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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부활 제3주일 - 오, 아름다워라!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04 조회수809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 아름다워라!

 

 

 

 

†찬미예수님

오늘 원래는 성당이 비좁기 때문에 성모님광장에서

미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일기예보를 들어보니까 오늘밤부터 비가 온데요.

그래서 성모광장에서 미사 드리다가 궁상 떨 일 있냐?

해가 져서 성당으로 다시 내려왔는데 벌써 기온이 많이 올라가서

또 지금은 사람의 열기 때문에 많이 덥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계신, 어머니가 내려다보고 계신~~

이 성전 앞에서 비록 몸은 힘들어도... 불편해도.....

여러분들 행복하십니까?

예~에~

식사들은 어떻게 저녁은 잘 챙겨 드셨습니까?

네에~

밥이 좀 되지요?

저도 오늘 사제관에서 영성의 집 밥을 좀 얻어다 먹었는데 밥알이 논으로 갈려고 합디다.

죄송합니다. 된밥을 해드려 가지고......

내일 아침밥은 좀 더 잘 될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 앞에 갈 때까지

반드시 세 개의 교회를 거쳐야 됩니다.

몇 개의 교회?

세~개~~

 

첫 번째 교회가 뭐냐?

순례의 교회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순례하고 있죠?


순례의 교회가 첫 번째고

그다음에 죽어서 연옥에 가면 연옥에서는 무슨 교회?

정화의 교회를 거쳐야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갈 때까지 이 세단계의 교회를 거쳐야 되는데........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무슨 교회요?

순레교회!


순례교회는 우리가 체험으로 알다시피 불안전한 교회 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이 교회 안에는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고, 착한사람도 있고 또 때로는 못된 사람도 있어요.


순례교회, 즉 눈에 보이는 이 교회는 언젠가 허물어지겠죠?

이 성당이 뭐 몇 백 년 갈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허물어 질 겁니다.


순례교회에서 정화의 교회를 거쳐서 천국의 교회로 가기위해

우리 신자들은 순례를 자알~~ 하셔야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순례한다.’하는 말뜻은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첫 번째, 포기한다는 뜻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뭐가 포함이 되고 있다구요?

포~기

포기가 포함이 되어있다!

그래서 순례하는 사람은 늘 포기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행복하지 않다면~~

그 원인의 99%는 아직도 무언가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이 순례를 하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됩니다.

행복은 포기하는 것만큼 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포기도, 사람 얼굴 생김새 다르듯이~~

포기하는 내용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12사도를 부를 때~~

어부형제가 두 쌍 이였죠?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면서

‘나 따라오너라!’ 하니까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뭘 포기했느냐?

그물만 포기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러자 똑같은 어부인데도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서

‘나 따라오너라!’ 했을 때는 아버지 제베데오와 삯꾼을 포기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니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포기해야 될 것은 고향, 친척, 아비의 집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재산 포기하라는 말은 야훼가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재산을 갖고 떠났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재산포기를 명령안하셨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재산은 절대로 우상숭배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하느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재산포기 명령을 안내리신 겁니다.

만일에 아브라함에게 재산이 우상숭배 대상이였다면 분명히 재산까지 포기하고 내가 일러주는 곳으로 가거라! 했을 겁니다.


하느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을 포기하게 만드십니다.

하느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자식을 포기하게 만드시고

하느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재산을 포기하게 만드시고

하느님은 어떤 이들에게는 건강을 포기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하혈이 멈추었던 그 여인이 지금까지 살아서 청담동에 삽디까?

죽었지요?

다시 말하면 육신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치유를 받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한번은 죽습니다.


정말 중요한 치유는 <영의 치유>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전화를 한통화하셨는데

“신부님 저 자신 땜에 전화를 드린 것이 아니라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폐암 말기 환자로 다 죽어갑니다.

그 친구는 성당에서 자모회회장도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감기가 몇 달 동안 낫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이미 온몸으로 폐암이 다 전이가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살아 보려고....

뭐 루르드 기적수도 먹어보고/ 유명하다는 데는 다 찾아다니면서 안수도 받아보고/ 심지어는 자기 여동생이 순복음 교회를 다니는데 순복음 교회 유명한 목사님, 그 양반 안수 받으면 좋다~~ 그래서 돈도 많이 써가면서 안수도 받았데요~~

그런데 낫질 않는 거야!


그 다음부터 이 아이가 완전히 돌변해서 난폭해져가지고/ 성모상도 다 때려 부수고/ 십자가도 쓰레기통에다 집어넣고/ 성서 책을 박박 찢으면서/ 하느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데요.


