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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 구약성경과 신들/ 제16강 정의가 강물처럼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6 조회수2,307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옮겨온 곳: 성서100주간 http://cafe.daum.net/bible100weeks

* 주원준 박사님 계신 곳: http://www.biblicum.or.kr/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16강 정의가 강물처럼

 

강의에 들어가며...

 

강물은 흘러가며 대지를 축축히 적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도 이 에드라는 말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어서 성경 전체를 추축히 적십니다. 사실 ‘멸망의 날’, ‘환난의 날’,

‘재앙의 날’, ‘재난의 날’, ‘파멸의 날’ 등으로 다양하게 옮긴 낱말이 모두 에드의 날인

것입니다.

 

때로는 문맥에 따라서 아예 ‘네가 어렵다고’ 또는 ‘네가 불행할 때’와 같이 풀어서

옮기기도 했다. 우선 에드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를 살펴보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닥쳐올 환난을 보았다. 그는 눈앞에 놓인 예루살렘 함락만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닥칠 재앙도 경고했다.

 

아래는 저마다 모압과 에돔과 케다르와 하초르에 닥칠 환난을 예고한 것이다.

 번역본에 따라 대개 ‘환난’으로 옮겼지만, 멸망, 재앙 등으로 옮겨 자연스런 문맥을

살리기도 한다.

 

“모압의 에드(모압의 환난; 모압의 멸망)가 가까이 다가오고
 그 재앙이 재빨리 닥쳐온다” (예레 48,16)

 “내가 그에게 에사우의 에드(에사우의 환난; 에서에게 재앙)를,
  그를 징벌할 때를 가져올 것이다” (예레 49,8)

 

정의를 강물처럼
 강의 종교심으로 돌아오자. 수메르 시대부터 신성 재판의 최종 판결자로서 대단한

권위를 지니는 강에 대한 종교심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국한되지 않았다. 고대 우가릿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신 얌무에도 이런 종교심이 깃들어 있다. 얌무의 호칭 가운데는

‘판관 나하루’가 있다. ‘나하루’는 우가릿어로 ‘강’이란 뜻이니, 이 호칭을 분석해 보면

‘재판관이신 강님’이 된다. 강이 정의를 판결하는 주체라는 모티프가 여기에도 들어 있다.

 

 구약성경도 이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열한 다양한 성경 인용문에서 강이

심판의 주체가 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강의 심판’인 에드의 개념은 고대

근동 종교의 껍질을 벗고 탈신화되어 ‘최후의 직접적 심판’이란 개념으로 정착되었고,

그 심판의 주체는 야훼 하느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에드의 날을 정하시는 것도 하느님이시고, 그날에 심판하시는 분도

그분이시다. 구약성경은 에드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고대 근동 종교의 전통을 이었지만,

강에 깃든 ‘심판자의 권능’은 고스란히 하느님께 돌렸다.

 

 이렇게 야훼 신앙으로 재신화된 에드는 구약성경에서 그저 ‘환란’ 또는 ‘재앙’의 뜻으로

널리 쓰이다가, 지혜문학에서는 ‘개인적 불행’의 뜻으로 쓰였다. 야훼 신앙 안으로 재신

화된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성찰을 통해 신학적 발전을 이룬 것이다.

 

‘강’과 ‘정의’가 연결되는 구약성경의 종교심은 이렇게 탄생한 것 같다. 하지만 그 문학적

표현의 흔적을 없애지는 못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유명한 말씀의 배경에도 이런

고대 근동 종교의 흔적이 엿보인다. 왜 정의와 공정을 강물에 비유했는지, 이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 5,24).

 

저승의 강
저승을 건너는 강이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나온다. 이 강을 아카드어로

‘후부루’라고 하는데, 역시 수메르어의 차용어다. 후부루 강을 건너면 저승이므로 ‘죽음의

강’이라고도 한다. 이 강은 수메르어로 ‘저승의 강’ 또는 ‘인간을 삼키는 강’이라고 했다.

 

저승의 문 앞을 흐르는 이 강에는 뱃사공이 있다. 이 뱃사공의 힘을 빌려야 건널 수 있는

강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 ‘죽음의 강’이 나온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대 수메르

신화 가운데 대표작인 이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을 밝혀 줄 우트나피쉬

팀을 만나러 이 강을 건넌다. 그때 그는 뱃사공 ‘우르-샤나비’와 겨루어 이긴 다음에야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은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없었지만 초인적 영웅 길가메쉬는 가능했다.

그는 저승에 가서 우트나피쉬팀을 만나 태초의 홍수 이야기를 들은 다음 다시 이 강을

건너온다. 이때 우르-샤나비는 우트나피쉬팀의 명령으로 고분고분하게 길가메쉬를 도로

데려다 준다. 후부루는 그 자체가 신의 이름이었다.

 

한편 이 ‘저승의 강’을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과 우가릿에서는 ‘쉴라후’라고 불렀다.  

히브리어로는 ‘셀라흐’가 되었다. 대개 ‘수로’로 옮기는데, 저승의 강이라는 의미가 있다.

욥기는 이 말을 분명 ‘저승의 강’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두 번 모두 동사는 ‘건너다’를

사용하여, ‘저승의 강을 건너’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맥이 분명하다. 이렇게 엘리후는

먼 옛날 신화를 인용하며 욥을 설득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목숨을 구렁에서 보호하시고
 그의 생명이 셀라흐(수로; 사망)를 건너지 않게 하신답니다(욥기 33,18).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의 셀라흐(수로; 죽음의 세계로)를 건너게 되고
깨달음 없이 숨을 거두게 됩니다(욥기 36,12).

 

신화적 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저승의 강을 건너는 권능은 하느님께 돌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길가메쉬 서사시에 등장했던 강한 뱃사공도, 초인적 영웅도 설 자리가

없어졌다.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정의를 논하는 신앙인들만 남게

되었다. 하느님은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다. 저승의 강을 건너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승의 강을 건너, 깨달음 없는 헛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탈신화되어 야훼 신앙으로 재신화된 셀라흐만 구약성경에 남았다.

 

이슬은 풍요의 상징
 여러 번 언급했듯, 고대 근동 지역은 대체로 물이 귀했다.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 강 등 큰 강의 하류를 제외하고는 메마른 땅이라서 농사가 무척 힘들다.

