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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17강 <특집1> 구약성경의 이모저모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7 조회수1,157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옮겨온 곳: 성서100주간 http://cafe.daum.net/bible100weeks

* 주원준 박사님 계신 곳: http://www.biblicum.or.kr/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 17강 <특집 1> 구약성경의 이모저모

 

강의에 들어가며...

 

 이번 17강에서는 본 강의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 <구약성경의 이모저모>라는 주제로

조금 쉽게, 구약성경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모르셨을 것 같은 내용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특히 이단을 한 명 말씀드리려고 해요. 때로 우리는 고대의 이단에서 많은

교훈을 배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란, 때로 비슷한 오류가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가 이미 인류가 겪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과거에 빠졌던 함정에 또 빠지는 것이죠.

 

성경 필사 - 몸으로 익히는 성경 

 유다인들은 지금도 3천년전, 4천년전의 말로 성경을 외운다. 집에서부터 성경을 외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배우는 것이다. 수천년 전 조상의 이야기를 외우는 것이다. 그런

힘이 유다인의 힘의 원천이다. 몸과 머리로 외워버린 것은 오래 간다. 나라를 잃고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누구도 지울 수 없다. 그 민족, 그 사람을 깡그리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는, 그래서 모국어가 중요하다. 모국어로 외워버리면, 모국어도 잊지 않고, 모국어로 외운

그 내용도 잊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성경필사는 참 좋은 방법이다.

 

우선, 몸으로 성경을 경험한다는 면에서 좋다. 성경 본문을 베끼며, 가장 완벽한 책을

자 한 자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성경필사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한 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손으로 쓴 정성스런 성경이. 그래서 그냥 ‘성경 필사’

라고 하지 말고, 정성들여 사본을 하나 만든다고 하면 어떨까?

 

마르키온주의 
 

저는 여러분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 고대의 이단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르키온은 약 기원후 85년에 소아시아의 시노페(Sinope)

에서 태어나서 약 160년에 죽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다인의 성경’ 연구로 이름을 얻어, 그에게 구약성경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습니다. 곧, 처음에 그는 그저 열심하고 명성 있는 구약성경 학자였을 뿐입니

다. 그 당시는 ‘구약성경’을 ‘유다인의 성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은 무엇이

라고 불렀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성경’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는 구약 46권, 신약 27권, 총 73권으로 된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렇게 성경 목록이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외경으로 분류한 책들도 성경처럼 읽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정경의 목록’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책이 성경이고 어느 책이 성경이

아닌지 확실히 기준을 갖고 갈라서 목록을 만들어야 신자들이 헷갈리지 않겠다 하고 생각

한 것이죠.

 

이 생각을 한 것은 그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단일지라도 ‘정경’(正經canon)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공로는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책이 정경이 되기 위해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을 경전의 ‘자기 완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그 책의 본문 자체로 완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준에 따라 자의적으로 책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겨

났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성경’, 곧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 구약 성경의 ‘야훼 하느님’과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곧 ‘예수님의 하느님’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두 신이 다른 신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구약의 하느님은 전쟁의 신, 율법의 신, 유다인의 신이요, 예수님의

하느님은 평화의 신, 말씀의 신, 만인의 보편적인 신이라고 신약과 구약을 ‘대립시켜’

보았습니다.

 

이 점이야 말로 명백한 오류요,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점입니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둘이 하나요, 서로 완벽히 조화되는 관계입니다.

 

당시 마르키온은 왜 이렇게 대립되어 보이는가 하는 문제를 고심하다가, 결국 문제는

‘유다인의 성경’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성경’, 곧 구약성경을

뺀, 무척 얄팍한 성경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마르키온 성경’이라고 합니다. 곧, 그의

두 번째 오류는 그가 자의적으로 성경의 책 가운데 일부를 빼서 자신만의 성경 목록을

만든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렇게 성경의 목록을 편집하는 태도는 분명한

잘못입니다. 결국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갈 당시, 144개나 되는 공동체가 그의

분파에 참여할 정도로 대규모의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분열되어 새로운

종교를 세운 것도 그의 큰 오류입니다.

 

그의 교회는 이집트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3세기부터

잦아들기 시작하여 6세기에는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있어, ‘마르키온 주의’(Marcionism)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마르키온 주의란,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대립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오류는

훗날 다양한 이단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키온주의는 현대에도 은연중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구약학자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신부님의 책에서는

오늘날의 ‘잠재적 마르키온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현대인도 자칫 잘못

하면 마르키온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쳉어 신부님은 ‘잠재적 마르키온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대략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첫째는 ‘대체 모델’입니다. 한마디로 신약이 구약을 대체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체된 것은 대개 쓸모없게 마련이죠. 자동차가 나와서 마차를 대체했습니다.

 

이제 마차는 느리고 짐도 많이 싣지 못하는 것 이므로 쓰지 않게 되죠. 그러므로 심한

경우, 신약만 읽으면 되고 구약은 나중에 읽어도 돼, 또는 안읽어도 상관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는 동료 신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농담조라도 이런 말은 피해야 하겠지요.

 

둘째는 ‘상대화 모델’입니다. 구약성경을 상대화시키는 것이죠. 곧 신약성경만이 절대적

이고 구약성경은 상대적인 것, 곧 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

은 신약성경을 준비하는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책이고, 신약성

경의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약속을 실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덜 중요한 책은 절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백성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주님의 해방이 실현된 사건으로서, 두고두고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주신 분임을 잊지 말라’고

거듭해서 권고합니다. 예언자들은 ‘죄를 뉘우치고 참된 해방의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라’고

외칩니다. 유배중의 백성은 해방의 하느님께서 한 번 더 우리를 이끌어 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해방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주님의 이집트 해방 사건이 덜 중요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신명기의 권고, 곧 해방의 하느님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섬겨라하는

말씀이 상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오셨더라도,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 우리 인간에게

해 주신 일은 절대 상대화되거나 덜 중요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별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이런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시작

된 하느님의 구세사는 마치 씨앗이 발아하여 점점 자라나듯 점차 성장하여 결국 신약성경

의 예수님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일부 내용만 신약성경으로

흡수되고, 일부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약속은 얼핏보면 비체계적이고 난해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경에

흡수된 내용만 '선별해서’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오류입니다. 신약성경에 반영되지 않은 구약성경의 내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종합하신 것이 불완전해지지 않습니까?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신약성경에 포함되지 못하고 누락된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설혹 인간적인 눈으로 그렇게 보이는 내용조차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

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임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어느 구절이라도 깊이 성찰하고

깨닫는 자에게는 참 구원의 빛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얼핏 신약성경과 무관해 보인다고 해서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성찰해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제17강 <특집 1> 구약성경의 이모저모

 

안녕하세요? 한님성서 연구소 주원준 토마스아퀴나스라고 합니다.