그러다 나중에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이제는 눈도 제대로 못 뜨기에 일주일전에 신부님의 테이프 하나를 들고 찾아가서 그 아이 머리맡에다가 테이프를 꽂아놓고

‘이거 어느 신부님 테이픈데 너 손만 뻗어서 누르면 어느 신부님 강론이 나올 것이다. 들어봐라.’

그리고 왔데요.

근데 어제 전화가 왔는데

“얘. 어느 신부님인지는 모르지만 나 그 신부님 테이프 듣고, 하느님과 화해했다. 내 죽기 전에 소원이 있는데 그 신부님 강복한번 받아 볼 수 없니?”

그러면서 그 친구는

“물론 신부님이 지금 그 친구 집에 가실 수 없다는 거 압니다. 그러나 혹시 전화상으로라도 축복을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거는 가능합니다. 전화번호 대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남편이 받습디다.

이러이러해 내 전화했습니다.

하니 남편도 깜짝 놀라면서

“근데 신부님, 지금 거의 의식이 없습니다. 아무튼 제가 귀에다가 전화기를 대볼 테니까 신부님 얘기하십시오.”

하면서 다 죽어가는 자기 아내를 흔들어 깨웁디다.

“여보, 여보, 눈 좀 떠봐!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신부님한테 전화가 왔어. 눈 좀 떠봐. 귀 좀 열어봐!

“신부님 전화기 갖다 댔습니다. 얘기하십시오.”

“자매님 제소리가 들립니까?”

자매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내서

“예~~”

“저 김웅열 신부입니다.”

“정말 김 신부님이세요?”

“예 맞습니다!”

“신부님, 저 신부님 테이프 듣고 하느님과 화해했습니다. 저 이제 죽는 거 두렵지 않습니다. 저 이제 가겠습니다. 축복기도 해주십시오.”

저는 전화기에다 대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자매에게 축복을 주고 영원한 안식을 주십시오.”

하면서 강복을 드렸지요.

그 자매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아~멘!”

주변에서는 남편과 아이들이 엉엉 울면서

“아멘!”하는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습니다.


5일 있다가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에게서...

“신부님 전화를 끊자마자 3분도 안돼서 숨이 떨어졌는데, 비록 몸은 뼈와 가죽밖에 안 남았지만...... 숨이 끊어진 다음에 그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얼마나 평화롭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매는 38살에 죽기가 그토록 아까워 생명을 원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테입 하나 가지고도 그 자매는 영생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하느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재산에.... 우상에... 사로잡혀 살 때는 하느님을 모르던 이가

쫄딱 망하고 나서야 신앙을 갖게 된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을 하느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다가 열심한 신자가 된 분도 계십니다.

신학교에 손주를 뺏기고 열심한 신자가 된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애착하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대로 내 자식을 키우려할 때

그 자식에게서 효도도 보고 내 사랑의 한 부분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기쁨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욕심의 마지막 한 조각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몸에 있는 암 덩어리가 낫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암까지도 감사하십시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저는 15년 전에 잘못된 수혈로 C형간염바이러스가 제 몸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악성, C형, 중에서도 제일 안 좋은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10년 이상을 수혈을 해준 그 의사를 얼마나 미워했고~~

하필이면 그 많은 헌혈봉지 가운데서 왜 그 피를 가져다가 내 몸에다 집어넣었을까!

원망을 했었는데 몇 년 전에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잘못된 수혈로 C형 바이러스가 내 몸 안에 들어온 지 내 몸에 일부가 된지 10년이 넘었는데..... 바이러스와 통성명을 한 적이 한 번도 없구나!’

갑자기 그 생각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샤워하면서 벌거벗고 바이러스와 통성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러스야, 우선 내가 너한테 사과한다.... 나는 너를 저주하고 미워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니가 내 몸의 일부라고 하는 거... 내가 인정한다. 사랑하겠다! 대신 내가 부탁이 있는데, 내가 조금 더 살아야 된다. 사제로도 살아야 된다. 그러니 쪼끔만 얌전하게 있어줄 수 없겠니?’

그날 양해각서까지 서로 쓰고 도장까지 찍었습니다.


바이러스와 화해하고 나니깐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없어요.

그 밉던 의사들도 미움이 사라지고.......


저는 4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가서 검사를 합니다.

15년 전에 비슷한 그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사람들.....

지금 다 죽었습니다.

치료 받다 받다......

그렇게 바이러스와 화해를 하고 난 다음에 며칠 있다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의사가 나오더니

“신부님, 참 이상합니다.” 얘네들이..... 바이러스 얘들이 좀 이상해졌어요!“

“뭐가요?”