다행히 이슬비나 안개가 축축히 땅을 적시는 독특한 기후 덕분에 그나마 한 철에

식물들을 키우고 살 수 있다.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사막 식물이라도 이런

이슬비가 없었으면 생명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잎사귀에 맺히는

영롱한 이슬은 풍요의 전조였다. 만일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재앙이었다.

 

구약성경에 ‘하늘의 이슬’이란 표현이 있다.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이슬이니 귀하고도

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이 이슬과 같다고 표현하는 구절도

있다. 모세는 유언으로 남긴 아름다운시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고 표현한다. 메마른 팔레스티나 땅에서 비는 풍요의 상징이다.

 

이슬은 금방 증발되어 버리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비나 소나기처럼 풍요의 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곧 여기서 이슬은 약한 존재도, 영롱한 존재도 아니다. 풍요의

근원이다. 히브리어로 이슬을 ‘탈’이라 한다. 아랍어로도 이렇게 부른다.

 

히브리어와 무척 가까운 우가릿어로는 ‘탈루’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근은 ‘탈’로서,

히브리어와 같다. 탈은 분명히 ‘이슬의 신’으로 섬김을 받았던 것 같다. 다윗의 다섯째

아내 ‘아비탈’의 이름은 ‘내 아버지는 탈님’이란 의미다. 이슬신 경배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과 대적했던 바알은 풍요의 신이었다. 우가릿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딸을 셋 두었다. 그 가운데 ‘이슬비의 딸 탈라유’는 풍요의 이슬을 상징한다.

나머지 두 딸은 ‘피드라유’와 ‘아르차유’라고 하는데, 학자들은 대개 나머지 두 딸도

이슬이나 안개 등 비의 종류로 이해한다.

 

 구약성경에 ‘하늘의 이슬’은 하느님이 내려주신다고 언급하는 구절이 꽤 많다.

그 뜻인 즉,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이 이슬을 내려주신다는 말이다.

아래 창세기의 말씀은 분명히 이슬을 내려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풍요가 이루어진다고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창세 27,28)

 

 고대 근동은 한반도와 자연 환경이 퍽 다르다. 다른 환경에서 수천년 살아 왔으니,

마음과 몸이 차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우리와는 퍽 다른

배경에서 생겨난 문헌이다. ‘이슬’같이 작고 연약한 물방울에 얽힌 종교심도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이슬’을 보라. 척박한 곳에서는 작은 이슬방울도 풍요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또한 찬찬히 들여다 보면 한 방울의 이슬에도 오랜 세월 축적된

신학적 성찰이 영롱하게 들어 있다.

 

제16강 정의가 강물처럼

 

안녕하세요?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성호경 바치고 강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 이제 우리는 16회 시간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첫 시간마다 이 강의의 의의와

지난 시간에 강의 했던 것을 잠시 정리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는데요. 계속 강조 드리는

것은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가 선교 300년대를 향해서 앞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선교 300년대에 걸맞는, 외형도 중요하고 신자 여러분이 늘어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

다만 그 내용의 깊이, 우리의 신앙의 깊이,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아직 5천년 문화 중에

그리스도교를 이렇게 접한 것은 사실은 300년이 채 안 된 것이죠?

 

점차 점차 우리 문화와 같이 접하면서 새로운 문화로 탄생하는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구약성경을 잘 이해해야 되고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 신앙인들이 교양을 쌓아야 될 것이 조금씩 조금씩 더 늘어나지 않는가?

 

그 중에서도 특히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종교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아 놓고 있으면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제가 이

강의를 준비했고 평화방송에서도 계속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선교 300년대를 맞는 우리 신자들이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 교양으로 성경이 탄생하게 된 고대 근동

  세계와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는 우리 신자들의 필수 교양으로써 고대 근동의 종교, 그 중에 일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이제 다른, 우리보다 더 오래된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우리도 역시 그들을 어느정도 쫓아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특히 우리가 좀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은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입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구약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시대가 우리하고 되게 멀고,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먼 시대이지만 역시 그들도

사람들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였고,

그들은 어떤 시긍로 생각을 했고, 어떤 조건에서 살았고 그래서 어떤 종교심을, 당대의

상식 같은 게 있는 게 있는 거거든요.

 

인간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잘 말씀하셨지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면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게 아니라 과거에 현재가 있고, 현재에 현재가 있고, 미래에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한테 주어진 고 현대 잠깐 100년도 안 되는 고 시간 밖에

살고 가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기록은 시대의 한계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도 우리가 굉장히 고대인들보다 뛰어나고 잘하고

이런 거 같지만 역시 1,2백년 후에 보면 우리도 굉장히 멍청한 짓을 많이 하고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서 역사에 겸손해져야 되고 하느님만이 지금 모든 걸 다 보시면서

모든 역사를 주재하신다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인터넷 같은 데 보면 첫 번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고대 근동의 종교를

책으로 쓰고 왜 강의를 하냐 하면, 인터넷 같은데 보면 그리스도교 구약성경을 이상하게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길거리에서도 그렇고. 이게 미신적인 텍스트다. 아니면

옛날에 어떤 점쟁이나 미신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용어들이 보이죠. 옛날 용어들이 보이죠. 그런데 제가 이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들한테 차근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그런 표현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가 시대 사람들이 썼던 언어이고, 그 시대의 문화이고, 그 시대의 종교인

것이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것을 쓴 의미는 다른데 있어요.

 

그 사람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고대 이스라엘의 하느님만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바치려고 했잖아요. 그 마음을 표현 할려고 하면서 그 당대에 썼던 의미의 언어들을

사용한 것이죠. 그런 표현들을. 그것을 이제 제가 신들을 예를 들어서 하나하나 여러분

들한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강의 신에서 계속 보고 있는 에드라는 신이 옛날에 그 수메르 시대에

그 어떤 이상한 신성 재판이라는 강물에 사람들을 풍덩풍덩 빠뜨리고 막 이런 관습에서

비롯된 그런 미신적인 용어라더라 하고 있지만 또 잘 보면은 그렇지 않죠?

 

그것이 이번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려고 하고, 과거를 여러분이 잠깐 돌아보시면 제가

첫 시간부터 하늘신에 대해서 보았고, 달신을 보았고, 이번 시간만 지나면 강의 신이

이제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강의 신을 다 보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또 다른 재미있는

피의 신을 볼 겁니다. 피의 신은 좀 재미있는 면이 있어요.

 

이번 시간에는 강의 신을 마무리 할텐데 강의 신을 마무리하면 강의 시간이 조금 남아요.

