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2 조회수1,253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성지주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복음: 마태오 26,14-27,66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카라바죠(Caravaggio) 작, (1606), 제노바 롯소궁전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태수는 집을 나와 지하철에서 남의 지갑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년입니다. 그러나 가끔 남동생과 통화는 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남동생으로부터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도 병원 앞까지 와서는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병원을 한 차례 올라다보고는 그냥 병원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태수가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 한 젊은 여자가 현금인출기에서 많은 돈을 뽑아 핸드백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은 다시 매섭게 변했고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갈 때 뒤에서 부딪히는 척을 하며 핸드백을 순식간에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태수가 사람들의 얼굴을 째려보다가 싸움이 붙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모두 연행이 되었습니다. 태수는 결국 그들에게 합의금을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었지만 당장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동생은 전화를 받고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이런 일로 불러서 정말 미안하다. 합의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형사 입건되거든. 너 말고는 연락할 데가 없었어.”

형은 .... 왜 그 동안 엄마에게 한 번도 오질 않았어?”

사실은 ... 전에 한 번 병원에 가긴 갔었어. 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지만... 엄마는 좀 어떠시냐?”

놀라지마, ... 엄마, 돌아가셨어. 장례식 끝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돼.”

? 왜 돌아가신 거야? ...?”

왜는 왜야? 결국은 병원비 때문에 돌아가신 거지.”

아니, 병원비 없다고 사람을 죽게 해? 그게 병원이야?”

워낙에 많은 수술비가 들어서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나 봐. 그래도 병원 측에서 많이 도와줬어. 나중엔 할 수 없이 엄마를 집으로 모셔갔지 뭐. 그러고 나서 한 달도 못 돼서 돌아가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죽을 줄 알면서도 그대로 내친다는 게 말이 되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어? 이러니까 내가 세상에 정 붙이지 못하고 벌레처럼 사는 거야. 아니 그렇게 돈 구할 데가 없었냐? 내게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언제 형이 나한테 연락처 같은 거 가르쳐준 일 있어? 형이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 얼마 전 내 여자 친구가 정말 어렵게 엄마 수술비를 마련했었어. 그런데 그걸 내게 갖다 주려고 병원으로 오다가 어떤 놈한테 소매치기 당했대.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놈을 잡지도 못했어. 그놈의 소매치기만 없었어도...”

태수는 갑자기 온 몸이 굳어짐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게 틀리기를 바라며 더듬더듬 물었습니다.

그 돈... 어디에서 소매치기 당했어?”

엄마 있던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지하도 계단에서...”

 

오늘 장엄 입당 예식 때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왕을 상징하는 팔마나무가지를 흔드는 사람들 사이로 또 그들이 벗어놓은 겉옷 위로 장엄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성에 들어가심을 재현합니다. 이때 사제는 기분이 으쓱해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오늘 수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크게 외치기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사제는 처음보다는 기분이 많이 상합니다.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저리 큰 소리를 치는가?’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인가?’

여러분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고 바랍바를 대신 풀어주라고 외치는 군중이었습니까? 대부분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는 쪽이고 싶을 수 있겠으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수난은 나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했던 사람들이 아닌, 그분에게 매일 매일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드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처음에 태수는 어머니를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탓이고 병원 탓이고 나라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남이나 탓하고 자신에겐 어머니의 죽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죽음은 자신에게 은총이 되어 그를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분의 손에 망치질을 했다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면 그분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우리 보속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용서가 오는 것입니다. 가시관을 쓰실 때도 매를 맞으실 때도 얼굴에 오물을 던질 때도 옷을 벗길 때도 못을 박을 때도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내가 아니면 그분은 그런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광수생각이란 짧은 만화에 나오는 글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제게 못과 망치를 내미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어머니가 정해준 나무에 못을 박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리고 드디어 제 키 높이에는 더 이상 못을 박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사다리까지 동원해서 못을 박기 위해 높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 그런데 나무 높은 곳에서 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못을 박아온 나무가 바로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 가슴에 박힌 못을 빼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아파하시는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면 그 고생은 헛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팔마가지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그리스도의 살에 차가운 못을 박아 넣었던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 더 나아가 그분을 작은 재물이나 쾌락을 위해 팔아넘겼던 유다가 바로 나였음을 눈물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분의 고통은 나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은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였습니다. 학교에서 채변봉투에 변을 담아오라고 해서 화장실에서 일을 보던 중 채변봉투가 그만 변기 구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의 짧은 팔로는 그 채변봉투를 다시 집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도 거의 변기에 엎드리다시피 하여 간신히 채변봉투를 건져 올리셨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지만 아버지가 대신 희생하시고 다시 원래상태로 돌려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탓이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면 아버지께 대한 감사도,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연탄길 3선생님의 눈물로 소개된 사연이 있습니다.

왕따 당하는 정태를 아이들이 변기에 얼굴을 밀어 넣고 물을 내리며 괴롭힌 것 때문에 선생님이 대신 화장실 청소를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명이 정태를 괴롭혔음에도 단 한명만이 선생님의 고생을 보며 잘못했다고 뉘우쳤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변기를 닦는 것이 어떤 이들은 자신 탓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에 지었던 죄를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정말로 내 죄가 그분 얼굴에 침을 뱉고 그 살을 뚫고 그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분을 아프게 했다고 믿는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는 그분에게 아픔을 드리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2-6)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