아주 그냥 잠자는 것처럼 가~만히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가만히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신부님이 가지고 있는 이 바이러스는 그럴 놈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주 활동성, 아주 굉장히 엑티브한.... 그런 그 바이러스인데 그냥 단체로 무슨 약을 먹었는지 조용~하게 있다는 거예요.

그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 길래

“화해했어요.”

의사는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바이러스와 자주 대화를 합니다.

저는 늘 만성피로가 있지요?

그래서 힘이 들고 그럴 때마다 저녁이나, 온몸이 파김치가 될 때마다 바이러스에게

‘바이러스야, 너도 오늘 내 몸 안에서 네가 활동하고 싶은데도 참느라고 얼마나 희생 많이 바쳤겠느냐? 고맙다!’”


기적은 내가 애착하는 것에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할 때 일어납니다.

내 몸 안에 있는 암덩어리!

여러분들 암 가지고도 칠십년, 팔십년 살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어도 칠십 팔십년 살면 되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 암처럼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끌어안으십시오....

끌어안으십시오!


우리가 이 순례의 교회 안에 산다고 하는 뜻의 첫 번째가 포기의 삶을 산다. 그 뜻일 겁니다.


두 번째, 순례라고 하는 말 안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있느냐?

<고통을 끌어안는다!>

하는 뜻이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고통가운데 살아갑니다.

건강이 주는 고통~~

환경이 주는 고통~~

물질 때문에 받는 고통~~

때로는 사람 때문에 고통 받을 때 힘이 듭니다.


고통 그 자체는 선이 아니고 입니다.

그런데 왜 고통을 신비스럽다고 할까요?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 고독해지고 외로워집니다.

자기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하느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이 없을 때는 그야말로 오만방자하게 하느님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고통을 당하면 낮아지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 신약의 사도들, 세례 받은 모든 이들은 바로 고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빛이 있으면 반드시 뭐가 있습니까?

어둠이 있지요?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둠은 더 어떻게 됩니까?

찐해지지요?


지금 내가 고통의 깊은 심연 속에 빠져있다고 하는 뜻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은총의 빛이 강하게 내리쪼인다!

그 뜻과도 뜻이 통할 겁니다.


교우들을 지켜보면 열심한 사람인데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열심 하긴 한데 어둡게 열심한 사람이 있고...

밝게 열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둡게 열심한 사람은 앞에서 비춰지는 그 빛을 보질 않고

자기의 어둠을 늘 봅니다.

‘죄 지으면 안 돼! 죄 지으면 안 돼. 죄에 떨어지면 안 돼!’

영적 세심증에 빠져 가지고 죄를 더 짓게 됩니다.


어둠은 보지 마십시오!

앞에서 오는 빛만 바라보십시오.

주님에게 감사할 건덕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빛만 쳐다보고~~

해바라기가 아니라 주바라기가 돼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다보면~~

낮이 길어지면 밤이 짧아지는 세상 이치와 같이~~

주님의 그 빛을 바라보고 살아가다보면~~

어둠은 점점 줄어들게 되어있는 겁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요이~땅’하고 출발했다 하더라도

어두운 쪽을 바라보고 살아가느냐?

밝은 쪽을 바라보고 살아가느냐? 에 따라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 앞에 쌓여있는 그 공로의 양이 엄청나게 차이가 많이 날겁니다.


여러분들은 바오로사도의 가시이야기를 알겁니다.

바오로사도는 불치병이 있었다고 그러지요?

그 불치병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예수님에게 세 번이나 간절히 눈물을 흘리면서 이 병 좀 낫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병이 안 낫습니다.

의학자들이 얘기하기를 ‘아마도 바오로 사도의 그 불치병은 간질병 이였을 것이다.’ 하고 예상을 합니다.

대설교가가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간질이 돋습니다.

그럼 설교하다말고 그냥 흙탕에서 발을 뒹굴면서 거품을 물면서 발작을 일으킵니다.

지금처럼 무슨 약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깨어났을 때는 죽고 싶었을 겁니다.

자존심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워서 “주님 나 써먹을려면 이 병으로부터 좀 해방시켜주시오.” 세 번이나 간절히 외쳤지마는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대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말씀을 줬죠.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내 권능은 건강한 자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능은 가진 자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능은 능력 있는 자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 권능은 약한 자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바오로사도는 즉시 고통의 의미를 180도로 바꿉니다.

전환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합니까?