그래서 제가 이제 큰 신 말고 작은 신 하나를 소개시켜 드리려고 그래요. 저번 시간처럼.

요번에는 이슬신을 소개시켜 드릴텐데 거기에 대해서는 이 강의 맨 마지막에 남는 시간

동안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의 신을 마무리 하는 의미에서 여러분, 강은 강조하지만 계속 경외의 대상으로, 돈벌이

의 대상이 아니라, 강은 어떤 자원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어떤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어떤 의미의 세계로 우리가 몸으로 느끼는 그런 강이었습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인들에게 강은 마치 신을 대하듯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우리의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껴서 그런 경외감을 지니는, 생태적인 의미의 강이었고요.

그 강이 어떤 때는 지리적인 경계의 의미로 쓰이고, 어떤 때는 신화적인 경계의 의미로

쓰이고, 특히 구약성경 안에서는, 고대 근동에서는 작은 신, 요르단 강 신이 구약성경에

서는 큰 신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 지난 시간 강의 요약: 고대 근동에서 강은 지리적이고 신화적인 경계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강의 신, 강과 관련된 굉장히 재미있는 함무라비 법전 조항을 우리가 저번 시간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강에 풍덩 빠뜨리는 것도 보았고, 당대는 되게 합리적인 그런 판결

방법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와 비슷하게 지금도 합리적으로 로또를 한다

든지 하는 것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인간의 어떤 한계라 할까요? 그런 것도 보았고, 이제

우리는 그 고대의 이드, 아카드어로 잇투, 히브리 말로는 에드라고 하는 그 강이 끝났고,

이번 시간에는 이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 '강'의 다른 말들

 

강물은 흘러가면서 대지를 축축히 적셔서 우리가  살기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우리 성경에서도 이 에드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어요. 그래서 멸망의 날, 환난의 날,

재난의 날, 재앙의 날, 파멸의 날 이런 식으로 옮겨요. 그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옮기는데,

 

*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에도 강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드'는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멸망의 날', '환난의 날', '재앙의 날', '재난의 날', '파멸의 날',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래서 히브리 말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라서 때로는 종종

이것을 완전히 풀어서 '네가 불행할 때', '네가 환난을 당할 때' 이런 식으로

옮기기도 해요. ?워낙 히브리 말이 우리나라 말과 다르기 때문에 많이 어렵거든요.

똑같이 옮길 수도 없고 이렇게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옮기는데 여러분은 아, 이게

모두 '에드'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이번 시간에 배우실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에드가 단독으로 쓰인 경우, '에드의 날'로 쓰인 거를 봤어요. 저번 시간

까지는 '욤 에드'라는 단어를 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는 '에드'만 쓰인 거, '파멸', '환난'

이렇게 쓰인 것만 몇 가지 더 보겠습니다.

 

또 예레미아 예언서입니다. 예레미아 예언자가 이런 신화적 표상을 잘 쓰시는데요.

예루살렘이 곧 함락될 것이다. ?너희들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 망한다라고 예고하실 때

예루살렘만 망하는 게 아니라 이 재난은 이스라엘 전체의 재앙이다. 이렇게 이제 표현

하시는 거예요. ?예레미아 예언자가.

 

그래서 모압도 환난이 닥치고, 에돔도 환난이 닥치고, 케다르, 하초르 이렇게 작은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 도시들까지 전부 다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할 때 그 환난

이라고 표현되는 게 모두 한 단어예요. '에드'라는 거예요.

 

* 예레 48,16: 모압의 에-드(모압의 환난; 모압의 멸망)가 가까이 다가오고

  그 재앙이 재빨리 닥쳐온다.

 

* 예레 49,8: 내가 그에게 에사우의 에-드(에사우의 환난; 에서에게 재앙)를,

  그를 징벌할 때를 가져올 것이다.

 

* 예레 49,32: 그들 주변 곳곳에서 그들에게 에-드(환난; 환난)를 불러오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에드는 원래 강의 이름이었지만 여기서는 강의 색깔은 하나도 없어지고 이제 '환난'

'멸망'으로 쓰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주시는 환난의 어떤 성격을 알 수 있는데요.

우리가 저번 시간에 강에 풍덩 빠뜨리는 건 아주 판결이 깨긋하죠? 죽기 아니면 살기죠.

그냥. 하느님의 환난은 어쩌면 이렇게 칼 같이 정확하게 오는 것일 수도 있어요.

 

중간에 애매한 것이 없이 완전히 여러분이 구원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 두 개 밖에

없을 그렇게 오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욥기도 에드를 자주 언급합니다. 욥은 저번 시간

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선하신가?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두는 굉장히 고급 신학을 피는 책인데요.

 

만약에 상선벌악,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은 벌을 하신다. 주님이. 환난은 악인에게

만 닥칠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지요? 세상살이는 반드시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욥기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교재 136쪽입니다. 그의 기력이 메말라 가

그가 넘어지면 바로 멸망이다. 이럴 때 에드를 쓰고요.

 

* 욥 18,12: 그의 기력이 메말라 가 그가 넘어지면 바로 에-드(멸망; 재앙)라네.

 

* 욥 21,17: 악인들의 등불이 자주 꺼지던가? 받아 마땅한 에-드(파멸; 재앙)가

  얼마나 자주 그들을 덮치던가? 그분께서 진노하시어 고통을 내리시던가? ?

 

에드를 읽어드리면, 악인들의 등불이 얼마나 자주 꺼지던가? 이것은 악인들의 등불이

꺼지기라도 하냐? 이 말씀이죠. 받아 마땅한 에드, 받아 마땅한 파멸이 얼마나 자주

그들을 덮치던가? 그들은 파멸을 받아서 마땅하지만 별로 안 덮치는 게 보인다. 이런

뜻이죠. 그분께서 진노하시어 고통을 내리시던가?

 

* 욥 30,12: 나를 몰아대고 나를 거슬러 에-드의 길(멸망의 길; 나를 파멸시키려고)을

  닦는다네.

 

* 욥31,3: 불의한 자에게는 에-드(환난; 불행), 나쁜 짓 하는 자들에게는 재난이 아닌가?

 

욥기는 이렇게 계속 하느님한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욥 31,23: 하느님의 에-드(파멸; 심판)가 나에게는 두려울 수밖에 없고 그분의

  엄위를 내가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일세.