성호경 같이 바치고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집에서 시청하시는 여러분,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17회 강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네 가지 주제를 다뤘는데요. 오늘은 약간 별책

부록 같은, 약간 번외편으로 잠시 쉬어가는 그런 의미에서 본 강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내용일 수도 있고, 혹은 새롭게

듣는 내용일 수도 있는데요. 한번 들어보시고 아, 구약성경에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걸 같이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아마 지금까지 강의한 여러 강의 중에서

가장 쉬운 강의가 될 것입니다.

 

특히 오늘 저는 강의 중간 이후에 '이단'이라는 아주 고대의 이단을 한 명을 소개해 드리

려고 하는데요. 왜 하필이면 이단을 소개하냐 하면은 우리가 사실은 고대의 이단으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실은 한 실수를 또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한번 저지른 실수를 후대에 거의 똑같이 하기 때문에 옛날에 "아, 이런

실수를 했었구나", "이런 오류에 빠졌었구나" 하는 ?걸 우리가 배워 놓으면 다시는 그런

실수에 다시는 안 걸려 들 수가 있겠죠. 사실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어리석은 인간은 과거에 빠졌던 함정에 또 한번 더 빠지곤 합니다.

 

이거는 전체적인 인간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내가 한 실수를 또 하고 했던 적이 저도

개인적으로 참 많이 있거든요. 그래서 과거에 우리가 "아, 이런 오류에 참 빠지기 쉬운거

구나" 하는 걸 좀 알아 놓으면 지금 도움이 되겠지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계속 해가지고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게 왜 신자들의

필수 교양이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선교 3백년

대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요. 지금은 이제 우리가 교회를 그리고 성경을 하나만 깊이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또 우리가 선교 3백년대에 들어가고 신자수가 5백만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는 타종교, 타교리, 사회와 문화에 대해 가지고 폭넓게 교양을 하는 것도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양은 어찌보면 넓을수록 좋은 면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성경과 교리 그 자체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그와 다른 옆에 주변

학문과 주변 지식도 넓혀 간다면 우리 교회는 참 도움이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고대

근동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 가톨릭 신자의 교양으로 자리 잡는 그날

을 제가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가지 강의를 드렸었고, 우리는 하늘, 달, 바람, 강 등 네 가지 주제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제가 여태까지는 주변 종교에 대해 가지고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구약성경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처음에 시작하는 의미에서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여러분한데 드리고 싶은데요.

 

요새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화가 중요하다. 스토리가 중요하다.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어 가지고 뭐 싸이가 미국 가가 지고 엄청난 히트하고 돈을 벌었고, 우리나가

한류가 또 드라마나 이런 게 동남아나 세계에서 많이 팔리고, 또 요즘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한국 감독도 있고 배우도 있고 그래서 참 옛날하고 많이 다른 거 같애요.

 

옛날에는 우리가 일방적으로 수입만 했는데 이제는 서로 어느정도는 교류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떤 얘기가 꼭 옆에, 신문에 보면 구석에 나오냐 하면

그게 자동차 몇 대 판 거만큼 돈을 벌었다더라. 뭐 이런 얘기들이 꼭 나와요.

 

그래서 사실 문화가 그렇게만 인식이 되면 안 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라도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거 같애요. 그래서 뭔가 창의적인 스토리, 새로운 노래,

새로운 어떤 유행, 이런 거 하나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큰 돈을 벌 수도

있고, 이게 어떤 면에서는 나라를 위해서 또 경제를 위해서 또 한국의 문화를 위해서 더

나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많이 있는 거 같애요.

 

그런데 저는 과연 우리가 진정한 창의성을 만들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저는 오히려 이런 시점에서 전통이나 고전이 더 중요하다. 이런 얘기를 말씀드리고

싶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어쩌면 고전 중에서 으뜸인 성경일 것이다. 이런

얘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 진정한 창의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과 고전이 중요한데 그중의 으뜸은

  성경이다

 

이런 창의적인 이야기, 뭔가 새로운 이야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는 이야기를 만들려

면 아, 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을 내가 해야 된다. 뭔가 아주 이상하고 엽기적

인 스토리를 만들어야 된다. 이렇게 나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전을 찾아서 읽는 게 더

좋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다 잘 아실 것 같은데요.

 

 

 

* 영화 ET(The Extra- Terrestrial)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82년 제작한 공상 과학

  영화로 개봉 당시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먼 우주에서 우주선을 타고

  날아 온 외계인(ET)과 미국 소년, 소녀들과의 우정 어린 교류를 그린 영화로 한국에

  서는 1984년 개봉 상영되어 청소년 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영화 보신 적 있죠? ET라고 보신 적 있어요. 이게 한 30년은 된 이야기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그런데도 요즘도 사람들이 이걸 아주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문화적 힘은 대단한 거 같기도 해요. 전세계를 강타한 영화였고, 그 당시에 이렇게 생긴

 

 

 

아주 이상한 외계인 하나. 저도 어렸을 때 이런 장난감이 동네에 굉장히 많았어요.

지금은 ET가 아니라 뽈로로죠. 이런 캐릭터 상품이 그때 그때마다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ET라는 영화가 제가 어렸을 때 한참 유행할 때 저도 봤습니다. 어떤 신부님도

같이 보셨어요. 그런데 그 신부님이 저한테 뭘 얘기하냐 하면, "아, 영화 참 재미있다.

감동적으로 잘 봤고." 그러고 나서 한 마디 하시는게. 야, 근데,

 

여러분들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이 ET라는 영화가 신약 성경하고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신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지금하는 제 얘기가,

"어? 이게 뭔 소리냐? 이 강사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ET스토리 여러분 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외계에서 외계인 한 명이 지구에

불시착 합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계세요. 그런데 이분이 지상에 떨어졌는데 이게 정말

좋고, 착한 외계인이고, 그런 거를 아주 소수의 사람만 알아요. 착한 사람들만 알아요.

리고 그 당시에 권력을 가졌던 미국 정부 이런 사람들은 이 외계인이 갖고 온 뭐를 이용해

볼려고 좀 이렇게 쫓아다니고, 탄압하고 막 이거지요?

