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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에 대해
작성자김동기 쪽지 캡슐 작성일2014-04-30 조회수1,208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듣고 또 말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낱말의 홍수 속에 살아간다. 라고나 할까? 심지어 철부지 어린아이들도 뜻도 제대로 모른 체

어른들 따라 사용한다. 대부분 좋아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힘. 특히 미움의 대립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원적인 생명적 원리로는 그러한 것도 포괄한다. 사랑은 역사적·지리적으로, 또 교제 형태에서 여러 양상을 취한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사랑은 에로스로 불렸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사랑에서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동경·충동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사랑, 즉 아가페는 인격적 교제(이웃에 대한 사랑)와 신에게 대한 사랑을 강조하며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자기희생에 의하여 도달하게 된다고 한다. 로 표현되어있습니다.

그럼 우리 카톨릭 신자들은 사랑을 어떻게 알고 실천하고 있을까?

물론 고린토 전서 13 장에서 바오로 사도가 사랑에 대해 잘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면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 또한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빛과 함께 있는 너희들이 무자비하고, 복수심이 강하고 걸핏하면 투덜거리고 과격하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난폭한 것을 찬성한다. 나는 너희들의 사고방식에 더 혐오감을 느낀다. 아직도 너희들의 처음과 같은 상태를 보는 것이 나는 괴롭다.” 하시며 제자들의 부족한 사랑에 대해 안타까워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진리로 가는 길을 가지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육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고, 육체로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육욕이다. 사랑은 영혼과 영혼사이, 높은 부분과 높은 부분사이의 애정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기 위하여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알기 위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진리의 길은 발견된 것이다. 진리는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지식을 이해하는 비결이다. 하느님의 가르침 외에는 결함이 없는 학설이 없다.”고 강조하시면서

 3 가지 사랑의 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일차적인 힘을 가진 사랑 그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고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다. 이차적인 힘을 가진 사랑은 모성애나 부성애다. 이것은 두 몫은 영적인 것이고 한 몫만 육체적인 것이다. 삼차적인 힘을 가진 사랑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반은 정신으로 반은 육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내에 대해서 남편 외에 주인이고 아버지이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아내인 것 외에 천사이고 어머니이다. 이것이 가장 고상한 3 가지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예를 드시면서 “나의 가장 친밀한 벗들 중에서 누가 그의 성질을 바꿔서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줄을 알았는지 아느냐? 막달라 마리아다. 마리아는 완전히 타락한 동물성에서 출발하여 천사와 같은 영성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순전히 사랑의 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떠나시고 그래서 그 첫째 샘이 마르고, 또 사랑은 악의가 있는 사람을 떠나고 그래서 그 둘째 샘이 마르고,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애덕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과 그 힘에 대해 자세하게 우리들에게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 거룩하고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사랑에 숙달하여라. 사랑은 정말 사랑이 되기 위하여는 절대로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한 대상만을 사랑할 줄 알고, 다른 대상은 사랑할 줄을 모르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사랑을 받는다 하드라도 참다운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필요 불가결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온 인류를 사랑하고 또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하여 보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 별과 물까지도 사랑한다. 배타적인 사랑은 흔히 이기주의라는 것에 유의하여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으로 사랑하기에 이를 줄을 알아라.” 하십니다.

 

노래 가사에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이신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을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사랑해야하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지상명령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몸소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며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정체성을 알면 한결 쉬울 것 같습니다.

안소니 드멜로 신부의 비유를 보면, 나무꾼이 산에서 커다란 알을 발견해서 집으로 가져와 알을 품고 있는 어미닭에게 같이 놓아둡니다. 때가 되어 병아리와 함께 부화되어 뛰어다닙니다. 커가면서 병아리들 보다 재바르지도 못하고 날개 짓도 형편없어서 병아리들로부터 조롱과 따돌림을 당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어느 날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새가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나는 것을 보고 동경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소풍을 갑니다. 그때 그 새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기가 그토록 동경하던 새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을 알고는 힘을 내어 커다란 날개 짓을 하면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갑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야 합니다.( 마르코12:28 ) 새는 알을 깰 때 죽을힘을 다 합니다. 그럴 때 밖에 있는 어미 새가 부리로 쪼아서 도와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육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구속이고 무지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에고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언젠가 수명이 다하면 미련 없이 버려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생은 거룩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사랑해야한다. 인생은 영원이라는 목적에 사용되는 수단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3:6~8)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면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 생기는 것이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느님 나라는 마음속에 하느님을모시고 살았던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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