 

에드의 날이 미래에 닥칠 멸망의 날, 심판의 날이 아니라 과거에 닥쳤던 그런 심한

고통의 날, 이런 걸 의미하는 걸 보셨는데요. 에제키엘서도 에드 자체도 그렇게

얘기가 됩니다.

 

* 에제 35,5: 너는 옛날부터 적개심을 품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에-드(환난; 재난)를

  당할 때, 그들이 마지막 벌을 받을 때, 그들을 칼날에  넘겨 버렸다.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할 때, 에드를 당할 때,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자, 에드의 날에 대해서 하나만 더 보고 에드의 날을 마치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성경 구절을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건 에드가 성경의 어느 한 구석에만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단어가 아니라 굉장히 널리, 마치 강물이 대지를 적시듯이 우리 구약성경

전체에 널리 축축히 퍼져 있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자꾸 예를 드리는 거예요.

잠언에 보면은 이제는 개인적인 불행의 시간으로 에드를 씁니다.

 

* 잠언에서 히브리어 '에드'는 개인적인 불행의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도 어떤 성찰거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한테

에드가 닥칠 때, 여러분들은 막 강에 누가 풍덩 빠치지는 않겠죠? 수영장은 가실지

모를 거예요. 그런데 저번 시간에 제가 함무라바 법전할 때 그렇게 말씀드렸죠.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고소할 때 저자가 나한테 흑마술을 걸었소라고 어떻게 보면

무고한 거죠. 증거도 없이 얘기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을 강물에 빠뜨리면 강물에

빠진 사람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죠? 나한테 이드가 닥치는 건 그런 거예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게 닥칠 수가 있어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왜

강물에 풍덩 빠져야 하나? 개인적인 불행의 시간, 예고 없이 찾아온 내 인생의 불행의

시간을 에드라고 표현을 해요. 어쩌면 그렇게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 봐요. 아니면 독을 먹어야

되거나, 불 위를 걸어가야 할지도 몰라요. 거거서 여러분한테 남는 건 어쩌면 하느님

신앙 밖에 없을 거예요. 나한테 닥친 에드의 날, 나한테 닥친 에드를 나는 어떻게 극복

할까? 잠언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 잠언 1,26-27: 나도 너의의 에-드(불행할 대;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에 웃고

  파멸을 당할 때 비웃으리라. 파멸이 너희에게 폭풍우처럼 닥치고 에드(불운; 재앙)가

  너희에게 태풍처럼 들이치며 곤경과 재앙이 너희 위로 닥칠 때 나는 그렇게 하리라.

 

* 잠언 6,15: 그래서 갑자기 에-드(재앙; 재앙)가 들이닥쳐 순식간에 망하면

  구제할 길이 없다.

 

* 잠언 17,5: 가난한 이를 비웃는 자는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자

  남의 에드(불행; 재앙)을 즐기는 자는 별을 면치 못한다.

 

* 잠언 24,22: 그분들이 내리시는 에-드(재앙; 재앙)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법

  그 두 분이 일을키시는 멸망을 누가 알겠는가?

 

여러분이 이 에드를 이제는 개인적인 영성의 맥락에서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언 이런 구절을 읽으면 우리가 성경에서 개인적인 묵상을 할 때, 나한테 불행이

닥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거는 가끔 해 보는 묵상이죠?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도 예고하지 않은 불행이 닥치거나, 예고하지 않은 고통이 닥칠 수 있었겠죠?

그때 그 고통을 어떻게 표현했냐 하면 에드리고 표현을 했어요.

 

이 책의 부제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잖아요?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도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던 거죠. 이제 여러분들은 적어도 에드에 관해서는 어떤 영성적인 맥락도

아시고 여러분 개인적으로 스스로 묵상을 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되신 것 같습니다.

잘 되셨기를 바라고요. 저는 하나만 더 얘기해 드리겠습니다.

 

# 정의가 강물처럼

 

강의 종교심으로 돌아오면은 수메르 시대부터 신성 재판을 최종 판결자로서 대단한

권위를 누리던 게 이제 강이죠? 그런데 그 강은 강이 정의와 관련되는 거는 메소포타

미아에 국한되지 않고 고대 히브리의 바로 옆 동네였던 우가릿에서도 그랬어요.

 

예를 들어서 강의 신이 나하루인데요. 나하루의 호칭이 뭐였냐 하면은 '판관 나하루'

였어요. 판관이라고. 강은 판관이었어요. 재판관이신 강님 정도 될 거예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재판관이신 강. 강이 정의를 판결하는 주체다. 이런 게 있었어요.

 

그런 종교심이 널리 퍼져 있었지요. 구약성경고 이 형향을 받아서 어쩌면은 이 에드

라는 말을 수용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고대 근동에 갖고 있던 신화

적인 표상을 탈박시켰어요. 껍질을 벗겨 냈어요. 그러를 탈신화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새롭게 생각을 했는데, 자, 최후의 심판 같은, 우리가

강물에 빠지는 거 같은 그런 에드의 날이 우리한테 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 민족

전체가 그런 걸 당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이제부터 그 심판의 주체는 누구예요?

하느님이세요. 하느님이 내리는 심판으로 바뀐 거죠.

 

* 구약성경에서 '강의 신'인 '에드'의 개념은 고대 근동 종교의 껍질을 벗고 탈신화

  되어 '최후의 직접적 심판'이란 개념으로 정착되었는데, 그 심판의 주체는 야훼

  하느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에드의 날, 심판의 날, 환난의 날을 정하시는 분도, 그날이 언제일지를

정하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심판의 주체, 심판하시는 분도 더이상 강이 아니라

하느님이세요. 구약성경은 에드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서 고대 근동의 맥은 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강에서 심판하는 권능을 싹 빼서 우리 하느님한테로 다 돌렸어요.

 

* 구약성경은 '에드'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고대 근동 종교의 전통은 이었지만, 강에

  깃든 '심판자의 권능'은 고스란히 하느님께 돌렸다

 

그래서 이게 두 본문이, 구약성경 본문과 고대 근동의 신화의 본문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들어가 있는 속뜻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슷한 그

당대에 쓰인 언어를 가지고 굉장히 독특한 신앙을 표현하는데 사용을 했어요.

 

이게 다른 점이죠. 이렇게 야훼  신앙으로 재신화된 에드는 구약성경에서는 이제 그냥

환난, 재난 이 정도 뜻이로 쓰이고, 우리들도 특별히 신화적으로는 번역하지 않죠.