 

그래서 외계인은, ET, 착한 외계인은 지구상에 와서 뜻하지 않은 곤경을 겪어요. 그런데

이 외계인이 착한 사람이고, 이 사람을 우리가 탄압할 필요가 전혀 없이 이분과 참된

정을 쌓아야 된다라는 걸 아는 사람은 지구에 한 몇명 밖에 모르고, 마음이 순수한 아이

들만 알고,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 그 미국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온갖 걸 동원해 가지고

막 군대도 동원하고, 나중에 별거 별것 다 나오잖아요? 그래서 ET를 탄압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결국 그 오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ET가 죽죠. 그런데 다시 부활

하죠. 부활할 때도 이 부활의 의미를 고 어린아이들만 알고 나머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됐어요? ET가 하늘로 승천했잔하요. 결국 우주선 타고 날아갔어요.

여러분 머리 속에 신양성서 얘기하고 좀 비슷하다는 걸 느끼시죠?

 

아, 이게 정말 그렇구나. 이 얘기가 정말 저도 그 신부님이 그걸 보시고, 그 신부님은 딱

보고 아셨어요. 그걸. 그 신부님 얘기 듣고 정말 신약성경과 비슷하네. 그런데 그 신부님

하고 그런 얘기를 좀 하고, 다른 교수님들하고 그런 얘기를 좀 하다가 보니까 아, ET가

왜  세계적으로 히트를 했는지 알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약성서 이야기를 다 알고 있기 때문에 ET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낯설지

가 않은 거예요. 그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따라가서 그 안에서 뭔가

우리가 배울점이 있고, 또 공감하는 게 있었던 거예요.

 

아, 정말 이게 구조가 비슷하니까 재미있고, 의미있고, 익숙한 이야기, 그 스토리 구조에

그대로 ET 이야기를 얹혀 놓으니까 나도 모르게 이것을 처음 봤을 때도 이게 뭔가 익숙한

거 같고, 이게 낯설지가 않고, 아, 그렇구나! 어쩌면 우리는 이 ET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

가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성당에서 많이 듣고 또 주일 학교에서도 배우고 했는데 영화 볼

때는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신부님은 성경을 직접 읽으시는 분이 되어서 그런지 이거를 한번 보고 아셨고,

그렇게 분석을 하실 수 있는 것이죠. 인문학이나, 예술이나, 아니면 우리가 예술도 어떤

고급 예술도 있지만 대중 예술도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예술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구조

기본 구조가 중요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토리의 유사성이 우리가

쉽게 친숙감을 느끼데 되는데 그런 것은 아직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ET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싶다고 그러면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고전, 성경을 읽고 그

이야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게 중요합니다. 아마 ET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일부

러 신양성경 이야기와 비슷하게 흘러갔을 수도 있죠. 우리가 이야기를 만든 사람하고

이야기를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렇게 공감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그런 대학생이

여러분들한테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자녀가 그런 걸 하고 싶다? 그러면 영화를 많이

봐라. 요새 나오는 영화를 많이 봐라.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좀 두꺼운

고전을 혼자 한번 읽어 봐라. 그래서 그 고전의 이야기에 내가 스스로 너호 모르게 자연

스럽게 익숙해지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거지로다가 읽지도 않은 고전을 요점 정리만 해와가지고, 뭐 이야

기는 이러니까, 이렇게 억지로 얹혀 놓으면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 이야기, 구약성경의

많은 이야기 아니면 뭐 토스트에프스키도 좋고, 톨스토이도 좋고, 헤밍웨이도 좋고, 이런

이야기의 고전의 요점 정리만 딱 따와서 그거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자 하는 그런 식으로

는 되지는 않겠지요? 그런 식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없고, 무릇 어렸을 때부터 자연

스럽게 젖어들어 가는 게 가장 좋아요.

 

그래서 수준 높은 고전은 인기 작가들이나 훌륭한 작가들의 보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소설이나, 시나, 문학이나 이런 유명한 감독 이야기를 좋아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

는데요.  그 감독들 이야기를 듣잖아요? 그러면 감독들이 나이가 많아서, 대가가 되서

60, 70 됐어도 가끔 어떤 말씀을 하시냐 하면은, 아, 요즘 불경이 다시 읽힌다. 요즘 논어

를 다시 보고 이다. 요즘 성경을 다시 보고 있다. 이런 말씀들을 하시거든요.

 

또는 아, 요즘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읽으면 아, 좀 새롭게 다가오는 거 같애. 그 연세에도

다시 고전을 읽고 거기서 다시 상상력을 발휘해서 또 다른 걸 알거든요.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아마 그 대가들이 그 나이에도 뭔가 새롭게 만들고 싶으면은 결국은 우리가 찾아 보

아야 하는 것은 고전이다. 인류의 검증된 문화적인 자산이다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고전일수록 왜 자꾸 보냐 하면,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분도

문학가인데 "왜 성경이 계속 읽히는지 아십니까? 왜 논어가, 왜 불경이 이런 훌륭한

문학 작품, 훌륭한 인류의 고전이 읽히느냐 하면요?" 거기에는 행간이 굉장히 많아요.

 

성경 이야기를 보면, 중간에 이야기가 아주 치밀하게 현대 소설 같이 흘러가지 않고

이렇게 비어 있는듯한 곳이 많거든요. 그 행간에서 우리가 큰 상상력을 발휘할 수가

어요.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제가 여러분한테 성서 이야기를 여기서 들려드리고

있지만 강사에 따라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또 말씀해 주시는 신부님, 신학자들에

따라서 똑같은 얘기인데 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또 제가 읽을 때와 여러분이 읽을 때와 또 다른 분이 읽을 때 그 성경에서 또 다른 이야기

가 나오는 건 거기 엄청난 행간이 숨어 있고, 그 행간에서 우리가 생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그래요. 논어도 마찬가지예요. 요즘  논문을 보면은, 학술 논문은 행간이 없어요.

빽빽해 가지고 빈틈이 없거든요. 요즘 이야기들은 많이 그런데 고전은 안 그래요.

 

성경은 어쩌면 중요한 이야기는 다 써 놓고 또 우리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또

굉장히 넓은 행간을 만들어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들한테 전해 준 민족, 성경 시대를 몸소 살았고, 성경을 우리에게

전해 준 민족이 누구예요? 유다인들이죠? 유다인들 보면 좀 대단할 때가 있어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다인들 보면 돈도 잘 벌고, 머리도 똑똑하고, 노벨상도 많이

타고, 아주 조그만 소수의 사람들이. 물론 고생도 굉장히 많이 했지만, 참 대단한

민족이다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대단할까? 그래서 이제 책방에 가보면 [유다인의 교육법]

이런 것도 많고요. 어떻게 내 아이를 그렇게 키워보자. 이래 가지고 이런 책들도 많이 사

시는데 그런 책 보면 뭐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책들 중에 한, 반 이상은 제가

보기에 헛다리를 짚고 있는 거 같애요.

