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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6 조회수2,021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
 
"Surely it is not I, Lord?"
(Mt.26,25)
 
 
제1독서 이사 50,4-9ㄴ
복음 마태 26,14-25
 

어느 늦은 밤에 노란 가로등이 비추는 길을 걷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눈물을 흘리는지 흐느끼면서 아무도 없는 이 길을 홀로 걷고 있습니다. 어때요? 외로울까요? 외롭지 않을까요? 만약 이러한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게 된다면, 너무나도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라고 결론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외로운 사람일까요?

사실 이 장면은 어제 묵주기도를 하러 밖에 나갔다가 동네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 촬영 장면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어느 골목길을 그것도 노란 가로등만이 비추는 길을 한 여배우가 천천히 걷고 있는 장면이었지요. 딱 이 장면만 보면 외롭고 힘들다는 것이 저절로 느껴집니다. 문제는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배우를 지켜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산책을 하던 사람들도 연예인 한 번 보겠다고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텝을 비롯한 많은 구경꾼들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외로움을 표시하는 배우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화면과 실제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즉, 연기와 실제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하긴 남들 앞에서라면 자기의 본모습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들 앞에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사랑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 안에서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게 될까요? 이렇게 다른 마음 안에 악한 기운이 들어오게 되고, 이로써 결국은 주님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폭탄선언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모두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며 묻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인물인 유다 이스카리옷 역시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유다는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요. 그리고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을 배반할 뿐이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주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에서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이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기는 주님을 배반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생활만을 해서는 안 됩니다.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 이러한 삶을 통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에 행복한 기대를 안고 보낸 시간이 성공을 이룬 시간보다 더 즐거운 법이다(올리버 골드 스미스).

 
최후의 만찬.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연중 제14주일 ‘독서의 기도’)

내용이 너무나 좋아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삽나이다.” 내가 내 죄를 알고 있사오니, 하느님이시여, 내 죄를 잊어 주소서. 우리는 죄 없는 착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생활이 칭송받을 만한 때에도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타인의 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잘못을 고쳐 줄 마음으로 그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비판하려고 찾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릴 줄 모르고 타인의 잘못을 곧잘 나무랍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에게 보여준 기도하는 법도 하느님과 화해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쏟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려 겉으로가 아니라 내심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청할 때 교만하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화해하기를 원합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화해하시도록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도록 하십시오. 같은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렇다면 제사를 바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어떤 번제를 드린다 해도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시편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사는 당신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을 계속 읽어 내려가며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여러분은 이제 이전에 바친 것을 포기하고 앞으로 바쳐야 할 것을 찾아냈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옛 조상들처럼 제사라고 하는 양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하느님이 즐기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의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고 어떤 새로운 제사를 원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느님께서 번제를 즐기지 않으신다고 해서 여러분이 제사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여러분은 이제 바칠 제물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제물을 양 떼에서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향을 가져오려고 배를 장만하여 먼 지방까지 항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즐겨 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서지면 그것이 소멸해 버리리라고 걱정합니까? 여기에 있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따라서 마음을 깨끗이 만들도록 먼저 불순한 마음을 부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 하느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불쾌감을 가집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들도 싫어한다는 이 한 가지 점에서 하느님처럼 됩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한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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