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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치기신부님의 말씀산책] 극단적 선택은 절대 안됩니다!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20 조회수1,146 추천수12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극단적 선택은 절대 안됩니다!

 

아직도 차갑고도 깊은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우리 아이들,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저 고분고분 말만 듣던 어린 양 같은 우리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밤잠이 오지 않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들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님들 생각하니 저절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구조된 생존자들에 대한 걱정도 이만저만 아닙니다. 끔찍한 참사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트라우마에 앞날이 걱정입니다. 나만 살아남았다는 극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신 교감 선생님 소식에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온 몸과 마음으로 경축해야할 부활절, 힘차게 알렐루야를 노래해야할 부활절이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우리 청소년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낭떠러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있습니다.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 모두도 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외치던 시편작가의 울부짖음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라는 곳도, 의지 할 곳도 없습니다. 바라볼 대상, 희망할 대상, 기대할 대상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절대 안 됩니다.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생명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당연히 내 삶에 대한 마지막 정리 역시 그분 손에 맡겨야 합니다. 최종적인 선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목숨 걸고 지켜야할 우리 교회 불변의 교리입니다.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어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부활성야에 있는 힘을 다해 외칩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극단적인 선택은 절대 안 됩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죄책감이 크더라도 마지막 선택은 안 됩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참혹하고 괴로운 이 순간, 서로가 서로를 향한 배려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과 측은지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될 순간입니다. 더 이상의 비극, 더 이상의 비참함은 없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를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세 사람의 태도를 주목해봅시다. 최초 목격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무덤으로 가보니 막았던 돌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즉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로부터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두 제자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조금 젊었던 요한이 먼저 도착했지만 수제자인 베드로에 대한 예우를 갖춰 기다립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

 

물론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한 그들은 아직 예수님 부활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신이 사라진 것에 대해 당혹해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표현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시각은 아직도 물리적이고 육신적인 시각입니다.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제한적 시각입니다. 마리아의 머릿속은 오직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큰 걱정과 상심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한 가지 부족했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시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나큰 신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아직도 참 빛을 만나지 못하고 어둔 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두운 새벽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모습은 그리스도교 초기교회(새벽교회)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먼 신앙의 초심자들의 교회인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아직 믿음이 약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시라는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밝은 신앙의 빛 속이 아니라 어둠과 의혹, 두려움과 의심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빈 무덤을 향한 발걸음은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확신이 부족했지만, 그녀는 일단 부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한 씩씩한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재에 대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했습니다. 황급히 마무리한 예수님의 시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어두운 신 새벽에 예수님 시신이나마 만나 뵈러 무덤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이런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노력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완전한 인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비록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부족할지라도,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그분을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우리의 사랑이 있다면 우리 역시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머지않아 우리의 신앙은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베드로와 요한 사도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가야겠습니다. 왜냐하면 빈 무덤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두 사도는 빈 무덤, 바로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빈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부활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장엄한 장소입니다. 거기서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 빈 무덤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거기서 우리도 새롭게 탄생하고 새롭게 출발해야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의 빈 무덤 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빈 무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살아나셨다!”는 무언의 외침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살아나셨다!”는 외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이 세상 안에 살아나셨다!”는 외침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계실 때,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현존해계실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참 부활은 완결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유념해야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희가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한다면 너희 역시 부활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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