 

제가 생각 하기에 유다인들의 가장 큰 교육법의 장점은 뭐냐 하면,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외우게 하는 거예요.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외우고 자랐고, 이 성경

을 외우는 것이 참 대단해요. 왜냐하면 그들이 성경을 히브리어로 외우잖아요. 그 히브리

어는 3천 년 전, 4천 년 전의 언어를 지금도 어린이들이 그대로 외우는 거예요. 이거는 참

대단한 거예요.

 

* 유다인들의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외우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백 년 전의 독립 신문도 딱 펴 놓고 읽으면 읽기가 어려워요. 여러분 학교에

서 그러셨겠지만 삼일 독립 선언문, 오등은자애아, 이렇게 흘러가면,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며 해석을 해야 되고, 그거 다 외우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3천 년 전, 4천

년 전 그 성경을 그때 발음했던 그 언어로 외워요. 그러면서 이 인류의 보고, 성경의 이야

기를 그대로 몸으로 습득을 하거든요.

 

저는 경영학과를 다니다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거든요. 구약성경을 공부하기로 하고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서 이걸 내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다시 한번 보고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다시 한번 보고 이랬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원어로, 히브리어로 그거를

외운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고전이 들아가 있잖아요.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까 그 영화 ET 영화를 만든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도 아마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자기 몸에 들어가 있을지 모르죠. 유다인들이 공부를 잘 하고,

잘 벌고 하는 것이 그들이 어떤 상술을 쓴다거나, 그들이 어떤 식으로 외운다다더라.

이런 걸 아는 거 보다. 그들이 집에서 엄마 아빠와 어렸을 때부터 가정 교육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집에서 엄마, 아빠한테서 배우면 외워버리게 되요. 아이들이. 저는 지금 조그만

애기가 있는데 잼잼 이런 거는 다 위우죠. 나중에 저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이야기 몇 구절은 그대로 외워버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외우는 텍스트 그

내용이 성경이예요. 그냥. 그것도 수천 년 전에 말했던 그 언어 그대로 외워 버리는 거예요.

 

그럼 그들한테 그 수천 년 전의 보고, 축척된 전승이 그대로 들어가겠죠? 아기들한테.

거기에 힘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슬람도 마찬가지예요. 전 세계 10억이

넘는 이슬람 사람들도 지금 쿠란을 1500년, 1600년 전 아랍어로 그대로 외우게 만들거

든요. 대단한 거죠. 이 사람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슬람 사람을 만난다. 유대인들을 만난다 그러면, "아, 내가 당신의

훌륭한 뭐 쿠란이 됐든, 성경이 됐든, 내가 믿든, 믿지 않든, 내가 훌륭한 책이라는 걸 알

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한 구절을 내가 직접 읽어 봤소."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이 이렇게 얘기하는 학생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 다 요약본으로 봤기 때문에. 직접 한 구절이라도 내가 직접 읽어보고 그 본문

그대로 내가 거기서 뭔가 느꼈다. 이 읽을 때마다 행간이 많기 때문에 이 느끼는 게 다르

거든요.

 

"내가 이거는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때 이런 걸 느꼈다"라고 얘기 하면

은, 그 사람들은 굉장히 반가워할 거예요. "어, 너 이런 것도 읽어 봤니?" 마치 한국에

장사하러 오는 미국 사람이 "야, 내가 니네 논어도 한 구절 읽어 봤고, 춘향전도 한 구절

봤는데,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아, 참 재미있더라. 이 대목에서 참 통쾌하더라. 암행어사

출두하는." 이러면 "어우, 대단하다!"고 보일 거 아니예요?

 

세계적인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고, 높은 자리에서 한국이 앞으로 더 중요한 사람이

될려면, 아이들한테 고전을 이렇게 한 부분이라도 직접 읽어보게 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대학에서 강의할 때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해서 발표하라고 그러면 학생들이

어디서 요약본을 읽고 오는 거 같애요.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요 대목을 네가 직접

읽고, 네가 느끼는 걸 그대로 얘기해라." 이렇게 하는 게 더 낫거든요. 직접 읽어보는 게.

 

그런데 이 사람들도, 이슬람도 그렇고, 유다인들도 그렇고 외워요. 어떤 조금이라도 처음

부터 끝까지 외우게 만들거든요. 외울 때 보면요. 외우는 방식이 우리나라 옛날에 서당에

서 외우는 거 하고 되게 비슷해요. 어떻게 외우냐 하면, 우리는 이제 외운다 그러면, 영어

단어 외운다 그러면, 막 쓰면서 외우는 사람이 있고, 들고 다니면서 외우는 사람이 있고,

이러면서 외우잖아요.

 

그런데 이슬람이나 우리나라 서당에서도 그렇고 지금 조그마한 아기들한테 성경 구절을

놓고 몸을 흔들면서 박자에 맞춰서 읽으라고 그래요. 성경을. 그러면은 마치 우리 식으로

하면 마치 연도 하듯이 박자에 맞춰서 몸을 흔들흔들 하면서 외우면 어린애들은 굳이 외

우라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열 번 박자를 맞춰서 하면 어린애들은 외워요.

 

제 조카가 6살 짜리가 하나 있는데 요즘은 또 한문이 유행이라고, 중국이 컸다고 천자문

을 외우게 하거든요. 그 아이는 천자문을 요새 또 나온 가락이 있어요. 그 가락에 맞추어

얘가 외우더라고요. 특별히 외우라고 하지 않는데 어디서 중간에 막히면 처음부터 다시

노래를 해 보면 생각이 나잖아요.

 

유다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보면은 조그만 애들이 이러헤 조그만 거 쓰고 성경을 이렇게

놓고 흔들흔들 어린이들이 읽어요. 그래서 지금 유다교 랍비들도 통곡의 문에 가가지고

랍비들이 읽는 거 보세요. 이렇게 조그만 책을 들고 몸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이슬람도 그래요. 이슬람은 우선 쿠란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쿠란을 놓는 대가 따로

있어요. 그 대에는 쿠란만 놔야 되고 다른 거 놓으면 안 되요. 엄청 중요한 대기 때문에

거기다 놓고, 여기서부터 요기까지 몸을 흔들면서 외워요.

