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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작성자이재승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29 조회수1,832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4월 29일이 기념일이며 다음과 같이 GoodNews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아가씨였으므로,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하여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레이몬드 성인이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제자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그녀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그 도시와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았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을 대항하려는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에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오상이 생전에는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플로렌스와 그레고리우스 교황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Roma)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성녀 카타리나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서거에 즈음하여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는 사건으로 큰 분열이 발단되어 여간 혼란스럽지 않을 때, 그녀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교황을 지지하여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녀는 중풍 증세로 고생하다가 며칠 후에 로마에서 운명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인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1461년에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가톨릭 역사 안에는 많은 신비가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큰 분이시군요. 말년 수년간 성체만으로 버티신 것 같습니다. 루이사 피카레타는 무려 64년을 그러했다죠. 간단한 분은 아니시네요. 이 글에 보면 가타리나 성녀에 대한  초기의 지나친 열광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으나 결국은 교황청의 큰 분열을 막고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 되시었네요. 같은 신자인데도 표징을 전혀 못받는 분도 있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그러셨다합니다) 어떤 분은 일상 대화로 정말 쉽게 자주 예수님을 만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개신교에 이런 사례가 많지만 사실 누구나 가능하다합니다. 저는 가슴에 성령님을 따뜻이 느끼는 정도입니다만 표징에 대해선 표징자체로 담담히 받아들임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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