서 환난이나 재난이 이제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걸 여러분이 아실 수 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죽을 때, 모세가 신명기 맨 마지막에 마지막 아름다운 노래를 하나

굉장히 길고 훌륭한 노래는 하나 남기고 돌아가시거든요. 그런데 모세가 남긴 노래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모세는 이제 그 마지막 노래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은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고 후손들한테 이제 너희들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신앙이다. 하느님한테서 멀어지지 마라. 이런 말씀을 남기시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세요.

 

* 신명 32,35: 에-드의 날(= 멸망의 날; 재난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

 

곧 환난이 멀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환난이 멀지 않았다기 보다 그런 자세로 열심히

살아라는 의미인데, 에드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 이거를

어떻게 번역을 하냐 하면, 멸망의 날이 가까웠고 이렇게 번역을 해요.

 

묩기를 또 보겠어요. 계속 이제 구약성경에서 이게 어떻게 널리 쓰이고 있는지 여러 번

보는 겁니다. 욥기는 부조리한 상황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책이예요. 여러분이 집에 가셔

서 욥기를 한번 보실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욥기는 그 신학적인 수준이 너무너무

깊어서 지금도 잘 이렇게 만만치 않은 그런 책이예요.

 

우리가 살다보면 착한 사람이 잘 되기보다는 악인이 득세할 때가 많죠? 마음씨 착하고

고운 사람이 잘 되야 되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이 더 고통을 당하고, 약삭빠르고 이런

사람들이 더 잘 되고. 왜 눈물은 착한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흘리나? 하는 게

사실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생각을 해 봐야 될 문제인데 욥기가 그거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예요. 거기서 욥기가 이렇게 얘기하죠.

 

우리가 상선벌악의 원리, 권성징악이 정말 가능할까? 이 세상에서 만약에 여러분이

욥에 대해서 공부를 하신다면 구띠 에레즈 신부님의 [욥에 관하여]라는 책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 책이 좋았고요. 여러분들도 여러 가지 책이 있으니까 보시길

바래요.

 

저는 욥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이 에드의 날을 쓴다는 것만 이 시간에 알려 드릴께요.

욥기 21장 31절에 보면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 욥 21,30 : 악한은 에-드의 날(멸망의 날)에 제외되고 진노의 날에 구제됨을.

 

악한은 원래 멸망의 날에 심판을 받아야 되는 거죠? 그리고 착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욥이 보니까 그렇게 안 되는 거 같다라고 하느님한테 이제 따지는

거예요. 질문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요. 악한은 에드의 날에 제외되고

진노의 날에 구제됨을.

 

그런데 이 에드의 날을 어떻게 번역을 했냐 하면 '악한은 멸망의 날에 제외되고' 이렇게

번역을 했어요.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스

라엘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다 다스리는 분이시죠? 거기에 예레미아서에 보면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예레 46,21: 에-드의 날(환난의 날; 파멸의 날)과 징벌의 때가 그들에게 닥치면

  그들도 견뎌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려 함께 달아나고 만다.

 

여기서 ?에드의 날은 환난의 날로 번역을 했어요. 환난이나 재난의 날로 번역이 나올 때

여러분이 아, 혹시 에드의 날일 수 있다. 비교해서 한번 공부해 보세요.

 

자, 에드의 날은 사실은 먼 미래의 날입니다. 우리한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이죠.

그런데 점차 점차 점차 에드의 날은 마치 과거에 있었던, 과거에 큰 환난을 당했을 때

그 환난이 얼마나 우리한테 컸던가? 그 고통이 우리한테 얼마나 컸던가? 이렇게 얘기

하면서 과거의 에드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표현이 나와요.

 

이거는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그냥 강의 신에서 풍덩 빠뜨려 가지고 이제 정의냐, 불의냐

이거를 딱 가리는 어떤 그런 거만 있었는데 구약성경 안에서 새롭게 발전을 하는 거예요.

개념이 계속 확장되는 거예요. 최후의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맨 마지막 날을 최후

의 날, 에드의 날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아, 과거의 날도 에드의 날이다 하는 거죠.