 

전통적인 공부 방법은 이렇게 몸으로 외우는 거였어요. 입으로 소리내어 외우고, 그 다음

에 귀로 듣고, 몸을 흔들흔들 하면서 리듬을 타는 거였어요. 그런데 요즘 외우듯이, 요즘

책 보는 게 다 이렇지요? 내가 조용하게 보고, 내가 그거를 몇 번 읽고 외워진다. 그런 거

잘 안 외워지죠?

 

왜냐하면 암기는 몸으로 하는 거예요. 몸으로 리듬을 타서 외우는 게 가장 좋아요.

자기가 크게 외치면 자기의 소리를 자기가 듣고, 자기가 어떤 리듬을 타면 그 리듬을

나의 장기들이, 나의 뼈들, 나의 신경들이 그걸 알아요. 나의 뇌도 알고요. 그러면서

외워지는 것이죠.

 

우리 교회도 사실은 예전부터 그렇게 했지요. 여러분들 그레고리오 성가나 미사할 때

보면은 신부님들이 노래로 하실 때 있지요. 그런 구절은 신부님들이 하시는 말씀이고,

여러분들은 한번도 얘기 안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거예요. 레고리 성가가

그런 데서 태어난 거잖아요.

 

원래는 성가와 독서와 그리 큰 구별이 없었어요. 어느 한쪽이 발달을 해서 노래가 되고,

어느 한쪽은 그냥 외우는 게 되어 버렸죠. 원래는 그렇게 성조에 따라 가지고 중얼 중얼

얼 외우는 것이었죠.

 

중국 말은 되게 오래 된 말이죠. 성조가 그대로 살아 있죠? 예전 그리스 말도 그래요.

그리스 말 보면 ?성조 표시가 있어요. 올리고 내리라는 표시가 있거든요. 히브리어

성서도 고 악센트 표시와 노래 표시가 있어요. 여기서는 올리고 여기서는내리고.

마치 옛날에 우리 연도 바칠 때 하는 거 같죠?

 

여러분, 몸으로 하는 게 왜 오래가냐 하면요? 여러분, 수영 배우셨잖아요? 수영을 배운

사람은 3년, 4년 동안 수영 안 하고 다시 물에 들어가도 수영을 할 줄 알아요. 자전거를

배워보신 분들도 알겠지만 자전거 타다가 자전거 한 몇 년 안 타잖아요. 그래도 자전거

를 딱 잡으면 탈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몸으로 아니까.

 

그런데 내가 10분 전에 읽은 신문은 기억을 못해요. 아, 이게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하는 건지, 국무총리가 말했다고 하는 건지, 이게 서울인지, 부산인지, 어제 일인지, 그제

일인지 물어보면 몰라요. 그냥 뭐 그런 일이 있었나보다 지나가는데 3년 전, 4년 전에 자

전거 배운 건 다시 자전거를 타보면 타요. 그냥. 몇 년 만에 하는 데도.

 

공부를 할 때도 이렇게 몸으로 하라고. 그래서 유다인들 어린애들한테 그냥 침착하게

앉아서 읽으면 선생님들이 뒤에서 이렇게 리듬을 만들어 줘요. 같이 중얼중얼. 옛날에

우리나라 서당에서도 그렇게 했죠. 모든 학동들이 같이 리듬을 타면서 하는 것이죠. 그

렇게 외우면 얼마나 오래 가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읽고도 성경을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

으로 갔어요. 앗시리아로 유배를 갔어요. 유배갈 때 뭘 가지고 갔어요? 금을 가지고 가지

도 않았고, 그걸 가지고 갈 수도 없었어요. 나라가 망했으니까. 누가 몰래 챙겨 갔을 수는

있지만 집을 가져갈 수도 없었고, 요즘 같으면 카드를 가져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냥 나라 잃은 백성이 얼마나 비참하게 갔겠어요. 갈 때 그 사람들은 성경을 외워갔어요.

성경을 몇 권 들고 갔을 수도 있겠죠. 유배살이 내내 성경을 외웠어요.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올 때 다시 성경을 외워 갔고 왔어요. 모국어로 외운 성경은 그래서 그 사람들의 정신

문화가 그대로, 그 믿음이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었고, 나라 망하고 2천 년을 떠돌고 막

홀로코스 당하고, 온갖 박해를 다 당하면서도 어렸을 때 암기 해 준 성경은 그대로 남아서

살 수가 있었어요.

 

*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도 성경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을 외워서

  기억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몸으로, 머리로 외운 것은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그 민족을 전체 없애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아요.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런 면에서 모국어는 굉장히

중요해요. 그들이 옛날 자기네 나라 말로 외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언어도 살고,

믿음도 살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한글도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한

언어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요즘 한국 가톨릭의 한 구석에서 성경 필사를 하잖아요. 그거 굉장히

좋다고 생각해요. 성경을 우리가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자 한자 쓰는 것도 몸으로

성경을 익히는 것 중에 하나예요.

 

저는 예전에 히브리어 배울 때 히브리어로 성경 필사 몇 구절 해 본 적이 있는데 ?제가

쓰면서 꼭 틀리는 구절이 있어요. 그런데 몇 번 틀리다 보면 안 틀리게 되거든요. 그러

면서 외워지게 되고 내가 분명히 실수하는 구절 이런 게 나오게 되죠. 몸으로 성경을

경험하는 것 중에 하나예요. 성경 필사는.

 

* '성경필사'는 몸으로 성경을 익히는 참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저는 매우 좋다고 생각을 하고 또한 고대 근동학 면에서, 공부하는 면에서 보자면

성경을 베끼는 일은 원래, 성경을 우리한테 남겨 준 고대 근동의 서기관들이 하는 일이었

어요. 그들이 하는 일이 뭐였냐 하면, 경전을 베끼는 거였어요. 경전을 하나하나 베끼면서

그들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 준 훌륭한 책들을 남겨 주실 수 있는 것이죠.

 

굉장히 좋은 글을 베끼잖아요? 그러면 그 글에 담겨 있는 향기, 의미, 문체, 그리고 그

글을 적으셨던 분들의 인격 그런 것들을 자기가 그대로 담는 게 되요. 여러분들의 자녀들

또 여러분 스스로한테 신앙도 높이고, 인격도 높이고, 문화적인 소양도 높이고 다 그러고

싶잖아요. 우리들은.