이렇게 설명을 해드려야만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거를 인제 야훼 신앙 안에서

신학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렇게 되는 거는 다른 나라 문헌에서는 볼 수 없고 이스라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여전히 강과 정의가 연결이 되요. 그 문학적인 표현의 흔적을

없애지도 않았고, 강과 정의가 연결되는 문학적 모티브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죠.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죠. 사회 정의를 많이 얘기하고 사회

정의를 많이 부르짖은 예언자죠. 그런 표현 중에 우리가 아모스서 5장 24절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여러분들 많이 보실텐데,

 

* 아모 5,24: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정의는 강물처럼. 시국 미사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표현이예요. 정의를 강물처럼이라는

표현이 왜 나왔는지 이제 여러분 이해하실 거예요. 정의를 강물처럼. 70년대, 80년대

데모할 때나 시국 미사에서 지금도 많이 쓰지만 그게 구약성경에서 나온 거라는 건

여러분들이 알지만 왜 하필이면 정의가 강물과 같은가? 이제 여러분이 이 시간을 통해서

아셨을 거 같애요. 정의는 원래 강물처럼 흘러야 되는 것이고 강물이 세상 모든 걸 다

적시듯이 정의는 모두한테 골고루 다 좋게 만드는 것이죠.

 

# 저승의 강

 

자, 정의를 강물처럼, 여러분들 다 아셨으면 저승을 건너는 강에 대해서 하나만 더 말씀

드리고 여러분들한테 강에 대해서는 마치려고 합니다.

 

 

                                    (저승의 강)

 

수메르어로 강의 이름 중에 후부루 강이라는 게 있어요. 좀 이상하죠? 이름이.

이게 H 밑에 낫 표시가 하나 있잖아요? 후부루가 아니라 후- 부루라고 발음을 해야 되요.

가래가 확 끓어야 되요. 후부루 강을 건너면 죽음이예요. 저 강을 건너면 우리는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네트 강 같은 옛날의, 죽음의 강이예요. 저승의 강, 인간을 삼키는 강.

이런 강이예요.

 

이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하면면요. 이 강에는 신화에 보면은 뱃사공이 하나 있어요.

어디가나 뱃사공이 하나씩 꼭 있어요. 그 뱃사공이 있는데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면은

길가메쉬가 이 강을 건너요. 건너는 데 죽음으 강이 나와요. 후부루 강과 같은 강이죠.

말은 좀 드리지만,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죠.

 

길가메쉬가 이 강을 왜 건넜냐 하면요. 죽음의 강이니까 건너면 생사의 열쇠를 쥔

사람이 있어요. 그 생사의 열쇠를 쥔 사람을 만나서, "내가 죽지 않고 살고 싶다.

그 비밀을 알려다오." 이 말을 할려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길가메쉬한테

"너 저 강만 건너가면 되는데" 하니까 드디어 저 강에 갔고, 저 강 앞에서 뱃사공을

만났어요. 뱃사공의 이름이 우루샤납이라는.

 

이 사람도 보통 사람이 아닌데 이 사람이 자, 길가메쉬가 후부루 강에 왔어요. 그래서

"나 좀 건너다 줘" 그러니까 또 그런 뱃사공은 함부로 잘 안 건너다 줘요. 그래서 거거시

내기 같은 겨루기를 해요.  ?겨루기를 해서 길가메쉬가 이겼어요. 꼭 이기죠. 얘기가 될려

면. 그렇게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 보통 사람은 저 강 근처에 갈 수도 없고 저 강에서 그런 뱃사공을 만나도 그 뱃사

과 겨루어서 이길 수 없지만 길가메쉬는 대단한 영웅이고 초인이니까 그거를 다 이기고

이제 저승에 갔어요. 저승의 강을 건너서 갔다는 길가메쉬는 게다가 돌아오기까지 했어요.

다시. 그런 길가메쉬가 훌륭한 영웅이다 하는 걸 얘기해 준 거죠.

 

후부루는 그 자체가 신의 이름이었어요. 후부루하는 신이 있었어요. 후부루가 140쪽에

보면 모든 것을 만든 어머니 후부루. 이 강물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 이렇게 얘기 되고

있지요. 이 저승의 강이라는 이름은 여러 개가 있는데 저승의 강의 이름이 여러 개예요.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여갛고 우가릿, 이스라엘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똑같은 강을

'쉴라후'라고 불렀어요.

 

 

                               (저승의 강)

 

 그런데 이 쉴라후는 히브리어로 셀라흐가 되요.

 

 

 

그러니까 히브리 말로는 '셀라흐'가 '저승의 강'이라는 말이예요.

그런데 이거를 우리나라 말로는 '저승의 강'이라고 안 옮기고 요것도 역시 탈신화 되어

그냥 '수로', '개울'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데 보통의 수로나 개울이 아니라 이렇게

조금 특이한 수로였어요.

 

우리가 보통 '수로'로 옮기지만 욥기는 수로로 쓰면서도 분명히 '저승의 강'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써요. 이 저승의 강을 건너면 죽음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욥은 고대의 신화를 알고 있었어요. 욥기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건대 한번 보세요.

 

* 욥 33,18: 이렇게 그의 목숨을 구렁에서 보호하시고 그의 생명이

  셀라흐(수로; 사망)를 건너지 않게 하신답니다.

 

죽지 않게 한다는 거죠. 하느님께서 수로를 건너지 않게 하신답니다. 이렇게 번역을

했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 욥 36,12: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의 셀라흐(수로; 죽음의 세계로) 건너게

  되고 깨달음 없이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한테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고 우리가 죽기 전에 깨달음

없이 숨을 거두게 된다는. 이 셀라흐를 건너면,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는 거죠.

 

이것도 역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신화적 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신화적 강을

건너는 권능, 누가 이 강을 건너게 해 주시냐 하면은 배사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건너게 해 주시는 거죠. ?이 신화적 강을 모두 통제하시는 분도 역시 하느님이시라는

거예요.

 

길가메쉬 서사시에 등장했던 어떤 초인적인 영웅, 그 다음에 되게 재미있는 이상한

뱃사공, 거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기 구약성경에서는 다 사라지고, 하느님하고

나밖에 안 남는 거죠. 그러면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오직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정의를 논하는 신앙인들만

남았어요.

