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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26 조회수791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4월 26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He appeared to them and rebuked them
for their unbelief and hardness of heart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k.16,14)
 
 
제1독서 사도 4,13-21
복음 마르 16,9-15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생일날에 근사한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는데, 자신의 생일날에는 특별히 받은 선물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냥 아침에 차려주는 생일상이 전부였기에 너무나 서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제는 아내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 뭐 그럴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이만큼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이 아닐까 싶더군요. 그러면서 문득 ‘선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물을 하면서 어떤 대가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선물을 한다면 그것은 뇌물이 되겠지요. 선물이라는 것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는 것,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선물’에 서운한 감정이 더해져서 ‘뇌물’의 형태로 바뀝니다. 선물은 선물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생각이 더해지지 않을 때, 좋은 가치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이와 달리 주님께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까,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니까, 이렇게 열심히 성당을 다니니까... 등등의 이유를 붙여서 보답을 얻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들이 주님께 드리는 그 모든 선물인 기도, 봉사, 희생 등등은 단순한 뇌물에 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좋은 마음이 나쁜 마음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에 혼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의 말도 믿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그 이유를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마음, 누가 높은가를 따졌던 마음,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들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선물이 아닌 뇌물을 바쳤던 것이고, 예수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선물입니까? 뇌물입니까?

주님께 선물을 드리는 사람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기쁘고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뇌물을 바치는 사람은 욕심과 이기심만을 앞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큰 선물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던질 뿐입니다.

주님께 진정한 선물을 봉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를 줄여야 한다. 의심과 근심과 욕심이다. 의심은 마음의 고름이다. 근심은 마음의 주름이고, 욕심은 마음의 기름이다. 의심을 호기심으로, 근심을 관심으로, 욕심을 동심으로 바꾸자(주철환).

 
나의 선물은 혹시 뇌물이 아닐까요?

 

더 이상 이유는 그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제자들이 듣기에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시니까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던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신다니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는 무조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 아니 어쩌면 무지렁이에 말재주도 없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이었을까요?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예수님의 명령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거부한다면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듯이 혼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선교 명령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못하는 이유만을 들어서 말합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말재주가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세상 삶이 너무나 힘들다고... 하지만 당시의 제자들 상황과 비교할 때 어쩌면 우리의 상황은 더 나은 편이 아닐까요?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르고 계신다는 주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따라야 합니다.

더 이상의 이유는 그만입니다. 크게 혼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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