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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2 조회수916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12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Jn.11,49-50)
 
 
제1독서 예제 37,21ㄴ-28
복음 요한 11,45-56
 

“저는 글 쓰는 재능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글 잘 쓰는 신부님이 정말로 부러워요.”

이런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아실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글짓기를 해서 상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제일 못했던 과목이 국어였다는 사실을요.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를 못해서 매번 혼났었다는 것은 아실까요?

상 한 번 못타고, 국어를 제일 못했고, 받아쓰기도 잘 못했던 저였습니다. 물론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재능이었는데 이제야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 없지만, 솔직히 형편없는 제 글을 바라보면서 ‘과연 글 쓰는 재능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재능보다는 2001년부터 오늘 새벽까지 성실하게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고 형편없는 글이라도 꾸준히 썼기에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이지요. 솔직히 어렸을 때에는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과 재주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고난 능력과 재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성실함만이 나중에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직전에,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됐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80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에 한 말로 유명하지요.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참으로 성실하고 보람 있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후회의 말을 마지막 말로 남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후회의 말과 행동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그리 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후회의 말과 행동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더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삶보다는 겉으로만 보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삶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지배했던 로마 체제 안에서 유지되는 자기들 나라의 한시적인 권한과 성전에 의지하면서 결국 예수님께서 반역을 꾸민다는 터무니없는 고발을 하게 되지요. 고발을 하지 않으면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이고, 이 모습이 로마인에게 알려지면 반역을 꾸미고 있다면서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보다 더 큰 것은 지금 자기의 편안한 위치를 예수님께 빼앗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을 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편함보다는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도록, 또한 나의 영광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마쳤을 때 후회의 말이 아니라 ‘이제 그만,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닷가에 있는 예쁜 조개껍데기를 전부 주울 수는 없다. 몇 개밖에 주울 수 없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법이다(앤 머로우 린드버그).

 
화려했던 벚꽃도 이제 지기 시작하네요. 자유공원의 벚꽃입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며칠 전에 신학생 어머니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현재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뇌종양으로 삶의 기로에 서 계시거든요. 사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남편 없이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 두 아들만 바라보며 열심히 사셨는데 이렇게 큰 병까지 얻으신 것입니다.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인 신학생이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신학교를 휴학했지요. 며칠 사이에 많이 핼쑥해진 신학생의 얼굴을 보니 더욱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런 아픔과 시련을 주시는지…….

물론 견딜 만큼의 고통과 시련을 주신다고 말하지요. 또한 이 뒤에 있는 더 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지금 현재의 이 고통과 시련의 무게가 너무나 커 보이기만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는 일마다 안 좋게 되었고 결국 큰 병까지 얻게 된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요.

“만약에 주님마저 제게 없다면 어떻게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겠어요? 주님이라도 계시니까 이 어려움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지요.”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실 크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동시에 여러분에게 신학생 어머니인 ‘김영순(베로니카)’를 위한 기도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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