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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1 조회수1,408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11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If I do not perform my Father's works, do not believe me;
but if I perform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realize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Jn.10,38)
 
 
제1독서 예레 20,10-13
복음 요한 10,31-42
 

어떤 글을 쓰다가 ‘친구가 싫어할 행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예가 필요했습니다. 저의 이 조그마한 머리로는 구체적이고 또 보편적인 생각들을 제시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지식 검색을 했지요. 검색 창에 ‘친구가’라고만 적었는데, 인터넷 자동완성 기능 때문인지 몇 가지 예시가 쭉 나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실수로 ‘친구가 없어요.’를 클릭하게 되었네요.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친구가 없어요.’라는 제목의 글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어요.’, ‘학교에 친구가 없어요.’, ‘반에 친구가 없어요.’, ‘같이 다닐 친구가 없어요.’ 등등의 제목이 담긴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세상에 친구가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지요.

사실 제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습니다. 형제도 6남매였기 때문에 집이 항상 북적북적 댔지요. 또 어렸을 때부터 친구도 많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만납니다. 그리고 제 동창신부들을 비롯해서 많은 선후배 신부님들을 만나고 있지요. 그러면서 내 개인적인 시간들을 보내지 못하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합니다. 누구는 자기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지금의 제 상태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그 누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의 짐으로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기도 했던 것이지요. 내 자신의 상태를 잘 봐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히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말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영광을 깨닫지 못했고,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의 짐으로만 생각했지요. 잘 살고 있는 자신들에게 커다란 혼란만을 가져다 준 사람, 그래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의 일들을 통해서 충분히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닫힌 마음으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이렇게 닫힌 마음으로 인해 오늘 복음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을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쫓아내게 됩니다.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싶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 부정적인 생각으로 쉽게 단죄하는 마음을 가진 우리들과 함께 하실 수 있을까요?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 주님을 쫓아낼 수밖에 없는 나의 잘못된 점을 없앨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정이란 이해받는 것보다는 이해하는 데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오늘부터 인천교구 전례꽃꽂이 전시회가 있습니다. 구경오세요.

 

 
획일화에서 벗어나세요.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밟았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첫 번째 아이: 죄송합니다.
두 번째 아이: 미안합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들어 말합니다. “이를 어쩐다?”

기가 막힌 선생님은 다시 이러한 문제를 냈지요.

“누가 선물을 주면 다섯 글자로 어떻게 말할까요?”

첫 번째 아이: 감사합니다.
두 번째 아이: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까 이상한 대답을 한 아이가 또 자신 있게 손을 들어 말하지요.

“뭘 이런 걸 다…….”

틀린 답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독특한 답일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독특한 답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편적인 답으로 똑같이 만들려는 획일화를 시도하곤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획일화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독특한 답 역시 정답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에서 다양함 속에 일치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당시에는 너무나 독특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독특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틀린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독특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인들이었습니다.

획일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 안는 포용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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