 

하느님은 생명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고, 저승의 강 앞에서 "내가 이거 문제 내서 네가

이기면 저승의 강을 건너줄께", "나랑 겨뤄 이겨 내면 저승의 강을  건너 줄께"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저승의 강 앞에서 생명을 보호사시느라고 우리한테 이 강을 건너지

말라라고 자애롭게 얘기해 주시는 분처럼 나와요. ?하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승의

강을 건너서 깨달음 없는 헛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이죠.

 

그밖에 우리가 아까 '후부루'라고 그랬는데 '하보르'라는 이름이 하나 더 나와요.

구약성경에. 아까 하보루하고 비슷한 이름이죠. 하보르라는 이름이 히브리 말로도 있고

구약성경에 딱 세 번 나오는데 어떤 의미도 아니고 지명으로 나와요.

 

 

 

그런데 이거는 신화적인 의미는 별로 없는데 제가 히브리 성서을 읽다가 여러분들 하고

그냥 어떤 느낌을 나누기 위해서 이 책에 적어 놓은 거예요. 신아시리아 사르곤 2세가,

남북 왕조가 구약성경에 있었지요? 이스라엘에서. 북왕조가 먼저 망하고 그 다음에

남왕조가 이제 망했는데 북왕조는 아시리아한테 망했고 남왕조는 바빌론한테 망했지요.

 

그런데 북왕조가 망했을 때 예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왕조가 망했을 때, 그 전쟁에

패했어요. 그래서 이제 북왕조의 백성들이 이제 나라를 잃은 약소국의 백성들이잖아요.

삶이 굉장히 비참했을 거예요. 강제로 고향을 떠나서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앞으로 저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까? 먹고 살 수 있을까?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이러한 것들을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사람들이 그때 끌려 갔다라는 얘기를 하는데 끌려간 곳이 어디냐 하면은 하필이

면은 ?'하보르'예요. (2열왕 18,11; 17,6; 1역대 5,26)에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요.

 

* 아시리아 임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유배를 보내어, 하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정착시켰다(2열왕 18,11; 참조: 17,6; 1역대 5,26)

 

하필이면 그 정착시킨 곳이 하보르예요. 저승의 강하고 이름이 똑같은 곳이예요.

아마 이 기사를, 이 성경을 읽으면서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아, 우리 조상들이 거기까지

가가지고 유배를 했구나. 이렇게 느끼실지도 몰라요. 지명의 일치고, 우연한 일이지만

저도 이거를 읽으면서 아, 이 이름은 어쩌면 고난의 유배를 상징히는 이름일 수도 있다.

저 신화의 강 저 끝까지, 세상 끝까지 유배를 간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을 거 같애요.

 

이상이 이제 제가 일반적으로 강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을 정리한 것이고요. 첫 시간에,

강의 시작할 때 말씀드렸지만 히브리 말로 강 그러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나하르'

라는 단어예요. 그런데 그 강은 너무너무 상징 세계가 커서 책 한권을 써도 모자라서

여기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저는 '이드'라든지, 신화적 경계의 강이라든지, 곁가지 강들만 얘기했고, 본질적인 강에

대한 ?신화적인 상징들이 있는데 그거는 다른 기회가 되면 여러분한테 말씀드리고 이번

에는 일단 곁가지만 몇 가지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처음에 시작할 때 말씀드

렸던 대로 강에 대해서는 이제 다 끝났고요.

 

# 이슬신

 

시간이 남아서 이제 남는 시간 동안 작은 신, 조금을 귀여운 신, 우리가 시간이 남으면

작은 신들을 하고 있지요? 그 작은 신 이슬신을 말씀드릴께요. 물하고 계속 비슷해서,

강 하고 좀 비슷하고요. 우리가 이슬신을 이 강에서 다룬 적이 있어요. 사실은. 바람신,

풍우신을 다루다가? 이슬이 신의 이름이라는 것도 보았지요?

 

그러니까 바람신 다룰 때 여러분들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봤을

때 지중해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이 축축하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그 바람에

이슬 같은 게 맺혀요. 나뭇잎 같은데 이슬로 맺혀요. 이스라엘 이쪽은 비가 워낙 적게

와서 거기에 맺히는 이슬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랬죠?

 

그래서 이슬신의 이름이 되었는데 다른 신이예요. 예쁜 신이죠. 고대 근동 지역은 물이

귀했고요. 그리고 큰 강가 아니면은 메마른 땅이라 농사가 무척 힘들었고요. 그래서 이슬

비 정도가 내려주면은, 아니면 안개도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러면은 그 물을 받아서 식물

들이 살 수 있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한반도는 이제 좀 복받은 지역이라서 물이 많아요. 댐을 많이 안

만들어도 물이 많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자연적인 저수지도 많고 일단 땅이

축축해서 농사가 잘 되서 우리는 이슬 그러면 농사에 별로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예요.

 

예쁘고 맑은 이슬, 영롱한 이슬, 그래서 먹으면 막 예쁘고 이런 식의 느낌이 있지, 이슬이

무슨 농사에 큰 도움이 되나? 그런데 성경에는 안 그래요. 성경에서는 이슬 그러면 농사

나 이런데 큰 도움이 되는 거예요. 워낙 메마른 지역이라서. 그래서 1열왕 1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으면 재앙이예요.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생각을 안 하죠.

 

* 고대 근동에서 영롱한 이슬은 풍요의 전조였으며 만일 이스도 비도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재앙이었다

 

구약성경에 하늘의 이슬이라는 표현이 가끔 나와요. 그때 그게 얼마나 소중한 표현인지

여러분들이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요.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이슬이니까 귀하고도 귀한

존재라는 뜻이예요. 이슬이 오죽했으면 '하늘의 이슬'이라고 했겠어요? 이 표현은 풍요의

맥락에서 반복 되는데 신명 33,28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

 

*신명 33,28: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고 야곱의 후손들은 안전하게 하늘이 이슬을 내려

 주는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산다.

 

즉 잘 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잘 살 것이다. 이렇게 모세가 마지막 노래에서 말씀하시는

것인데 자,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고 좋아요. 야곱의 후손들은 안전하게 산다. 그런데 왜

평안히 안전하게 사느냐 하면은 하늘이 이슬을 내려 주는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산다.

 

우리는 하늘이 이슬을 내려 주는 정도로는 벼농사를 못 짓지요. 물이 많이 필요해서.

