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갈릴래아로 가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19 조회수1,695 추천수8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부활 대축일 전야미사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복음: 마태 28,1-10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다


PIERO della FRANCESCA 작, (1463-65)


     < 갈릴래아로 가라! >

            


얼마 전 개봉했던 노예 121840년대 흑인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미국에서 한 자유인이었던 솔로몬이란 흑인이 12년 동안 노예로 팔려가 살았던 비참한 삶을 엮은 실화입니다.

솔로몬 노섭은 아내와 아들, 딸을 둔 음악가로서 뉴욕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술을 한다는 두 사람이 공연하는 중에 바이올린으로 연주해주는 조건으로 워싱턴까지 따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둘은 흑인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단의 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취해 정신이 없게 만든 다음 노예로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는 끌려가는 중에 평생 노예로 살아와서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자유인이었다고 말하면 그들에게 모진 매를 맞고 다 써버려 소용이 없어진 물건처럼 언제 사라질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노예임을 받아들이고 플랫이란 새로운 이름을 지니고 개보다 못한 삶을 살며 갖은 고통과 죽을 위험들을 수없이 겪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주인은 짐승만도 못해서 노예 중 한 여인을 성적인 노예로 부려먹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플랫에게 와서 사정을 합니다.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플랫은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플랫이 그 여자의 등짝이 걸레가 될 때까지 채찍질을 해야만 하는 상황도 닥칩니다. 그래도 살아남아 다시 자유로운 땅,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픈 열망이 그를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몇 번에 걸쳐 집으로 편지 한 통 붙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이 노력이 결국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훌쩍 커 버린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사위와 손자까지 만나 직접 보게 되는 주인공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부둥켜안고 그동안의 고통을 눈물로 씻어내려 합니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솔로몬은 이제 편안히 살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과 함께 노예 생활하던 이들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그는 비로소 살려고 하지 않고 죽으려고 합니다. 노예 인신매매단과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게 됩니다. 자신이 겪었던 지옥과 같았던 삶을 노예 12이란 책으로 펴내고 노예 탈출을 도우며 평생을 바칩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의 생은 어떻게 끝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노예 생활을 할 때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유를 얻었을 때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예생활 할 때는 살려고 하고 자유로울 때는 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참다운 자유인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고, 자신이 살려고만 하는 사람이 곧 무언가의 노예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 속에서 슬픔과 분노로 부활의 기쁨을 함께 온전히 나누고 있지 못합니다. 나누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슬퍼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들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벌만 운운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몇 명의 제물로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퉁치고 넘어가며, 계속 같은 재난만 반복하며 살아왔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하지 않으면 제2, 3의 세월호는 계속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숭고한 죽음을 맞았던 이들과, 자신의 생명만 지키려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22살의 승무원 박지영 양은 우리에게 참다운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승무원은 가장 마지막에 내리는 것이라고 하며 가슴까지 물이 차 올라와도 자신의 구명조끼까지 모두 학생들에게 주고 그들을 구하다 결국 자신을 구할 힘까지 다 써버려 그 곳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노예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먼저 갈릴래아로 가겠으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갈릴래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말을 믿고 갈릴래아로 갔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또 일주일이 지난 뒤 토마가 다시 왔을 때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적어도 일주일간은 예루살렘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 잘 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입니다. 이 말은 차원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벽을 통과하시고 같은 시간에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시기도 하십니다. 시간과 장소에 방해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차원이 다른 분이시기에, 당신이 갈릴래아로 가신다는 말 또한 차원이 다르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당신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시던 활동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복음선포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을 만나려면 당신과 같은 수준, 즉 죽음을 무릅쓰고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도망가버리던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차원이 다른 그분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가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복음선포의 마음을 지니고 교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겼을 때 비로소 자신들과 함께 계시며 성경말씀을 뜨겁게 설명해 주셨던 그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유인이십니다. 자유인이셨기 때문에 당신만 살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려고 죽으려고 하셨습니다. 그 삶이 바로 갈릴래아에서의 삶이셨습니다. 당신을 보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당신을 온전히 볼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게 복음을 선포하려는 바오로의 눈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교회를 박해하였지만 하느님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만 있다면 그 사람의 눈을 밝혀 주셔서 당신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시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개미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온전히 만나려면 인간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은 처음에 그들이 자유를 누리던 그 삶이 아니라 노예생활이 무언지 똑똑히 알고 다시 돌아가 그런 노예생활을 하는 억눌린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으로 돌아가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비로소 예수님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할 것이란 뜻인 것입니다.

승무원은 마지막이다.”라고 하며 죽음을 불사한 고 박지영 양이나,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던진 고 정차웅 군이나 모두 갈릴래아에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종교가 어떻든 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던 이들이 틀림없습니다. 하늘나라 가서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어떻습니까? 먼저 뛰어내린 선장이나 다른 선원들처럼 나 먼저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돈을 먼저 벌어야 행복하다며 낡은 선박을 사들여 위험하게 개조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담보로 재물을 쌓는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쾌락을 부추겨 사랑은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이 아니라 다른 이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줘야 하는 쾌락과 낙태천국을 누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이 곳이 바로 노예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만 살아남기 위해 사는 삶이 노예의 삶이고 이런 삶 안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개미가 사람을 만나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쓰라린 부활을 함께 맞으며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어가는 저 수많은 생명의 희생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아이들의 피로써라도 이 세상이 정화되어야 합니다. 다시 남을 위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갈릴래아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경고는 몇 번이면 족합니다. 우리는 그 많은 경고를 이미 수차례 받았습니다. 언제까지 행복지수가 꼴찌이고 자살률 1위인 나라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갈릴래아로 가지 못하면 그것이 희망이 없는 것이고 부활의 기쁨조차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도 먼저 갈릴래아로 갑시다. 그 곳에만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