즉시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위하여 이제부터는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그전 같으면 간질한번 일어나고 난 그 동네는 바오로사도는 절대 가질 않았습니다. 자기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의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이 말씀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나는 이런 사람이오. 나는 이런 가시가 있는 사람이오. 이 가시가 안 박혔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교만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사도에게 그 가시가 예수님을 만나는 출구였듯이 우리들 모두들도 다 가시가 있습니다.

자식이 찔러 넣어준 가시도 있고~~

남편이 찔러 넣어준 가시도 있고~~

물질이 찔러 넣어준 가시도 있고~~

건강이 찔러 넣어 논 가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뽑아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가시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요꼬라지라도~~ 요로케끔·~

요정도 신앙이라도 가지고 사는 겁니다.


가시를 뽑아버린다!’ 고 하는 말뜻은 뭐냐?

‘하느님과 인연을 끊어버리겠다.’ 그 뜻일 겁니다.

하느님과 인연을 끊고 싶은 분들은 그 가시 마음대로 뽑아버리십시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고 한평생 고통 중에 계셨고, 말년에는 완전히 실명이 됐습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은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인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완전히 실명이 되었습니다.

암흑 한가운데로 떨어졌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일치하는 단계 지복직관의 경지에 이릅니다.

시력을 잃고 난 담에 지은 아름다운 찬가가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 입니다.


오, 아름다워라!

거기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어둠을 향해서 ‘형제여!’라고 그랬고 죽음을 향해서 ‘누이여!’ 라고 외칩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 성인은 알몸으로 대지에 엎드려 숨을 거두십니다.


하느님 앞에 갈 때까지 이 순례하는 동안.... 이 순례교회에 머무는 동안 우리들은 분명히 십자가를 끌어안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례하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순례라고 하는 그 뜻은 ‘끊임없는 영적투쟁’을 의미합니다.

약한 인간은 한 번의 포기로 최종적인 포기를 이루어 내지를 못합니다.

지속적인 포기의 길을 가야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지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알콜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듯이/ 노름꾼이 그렇듯이/ 마약중독자가 그렇듯이

한번 회개로/ 한번 피정으로/ 한번 총고해로

성인이 될 수 없음은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싸움에서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위대한 바오로 사도도 <나는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한때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순례의 길을 가면서~~

정화의 교회를 통해서~~

천상의 교회로 갈 때까지......

우리들에게 영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성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바로 성모신심입니다.


성체 없이 성모신심만 있는 교회도 천주교회가 아니고

성체는 있는데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교회도

역시 천주교회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에 대한 뜨거운 신심은 있는데 성모님에 대해서 늘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아직까지도 온전히 하느님의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체를 매 미사 때마다 영합니다.

잠시 후에 이 제대위에서 사제의 입술로 성체성혈이 축성이 될 때는

이 제대위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성체와 성혈을 지킬 겁니다.

성모님께서 미사 내내 사제 뒤에서 손을 벌리고

사제를 지켜 주시다가도 유일하게 사제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언젠가?

사제의 손에 성체 성혈이 들어 올려 질 때는

성모님도 사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 엄청난 성체가 여러분들의 입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합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말은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의 성체를 영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리세이와 세리가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지만 바리세이는 제단 제일 맨 앞에까지 나와서 가슴을 쫘악 펴면서

‘주님, 저 아시죠?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 꼬박꼬박 바쳤고

저 뒤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는 저 죄인인 저놈과 나는 질적으로 틀린 인간입니다.’

세리는 고개도 못 들고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결국에 의인으로 인정받아 돌아간 사람은 바리세이가 아니라 세리였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주님 앞에 기도로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 앞에

무슨 미사여구를 화려하게 늘어놓겠습니까?

주님 앞에 할 수 있는 기도의 시작이요 마지막은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 저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오늘 이 미사 중에 주님의 성체가 여러분을 치유시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의 영과 육을 새롭게 부활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비록 이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미사 중에 기억하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똑같은 은혜가 내려갈 것을 믿습니다.

아~멘!

무엇보다도 굳은 믿음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교만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성모님의 전구로 오늘 우리들은 초대를 받았습니다.

초대는 분명히 목적이 있기 때문에 초대하신 겁니다.

불러놓고 대답을 하지 않5으신 것이 아닌 거죠.


오늘 사제의 입을 통해서 순례의 교회에서 포기하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순례의 교회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원하십니다.

이 순례의 교회에서 니 십자가 니가 지고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순례의 여정이 끝날 때

우리는 천상교회에서 성모님의 얼굴을 마주보고

예수님 옆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살 것을 믿습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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