 

오바드야서 13절에 보면은 에돔의 죄악을 얘기할 때 에돔이 이스라엘 하고 형제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을 때 당연히 도와 주어야 하는데 도와주지 않았어요. 원래

에돔하고 약간 사이가 안 좋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해요. 에돔이 이스라엘이 환난에

빠졌을 때 돕지 않았고 오히려 니네들이 이 형제를 고소해 하지 않았냐? 그래서 오히려

재물을 니네들이 그 혼란을 틈타서 우리의 재물을 약탈해 가지 않았느냐? 이 나쁜 놈들아.

이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 오바 13절: 내 백성의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는 그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했다. 그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라도 그의 불행

  을 흐믓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 그 에-드의 날(재앙의 날; 패망하던 그 날)에

  너는 그의 재산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

 

옛날에 어떤 전쟁이 있었는데 그때에 안 도와 준 거를 얘기하는 건대, 이때 에드의 날을

이제 미래의 심판의 날이 아니라 미래에 심판이 있을 거 같은 굉장히 옛날에 큰 참혹한

날, 큰 불행을 겪었던 날 정도로 쎈 것이죠.

 

* 오바드야서에서 '에드의 날'은 미래형인 '심판의 날'이 아닌 이미 체험한 과거의

  '지독한 고통의 때'를 말한다

 

신적 심판의 날이 아니라 하느님이 최후의 심판하실 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겠

나 할 정도의 큰 환난과 고통의 날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2사무엘기에

나오는 다윗의 승전가를 보겠어요. 시편 18,19절과 매우 비슷한, 두 구절이 매우 비슷한

데요. 2사무 22,19에서 다윗은 큰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셨다

하는 감사 기도를 잘 올립니다.

 

다윗은 실제 왕으로서는 한계도 많이 보여주는 왕이지만 믿음 하나는 굉장히 좋았던

왕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잘 드리는데 이것도 역시 이런 식으로 드립니다.

 

* '에-드의 날'(환난의 날; 재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나를 덮쳤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의지가 되어 주셨네(2사무 22,19= 시편 18,19).

 

옛날 얘기 하는 거예요. 미래의 에드의 날이 아니라. 에드의 날을 환난의 날로 옮기는데요.

환난의 날에 그들이 나를 덮쳤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의지가 되어 주셨네. 잠언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잠언도 과거의 고통의 날, 고통의 때라는 의미로. 이거는 과거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쓰는 것인데요. 잠언의 이 구절이 참 재미있어요.

 

먼 친척보다 이웃 사촌이 낫다.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에드의 날 같은 날이 닥칠 수가 있어요. 우리가 착하게 살다고 그런 날이 안 닥치는 것도

아니고, 인생에 살다보면 불행이 닥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 불행은 남들이 안 닥치고 나에게만 닥쳤을 때, 예를 들면 교통사고라든지,

이런 거 당할 때 더 마음이 아프죠? 그럴 때 진짜 찾아야 되는 사람은 잘 사는 먼 친척이

아니라, 평소에 이웃 사촌이 더 나을 수가 있다. 평소에 이웃 사촌을 잘 해 놔라.

잘 지내라 하는 얘기인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ㅣ

 

* 잠언 27,10: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에-드의 날(불행할 때;

  네가 어렵다고)에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

 

여기서 에드의 날은 불행할 때로 옮겼는데, 환난의 날로 옮겨도 될 거예요.

이렇게 환난의 날, 이런 표현들이 원래 신화적인 의미였다라는 걸 여러분이 아시면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가 강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좀 알아봤어요. 경계의 의미의 강,

그것도 지리적인 경계의 의미의 강, 신화적인 경계의 의미의 강도 알아봤고, 요르단

강이 기적의 장소다 하는 것도 알아봤고, 정의가 왜 강물처럼 흐르는지에 대해서

맛배기로 보여 드렸어요.

 

다음 시간에는 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거를 조금 더 보고요. 다른 강에 대해서도

보고 우리가 강과 관련된 표상에 대해서 몇 가지만 더 보고, 강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잘 들어 주셔서 여러분 고맙습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주원준 박사님이 계신 곳: ?http://www.biblicum.or.kr/

 

*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6875%26menu_fid%3D6891&program_fid=6875&menu_fid=6891&cid=&yyyymm=

 

* 글을 복사해 온 곳: http://cafe.daum.net/bible100weeks

 

* 다음 시간 예고: 제16강 정의가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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