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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작성자박승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8 조회수1,108 추천수1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부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부활시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이 시기는 자연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한 하느님의 확인입니다.
부활은 ‘죽었지만 되살아 난다’는 단어의 단순한 뜻과 같이 환생이라는 초보적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어린시절 또는 예비자로서 교리를 배울 때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다 체득하지 못한 채 십자가상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복음 증언을 기초로, 막연하지만 그래도 의지적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 대부분이 이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저도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하고 새롭게 선택하고 새로 시작하고 여러 가능성 가운데 분명히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이 바로 신앙이라고 이해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갑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늘 변하고 성장합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께 대한 고백으로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며,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장하듯 우리의 신앙도 나이와 체험에 따라 성장합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신앙과 고백도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러한 신앙체험과 성장하는 믿음은 우리를 끊임없이 하느님께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

아가면서 때로는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도 갔다가 제 길을 찾아 되돌아오곤 합니다. 복음에 언급된 제자들, 군중들, 죄인들, 바리사이, 사두가이, 율법학자, 대사제, 로마군인, 이방인 등 이 모든 이들은 바로 우리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사건을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 현실의 현상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깊이 예수님과 그 행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성서 해석의 한 방법으로 상징적 해석, 실존적 해석, 현실적 해석 또는 적응적 해석이라고 했지만 구태여 이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삶과 과정 속에서 성서를 이해하면서 성서를 따라 삽니다.

우리는 자연을 하느님 모습의 반영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와 그 엄위하심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초보적 설명으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나무를 비유로 듭니다. 나무는 겨울철에 앙상한 가지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에서 봄철에는 새싹이 돋습니다. 겨울철의 나무와 봄철의 새싹이 바로 자연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깨닫게 하는 대표적 상징입니다.  

이러한 예화에서 우리는 나무얘기를 넘어서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신비를 직감적으로 깨닫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겨울철의 나무는 잎사귀만 떨어졌을 뿐 결코 죽은 나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나뭇잎이 없는 나무에서 죽음의 상징을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죽음도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이 결코 죽음이 아니라는 것, 죽음은 오직 변화와 새로운 생명을 출산키 위한 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코린토 전서 15장에서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오로의 이해와 설명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성서 구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진리를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어이없는, 슬픈, 억울한, 한 맺힌 사건입니다. 불의한 자들,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야합하여 의로운 분을 죄인으로 몰아 사형에 처한 기가막힌 처절한 ‘조작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작사건’앞에서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성모님의 마음과 여인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은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늘이 무너질 지경이었고 너무 억울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막힌 불의한 ‘조작사건’을 너무 쉽게 지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님의 억울함, 불의한 권력자들의 오판, 위선적 종교인들과 부정부패에 찌든 그 당대의 지도층들을 기억하고 함께 그들의 폭압을 논해야 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라고만 고백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너무 쉽게 이 모든 인간적 모순과 죄와 억울함을 애써 외면하고 비약한 허구의 내용일 수 있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불의한 종교인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으셨지만 그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하느님 앞에 오히려 의롭다는 선언과 고백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죽음은 세상의 불의와 우리의 죄를 없애는 새로운 은총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간 단계의 고민과 갈등과 투쟁과 싸움도 없이 느닷없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결론부터 고백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라는 결론의 전 단계인 그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현실적 제도의 죄를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그 죄과에 대하여 물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의로운 예수님을 죽인 그 당사자들이 도대체 누구이고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의 핵심입니다.

때문에 톨스토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대작 <부활>에서 사건 전개를 불의한 첫 재판과정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란 바로 억울한 재판, 권력자, 재벌가들의 불의와 결탁한 현실의 범죄 속에서도, 끝까지 짓밟히지 않고 진실과 생명력을 간직하는 하느님의 힘, 그리고 진리의 힘입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이 세상 모든 사건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부정, 부패, 성폭력, 불의한 재판, 투기, 거짓, 사기, 종교와 권력의 가식과 위선, 귀족의 허례의식과 부자들의 욕심, 감옥 안에서 자행되는 간수들의 불의, 죄수들의 반복된 죄, 유배지에서 펼쳐지는 우리 현실의 모든 얘기를 언급한 뒤,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고 결국 단독자로 남은 주인공 네플류도프가, 성서를 껴안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8장의 어린이의 순수함,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철저한 삶, 용서의 의미 그리고 마태오 5·6·7장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자신이 살아온 길을 주마등처럼 떠올리며 핵심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그 외 모든 것은 덤으로 주시리라”(마태6,33).

“아, 그렇구나!” “그런데 사람들은 먼저 찾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는 구하지 않고 덤으로 주시겠다고 한 부차적 내용들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결국 이 세상은 죄와 악으로 얼룩질 수밖에…….” 이에 네플류도프는 하느님 나라와 정의의 우선성을 깨닫고 그 실천을 다짐합니다. 그의 앞날의 생애가 그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톨스토이는 힘주어 말합니다. 부활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리고 정의를 위한 구체적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결코 관념적 교리가 아닙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의의 실천입니다. 1975년 4월 8일 박정희 유신독재 하에서 민복기 대법원장 등 9명의 대법관들이 법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하고 18시간 만인 그 다음날 새벽 4월 9일에 목숨을 잃은 이른바 인혁당 관계 인사 여덟 분, 이분들의 기막힌 죽음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읽을 수 있는 그러한  눈이 바로 부활을 향한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눈으로 현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삼성그룹의 헤아릴 수 없는 불법과 비리, 이 불의를 외면하는 뇌물검찰, 뇌물공무원, 뇌물정치인 등이 버젓이 활개치는 이 슬픈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십자가의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대만 신학자 송천성은 ‘부활은 십자가의 수락’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삶, 현실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수락하면서 고통과 죽음 앞에서 영원한 삶을 기리며 예수님과 함께 과감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 그 결단과 용기만이 부활과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삼성의 죄악, 그것은 바로 맘몬의 힘입니다. 돈과 권력, 기존 세력의 불의한 유착관계를 끊는 작업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며, 그때 비로소 부활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권력자들, 종교인, 정치인, 율법학자 그리고 거짓 여론에 의해 살해되셨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삼성과 결탁된 언론, 불의한 권력구조에 의해 여전히 진실이 외면당하는 이 현실에서 새롭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정의에 대한 열망과 불의와 거짓과의 결별에서 확인됩니다.
이 은총의 부활시기에 신부님들과 함께 깊은 신비를 되새기며……

2008년 3월 부활대축일을 앞두고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가족들과 함께
함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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