그런데 여기는 그것만으로도 참 좋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어요. 이와 반대로 역시

모세의 노래인데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메마른 팔레스티나 땅에서 비는 풍요의 상징이죠? 이슬은 비하고 비슷할 정도로

중요한 상징이예요.

 

* 신명 32,2: 나의 가르침은 비처럼 내리고 나의 말은 이슬처럼 맺히리라.

  푸른 들에 내리는 가랑비 같고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 같으리라.

 

하느님의 말씀은 메마른 지역에서 비처럼 내리고, 이슬처럼 맺히고, 가랑비 같고 소나기

같다. 하늘에서 내라는 하여튼 물은 다 좋은 거예요. 워낙 메마른 지역이라서. 그런데

이슬이 가랑비와 소나기와 같은 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어요. 이슬은 금방

증발되어 버리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비나 소나기처럼 풍요의 근원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예요. 약한 존재도 아니고, 영롱하기만 한 존재도 아니예요.

 

* 모세는 유언으로 남긴 아름다운 시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고

  표현을 했는데 메마른 팔레스티나 땅에서 이슬은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비와 같은

  풍요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 구절을 읽으실 때 이슬이 맺힌다 그러면 아, 영롱하고 이쁘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롱하고 예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셔도 되요. 거기서도

이슬은 영롱하고 예뻤을 것이지만 이게 비처럼 대지를 축축히 적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야 되요.

 

이렇게 고대 근동의 종교심은 우리와 다르죠? 자연 환경이 다르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한반도는 크고 작은 강과 저수지가 자연적으로 잘 발달해 있고, 일년에 한번씩 또 장마

가 와 가지고 물이 홍수가 나면 큰일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물이 부족하지는 않죠?

한반도에서 이슬이 공급하는 물의 양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슬과 풍우를

연결시키는 종교심은 우리한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낯선게 아니죠. 히브리어로 이슬을 '탈'이라고 해요. 배탈났다에서

탈이났다의 탈이 아니라, 아니면 탈춤을 출 때 쓰는 탈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잘 외워지

더라고요. ^^*~~~ 이슬이 히브리 말로 탈이예요. 아랍어로도 '탈'이거든요. 똑같애요.

 

히브리어 하고 가까운 우가릿어로는 '탈루'라고 하는데 '우'는 주격 조사예요. 그러니까

어근은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탈'은 분명히 이스라엘 신으로 섬김을 받은 거 같애요.

우리가 다윗의 5째 아내 아비탈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내 아버지는 탈. 탈을 아버지로

모신 거예요. 그런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탈이 굉장히 중요한 신이었던 거죠. 이슬신을

아마 경배하는 문화가 있었던 거 같애요.

 

우리가 고대 근동의 잡신들, ?신들을 많이 보고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신 중에 하나가

사실은 바알이예요. 야훼하고 경쟁했던. 바알신도 보면 좋은데 이 짧은 강의에서는

다루지 않을 건대, 바알이 어떤 신이었냐 하면 풍요의 신이었어요.

 

바알을 믿으면 건강해지고, 아들 딸 많이 낳고, 바알을 믿으면 가축들도 자식들을 많이

낳고 풍요로워지고, 성적인 의미도 굉장히 강했어요. 그런 신이었거든요. 돈도 많이

벌고. 그런데 그런 신을 야훼는 배척을 한 거죠. 그런 신은 이제 우상이 되는 것이죠.

 

  

 

바알이 딸이 있어요. 바알의 딸이 셋이 있어요. 그 바알의 딸 중에 하나의 이름이

'탈라유'라고 해요. 이 탈라유라는 이름을 학자들이 분석을 하면, 뒤에 '아유'를 빼면

아, 이게 이슬신이구나. 아까 이슬신 문화가 있다고 그랬죠? 이슬신을 경배하는 문화.

이슬신을 경배하는 문화는 바알의 딸을 경배하는 문화이기도 했던 거죠.

 

바알이 세 딸이 있는데 두 딸의 이름은 피드라유와 아르치유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마

안개나 비라는 뜻으로 봐요. 학자들은. 그러니까 바알의 딸들이 바로 풍우의 신이었고

왜 풍우의 신이냐 하면 그 딸들에 의해서 대지가 축축하게 적시니까.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상상을 해 볼 수가 있는데 바알의 종교를 믿던 사람은

바알한테 기도를 해서 딸들을 시켜서 비 좀 내리게 해 달라고 했을 수 있어요.

 

1열왕 19장에서 엘리야 예언자 한분이 바알 예언자 450명을 갈멜 산에서 대적해서

이기는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서 엘리야 예언자 하고 바알 예언자가 뭐 가지고 싸우냐

하면요. 비를 내리게 하는 것 가지고 싸워요. 그쵸? 바알의 예언자들은 바알이 비를 내려

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물론 바알은 비를 내려주지 못했고, 그때 비를 내리신 분은

하느님이셨죠.

 

딸은, 이게 바알의 딸의 이름으로 신화가 되게 재미있어요. 신화는 그 당시 사람들의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딸은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요. 또 아버지하고 딸은 대체로

친해요. 그러니까 바알의 딸들도 아버지 말들을 잘 들었을 거예요. 이렇게 신들의 세상은

인간사의 반영이기도 하죠.

 

실제로 바알 신화가 출토된 우가릿 토판을 보면 바알이 딸들을 칭송하는 대목이 나와요.

"내 딸들은 참 귀엽다. 내 딸들은 참 좋다."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와요. 사람하고 비슷

하죠? 그리고 바알이 자기의 신전이 없어 가지고 신전을 지을려고 하거든요. 그때 뭐라고

한탄하냐 하면은, "나는 내 집이 없어가지고 아직도 내 딸들하고 같이 산다." 이렇게 표현

하는 대목도 있어요.

 

그리고 한번은 바알이 사람들 앞에서 그 추종자들 앞에서 나타나는데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냐 하면은 세 딸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비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죠. ?이것도 역시

바알의 성격을 나타내 주는 거죠. 이슬을 딸로 거느린 풍산신이예요. 바알은 풍요를

가져오는 풍요의 신인데 이슬을 딸로 거느린 풍요신 바알은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종유의 비와 안개와 이슬을 마음대로 부리는 신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메마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이런 능력은 아, 바알이 되게

우리한테 필요하구나. 바알을 믿어야 되겠구나. 아마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점을 바로,  바로잡아야 되겠다. 참되

게 비를 내리시는 분도 역시 하느님이시다. 이런 얘기를 아마 그 당시 사람들한테 강조를

했던 거 같애요. 저 풍요의 신을 따라가지 말고 하느님을 따라야 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늘의 이슬은 바알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리신다 하는 구절이 구약

성경에 왜 그렇게 많은지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고 그 구절을 몇 개 읽어드

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늘의 이슬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다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꽤 많아요. 그 뜻인즉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이 진정하게 이슬을 내려 주신다.

