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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04 조회수848 추천수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5월 4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사도 2,14.22ㄴ-33
제2독서 1베드 1,17-21
복음 루카 24,13-35
 

지난 4월 16일부터 시간이 멈추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4월 16일의 세월호 참사만 기억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저절로 납니다. 어떻게 보면 제3자라고 말할 수 있는 저도 이러한 마음인데, 정작 희생자의 가족들은 어떠할까요? 또한 구조자들 역시 자신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달,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되신 분 중에 성소후원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셨던 교우가 있어서 주교님과 함께 문상을 다녀왔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내 되시는 분이 주교님 품에 안겨서 마냥 우십니다. 주교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냥 꼭 안아 주시더군요. 한참을 우신 뒤에야 자매님께서는 품을 벗어나 이런 저런 말씀을 하세요. 도저히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할 정도의 슬픔과 아픔 속에 계셨던 것 같은데, 주교님과의 포옹을 통해 큰 위로를 얻으신 것이지요.

많은 말들만이 위로를 줄 것 같지만, 천 마디의 말보다 더 큰 위로는 단 한 번의 포옹입니다. 그리고 함께 울어주고 아파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힘이 된다고 어떤 정신과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하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나서 정부에서 보여준 것은 많은 말들뿐이었지요. 실천 없는 말들, 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말들, 그러한 말로 과연 위로가 되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큰 배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불신만이 팽배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어서 약간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요.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가 무참히 십자가형을 받고 죽는 것을 보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암담한 심정에 빠진 것입니다. 여기에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함께 했겠지요. 그때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픔을 안고 있는 제자와 함께 걸어가시며 길동무가 되어 주십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지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결론지음이 예수님을 바로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그들은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좌절과 아픔의 순간에서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며 길동무가 되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길동무를 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마음이 점점 타올랐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길동무를 자청하고 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점점 타오르면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세상의 어려움을 뛰어넘어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 속에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놓아 버리면 종종 놀랍게도 대단히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다니엘 데비앙).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너무나 다른 남편과 아내

어떤 금융기관 연구소의 재미있는 조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은퇴한 뒤에 하루 여유시간이 11시간 정도인데, 이중 절반 이상을 부부가 함께 지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은퇴까지 했다면 부부로 최소한 20년 이상을 함께 하셨을 텐데,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글쎄 남편은 43%가 좋다고 대답한 반면, 아내는 28%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집 문제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남편은 전원주택을 선호한 반면, 아내는 서울이나 신도시 아프트에 남는 것을 선호합니다.

노부모님 용돈 문제도 인식차가 있습니다. 남편은 52%가 매달 일정액을 드리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아내는 51%가 명절이나 경조사 때만 부정기적으로 지원하기를 원했습니다.

노부모님 아프실 때 간병 문제는 어떨까요? 남편의 63%는 아픈 부모님을 모시고 직접 살겠다고 답한 반면에 아내의 43%는 남이나 요양 기관에 남에게 맡기겠다고 답했습니다.

너무나 다른 남편과 아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 대화가 그만큼 없었다는 것이지요. 직장으로 인해서 그 간격을 미처 모르기도 했고, 또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알아도 모른 척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퇴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문제들로 함께 살지 못해서 ‘황혼이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까? 따라서 미리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대화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둘의 간격은 좁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과 우리의 간격은 어떤가?’ 라는 의문도 생기네요... 너무나 먼 주님은 아니었을까요? 나의 대화가 전혀 없어서.... 기도도 잘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으면 주님과의 거리는 절대로 좁혀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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