 

그런데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하면, 그렇게 성경을 하나하나 쓰는 거예요.

쓰면서 "아, 이분들은 이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왜 이런 말을 썼을까?"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그분들을 닮아갈 수 있어요.

 

성경 본문 필사를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어떤 신부님과 그런 얘기를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이 저한테 해 준 답으로서 일단 오늘 강의 1부를 마무리 하고 싶

어요. 오늘 강의 1부는 성경 필사에서 가장 좋은 점은 이 세상에서 성경이 한 부 더 늘어

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성경이 한 부 더 늘어나는 것을 내 손으로 한다는 거예요. 내 몸

으로. 무너가 보람있는 일을 한 거 같지요? 그게 가장 좋은 점이죠.

 

* '성경필사'의 가장 좋은 점은 '성경이 한 부 늘어난다'는 것이고 그 작업을 바로

  내 손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냥 성경필사라고 하지 말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대로 구약성경을 필사하는

의미가 얼마나 큰 의미이고, 여러분 신앙뿐 아니라 인격과 모든 면에서 가정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정성들여서 뭐 처음에는 꼭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어요.

너무 길기 때문에. 한 단락, 한 장이라도 맛을 들여가면은 좋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

합니다. 어때요? 성경필사에 대해서 새롭게 다가오세요?

 

# 마르키온 주의

 

자, 그러면 오늘 2부 강의의 주제 '마르키온'에 대해서 말씀드릴께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다가 제가 이 '이단'을 찾았는데요.

제가 고대 교회의 이단을 소개하는 이유를 먼저 여러분들한테 의미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애요. 제가 이 '이단'을 결코 좋아해서 그러는 거는 아니예요. ^^ 이 사람이 옛날에 제기

했던 문제가 바로 제가 인터넷이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토론하고 있는 경우,

 

"아, 이 문제가 바로 그 문제다" 하는 거라고 제가 좀 느끼고 있어서 그래요. 똑같은 문제는

아닌데 깊게 연결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인테넷에 보면은 "아,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어떻고,

구약성경은 어떻고, 여러 가지 좀 말도 안 되는 - 제 입장에서 보면- 그런 얘기들이 돌아다

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마르키온을 보면 그게 '거의 같은 오류다' 하는 걸 여러분들

이 알 수 있고,

 

이 마르키온이 왜 고대 교회에서 이단이 되었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그런데에 여러분들이 대처할 수 있을 거 같애요. 이를테면

인터넷에서 이런 말들이 많이 돌아다니죠. 구약의 하느님은 전쟁의 신이고, 폭력의 신이다.

이렇게 얘기 많이 하죠? 그래서 한쪽 편만 드는 뭐 좀 옹졸하신 분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있고,

 

그리고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유다 민족의 하느님일 뿐이다. 우리와는 상관 없는 분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또 얘기 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구약성경은 그냥 유대인의 종교의 한 경전으로 끝났을 거다.

유다인의 민족적 지평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하거든요.

 

"하느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당신의 구세사를 온전하게 시작하셨다."라는 걸 부정하는

것이죠. 이런 주장을 역사상 가장 먼저 펼치다가 교회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사람, 그 사

람이 여러분 앞에 보시면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이예요.

 

 

 

그리스 말로 맨 위에 쓴 거는 '마르키온'이라고 그랬고, 영어로 마르키온을 c로 적기 때문

에 '마르치온'이라고도 많이 발음하는데 이 사람은 기원후 85년, 그러니까 0년에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33년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그 다음에 후대에 사도 바오로라든지 이런

분들이 서간도 쓰고, 복음서도 완성이 되고 하는 고 시대죠.

 

85년이면 요한 복음서가 아마 AD 100년 쯤 나왔다고 사람들이 하니까, 요한 복음서는 아

직 지금과 같은 형태로 아직 완성이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사황이죠. 굉장히 옛날 분이고

85년에 태어나서 160년에 죽었으니까 75세 정도를 사셨으니까 그 당시로는 굉장히 장수

하신 분이예요.

 

일찌기 이분이 얼마나 유명했냐 하면, 이분의 고향은 시노페예요. 그래서 Marcion of

Sinope, 우리나라 말로는 시노페 출신의 마르키온 또는 시노페 출신의 마르치온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분이 처음에 굉장히 유명한 성경 학자였는데 어떤 걸로 명성을 얻었느냐

하면 '유다인의 성경 연구'로 명성을 얻었어요.

 

곧 처음에 그는 열심하고 명성이 있는 구약성경 학자였어요. 그 당시는 구약성경, 신약성

경이라는 말이 정립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구약성경은 유다인의 성경이니까 유다인의 성

경, 그런데 신약성경은 뭐로 불렀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성경으로 불렀어요.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은 성경 목록이 확정 돼 있지요? 구약 46권, 신약 27권 그래서 73권

의 성경이 있는데 초대 교회에는 이 성경 목록이 다 확정이 안 됐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외경으로 치는 거 혹은 지금 우리가 알 수가 없는 어떤 책들도 거기서 거룩한 책이다 그래

가지고 다 성당에서 일고 같이 토론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마르키온이 아, 이제 - 딱 보면은 외경으로 된 책들은 외경으로 된 이유가 있거든요.

보면 이게 경전이 될 수 없는 책들이 있어요. 물론 명백하지 않고 좀 애매한 책들도 있는데

어쨌든 마르키온은 이렇게 어느 책이 경전이고, 어느 책이 경전이 아니다를 우리가 얘기해

야 된다. 정해 놔야 된다. 그래서 정경의 목록을 만들어야 된다고 얘기 했어요. 이 생각을

한 것, 정경의 목록과 성경과 성경이 아닌 책을 가르는 것.

 

우리가 보면 4복음서가 있죠? 4복음서는 성경. 그런데 외경 복음서도 있어요. 다른 복음서

는 성경이 아니고, 행전도 사도행전이 있지만 베드로 행전 뭐 이런 책들도 있어요. 이거는

성경이 아니고. 그래서 "요거는 성경이고, 요고는 성경이 아니고"라는 걸 정해야 된다.

아무리 이단이지만 그 생각을 처음한 공로는 있어요.

 

* 마르키온은 비록 이단이었지만 '정경'(政經 canon)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공로는

  인정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조금 이상해지는 게 정경이 되는 책은 어떤 책이고, 외경이 되는 책은

어떤 책이냐? 어떤 기준이 있어야 되잖아요. 기준이 이분은 완전함, 온전함, 자기 완결성,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떤 책이 온전하고, 완결적이면은 정경이고, 뭔가 좀 부족하면 정경

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죠.