이 말씀이죠. 창세 27장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창세 27,28: 하느님께서는 이슬을 내려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하느님이 많은 일을 하시는데 하늘의 이슬을 내려주시리라고 콕 찍어 가지고 특별히

강조한 이유는 그 뒤에 배경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알이 아니라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고백은 ?창세기 뿐만 아니라 후대 잠언까지 쭉 이어져

내려가요. 그래서 이슬을 내리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이슬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구절이 나와요.

 

* 잠언 3,20: ?그분의 지식으로 심연이 열리고 구름이 이슬을 내린다.

 

그분이 열어주시는 거예요. 욥기를 한번더 보겠는데요. 욥기는 이슬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서 쐐기를 박는 그런 구절이예요. 이슬은 누구의 딸이 아니라 이런 말을 해요. 왜

굳이 욥이 이런 말을 할까?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왜냐하면 바알을 염두에 두고 지금

하시는 말씀 같애요. 이슬에게 아버지 같은 것은 없다. 이렇게 얘기해요. 욥이.

 

* 욥 38,28: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또 누가 이슬방울들을 낳았느냐?

 

이거는 그 당시에 바알과 바알의 달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어요.

바알의 세 딸은 안개나 이슬 등 비의 종류지요. 그것은 아비가 없다. 있다면 하느님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 대목에서 욥기는 기후의 주재자가 하느님이시다

라는 걸 말하고 있어요. 이슬도 비도 모두 하느님이 주셨다. 그 까닭은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이죠.

 

* 하느님은 모든 것은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슬도 비도 모두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비가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해햐 하다.

비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비야,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바알의 딸들은 바알을 찬미하겠죠?

바알의 세 딸들은 바알을 찬미할텐데 비한테 바알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히는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창조신학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 다니 3,64: 비와 이슬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래서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고대 이스라엘 옆에 있던 바알 신앙을 믿던 사람들은

바알의 세 딸을 좋아했어요. 아버지와 딸 이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그거를 대단히

믿었던 거 같애요. 그런데 이제 우리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이 이루어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옛날에 썼던 그 표상이 그대로 넘어 왔어요.

?똑같은 표현이 고대 근동 신화와 구약성경에 있다 하더라도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는 걸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자, 고대 근동은 이런 면에서 한반도와 자연 환경이 다릅니다. 다른 환경에서 수천년 살아

왔으니까 마음과 몸이 다른 것은 당연하고요. 종교적인 마음도 다른 것은 더 당연합니다.

우리는 첫 시간에 하늘신에 대해서 봤죠? 하늘신은 기본적으로 우리랑 좀 비슷했어요.

최초의 신, 최고의 신이었는데 거기서도 최초의 신이 하늘이었고, 최고신이 하늘이었고

한반도에서도 우리도 하늘, 그러면 금방 받아들이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이런 식으로 얘기도 하고, 그 다음에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나오

고, 그런데 달신에 대해서는 퍽 달랐어요. 우리는 양. 음 이런 거 생각해서 정반대로 달은

좀 약하고 해가 강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고대 근동에서는 정반대로 달이 굉장히 큰 역활

을 했었지요?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달신을 믿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서 보름달을

보고 막 죄의식을 느끼고, 내가 저 달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우리 봤었어요. 참 재미있어요. 우리는 보름달만 보면 기분이 좋아가지고 강강수월레 하고,

추석 세고 이러는데 그쪽에서는 정반대의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죠?

 

바람신에 대해서도 우리가 다른 걸 보앗고, 강의신에 대해서도 퍽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퍽 다른 종교심이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배경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강

을 마무리 하는 의미에서 계속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많이

잃어버린 게 있어요. 이 책을 통해서도 저희가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인데,

 

고대 근동 사람들이 자연, 피조물을 보면서 느꼈던 마음. 자연을 정말 우리 친구로 생각

하고 피조물로 생각해서 거기에서 의미를 느끼고 자연을 그냥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연과 함께 사는 환경으로 생각했던, 참된 환경으로 생각했던 창조신학적인

마음을 우리 현대인이 좀 가져야 된다는 것이죠.

 

특히 종교인이라면은 그런 마음을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에서 자본주의나 실용주의의 눈으로만 강을 바라본다면 강은 그냥 돈을 버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삼라만상 모두가,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가, 그리고 심지어 인간들까지

도 돈벌이의 수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시각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뒤집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만한

텍스트가 없거든요. 그리고 성경이 쓰였던 시대 모든 사람들은 그런 착한 마음을 갖고 있

었습니다.

 

종교인의 마음으로 보자면 강은 태초의 강에서 나오는 생명수고,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고, 때로는 우리를 치유하는 존재고, 때로는 우리에게 정의를 알려주는

존재고, 우리와 늘 함께 살아가는 그런 존재입니다.

 

* 종교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강은 태초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요,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이며 우리를 치유하고, 때로는 심판하는 존재로 흐르는 강물은

  정의의 상징이다

 

우리가 강을 영성적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종교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고대인들이 강에

대해서 느꼈던 두려움, 강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 하는 그런 두려운 마음도 우리가 사실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강을 재화의 시각으로만 보면 안 되겠습니다. 강을 경외할 필요는

없지만 고대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느끼면서 우리가 미래를 모색해 나간다면은 우리한테

더 큰 미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제가 강과 이슬에 대해서 말씀드렸고요. 다음 시간에는 피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조금 재미있는 강의가 될 건 데요. 구약성경을 보는 관점 중에서 몇 가지를 찝어서

제가 말씀드릴 거예요. 그 몇 가지 관점을 보시면, 아, 요런 것을 우리가 좀 알아야 되겠

구나. 약간 부록, 번외편, 쉽게 말하면 깍두기를 한 편 하고 그 다음에 피의 신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피의 신은 중요한 신이예요. 지금도 영향을 많이 끼치는 신이고 벌써 강렬

하죠? 빨간색깔처럼.

 

다음 두 시간도 여러분 기대해 주시기 바라고 이 시간 강의 잘 들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제17강 구약성경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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