 

* 마르키온은 정경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책이 본문 자체로 완전해야 한다는 경전의

 '자기 완전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요 책은 정경이요, 요 책은 정경이 아니요라고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이분이 요기서 조금 이상해지는 게 이거예요. 유다인의 성경, 그러니까 구약성경이 예수라

는 이름이 한번도 안 나와요. 당연히 안 나오죠. 신약시대에 태어났는데. 우리 예수님은 안

나오죠. 여호수아, 다른 이름은 나오지만. 이상하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야훼 하느님 하고

신약성경의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 하고 다른 분 같애요.

 

*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야훼 하느님'과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곧 예수님의 하느님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까 제가 얘기했던 구약성경의 야훼 하느님은 조금 전쟁의 신 이런 거 같고, 신약성경의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은 좋은 분, 착한 분, 선하신 분 같애요. 그래서 두 신은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이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구약성경의 하느님은 전쟁의 신, 율법의 신, 유다인의 신이고 예수님이 믿었던 신약성경

의 하느님은 평화의 신, 말씀의 신, 만인의 보편적인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립하는 걸로 이해했어요. 이게 가장 큰 잘못이예요.

 

*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느님은 전쟁의 신, 율법의 신, 유다인의 신이요, 예수님의

  하느님은 평화의 신, 만민의 보편적인 신이라고 신약과 구약을 '대립시켜' 보았다

  하지만 마르키온의 이 같은 생각은 명백한 오류로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서로

  완벽히 조화되는 관계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둘이 하나고 서로

완벽하게 조화되는 관계인데 이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지금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떤 대립하는 걸로 보시면 안 되죠.  그런데 마르키온이 여기서 "아, 저 잘못 생각했습

니다." 그러고 그냥 접었으면 좋은데 이분이 또 고집이 세요. 그래서 여기서 더 생각을

밀고 나갔어요. 어떻게 더 밀고 나갔냐 하면,

 

그러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대립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 논리를 따르게 될 수 밖에

없어요. 지금도. 지금도 현재 그렇게 나갈 수 있는데, 자, 왜 이렇게 대립되어 보이는가?

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까 원인은 신약성경에 있지 않고 구약성경에 있다. 이 구약성경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가 정경을 만들려면 구약성경의 많은 책을 빼자.

 

그래서 전쟁신 같이 보이는 책도 다 빼고 막 이렇게 빼다 보니까 성경이 얄팍해져 버렸

어요. 다 자기가 다 빼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해서 성경목록을 만들었는데 그거를

지금 학자들은 '마르키온 성경'이라고 불러요. 두 번째 오류가 이거예요.

 

* 마르키온의 두 번째 오류는 거룩한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자기만의

  성경목록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자기가 자의적으로 성경에서 이 책 저책 빼 가지고 어떤 성경을 따로 만든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안 되요. 이렇게 하면 큰 문제가 발생해요. 성경 한권에서 뺄 거는 하나도 없어요.

한장, 한절이라도. 그런데 자기가 자의적으로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해가지고 새로운 거

만들고 하는 것도 잘못이예요.

 

두 번째 태도는 교회의 거룩한 전통이 있는데 전통에서 벗어나 혼자 개인적, 독단적으로

성경 목록을 따로 만든 것. 이거는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세 번째 오류를 범하게 되요.

이제 하나가 잘못돼서, 첫 단추가 잘못 끼니까 나가는 건데 나중에 교회에서 얼마나 이

사람을 권고도 하고 돌아오라고 하고. 본인은 또 자기 신념이 있으니까 안 돌아와서 교회

하고 사이가 안 좋아졌죠. 그래서 자기 추종자들하고 나가서 교회를 새로 만들었어요.

 

* 마르키온의 세 번째 오류는 가톨릭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게 또 가장 큰 문제예요. 가톨릭 교회에서 결국 갈라져 나갔어요. 그런데 이 당시 이분이

카리스마도 있고 사람들한테 인정도 받았나 봐요. 144개나 되는 공동체가 따라서 나갔어요.

그 당시 초대 교회가 그리 크지 않았을 때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굉장히 영향력이 있었나

봐요. 그래서 기록에 보면 144개나 되는 공동체가 새로 나갔지요. 이렇게 거룩한 교회의

전통에서 분열해서 새로운 종파, 새로운 분단을 세운 것도 역시 오류예요.

 

그래서 크게 세 가지 오류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구약과 신약이 대립하는

거라서 구약성경을 폄하한 게 큰 문제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 가지고 성경을 자기가 빼고

넣고 해 가지고 성경 목록을 따로 만든 것이 잘못이고, 결국 그래서 가톨릭 교회를 나간

것. 나갈 당시는 엄청나게 컷는데 결국 한 300년 정도 지난 다음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안타깝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로가.

 

이런 마르키온을 하나 여러분이 보면서 아, 이런 오류에 빠지면 안 되겠구나. 우리도 신약

하고 구약하고 뭔가 다른 거 같다 해서 구약성경을 폄하하게 되면 이런 잘못된 길로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다음에 가톨릭 교회 신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마르키

온 주의다 하는 것을 만들고 우리가 '마르키온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거는 지금 세 가지 모델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에리히 쳉어(Erich Zenger)라고 독일에서 구약성경학으로 제일 유명한 학자가 계세요.

완전히 세계적인 대가인데 이분이 지금 우리에서는 사실 마르키온을 따르는 사람은

없다. 옛날의 고대의 이단인데 사실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가 있다. 현대에.

 

마르키온 하고 비슷한데 본인도 마르키온 하고 비슷한 걸 모를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오류에  잘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를 세 개를 정리해서

우리가 현대인들은 요 세 가지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라고 정리해 주신 게 있어요. 그걸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리고 이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독일의 저명한 구약학자 에리히 쳉어 신부는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의 세 가지 형태를 지적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이른바 '대체 모델'인데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대체했다.

 

여러분, 자동차가 나오면 마차를 대체했잖아요. 자동차가 나오고 우리 마차는 안 타죠?

말 간수하는 것도 힘들고 마차는 느리고 또 짐도 많이 못 싣잖아요. 그런데 자동차는 쉽게

탈 수 있죠. 자동차가 나오고  마차를 버리듯이 신약성경이 나왔으니까 이제 구약성경은

필요없다. 신약만 읽으면 되고 구약성경은 읽지 않아도 된다. 이게 이른바 '대체모델'이

예요. 대체 되었다. 그게 일종의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가 될 수 있다.

 

* 첫 번째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는 '대체 모델'로 신약이 구약을 대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여러분들이 "야, 신약만 읽으면 되지 뭐 구약성경까지 읽냐?" 이런 말도 제가 구약 학자

로서 느끼기에는 좀 조심해서 할 말이예요. 이게 물론 그런 의미로 쓰는 건 아니시겠지만

말이 씨가 될 수 있거든요. "구약성경은 안 읽어도 돼!" 이렇게 말하시기 보다는 "구약성경

도 읽어야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셔야 되지요.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에서 대체 모델은 이런 것도 있어요. 구약성경 전체가 대체된 게

아니라 구약성경 일부가 대체되었다. 그러니가 구약성경 일부 구절은 이제 안 읽어도

된다.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구약성경 어느 한 구석은 우리가 사실은 많이 읽지 않고

또 우리가 잘 모르고 많이 인용되지는 않지만 필요 없는 거는 아니예요. 우리가 그대로

또 두고 어떤 의미가 앞으로 우리한테 있을지 모르는 거예요.

 

* 두 번째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는 '상대화 모델'로 구약성경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곧 신약성경만이 절대적이고  신약성경은 상대적인 것. 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대체 모델  다음에는 '상대화 모델'이 있어요. 이 상대화 모델도 역시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인데 그거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계시니까 신약성경은 절대적인 것이고 구약

성경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된 거예요. 성경이 하나가 절대적이고

하나가 상대적이면 상대적인 거는 덜 중요하죠.

 

즉 이거는 돌려 말하자면 구약성경은 덜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는 태도예요. 그것도 잘못

된 것이죠. 물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준비하는 책이예요.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도래를

기다리는 책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덜 중요한 건 아니예요.

 

예를 들어서 이집트 탈출을 생각해 보세요. 이집트 탈출에서 이집트 노예살이 하던 백성을

하느님께서 탈출시켜 해방시켜 주셨어요. 이집트 탈출 사건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해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사건이예요. 우리가 계속 지금도 읽어야 되는

것이죠. 이거는 덜 중요한 게 아니예요.

 

그리고 신명기라든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우리 백성을 탈출시켜 주셨다

라는 말을 계속해서 거듭해서 "백성들아,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라고 얘기하는 책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물론 굉장히 완벽한 해방을 보여 주셨지만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이제 중요해지지 않았다. 필요 없다. 이렇게 된 건 아니죠. 그것도 역시 중요해요.

 

예수님도 인용하셨던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된다." 이 말씀

도 덜 중요하거나 이제 예수님 말씀만 읽으면 되고 우리는 레위기는 말 안 해도 된다. 이

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죠. 이게 두 번째 모델이고 세 번째 모델은 제일 교묘한데,

'선별 모델'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는 아, 정말 머리를 잘 쓴 거 같애요. 정말 애매한데.

 

* 셋째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는 '선별 모델'로 구약성경의 약속을 얼핏보면 비체계적

  이고 난해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경에 흡수된 내용만 '선별해서'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구약성경 하고 신약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 마치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 걸로 비유할 때가 있어요. 그 비유 자체는 틀린 거는 아니예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죠.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씨를 뿌려 주셨어요. 그래서 그것이

점차 점차 자라나 가지고 예수님에 가가지고 우리가 큰 열매를 맺고 우리가 큰 나무가

되어서 결실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구약성경의 일부 구절만 신약성경으로 흡수가 되고 구약성경의 어떤

구절은 신약성경으로 전승되지 못하고 그냥 구약성경에 남아 있다. 마치 이렇게 성장 모

델을 얘기하면은 우리가 곤충이 허물을 벗잖아요. 그러면은 곤충은 허물을 벗고 껍데기만

남고, 그 허물 벗은 껍데기는 신약성경으로 안 이어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걸로 비유를 하면은, 어린이가 뭐 똥도 싸고 때도 있고

하잖아요. 그렇게 안 들어간 게 있다. 구약성경에. 이게 선별적으로 신약성겨에 흡수 되었

다. 그래서 '선별 모델'이라고 해요. 요걸 잘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가 넘어가기 쉬운데

독일의 에리히 쳉허 신부님은 선별 모델도 일종의 잠재적 마르키온 주의다 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마 올바를 거예요. 신약성경에 반영되지 않는 구약성경의 진리는

없어요. 두 성경은 서로 완벽히 조화되고 같은 진리를 전하고 있지요. 만약에 구약성경의

내용이 신약성경에 다 종합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완전히 종합하지 않은

게 돼 버려서 조금 이상해져요.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누락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또 어떤 면에서

는 이게 좀 잘 안 맞는다 하는 것도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구약성경의 모든 것이 다 계시

이고 구약성경의 어느 구절이라도 지금 우리가 잘 모르지만 혹시 지구상 어디어선가 혹은

미래의 언젠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일 수 있고, 아직 깨닫지 못한 보물이 그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이런 태도로 구약성경을 접근하셔야 되요.

 

잘 성찰해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구약성경의 어떤 내용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다

들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는 것이죠. 어쨌든 오늘의 결론으로 여러분이 구약

성경을 이해하실 때 좀 생각해 보셔야 되는 것. 구약성경은 요약본을 보셔도 좋고, 그

다음에 어떤 신부님이나 훌륭한 신학자의 말씀을 들으셔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여러분이

직접 읽으시고, 직접 느끼시고, 또 가정에서 함께 읽으시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몸으로, 마음으로 같이 쓰면서 읽으시면 대단히 좋겠죠?

인류 최고의 문학적인 보배가 또 종교적인 신앙의 입장에서는 다 성경에 있다고 생각

하시고 천천히 이렇게 좀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시면 좋을 것이고 마르키온을 한번

집에 가서 강의 끝나면 생각해 보세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대립되지 않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 보다 덜 중요하지도 않고,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종합하셔 가지고 우리한테 굉장히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신 주님이시다. 그런 걸 한번 마음에 두시고 이 강의 중간에 제가 구약성경을 대하

는 평신도들의 자세에 도움이 되시라고 이 강의를 준비해 봤습니다.

 

그러면 오늘 부록편으로, 사실은 부록편 하나를 더 기획하고 있는데 그거는 한참 있다

하고요. 부록편을 마치고 다음 강의부터는 다시 본격적으로 구약성경의 신 하나를 여러

분들한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다음 강의 예고: 치유하는 피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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